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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72화 (273/527)

제48장. 히몰리카 맛있네요(2)

고요한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머뭇거리지 않고 앞에 앉은 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 생각의 끝에 제가 있을 겁니다.

자신의 것과 참 많이 닮은 청은색의 짧은 머리를 스치듯 본 체이스가 자신의 것과 아주 많이 다른 짙은 갈색의 두 눈을 직시했다.

뱀의 것보다 더 소름끼치는 눈.

그 눈을 체이스는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똑바로 마주보았다.

- 저라면 제 정체에 대해 깊은 의심을 하게 될 겁니다. 데블란 역시 다를 리 없으니 진실을 확인하고자 형님을 들춰보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 칼리안이 전해 온 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 동요하시면 안됩니다. 저를 의심한다면 의심하게 두세요.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그냥 두세요. 섣부르게 의심을 걷어내려 하거나 속이려 하면 더 집요하게 굴 겁니다. 어차피 곧 제온과 제가 연관되었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질 테니 그때까지는 그대로 두시면 됩니다.

아침의 하늘을 보고 그날 비가 올지 오지 않을지를 가늠해 소소한 내기를 하던 것과는 달랐다. 체스판을 앞에 두고 공방을 나누다 투닥거리던 일과도 달랐다.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여기신다면······."

그래서 체이스는 지금 이 자리에서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도록, 숨을 참지 않도록 온 신경을 썼다.

"한 번 만나보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데블란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속내를 예측하기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데블란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말. 그런 말을 머뭇거림 없이 꺼내는 체이스의 눈을 보았고 목소리를 들었다.

손가락 끝에 놓였던 미소가 데블란의 얼굴로 옮겨갔다.

동전 한 닢보다 많은 것이 걸려있는 예측이 오간다.

체스 말 대신 목숨을 올려둔 수 싸움이 시작되었다.

"됐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그 쪽이 아니니."

데블란은 칼리안에게로 향했던 고개를 돌렸다.

직접 만나는 것 역시 흥미가 동하는 일이지만 보다 정확한 판단이 서기까지 칼리안에 대한 관심을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 귀족 회의에는 참석하지 말고 쉬거라."

귀족 회의에서 데블란의 병세와 체이스를 향한 진짜 속내를 꺼내 놓도록 만들려 했다. 그리고 데블란은 그런 생각을 이미 다 읽었다는 듯 체이스를 막았다.

기침 소리가 이어졌고, 그 틈을 타 아주 잠시 눈을 내리 뜬 채 생각을 정리한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모를 리가 없지.

데블란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끝날 싸움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니까.

"회의에 참석치 말라는 말씀을 위해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니. 그보다는."

다시 한 번 톡, 하고.

데블란의 손 끝이 손등에 닿았다.

"그저 잠시 적적하여 불렀느니라."

일국의 왕세자를, 자신의 아들을 불러다 놓고 한 시간을 기다리게 했다. 아는척 한 번을 하지 않고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은 채로 한 시간을 앉혀놨다.

그저 잠시 적적하여서.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심심해서.

'밑바닥.'

체이스를 밑바닥으로 내려보내려는 것이다.

무엇을 꾀한다 한들 너는 결국 내 아들이니.

아무리 벗어나려 하여도 나를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리하여도 괜찮지 않겠느냐. 나는."

"네. 그리하셔도 괜찮습니다."

자애로운 얼굴로 자신을 보는 데블란을 향해 체이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여전한 눈으로 데블란을 바라봤다.

당신의 생각대로.

나는 당신의 아들이니.

"······ 아직은."

짧은 말을 덧붙인 체이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데블란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려냈다.

* * *

넓은 바다를 붙들어두는 파도 소리 같았다.

숲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바람 소리 같았다.

- 쏴아아아······!

비가 내렸다.

창 밖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에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흔들렸다.

"다행입니다. 도착하고 나서 비가 내리니."

이 남쪽 땅에도 이제 가을을 맞이하려는 것처럼 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레릭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보다 어렸을 적의 루시나 지금의 안네는 물에 젖는 것을 퍽 싫어했다는데, 생각하기로 칼리안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비가 내리는 것을 늘 못마땅해 했다.

혹시 그것도 바다에 잠기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그래."

