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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71화 (272/527)

제48장. 히몰리카 맛있네요(1)

고기.

엘프의 도시를 나와 그들의 경계 영역을 벗어나니 저녁 무렵이 되었다. 사냥을 해도 괜찮을 곳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칼리안이 사라지더니 오래지 않아 산만한 멧돼지 한 마리를 질질 끌며 돌아왔다. 티 하나 없이 참 해맑게 웃으면서.

그런 칼리안의 얼굴이 마치 오랜 고난과 인내의 끝에 마왕을 무찌른 용사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한 플란츠가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내가 왕자고 쟤는 내 동생이니까.

쟤도 분명히 왕자인데.

"왜······."

차마 내뱉기 어려운 십수 개의 심란한 감상을 애써 집어넣으면서.

쟤가 저러는 건 내 탓 아니다. 체이스 탓이다.

애를 쫓아낼 거면 제대로 챙겨 쫓아내야지, 대체 어떻게 했기에 애가 혼자 밖에서 닭 잡아먹고 돼지 잡아먹고 술처먹고 벼랑에서 굴러떨어지고.

······ 그러니까 애가 저렇게 되지.

구운 대구고 뭐고 뱀이고 나발이고 일단 체이스부터 만나 해야 할 말이 참 많아진 플란츠의 입에서 깊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런 플란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법사들의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튀어나온 넓적한 불판 위에 올려진 고기가 잘도 익어갔다. 기사 한 명이 건네 주고 간 차를 손에 들고 고기 익는 것을 기다리는 칼리안은, 배에 난 구멍 때문에 하게 된 길고 긴 단식의 끝에서 마주한 식사를 대했던 날의 몇 배는 더 신이 나 있었다.

덕분에 칼리안의 입에서 작은 흥얼거림이 흘러나왔고 곁에서 그 소리를 들은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께서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를 잊으신 듯 한데."

노래.

어차피 누가 들을 일도 없고 듣는다 하여 그것이 세크리티아의 노래임을 알 수도 없겠지만 카이리스의 왕자가 고기를 앞에 놓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좀 이상하기는 하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베른의 버릇을 꺼내 든 칼리안이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까먹을게요."

미련만 가득했던 그 날의 베른.

마지막 날의 베른에게 인사를 고했다.

그러고서는 어디에도 묻지 못해 혼자 조용히 가슴에 묻으려 했던 것을 플란츠가 꺼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이가 머나먼 어딘가의 바다에 닿을 수 있게 묻어줬다. 그 왕제의 마지막을 억지로 위로한 것에 대해 칼리안이 또 서러워하지 않도록.

"살만해졌나 보네요. 제가."

그렇게 띄워진 푸른 불꽃.

발칸의 대원들이 흩뿌리듯 띄운 푸른 불빛들과 플란츠가 올려 준 푸른 불꽃을 칼리안이 봤다. 다리를 접고 웅크려 잠든 레이븐에 기대 앉은 채로, 수평선 너머로 푸른 빛이 사라져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달이 기울도록.

등 뒤에서 떠오른 태양이 짙푸른 바다를 다시 비추도록.

아주 오랫동안 바다를 봤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바다 위에 올려졌던 시나스타에 대해 플란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챙겨줘 고맙다 여길 일도 못 되었고, 잘했다 칭찬할 일도 못 되었고, 쓸데 없는 짓을 했다 타박할 일도 못 되었던 까닭에.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만해졌다고, 그 말만 해 줬다.

"알았어."

"네."

악몽 안 꾸고 제자리로 다시 잘 돌아왔다는 것만 알려줬고 플란츠는 알아들었다.

"닭 먹는 엘프는 간 건가."

플란츠 역시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지그프리드령으로 먼저 가겠다고 했습니다. 숲에서는 엘프의 발이 가장 빠르니까요."

특별한 이유는 없을 터였다.

분명 제대로 된 고기 먹으러 먼저 갔겠지.

"그래."

"그런데 하루종일 안 보인 시오나를 이제서야 찾으시네요."

"······ 생각하느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셨습니까."

"말 이름."

"정하셨습니까."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머릿속에 세크리티아의 고대 언어 사전 하나를 펼쳐놓는 기분으로 플란츠를 봤다. 플란츠 성격에 이번에도 분명 같은 언어로 이름을 지으려 할 것 같아서였다.

"······ 꽃."

아니나 다를까. 플란츠는 이렇게 말했고 칼리안은 꽤 의외라는 얼굴이 되었다.

