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75화 (276/527)

제48장. 히몰리카 맛있네요(5)

우애애애옹!

이라고 했다.

정말로 저렇게 울었다.

체르밀 궁에 돌아온 플란츠를 본 루시가 소파 밑으로 들어갔고 안네는 그런 루시를 따라갔다. 그러더니 루시는 정말로, 정말로 서럽게 우는 소리를 냈다.

루시는 여전한지 그리고 안네는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할 틈도 없이 말이다.

"······ 잊어버린 건 아닌데."

"애오오옹!"

"오랫동안 나갔다 올거라고도 했는데, 왜."

"애옹!"

"니아옹!"

오랜만에 돌아온 방에서 마음 편히 목욕하는 것도 잊은 채 한참동안 소파 앞에서 루시와 안네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서러운 울음소리 뿐이라.

내 동생 아빠만 잠깐 만난 뒤에 내 아버지 얼굴은 볼 생각도 않고 이곳으로 서둘러 돌아왔는데 두 고양이의 엉덩이만 보게 된 플란츠는 지금 서러운게 너인지 나인지 모르겠다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루시. 안네."

"애오옹!"

아무리 불러도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부르고 야옹거리다 결국은 다진 소고기를 동글동글하게 만 간식을 받아 건넨 뒤에야 고개를 빠끔 내미는 두 고양이를 본 플란츠가 살짝 웃었다.

안네가 많이 자랐다.

그리 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 정말 많이 자라 있었다. 먼지털이개가 생각날 만큼 풍성해진 잿빛 꼬리가 눈에 띄었다.

그렇게나 자랐어도 여전히 작은 안네를 두고, 그저 곁에 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온기를 전해주는 루시를 두고, 곧 다시 한 번 왕궁을 비워야 하는데. 어찌 해야 하나.

"데리고 가시면 안 됩니다, 왕자님."

얼마 뒤에 더 먼 길을 다녀오리라는 말을 들었던 레릭이 먼저 이런 말을 했다. 눈치가 늘더니 최소한 두 고양이를 보는 플란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읽어낼 정도는 된 모양이다.

"알아."

"대신 제가 열심히 잘 돌볼게요. 걱정 마세요."

플란츠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엘프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도 이 이야기를 들었었다. 고양이는 데리고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

아래층에 거주하시는 새까만 고양이는 어딜 가든 쉼없이 짖으면서 잘만 따라다니는데 루시와 안네는 그렇지 않다 하니 어쩌겠나. 잠시 있는 동안 루시도 열심히 안아주고 안네도 눈에 꼭꼭 담아가는 수 밖에.

"목욕 준비 해두었으니 우선 푹 쉬세요. 내일까지는 다른 일정 없이 지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제야 겨우 다가와 발치에 몸을 부비는 고양이들을 가만가만 쓰다듬어 준 플란츠가 망토를 풀어 레릭에게 건네주며 대답했다.

"알았어."

레릭을 내보내고 난 뒤에는 옅은 빛의 비취로 만들어진 널찍한 욕조에 잠겨들듯 한참동안 목욕을 하고 나왔다. 어느 정도가 흘렀는지 따지는 것도 잊고 한참동안, 정말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나와 다시 의복을 입는데 레릭의 손에 가디건이 아닌 재킷이 들려 있었다. 금사로 수를 놓은 남청색 재킷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쉬라더니."

"그게······."

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재킷을 들고 있는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기다릴테니 얘기 전하지 말아달라 하셔서요."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부르는 것도 아니고, 찾아왔단다. 심지어 빨리 준비하라는 말도 없이 그냥 기다렸단다.

"언제 오셨는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느냐고.

그렇게 한 마디를 할까 하다 그냥 접어넣고 물었다. 타이 대신 셔츠 장식만 하나 달아 준 레릭이 재킷 입는 것을 도우며 대답했다.

"삼십 분 정도 되었습니다."

"넌, 대체."

아무리 그래도, 삼십 분이라니.

결국은 한 소리를 하게 되었다.