높임말도 반말도 아닌 애매한 말로 또 말을 끝낸 것을 지적하는 대신, 플란츠는 그냥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전날, 대련을 마치고 돌아간 칼리안이 그대로 잠자리에 들고 플란츠는 밤새 생각에 빠져들고. 그렇게 아침이 되어 다시 출발한 뒤 늦은 오후가 되었을 즈음 지그프리드령으로 돌아왔다. 시장저에 와 목욕을 끝내고 저녁 식사를 위해 나오니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를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문 닫을까요. 형님 감기 걸리겠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제대로 된 고기 요리에도 칼리안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저녁 식사를 했고, 바람이 불자 이런 말만 꺼냈다.

"둬."

"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시종인 양 굴면서 신경을 쓰는 건 여전한데 무언가 평소와 많이 다르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미 잘 알고 있는 플란츠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안 짖네, 오늘은."

"제가 그랬습니까."

"그랬어."

쉼없이 짖던 동생 놈이 오늘 하루 참 정중하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겠다 말하려던 칼리안이 플란츠를 보며 웃었다.

"비가 오려고 그랬나보네요."

그러더니 애먼 비 탓을 했다.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을 들은 플란츠가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벽에 기대어 둔 검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런 플란츠를 잠시 지켜보던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안은 소리 없이 일어나 예를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검집이 없어 적당히 천으로 감싸두었던 것.

천이 흘러내려 드러난 청은빛의 검이 반짝이고 있었다.

플란츠의 시선이 그 검에 못박힌 듯 머물렀다.

흔들리는 불빛에 검신에 길게 새겨진 검은 글씨가 함께 일렁였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전날 밤부터 내내 답답했던 것은 속이었는데 머리까지 울렁거리는 기분이 든다.

- 제대로 공격하실 수 있을 때까지.

동생 놈이 왜 저러는지 모르지 않았다.

본래부터 칼리안의 심장을 노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도 이미 알았다. 키리에에게도, 드미레아에게도, 물론 칼리안에게도. 분명 심장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었다.

그런데 지난 번 대련에는 그렇게 하질 못했다.

칼리안의 경고를 듣고 나서도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못했다.

'하필 지금.'

하필 지금.

세크리티아에 가려고 하는 이 때에.

그래서 칼리안이 저렇게 군다는 것을 안다.

평소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닥달하듯 말하고 행동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지금 이런 때가 아니었다면 그냥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을 놈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꽃 한 송이 놓여 있지 않은 테이블 위를 훑듯이 본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다들 왜 술을 안 마시는데. 설마 마실 줄 아는 사람이 없나?"

"저희는 왕궁 돌아가면 마실 겁니다."

"너희 부군단장이 군기를 잘 잡아놨나 보군."

"다른 군기는 부군단장님께서 잡아주셨는데 술 군기는······ 여하간 오늘은 힐 경 혼자서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식당 옆에 위치한 보다 큰 연회장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생각을 했다.

왜 갑자기 제대로 칼을 들지 못하는지, 칼리안은 가늠했고 플란츠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지난 일들을 되돌려가며 기억을 정리했다. 잊는 것 잘 모르는 머릿속으로 그 이유가 될 만한 것을 찾아 하루씩 하루씩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바다 위에 올린 시나스타. 소라 껍데기. 파도 소리. 바나나 나무. 고래 울음 소리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무지개 속에 들어갔던 일과 모닥불 불티를 바라보던 일을 지나쳐 계속 생각을 했다.

동생 놈 손에 잡혀 푸드덕거리는 닭을 보면서 저 닭이 짐승인지 내 동생이 짐승인지 잠깐 혼돈할 뻔한 일, 이곳으로 출발하던 날 루시와 안네를 마지못해 레릭에게 맡긴 일이 떠올랐다.

반지 훔치러 3층에 내려갔다가 꽉꽉 잠긴 창문만 확인하게 된 바람에, 왕궁에서 나가기 전에 그 왕세자에게 나도 그냥 통신용품부터 하나 보내버려야 되겠다고 굳게 결심하며 4층으로 다시 올라갔던 날이 생각났다.

그렇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한참동안 생각을 하다가,

'······ 아.'

깨닫게 되었다.

더는 생각하는 것을 막지 않은 탓에 자신도 모르게 퍼져나간 생각이 어떤 사실 하나를 눈치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플란츠가 청은색의 검을 들고 방을 나섰다. 그 뒤에는 거리낄 것 없다는 얼굴로 시장저에 마련된 귀빈실 중 비어있지 않은 다른 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배려심은 두 고양이에게 다 퍼주고 있는 탓에.