그 플란츠가 하필.

"왜 그런 이름으로 지으려 하시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싫어."

"네."

말해주기 싫다는데 뭘 더 묻겠나.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먼 곳에 매어 놓은 은백색의 말을 쳐다봤고, 참 잘 길들여진 그 얌전한 말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에스티나, 입니다."

"그렇게 부르면 되겠군."

말을 꽃이라고 부르겠다니.

"네."

파릇한 풀이 꽃을 타고 다니는 것을 떠올린 레이븐의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왕자님, 식사하십시오."

조금 전에 찾아와 차를 건네주었던 그 기사가 다시 와서 접시 하나씩을 건넸다.

조촐하게 떠나온 탓에, 그리고 마법사들의 주머니에 테이블처럼 큰 것은 들어가지 않는 탓에, 두 왕자도 결국은 손에 접시를 들고 먹게 되었다. 물론 둘 다 그런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말 없이 멧돼지 고기를 먹기 시작하는 플란츠를 보면서 칼리안이 물었다.

"엘프 도시에서 챙겨온 음식들은 입에 안 맞으십니까."

"아니."

"그런데 그건 안 드시고 고기 드시네요."

"대구 먹으러 가자며."

세크리티아 가는 길은 더 멀지 않나. 그런 곳에 가는 내내 입맛에 맞는 음식들만 골라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 놈의 얼굴에 '아이고 우리 형님 기특하시네' 하는 표정이 떠 있는 것을 보며 짜증난 얼굴이 되었던 플란츠가 물었다.

"넌 거기 왜 가는데."

"뱀 만나러요."

"왜 만나려는 거냐고."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아니야."

"네."

하나도 안 믿는 얼굴을 한 칼리안이 플란츠의 검을 가리켜보였다.

"세크리티아 검은 카이리스의 것보다 강합니다. 동생이 돼서 연약하신 형님만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호위 봐드려야죠."

시종도 하고 호위도 하고. 참 잘 짖기도 하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바쁘게 사는 동생 놈이 말을 이었다.

"데블란은 제가 갈 것이라고 생각 못 할 테니까요."

"가서 어쩌려고."

"이제 생각해 보려고요. 만나면 어떻게 할지."

"······ 안 마주치는 게 나을 텐데."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아니야."

"네."

가벼운 말투로 대답한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을 겁니다. 혼자 가는 것도 아니니."

혹시라도 또 악몽을 꾸면, 또 깨워 주겠지.

혹시라도 또 악몽을 꾸면, 또 깨워야 하고.

대충 그런 뜻을 담은 대답임을 알아들은 것인지는 몰라도 플란츠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식기 전에 식사 마저 하십시오. 어차피 드실 생각이면 다 드시고요. 체이스 형님이 형님보다 키 큽니다."

그리고 접시에 담긴 고기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칼리안의 마지막 말을 신경 쓴 까닭은 아니었다.

* * *

어두운 밤.

잠에 들지 못했다.

체했다.

"괜한 말씀을 드렸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소화가 하나도 안됐다. 차라리 탈이 났으면 축복의 힘이 알아서 고쳐낼텐데 키 크려고 꾸역꾸역 먹어치운 고기 때문에 생긴 문제는 축복도 그냥 무시해버렸다.

니들렌이 전해 준 진한 민트차를 다 마시고 나서도 속이 답답해서, 플란츠는 레이븐과 마주 앉아 두런두런 수다를 떨고 있던 칼리안을 불러냈다.

같은 고기를 세 접시나 비우고 발칸의 대원들과 모여 앉아 과일 잼이 가득 들어간 쿠키도 잔뜩 집어먹고, 거기에 더해 말린 사과칩까지 한가득 가져다 레이븐과 나눠먹고도 지나치게 멀쩡한 칼리안은 거절 않고 일어나 플란츠를 따라 나섰다.

- 우우웅!

자고로 속이 엉켰을 때에는 싸움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형제인지라.

소화는 잘 됐지만 싸움을 거절할 생각은 없던 칼리안의 손 끝에서 붉은 불꽃이 일렁였다.

붉은 오러.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나를 오러로 바꾸어 쓰기 때문에 붉은 빛을 내게 된 독특한 오러가 두 자루의 긴 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아직 무게를 덜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동시에 들고 휘두를 수 없는 자신의 두 검 중 무엇을 쓸까 고민하다 새로 얻게 된 '시나스타'를 뽑아 들었다. 얼핏 청량한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한기가 드는 빛의 검날이 예리한 기운을 머금었다.

