제49장. 정녕 아름다운(2)
참 경쾌하다.
잘 정돈된 왕도 위를 걷는 레이븐의 발소리는 언제나 경쾌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경쾌하다.
당연한 일이다.
"어쩐지 오늘 갑자기 레이븐의 편자를 바꾼다더니······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새 편자를 단 레이븐의 기분이 상쾌했으니 이렇게나 경쾌한 소리가 울릴 수 밖에.
차마 형님 면전에 '속셈'이니 '수작'이니 하는 소리를 꺼내지는 못한 칼리안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두 번 씩이나 동생 뒷통수를 때리십니까."
"두 번이나 속을 줄은 몰랐어서."
똑같은 방법에 두 번을 속은 것이 더 놀랍다는 반응을 본 칼리안이 애꿎은 레이븐의 갈기를 이리저리 흐트러뜨렸다.
속았다.
플란츠의 수에 벌써 두 번이나 넘어갔다.
'오늘은 레이븐 편자를 바꾼다고 하네요.'
'
'그래? 아직 괜찮은 것 같았는데.'
'아까 레릭이 왔는데 에스티나의 편자를 바꾸러 온 장제사가 레이븐의 것도 새로 달아야 한다고 말했다기에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요. 편자도 바꾸고 목욕도 시키고 해야 하니까 공작저에는 이즐란을 타고 다녀오세요, 왕자님.'
'응. 알겠어.'
그날,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가겠다는 칼리안에게 얀은 레이븐 말고 자신의 말을 타고 가라 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별 생각 없이 얀이 시키는대로 했다.
편자를 바꾼다 하는데 다른 의심할 일이 있었겠나.
그것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기 위한 속셈이었다는 것도, 레이븐이 지니고 다니는 가방에 칼리안의 개인 짐을 챙겨 넣게 할 생각에서 벌인 수작이라는 것도, 칼리안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얀도 몰랐다. 알았다면 그 얼굴에 뭔가 숨기고 있다는 표정이 죄 드러났을 테니까.
"미리 말씀을 해주셨어도 반대하지 않았을 텐데요."
"그건 내 아우님의 옛 형님이 사실을 알게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일텐데."
거짓말은 못하고 들키는 것은 잘한다. 그러니 칼리안에게 알렸으면 체이스가 눈치챘을테고 결국 데블란이 알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을 했단다.
······ 라는 것은 핑계고 왠지 그냥 놀린 것 같다는 기분을 떨쳐낸 칼리안이 저 멀리 보이는 공작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드미레아와 한 차례 대련을 한 뒤 에반과 싸우다 배에 구멍이 났다. 덕분에 두 번째 대련을 뒤로 미뤘다가 그대로 엘프 마을에 다녀오는 바람에 더 만나지도 못했다. 그러다 간신히 다음 약속을 잡았는데 또 깨뜨리게 생겼다.
"드미레아와 그런 약속을 잡지는 말 걸 그랬습니다. 참 생각 깊으신 형님 덕분에 아무래도 돌아오면 파혼당할 것 같네요."
플란츠가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이제야 간신히 칼리안을 다시 기억해낸 것 같은 루시와 안네 얼굴도 못 보고 앨런과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너 뛴 채 먼 길 가게 된 동생 놈이 애먼 말로 툴툴거리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칼리안이 공작저로 출발한 뒤 사실을 알게 되어 부랴부랴 여행 준비를 해준 얀과는 인사를 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나저나······."
이런 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있는 처지가 된 것에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뒤를 쳐다봤다.
뒤를 따르고 있는 키리에가 칼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살짝 끄덕여 가벼운 예를 받은 칼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키리에의 곁에 있던 에일라가 보인다. 결국 함께 오게 되었다.
그런 둘의 뒤로 기사들이 보였다. 세크리티아에서 쓸데없이 경계하는 일은 없어야 했기 때문에 서른 명만 추렸다 했다. 같은 이유로 왕실의 군대인 발칸의 기사와 마법사들은 세크리티아 행에 함께하지 못했다.