고양이들에게 퍼주고 그나마 남는 실낱같은 배려심은 사고치는 발칸 대원들을 칼리안의 시야에서 가려주는 일에 쓰고 있어서.

"일어나."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동생 깨우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플란츠가 칼리안을 불렀다. 잠에 들었든 아직 들지 않았든 상관 없이 문이 열림과 동시에 정신을 차렸을 칼리안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얘기."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멀찍이 문 앞에 선 플란츠를 쳐다봤다.

의외로 성격이 급해서 할 말은 곧바로 해야 하는 사람임을 잘 안다. 그런데, 또 의외로 순해서 피곤하니 내일 아침에 얘기하자 하면 알겠다며 되돌아갈 사람이라는 것도 안다.

"네."

그래서 그냥 군말없이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란츠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칼리안과 슬레이만이 이야기를 나눴던 그 곳이었다. 지붕이 있는 티 테이블도 있었건만 플란츠는 굳이 지붕도 없고 정원도 없는 빈 곳으로 걸어가 섰다.

마뜩치 않은 얼굴로 내리는 비를 보던 칼리안이 자박자박 걸어 그 곁으로 갔다.

"말씀하십시오."

화가 난 것과는 조금 다른,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

기껏 잘 씻고 밥 잘 먹고 자다 말고 비 맞으러 나와버려서 더더욱 가라앉은 목소리.

"내가 아니라 아우님 때문인데."

밥 잘 먹고 일찌감치 잠든 사람 깨워 불러내서는 내가 아니라 너 때문이다 하는 말을 듣고 그 뜻을 알아들으면 시스파니안이다. 아무리 칼리안이라 해도 저 말은 너무 어려웠다.

다행히 스스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는지, 플란츠는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칼리안을 마주보며 설명을 더했다.

"내 아우님께서 오해를 하신 듯 하다고."

"무슨 오해 말씀이십니까."

"내가 내 칼에 피 묻는 걸 꺼리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오해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세작을 만난 즈음부터 검을 들 때마다 생각이 많아지더니 어제는 제대로 된 공격 한 번을 못하셨지 않습니까."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새빨간 눈에서 시선을 돌려 곁을 바라보니 어느새 사일런트 막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데블란을 찾아가겠다 말씀하신 분께서요."

플란츠가 가져온 검을 살짝 들어올려 보이며 대답했다.

"칼 쓰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안 알려줘도 알아. 검이 무거운 것도 알아. 알면서 배우기로 한 거니까 피할 생각 없어."

드미레아의 말대로 생과 사를 가르는 물건이다.

그것을 잊고 배운 적 없었다. 평생 이 칼에 피 묻힐 일 없이 곱게 대련이나 계속 할 것이라 착각한 적 없었다. 지키기 위해서든 아니든 결국 누군가에게는 해를 입힐 물건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그러니까 그 세작 때문이 아니라고."

입 안의 독을 삼킨 세작의 마지막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던 플란츠가 눈꼬리를 잠시 찌푸렸다. 며칠 잠을 설쳤을 만큼 썩 좋은 기억이 아닌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대련 중에 검을 물린 것은 분명 아니었다.

검에 피가 묻으면 또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검을 놓을 생각 없었으니까.

"아니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러십니까."

"너. 후작저에서 뭘 봤는지 알 것 같은데."

그날 에반의 저택에서, 칼리안이 무엇을 보고 누구를 떠올려 칼을 멈췄을지에 대해 플란츠가 눈치를 챘다.

"검 집어넣기 전에 마음 놓지 말았어야 했던 건 내 아우님 아닌가."

"그날 제가 브리센 후작저에서 본 아이 때문에 형님을 떠올렸고, 같은 이유로 형님 검도 막지 못할까봐 공격을 못하셨다는 겁니까."

플란츠가 뭘 생각했는지 이제야 감을 잡았다는 듯한 얼굴이 된 칼리안이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 했을 때 플란츠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같은 검에 같은 피 두 번 묻을까봐."

하필이면 그 검으로, 하필이면 또 플란츠가, 하필이면 칼리안을 다시 다치게 할까봐 공격을 못했다는 소리다. 칼리안의 머릿속에 또 예전의 기억이 떠오르고 그 때와 지금을 혼돈해서 검을 놓을까봐.

"아······."

어떤 얼굴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진 칼리안이 몸을 잠깐 숙였다.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무지 가늠이 안됐다.

고양이 한 마리가 저보다 훨씬 큰 멍멍이랑 싸우다가 멍멍이 다칠까 걱정하는 마음이 들어서 발톱 집어넣었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지 않나.