- 카아앙!

별빛인듯 달빛인듯.

붉고 푸른 세 자루의 검이 얽혀든다.

브리센의 검을 쓰려면 브리센의 검을 막을 줄도 알아야 하기 때문에.

- 카강! 카아앙!

칼리안의 검이 만들어내는 붉은 꽃을 플란츠가 막아서고 갈라내기를 반복했다.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검을 막아낸 뒤 허리를 숙여 왼쪽에서 휘감아오는 두 번째 공격을 피했다. 그 뒤에는 발을 박차며 몸을 띄워 올려 칼리안의 어깨죽지를 향해 검을 내뻗었다.

- 카가강! 캉!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는 대신, 칼리안은 적당한 속도로 플란츠의 공격들을 피하며 두 검을 하나로 모아 쥐었다. 그리고 회수되어 되돌아가는 청은빛의 검을 올려친 뒤 다시 나누어 들고 양 쪽에서 찔러 들어갔다.

- 타당!

재빠르게 검을 휘둘러 양쪽 공격을 모두 막은 플란츠가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강한 힘으로 칼리안의 옆구리를 노렸다.

- 쉬익!

파공음이 이어진다.

오른쪽 검을 거꾸로 들고 다가오는 공격을 막은 칼리안이 왼팔을 휘둘러 플란츠의 검을 내리쳤다. 급격하게 방향이 꺾인 검을 다잡기 위해 이를 악문 플란츠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며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칼리안의 왼쪽 검이 공격을 막았고 오른손에 들린 검이 플란츠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 카아앙! 카앙!

숲을 울리는 메아리는 없었다.

주변에 넓게 퍼진 반투명한 막 때문이다.

대신 막 안의 두 사람에게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 카앙! 캉! 카가강!

연두색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눈빛을 마주 대하는 새빨간 눈이 찬 기운을 가득 머금었다.

"······ 어깨를 찌르고 옆구리를 베는 것으로는 안 죽습니다."

작은 미성이 플란츠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번쩍하는 느낌이 들며 하늘에서 붉은 검이 내리꽂혔다.

- 카아아앙!

양 손으로 받쳐든 검을 올려 떨어지는 칼날을 막아낸 플란츠가 재빨리 발을 움직였다. 곧 플란츠가 있던 곳으로 날아오던 두 번째 검이 다시 회수되어 돌아갔다.

"특히 검이 가볍다면 절대로 못 죽입니다."

모를 리 없는 말이겠지만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지금 플란츠는 칼리안의 심장을 노린 적도 없었고 목을 찔러 들어간 적도 없었다. 계속하여 팔과 다리, 어깨와 복부만 노렸다.

- 카앙! 카아앙!

두 개의 붉은 검이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날아들었다. 공격 하나를 올려친 뒤 두 번째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물리려던 플란츠를 향해, 세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올려친 반동에 튀어오르는 검을 없애버리고 다시 만든 칼리안이 플란츠의 심장을 노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하나는 심장으로, 하나는 목으로.

어느 것을 피하고 어느 것을 막을 것인지.

- 탕! 카앙!

순간적인 계산을 끝낸 플란츠가 손잡이를 돌려잡아 검면으로 심장을 막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검을 올려쳤다.

- 카아앙!

동시에 칼리안의 네 번째 공격이 곧바로 이어졌다.

가벼운 만큼 예리한 날붙이의 오싹함을 느낄 새도 없이, 어느새 목에서 따끔한 감각이 전해졌다. 눈에 보이지도 않게 뻗어 나온 다섯 번째의 검날이 플란츠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을 그제야 느꼈다.

언제나와 같이 이번에도 칼리안의 검에 목이 베인 것을 깨달은 플란츠가 검을 늘어뜨렸다.

그런데 그때.

- 쉬이익!

붉은 검이 플란츠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멈출 생각 없다는 듯 조금도 주저함 없이 들이닥치는 검을 본 플란츠가 내렸던 팔을 들어올렸다.

"아······."

늦었다.

막지 못한다.

칼리안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심장을 향해 깊숙이 박히는 금속의 느낌을 저도 모르게 떠올리면서, 플란츠가 한 걸음을 뒤로 물렸다.

- 카가각!

그리고 쇠가 긁히듯 강제로 멈추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집어넣기 전에 마음을 먼저 놓으시면, 형님 죽습니다."