재킷을 입고 털 장식이 달린 하늘색 코트 하나를 더 걸친 플란츠가 밖으로 나가 후원으로 갔다. 언젠가 히나가 딸기 아이스크림을 내려놓았던 그 자리에 앉아있는 르메인이 보였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예를 올리고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사과의 말을 건네자, 르메인은 다른 말 없이 자신이 앉은 의자의 옆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곁에 앉은 플란츠를 한동안 바라보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칼리안을 잡아오는 것에 시간이 오래 걸렸구나."

"죄송합니다, 전하."

도망가려는 칼리안 잡으러 잠깐 나갔다 오겠다던 핑계에 대한 말에 다시 한 번 사과를 해야 했다.

새하얀 입김이 인다.

도착하기 전에는 풀 냄새와 이른 낙엽 냄새가 났는데.

이 곳을 떠나 열흘 남짓을 보내는 사이, 카이리시스는 쌀쌀함을 넘어 완연한 추위가 느껴지는 계절에 접어들었다. 밖에서 오랫동안 있기에는 부담스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체르밀 궁에도 응접실이 있고 그도 아니라면 플란츠의 방으로 와도 될 것을 굳이 밖에 나와 앉아있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마차도 없이 먼 길에 불편한 것이 많았을 텐데."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혹 대장로가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더냐."

"······ 그보다는 칼리안이."

"······ 그래."

태어나 예절에 대해 교육받은 것이라고는 식사예절 밖에 없다는 듯 굴었던 칼리안이 생각났다. 아마 그 모습을 전해줄 수 있다면 르메인은 절대로 '그래'라는 말 정도로 넘기지 못했을 거다.

물론 그 옆에서 한 술을 더 떴던 플란츠의 모습까지 봤다면 당장 대장로 나르잔에게 위로를 건네는 서신이라도 써야 하나 고민을 했겠지만, 플란츠는 발칸의 부군단장으로서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적당히 알아야 할 것만 알게 된 르메인이 물었다.

"세크리티아에 갈 생각이 있다 들었는데, 사실이더냐."

"네. 맞습니다."

엘프들을 찾아갔던 것도 심장이 내려앉을 일이었는데 이제 아예 타국에 가겠단다.

"우호적인 관계였다 하나, 세크리티아의 국왕과의 기류가 그리 좋지 않게 흐르고 있다. 세크리티아와의 교류를 금지시켜 두기도 하였고. 무슨 일로 가려 하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네가 되도록 이 곳에 있었으면 좋겠구나."

본래대로라면 세크리티아에 가게 되는 주체인 칼리안이 직접 르메인과 나누었어야 할 대화.

하지만 칼리안이 르메인을 대하는 것을 퍽 어려워하기도 했고 애초에 핑곗거리를 만들어 둘러대는 것은 플란츠가 더 잘하기도 했다. 때문에 르메인을 설득하는 역할은 플란츠가 맡기로 정해두기는 했었다.

그런데 르메인이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무슨 이유를 대고 그 곳에 굳이 가겠노라 허락을 받아야 할지 여전히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올해만이라도 카이리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플란츠는 내내 고민해오던 적당한 핑계 대신 이런 대답을 했다.

한 해 전.

칼리안과 손을 잡은 뒤 유난히 찬 겨울을 보냈던 플란츠가 아니던가.

헤이시아 궁이 무너지기 전까지 정말 유난스럽게도 춥고 긴 겨울을 홀로 지냈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굳이 머리가 좋은 까닭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겨질만한 시간을 보냈고, 그날들을 떠올릴만한 시기가 처음으로 다시 찾아왔다.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만 낯선 마음이 들어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번 겨울만이라도 카이리스가 아닌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대답을 했다.

"······ 그런 생각을 하였더냐."

르메인이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이유임을 알아서 고른 핑계일지. 아니면 진심일지 모를.

* * *

새하얀 입김이 인다.

숲 속에 머물던 찬 공기 특유의 맑은 바람 냄새가 났다.

바다는 더웠고 코끼리들의 땅은 서늘했는데 북쪽의 숲에는 추위가 찾아왔다.

"오래 떠나있지도 않았는데 겨울이 됐네요."

"네. 하루하루는 길고 나날은 짧더니 어느새 겨울이 되었습니다."

짧디짧은 스무 여섯 해를 보내고, 길디긴 한 해를 더 보냈다. 그리고 두 번째 겨울이 왔다.

"춥지는 않으신지요."

