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70화 (271/527)

제47장.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6)

시오나 옆에 붙어 있으라고는 했다.

시오나와 한 판 붙으라고는 안했다.

아무래도 말을 좀 길게 할 걸 그랬다.

어차피 왕궁 밖에 나와 있었으니 이곳까지 와서 훈련을 한다는 것은 기대도 안했다. 그래서 플란츠는 놈들이 그냥 탄산수를 자신들의 인생처럼 말아먹으며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있거나 자기들끼리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기를 했거나 알아서 잘 쉬고 있는 정도를 예상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모래 사장 위에 마흔 구의, 아니 마흔 명의 대원들이 누워, 아니 버려져 있었다.

습격당한 줄 알았다.

"대련은 아닐 것 같은데. 혹시 대원들이 시오나에게 뭔가를 배우기로 했습니까."

둘을 보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려 노력하고 있는 마흔 명을 보면서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딱 봐도 그냥 적당히 한 두 대씩 맞고 쓰러진 꼴이라 부상 걱정은 하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칼리안의 질문을 받은 플란츠는 아주 잠시, 하지만 아주 깊이 고민한 뒤 대답했다.

"······ 안 했어."

"네."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아무튼 칼리안은 이번에도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들이 내기에 널 걸어서 내가 말을 못해준다는 플란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서 적당히 상황을 파악했으나 발칸의 일에 대해 되도록 크게 관여하지 않으려 하던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대체 왜 나서서 얻어맞고 다니는 거야."

이런 혼잣말을 한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조금씩 커지더니, 웃음이 터졌다.

터져나온 웃음이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좀 쉬고 오겠다며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는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한참동안 계속 들렸다.

그런 동생을 애써 무시한 플란츠는 일단 들어가서 제대로 씻고 잘 놈은 자고 쉴 놈은 쉬라는 말로 전부 다 들여보냈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들어가' 라고 했다.

"제이아 사단장."

"네, 부군단장님."

"남아."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중간관리자 빼고.

칼리안도 플란츠도 없는 상황에서 대원들이 전부 저지경이 됐으니 니들렌은 뭐라 할 말도 없었다.

대사막의 전사가 어떻게 싸우는지를 알려달라 했지 대사막의 전사인 소드마스터가 어떻게 싸우는지를 궁금해 한 것은 아니었는데.

속았다.

엘프라는 족속들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아무튼 '딸랑' 소리 여섯 번만에 마흔 명이 싹 주저앉았다. 딱 그 때 두 왕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고 시오나는 빛과 같은 속도로 자리를 피했다.

결국 오늘도 할 일 많은 중간관리자는 심심했던 소드마스터에게 툭 얻어맞은 명치의 욱신거림이 가시기도 전에 일단 고개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됐고."

그리고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안 혼났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더 나아가 정말 놀랍게도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그 플란츠가 궁금한 점이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말이 너무 길어서 놀랐다.

플란츠의 질문을 끝까지 다 듣고 난 니들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려다,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부군단장님. 물어보신 것 말씀드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 한데, 그 전에 하나만 먼저 보여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왕자의 질문에 다른 말을 꺼내는 것에도 플란츠는 별다른 얘기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고, 곧 니들렌이 로브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제는 익숙한 마법사들의 공간 주머니였다.

그것을 주섬주섬 여는 동안 니들렌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 칼리안 왕자님 기분이 좋으신 것 같네요. 평소보다 더 웃으시는 것 같습니다."

"내 아우님 오늘 안 웃었는데."

플란츠는 이렇게 답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듣지 못한 니들렌이 플란츠를 쳐다봤으나 플란츠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달리 더 무엇을 물어보게 할 만한 얼굴이 아니어서, 니들렌은 입을 닫고 얼른 주머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빨리 화제를 전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주먹만한 주머니 속에 팔꿈치까지 쑥 집어넣고 뒤적거리던 니들렌이 곧 원하는 것을 찾았다는 얼굴이 되어 손을 뺐다. 주머니 밖으로 나온 것을 본 플란츠가 미간을 살짝 굳히며 물었다.

"······ 뭐야."

"소라 껍데기입니다, 부군단장님."

옅은 모래 색을 가진 커다란 소라 껍데기.

그것을 들어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해 보인 니들렌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 파도 소리 들립니다."

바다가 없는 카이리스에서 파도 소리 들을 방법이라며 시오나가 말해 준 것이다.

물론 알고는 있었지만 시오나 덕에 그 생각을 떠올리고 또 처음으로 직접 그 안의 소리를 들어 보게 된 니들렌이 소라 껍데기를 건넸다.

"신기합니다. 부군단장님도 한 번 들어 보십시오."

그것을 받아 든 플란츠가 니들렌이 알려준대로 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낮에 부군단장님 나가시고 나서 대원들이 다 같이 찾은 것 중에 제일 예쁜 겁니다. 얼마 후면 부군단장님 탄생일이라 선물로 드리려고요."

생일 선물.

진주 말고 자개 말고, 그냥 소라 껍데기.

힘들게 구했다는 희귀 보석 말고 발칸 대원들이 한참동안 바닷가를 뒤져가며 찾아낸, 그냥 소라 껍데기.

이왕이면 대원들 다 모였을 때 드리려고 했는데 다들 부끄럼이 많아서 그냥 조용히 슥 건네달라고 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플란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래."