더불어 시종과 시녀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발생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전투가 불가한 인원은 일행에서 제외시켰다. 카이리스를 찾아온 체이스가 그러했듯이.
마지막으로, 기사들의 사이로 실로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왕실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레이븐의 고집 때문에 타지 못했던 바로 그 마차였다.
"마차는 이동 마법진 앞에 세워두고 갈 생각으로 끌고 나오신 겁니까. 마법진 통과 못 할 텐데요."
"마나실 후작이 해결했는데."
엘프 도시에서 카이리시스로 돌아온 첫날에 앨런을 만나 부탁했던 것. 온갖 방어 마법이 새겨진 저 마차가 이동 마법진을 지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앨런은 어렵지 않게 날짜 잘 맞추어 마차 개조를 해 둔 터였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짜고 있던 것인지.
실소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풀물 안 드는 옷이나 골라 입고 가실 줄 알았는데 마차까지 준비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안 들잖아."
"흰 옷 뿐만 아니라 그 검은 옷도 안 입으실 줄 알았으니까요."
세크리티아 땅을 밟는 플란츠라면 발칸의 제복도, 왕자의 정복도 두고 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한쪽 어깨를 감싸는 새까만 털 장식과 커다란 태슬이 더해진 붉은 망토 아래, 금사로 수놓아진 검은 코트가 보인다. 물론 그 안에는 왕자의 정복이 있을 것이다.
일부러 갖춰 입은 의복이다.
수도를 벗어나는 동안 저 모습을 본 새들이, 플란츠가 지금 어떤 입장으로 세크리티아에 가고 있는지를 데블란에게 전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러지 말라며."
"네. 기억이 들어도 신경 쓰실 필요 없다고 말씀을 드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형님 성격에 발칸 부군단장도 아니고 왕자도 아닌 채로 가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크리티아니까요."
"······ 싫으면."
"아뇨. 싫지 않습니다. 가끔 뒷통수를 노리셔서 그렇지 말은 참 잘 들어 주시는게 재밌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곱게 짖은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외성 문을 지나 이동 마법진 앞에 섰을 때 조금 더 진해졌다.
- 삐약! 삐약!
자고로 뒷통수란.
주고 받아야 제 맛 아니던가.
* * *
녹빛의 차에서 난꽃의 향이 났다.
요란하지도 않고 코 끝에 질리지도 않는 그 향이 참 좋아서 새로 생긴 아들에게 주었다 했더니 채 드러내어 기뻐하지도 못한 엘린느가 이번 선물에 다시 한 번 보내온 것이었다.
창밖에 부는 바람이 차가워진 만큼 차의 온기는 더해지는 법이라, 테이블 위에 놓인 난꽃 향 차에서도 모락모락 포근한 김이 올라왔다.
"향이 좋군."
조용히 그 향을 맡은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것을 보던 앨런이 손가락 하나를 자신의 찻잔 위에 톡 올렸다. 동시에 찬 기운이 찻잔을 감싸며 찻물 위에 살얼음이 어렸다.
"날이 추운데 차게 마시는가."
"칼리안 왕자님께서 갈수록 찬 것을 자주 찾으는데 스승이 되어 그냥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똑같이 맞춰보아야지요. 게다가 나중에 남쪽에 가서 같이 살려면 찬 것에도 익숙해지는 편이 좋을 듯 보여 그럽니다."
"······ 내 아들인데."
"전하 아들이기 이전에 제 제자인것을요. 제가 남쪽에 좀 데려다놓고 살 수도 있는 것을 무얼 그리 보십니까."
여지없이 핀잔을 보낸 앨런이 차갑게 변한 차를 반쯤 비워냈다.
"얘기해보게."
"무엇을 얘기하라 하시는지."