목에 난 상처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가슴 부근을 쳐다본 플란츠의 눈에 두터운 실드가 보였다. 실드 한가운데 박혀 멈춘 칼리안의 검 끝이 함께 보였다.

"제대로 공격하실 수 있을 때까지 저는 대련 안 해드릴 겁니다."

조금 딱딱해진 목소리로, 칼리안이 말했다.

그리고 등을 돌려 저벅저벅 먼저 걸어가버렸다.

* * *

밝은 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자 왕성 이곳 저곳에 놓인 마법 등불이 빛났다. 후원과 별궁을 잇는 산책로의 양 옆에 늘어선 나무들이 등불의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이미 진작에 별궁으로 돌아갔어야 할 시간이었으나 루이즈는 몇 번째 그 산책로를 오가며 계속 걷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마음이 불안하고 시끄러워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세자가 전하께 간 지가 한 시간이 넘은 듯 한데, 왜 이리 오래 있는지."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별 일 없을 겁니다."

대답을 대신해 작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집무를 논할 시간도 아닌데 갑자기 부르셨다 하니 마음이 소란하구나."

"정 그리하시면 제가 한 번 다녀와 볼까요."

멀리 본궁에 보이는 체이스의 방에 불이 켜지지 않는 것을 올려다보며 꺼내진 말에, 함께 걷던 시녀가 물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루이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되었다.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이 전하께 알려져서 좋을 것 없으니."

또각또각, 루이즈의 발이 몇 걸음을 더 걷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루이즈는 고개를 올려 체이스의 방과 데블란의 집무실을 한 번씩 쳐다봤다.

"전하께서 수면향을 다시 올리라 하신 것은······."

"그것은."

잠시 말을 멈춘 루이즈가 몇 걸음을 더 걷다 입을 열었다.

"지난 번에 향을 물리라 하신 일로 향을 모두 치운 탓에 남은 것이 없구나. 그 일은 내가 전하께 따로 말씀을 드릴 테니 우선 그냥 두거라."

"알겠습니다."

시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이즈의 시선이 또 본궁 쪽을 향했다.

불안함 마음을 가득 담은 시선의 끝.

그 곳에서 데블란의 집무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법의 기운이 담긴 샹들리에가 가장 밝은 빛을 내고 있던 까닭이다.

작지만 화려한 세공의 샹들리에가 보랏빛 눈을 비췄다.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만 물러가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집무실로 불러와 앉혀둔 채 한 시간을 있었다.

서류를 살피고 일을 하다 몇 번의 기침을 내뱉기를 반복했을 뿐,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한 시간을 앉아있던 체이스의 말에도 데블란은 별다른 반응 없이 서류를 한 장 넘겼다. 그리고 기침을 했다.

밝은 등불 아래, 체이스의 두 눈이 잠시 감겼다 올라왔다.

"내가."

데블란의 입이 그제야 열렸다.

"생각을 해 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생각을 했다."

가라앉고 쉰 목소리.

하지만 누구보다 침착한 목소리.

그 소리를 비로소 들은 체이스는 데블란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앉아있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 말씀이십니까."

"르메인의 입을 빌려 나에게 말을 건넨 이에 대해서."

탁, 하고 넘겨보던 서류를 덮은 데블란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움직임으로 걸어와 체이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소파가 깊숙이 내려앉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우연히 찾은 나의 새를 내세워 후작을 해한 죄에서 벗어나고. 그 일을 나의 새에게 덮어씌워 나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핑계를 만들고. 더불어 나의 숨죽임을 요구하고. 내가 쫓던 또 다른 새를 찾아내더니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제 것으로 만들고."

톡, 톡, 톡.

깍지를 낀 채 무릎 위에 올려 둔 데블란의 손 끝이 반대편 손등 위를 천천히 두드렸다.

"그래서 오랫동안 생각을 하였다."

선왕의 눈을 고스란히 닮은 체이스의 보랏빛 눈을 바라보는 데블란의 손가락이 멈췄다. 작은 기침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정도의 소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데블란도, 그리고 체이스도.

"네가 굳이 만나러 갔던 그 아이가 어떻게. 나와. 그렇게까지 똑같은 생각을."

톡, 톡, 톡.

"······ 하는지."

체이스가 대답 없이 데블란을 마주 바라봤다.

데블란의 손가락 끝이 반대편 손등에 긴 호선을 하나, 천천히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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