하얀 입김을 지긋이 따라가던 은회색 눈에 머금어진 따뜻한 빛이 너무 좋아서,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도 안 춥습니다. 주변이 온통 따뜻해서요."

이 숲 전체가 꽁꽁 얼어붙을 한겨울이 되어도 찬 기운만 느낄 뿐 추위는 타지 않을 칼리안이 목에 꽁꽁 둘러진 머플러를 가리켜보였다. 칼리안이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는 데에 한참을 쓰고, 말 없이 나간 것을 혼내는 데에 또 한참을 쓰고, 무사히 돌아온 것을 반기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쓴 얀이 가장 오랫동안 공을 들여 감아 준 것이었다.

"그래요. 춥지 않다니 되었습니다."

바짝 마른 풀 위에 얇은 천 하나를 펼치고 앉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곧 칼리안이 레이븐의 안장에서 큼지막한 술병 두 개와 술잔 네 개, 그리고 말린 과일이나 소시지와 같은 것들이 든 작은 바구니를 꺼내들었다. 그러더니 전혀 어색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앨런과 자신의 앞에 그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히몰리카를 사올까 시즐리누를 사올까 하고 생각해보니 무슨 술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고 있더라고요, 제가. 그래서 우선 두개 다 준비를 했습니다."

와인잔이 두 개, 손에 쏙 들어오는 히몰리카 잔이 두 개.

그렇게 네 개의 술잔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짙은 자주빛의 와인이 든 병을 손에 들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몰랐던게 또 있나보네요."

칼리안의 손이 조용히 움직여 와인잔 두 개를 치웠다.

그리고는 시즐리누가 담긴 병도 뒤로 물린 뒤 독하기로 이름난 히몰리카를 앨런과 자신의 앞에 한 잔씩 따랐다.

곧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을 한 칼리안이 앨런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무슨 고민을 하시는걸까."

이 말을 들은 앨런의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냈다.

"진짜 형님 한 명을 만들어 오시더니 눈썰미까지 배워오신 모양입니다."

"아, 혹시 형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 제 걱정을 해주고 가셨지요."

많이 크셨네, 우리 형님.

다른 사람 걱정을 다 해주시고.

소리없이 웃은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을 못 주무셨습니까."

"바쁜 일이 많아 그리 되었습니다."

칼리안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술잔 대신 말린 바나나 하나를 가져와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그 뒤에는 별 가득한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한 번을 죽고 두 번을 살다 보니 신기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한 번을 죽고 두 번을 사는 것부터가 신기한 일이기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향기 없는 꽃도 신기하고 단 내 나는 꽃도 신기하겠지만 칼리안에게는 조금 더 신기한 일들에 대해 말을 꺼냈다.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던 아버지와, 아버지라는 사실이 아직도 잘 적응이 안되는 아버지와, 아무 수식어도 필요없을 아버지가 생기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늘 아프시다 일찍 떠난 어머니가 계셨고, 그런 어머니를 대신해 온 품으로 저를 보호해주려 하셨던 어머니가 계셨고, 기억에도 없었는데 엘프였다는 사실마저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새하얀 입김이 별밤 아래로 가만가만 퍼져나갔다.

앨런은 칼리안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들어주었다.

"기억에 없는 어머니는 독을 드셨고, 기억에 있는 어머니는 병을 얻어 떠나신 줄 알았더니 독에 저무셨던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살아계시는 남은 한 분의 어머니도 결국 독에 물드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기분을 뭐라 해야 할까. 신기한 것은 분명 아닌데."

아무 말 없이 칼리안을 쳐다보던 앨런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면향을 손에 쥐었던 루이즈가 그 안에 든 것에 중독되었음을 칼리안에게 전해들어 이미 알고 있던 탓이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요. 그렇게 말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입 속에 향긋한 바나나 내음이 퍼졌다.

아플 때마다 찾던 과일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유난히 달다.

"디에나 왕비······ 제 친어머니께서는 본래도 몸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데블란이 루이즈 후궁님을 맞이했고, 체이스 형님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러다 어찌저찌 제가 태어났는데. 저는 어머니가 저 때문에 그리 아프셔서 눈을 감은 것은 아니리라고 항상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형님의 어머님이 늘 말씀해주셨거든요."