"내가 또 잘못을 했으니 그리 구는 것 아닌가."
그 좋아하는 진한 초콜릿을 잔뜩 넣고 산딸기도 한가득 올린 케이크를 한 입 크게 떠서 먹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는 녹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신 뒤, 열심히 들을 준비를 마친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특별할 것 있겠습니까. 세 왕자님 세상에 꺼내두신 것 말고는 전부 다 잘못하셨으니."
워낙 단 것을 싫어하는 통에 케이크에는 손도 못댈 르메인이 애꿎은 차만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그리고 보기만해도 단 맛이 올라오는 케이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말했다.
"무탈히 다녀오도록 신경 쓸 테니 너무 화내지 말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로 인해 플란츠가 갑자기 여정에 나서는 바람에 호위 노릇 하겠다며 칼리안까지 함께 간 것에 마음이 쓰여 그러는 것 아닌가. 세크리티아에서 별다른 일 생기지 않도록 제대로 신경 쓰고 있을 테니 이미 아는 핀잔 또 주지 말고 걱정도 말라는 소리네."
정확히 말하자면, 카이리스와 세크리티아 제일 높은 곳에 앉아있는 두 아비가 제 할 일을 못해서 고생길에 오른 칼리안을 보고 있으려니 부아가 치민 상태였다 해야 할 일이다. 먼 데 있는 데블란 몫까지 합쳐서 코앞의 르메인에게 화를 내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아무튼 둘 중 한 놈이라도 제대로 아비 노릇을 했으면 이 사달까지는 안 났을 것 아닌가.
"세크리티아에서 별다른 일을 꾸밀까 걱정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지요."
애꿎은 케이크만 또 잔뜩 퍼서 입에 넣은 앨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 거창한 마차까지 끌고 출발한 칼리안이 또 신 귤을 까먹고 오면 어찌하나.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얼굴을 찌푸린 마법사가 한숨을 푹푹 쉬며 초콜릿 케이크를 푹푹 퍼먹고 있는 것을 조용히 보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혹시나 그 뱀같은 작자가 왕자들을 붙들어두고 이용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이 아닌지는 우려가 안 된다는 말인가."
"네. 두 왕자님이 같이 붙들려있을 일은 안 생깁니다."
이렇게 말하던 앨런이 잠깐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을 바꾸었다.
"아니지. 2왕자님만 붙들릴 일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후 앨런은 집무실에 놓인 책장 쪽을 가리켜보였다. 발칸이 있는 빌헬름 관이 그 방향에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때는 고민 마시고 저기 사는 친구들과 저를 같이 보내시면 됩니다."
"전쟁이라도 내겠다는 것인가."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잠시 말을 멈춘 앨런이 케이크 한 입을 느긋하게 먹은 뒤 대답을 덧붙였다.
"2왕자님 붙들릴 일 생겼으면 3왕자님은 이미 세상에 없다는 말이고, 그리 됐다면 그 나라 왕세자는 진작에 죽어 사라졌다는 뜻인데······ 그리 되면 굳이 복잡하게 전쟁을 할 필요가 없지요. 그냥 마음 편히 찾아가서 세크리티아를 없애놓고 2왕자님만 모셔오면 될 일이 아닙니까."
체이스가 있으니 데블란도 두 왕자에게 허튼 짓은 못할 테고, 허튼 짓을 하려 든다 해도 칼리안이 있는 한 별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를 참 무섭게도 한다.
르메인의 시선이 잠시 찻잔에 머물렀다.
앨런의 입에서 나오는 저런 말이 조금도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정말로 이 대륙의 지도에서 세크리티아를 지워 놓을 수 있는 사람임을 안다.
리베른의 국왕도 그것을 알았기에 국서 테이안을 곧바로 처형한 것이겠지. 덕분에 리베른의 지도는 바뀌지 않았을 테고.
"······ 그래. 참고하지."