플란츠의 저런 생각이 진짜 말도 안되는 웃긴 이야기라는 것을 아는데 웃을 수가 없었다. 예전의 칼리안이 플란츠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알아서, 자신만큼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플란츠가 저런 결론을 낸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서 웃질 못했다.

"설명해드릴게요. 제가."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몸을 일으키는 대신 고개만 들었다.

그날 칼리안이 무엇을 봤는지 반만 눈치채버려서 완전히 다른 짐작을 해버린 형의 완두콩같은 눈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말해."

"리리에입니다. 그 아이 이름."

에반의 저택에서 보았던 아이.

지금은 드미레아가 보호하고 있는 아이를 입에 담았다.

"생각하셨을 것처럼 형님과 닮기는 닮았습니다."

체르밀 궁에 오고 몇 년 동안 칼리안은 밖으로 나온 적 없었다. 너무 어렸던 탓도 있었고 칼리안을 돌보던 시녀들이 위험하다며 내보내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테라스 밖을 봤고 그 호수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답답했다기보다는 그냥, 호수가 반짝이는 것이 문득 너무 예뻐서.

그래서 몰래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체르밀 궁에 하나밖에 없는 계단까지 몰래 나갔을 때 누군가가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당황한 칼리안은 내려가려던 발을 돌려 한 층을 올라갔다.

그리고 그 복도 끝에 서 있던 형을 처음으로 만났다.

"색은 달랐지만 뒤로 묶은 머리며 얼굴이며 눈빛이며. 제가 처음으로 봤던 형님 모습과 많이 닮았어요. 그래서 놀라기는 했습니다. 놀란 것은 맞습니다."

딱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복도 끝에서 나타난 리리에를 보게 되어서, 순간적으로 그 날의 기억이 튀어나와서 놀라기는 했다. 놀란 것은 맞다.

"그런데 칼을 멈춘 건 그것 때문이 아니라. 물론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또 다른 이야기 하나를 꺼냈다.

다치고 난 뒤 찾았던 체이스에게는 전하지 못했던 말. 자신이 칼을 멈춘 진짜 이유를 천천히 입에 올렸다.

리리에를 보고 그 날의 플란츠를 떠올리다 딱 그만한 또 다른 어린아이를 연상하게 되었던 일을 전했다. 그 아이를 어떻게 했었는지도 함께 알렸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그런 일을 했는지도 이번에는 숨기지 않고 전부 다 이야기를 했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비를 맞으면서.

곁에 서 있던 플란츠를 올려다보다가 내리는 비에 눈이 감겨 다시 앞을 보면서, 굳이 숨기지 않고 얘기를 해줬다.

이번에도 플란츠는 그 말을 다 들었다.

"그래서 칼을 멈췄던 겁니다. 말씀드리기 어려운 이유여서 넘어가달라 했었고요."

"······ 그래."

그 때의 체이스나 키리에에게 하지 못했을 말일 터였다.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처음 꺼내 놓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서 인상 하나 안 찌푸린 얼굴로 그냥 들었다. 들어줬다.

"그런 걸 걱정하셨습니까."

칼같이 돌아오던 답이 이번에는 없었다.

작은 소리로 웃은 칼리안이 몸을 일으켜 제대로 선 뒤 말을 이었다.

"그 칼로 꼭 무언가를 베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부터 알려드리고 싶었는데 꼭 무언가를 베어야만 할지도 모를 곳에 먼저 가게 됐네요."

"알고 있어."

"만약 그래야 할 상황이 되면 생각이 앞서서 검을 먼저 내리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아. 그것도."

"그리고 저는 형님한테 두 번 죽을 사람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플란츠가 한참동안 칼리안을 쳐다봤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꺼낸 칼리안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형님 동생이, 검을 좀 잘 씁니다."

"······ 알아. 이제."

"네."

칼리안의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어렸다.

"실수하기에는 형님 너무 약하시기도 하고."

생글거리는 동생을 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참 오랜만에 말려 올라갔다.

이제는 반말로 짖는다.

지적한다고 해도 저 버르장머리 평생 안 고칠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형님이 돼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고. 그러니 뭘 먼저 말해줘야 하나 고민은 되는데 쉬이 하나를 먼저 짚어 줄 수가 없다.

그래서 말 대신 그냥 팔을 뻗었다.

- 카아앙!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세 개의 검이 다시 맞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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