"두분 다 좋은 어머니였나 봅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아픈 것을 들키면 의심을 살 테니, 수면향에 중독된 것을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않으셔서. 본래에도 그리 아프셨던 분이 그것을 참느라 더 많이 아프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 어머니뿐만 아니라 어머님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아픈 티를 내지 않으셨어요. 제가 눈을 감았던 날까지 숨 한 번을 편히 쉬지 못하도록 그렇게 아프셨습니다. 이제 와 알고보니 어머님도 수면향에 중독이 되셨던 것인가 봅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앨런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을 제가 모르고 있었는데. 다행하게도 이번에는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은 수면향을 쓰지 않으시도록 말씀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손을 쓸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아니니까요. 정말 다행히도."

시계 없는 숲 속에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칼리안의 목소리가 드문 드문 이어졌다.

"손 쓸 수 없을 때라는 것이 참 그렇습니다. 어느새 눈을 뜨면 어느새 늦어 있어요. 어머님의 병도 그랬고, 그날의······."

칼리안의 손 끝이 유리잔 위를 매만졌다.

"군사들이 그랬듯이."

예고 없이 지나치게 빠르게 목전까지 와 닿았던 카이리스의 군사들을 떠올리면서. 무엇이 재밌는지 혹은 무엇이 신기한지 실소한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늠을 하고 계셨습니까."

내려앉은 앨런의 목소리가 들렸고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많은 이들을 어떻게 한 순간에 움직였을까. 새들은 등을 돌리지 않았었는데. 그것을 늘 궁금해 했습니다. 그것 참 마법같은 일이 아닌가 하다가. 마법이겠구나, 하고. 가늠을 했습니다."

카이리스의 왕궁 안에 모인 새하얀 악마들을 이끌고 일순간에 세크리티아의 국경 앞에 서는 일. 지금의 앨런은 하지 못하지만 8서클의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라면 할 수 있는 일.

"기어코 저마저 왕자님께 비수가 되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는지."

"어찌하기는요."

말을 마친 앨런의 눈이 바닥을 향했다.

칼리안이 웃으며 앨런을 쳐다봤다.

"걱정 마시고 그 벽, 넘으셔도 됩니다. 축하드릴 일이 아닙니까."

지난 날 자신이 무엇을 했을지 가늠하게 되어버린 바람에, 과거에 비해 훨씬 빠른 시기에 도달한 8서클의 벽 앞에서 멈춰선 채 잠을 이루지 못하던 마법사.

도무지 똑똑하지 못한 그 마법사를 향해 말한 칼리안이 긴 숨을 내쉬었다.

"살려달라며 옷깃 한 번 잡은 것을 두고 건네주신 것이 너무 많아서. 늘 그것들을 어찌 다 갚아야 하나, 오랫동안 고민을 했는데 차라리 잘 된 일이 아닙니까. 그리 갚지 않고 오래오래 같이 살면서 효도만 해드리면 되니 정말 어찌나 다행인지."

한숨이라 하기보다는 조금 긴, 숨을 쉬었다.

"저랑 오래오래 같이 사셔야죠. 잠도 잘 주무시고, 건강하게요. 아버지."

앨런의 입가에 다시 한 번 미소가 어렸다.

서로 갚지 말고 같이 살자는 말이 참으로 고맙고, 미안하여서.

"그래요. 오래오래 같이 살겠습니다. 내새끼랑 같이, 오래오래."

"네. 아버지."

아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손을 뻗어 앨런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 맑고 영롱한 소리가 숲 속을 잠시 머무르다 지나갔다.

그렇게나 기대하고 기대했던 히몰리카를 쭉 들이킨 칼리안이, 함께 잔을 비운 앨런과 자신의 빈 잔을 한 번씩 쳐다봤다.

"와······."

향긋한 내음이 목을 타고 지나가는 이 기분이 도대체 얼마 만인지.

앨런과 풀어야 했던 숙제를 비로소 풀어낸 것만큼 시원한 그 느낌이 너무 반갑고 기꺼워서.

"히몰리카 맛있네요, 아버지."

오러로 술 기운 몰아내는 것도 깜빡 잊은 칼리안이 정말 어여쁘게 웃었다. 그리고,

- 쿵!

잠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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