새가 날아갔는지, 작은 그림자가 스치듯이 창 밖을 지나쳤다. 그것을 쳐다보던 앨런이 물었다.
"데블란에게는 서신을 보내셨습니까."
"두 왕자가 출발한 직후에 보냈네."
평생동안 자신이 그런 뻔뻔함을 부릴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편지 내용이 생각난 르메인이 잠시 실소했다.
- 내 아들이 곧 생일인데 그 나라 구경을 좀 하고 싶다 하더라. 당신이 이 서신을 받을 즈음이면 아마 국경 근처에 가 있을 텐데 만약 귀한 내 아들들을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발칸의 마음도 아플 테니 대문도 잘 열어주고 별 일 없이 다녀올 수 있게 도와줬으면 한다. 그래도 미리 말 못한 것이 유감스럽기는 하니 너희들과 왕래 끊기로 한 일은 취소하겠다.
이런 말을 예쁘게 잘 꾸며서 데블란에게 보냈으니까.
곧 르메인이 다시 찻잔을 들어올렸다.
나중에, 언제가 되었든 나중에 그 언젠가는 플란츠와도 함께 마셔보고 싶은 차라는 생각을 하면서.
* * *
답답해진 마음에 두꺼운 코트를 벗어둔 지는 오래였다.
대신 검은 셔츠와 붉은 베스트, 그리고 검은 재킷과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붉은 기운이 비치는 천으로 만들어진 긴 망토를 둘렀다. 얀이 챙겨 두었던 망토 매듭 장식까지 키리에의 도움을 받아 착용을 했다.
여행을 하기에 적합한 복장이 아님을 안다.
애초에 복장에 신경 쓸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찌됐건 오랜 길을 떠나는 이가 입을 만한 의상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왕자의 정복보다는 편하니까 됐다.
"문제가 있습니까."
키리에의 입에서 상당히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에 선 병사들이 잠시 자신들끼리 어떤 의견을 주고 받는 듯하다 다시 다가왔다.
"카이리스 2왕자님과 3왕자님의 방문에 대한 연락은 받았습니다만."
잠시 말을 멈춘 병사가 진중한 얼굴을 한 채 앞에 선 일행을 살폈다.
커튼이 내려진 화려한 마차.
그 바로 옆에 꼼짝도 않고 서 있는 거대한 흑마에 탄 이의 길고 검은 망토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앉아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검은 정장을 입은 이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앞을 바라볼 뿐. 병사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병사는 그 모습에 시선을 오래 두지 않기 위해 빠르게 눈을 돌렸다.
3왕자.
그리고 소드마스터.
자칫 심기를 거슬러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실 안그래도 일이 복잡해질 일이 이미 하나 있었기도 했고.
일행들 확인을 마친 병사가 키리에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군인은 통과하실 수 없습니다."
"2왕자님을 말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다른······."
"아니라면 이 중에 군인은 없습니다."
병사가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리고 키리에의 뒤에 서 있는 새파란 머리 마법사를 바라봤다.
"아, 나 말인가."
물갈퀴 달린 꽤 큰 새끼 오리를 품에 안은 파란 머리 오리 엄마가 자신을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마법사, 아르센 헤르츠라네."
그래, 너.
네가 바로 그 군인이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병사들의 눈빛을 확인한 아르센이 길고 긴 소개를 덧붙였다.
"급여가 다 깎인 것을 두고 군단장님께 대섰다가 아예 직위 해제된지 며칠 안 된 그냥 마법사일 뿐이니 그리 어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네."
칼리안에 의해 일시적으로 민간인이 된 바로 다음날 들려온 레이븐 편자 교체 소식에 일단 냅다 달려 이동 마법진 앞에 와 있었던 마법사.
"제 말에 틀린 것이 있습니까, 협회장님?"
"아니. 없지."
아르센 헤르츠가 싱긋 웃으며 곁에 선 보라 머리 마법사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