그리고 한참 뒤에 이렇게 대답을 했다.

소라 껍데기 속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꺼내진 말이 '고맙다'는 뜻임을 알아들은 니들렌이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 * *

찻잔에서는 커피 향도 안 나고 차 향도 안 났다.

그것을 조용히 내려다보는 앨런의 얼굴에 다소 복잡한 표정이 들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앨런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걱정 가득한 질문에 칼리안이 대답했다.

- 세크리티아에 형님과 함께 가기로 한 것에 대해서 말씀이십니까.

- 네. 저는 그것이 우려됩니다. 플란츠 왕자님이 과거의 일과 무관하다 여기시는 것은 저도 압니다. 허나 아는 것과 와닿는 것은 늘 다른 법이니 우려가 될 수 밖에요.

- 기억이 돌아와도 상관않겠다 말씀드렸습니다.

앨런이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찻잔의 모서리를 손으로 쓸기만 할 뿐, 그것을 들어올리지도 않고 잠시 칼리안의 말을 새기고 있었다.

대신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 그러니 아마 지금쯤이면 무슨 옷을 입어야 풀물이 안드는지, 그런 것만을 걱정하고 계실 것이라서. 왕자의 정복이나 발칸 부군단장의 제복 말고 풀물 안드는 그냥 제 형님 옷이요.

발칸을 거느린 왕으로 찾아갔던 세크리티아에, 이제는 그저 칼리안의 형이 되어 갈 생각을 하고 있을테니 상관없다는 이야기였다.

- 그 마음가짐이 옷을 바꿔입듯 그리 쉬이 바꿔먹을 수 있을는지. 다시 악몽을 꾸실까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 어차피 저도, 형님도······ 악몽은 이제 익숙하니 괜찮습니다. 서로 많이 깨워보기도 했고요.

앨런의 입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 그럼 왕자님께서는 그 곳에 가셔도 괜찮겠는지요.

- 생각나는 것들이 많겠죠. 반갑고 좋지 않겠습니까.

- 왕자님께서 그 자의 앞에 서는 것에 대해서를 여쭙는 겁니다. 굳이 직접 가지 않으셔도 해결 할 방법이 있을 터인데.

- 인내심 모자란 제 성격에 데블란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이번에 하나를 배웠습니다.

-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 직접 마주해야 떨쳐지는 것도 있다는 것을요. '떨친다'고 말하면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런 것을 하나 배웠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더 가려고 합니다. 떨쳐내려고.

찻잔 모서리 위를 맴돌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여전히 아무런 향이 나지 않는 짙은 빛의 찻물을 내려다보던 앨런이 다정한 목소리를 보냈다.

- 엘프들의 어머니도 왕자님 속을 헤집어놓고 갔습니까.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다가.

- 네.

솔직한 마음이 전해졌다.

- 제가 가서 그 못돼먹은 나무 혼쭐을 내어 줄까요.

- 정말 그리 하실 것 같아서 해달라는 어리광도 못 부리겠네요. 이것도 나중에. 같이 술이나 마셔주세요.

- 그리하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기다려 주시겠다 하는 말이 저는 참 좋습니다. 체이스 형님도,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고······ 이번에는 저도 돌아갈 수가 있으니. 좋네요.

잘 하지도 못하는 거짓말.

다녀오겠다던, 꼭 돌아오겠다던 거짓말.

이번에는 안 해도 되니까.

체이스를 그리 부르는 것을 들은 앨런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아무래도 칼리안이 이번에 돌아오거든 서로 나눌 말이 참 많으리라.

- 조심히 돌아오십시오.

- 네, 조심히 돌아갈게요.

이 말과 함께 반지의 빛이 줄어들다 사라졌다.

"할아버지 새아들 왕자님이랑 얘기 다 한거야?"

한동안 그 빛의 여운을 내려다보던 앨런을 향해 베로니카가 이렇게 물었다.

"그새 눈치를 채었느냐."

"할아버지 아들 생긴 거 나도 알고 엄마도 알아. 아마 아빠도 알걸."

아직 저택에 가져가지 않아 창가에서 잘 자라고 있는 보석같은 꽃을 들여다보던 베로니카가 웃어보였다.

"나도 좋아했고 엄마도 좋아했는데 아빠만큼 좋아하지는 않을 거야."

앨런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 후에는 손 끝으로 찻잔을 톡톡 치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리 쓴 것을 어찌 다 먹으라는 것인지."

"할아버지 요즘 계속 못 자잖아. 약이라서 쓴 거니까 툴툴거리지 말고 다 마셔."

베로니카는 꽤 엄한 얼굴을 하며 저보다 열 살쯤만 많아 보이는 앨런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짙고 짙은 갈색 빛의 차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던 앨런이 정말 억지로 먹는다는 얼굴을 감추지 않은 채 그것을 한 입에 쭉 마셨다.

앨런의 옆으로 와 앉은 베로니카가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은 빈 잔을 확인한 뒤에 손에 들고 있던 초콜릿 상자를 꺼내들었다.

얼른 그것을 받아 하나를 입에 넣은 앨런이 찌푸려진 얼굴을 조금씩 폈다.

"할아버지랑 나랑 할 일이 바뀐 거 알아? 이런 건 할아버지가 주고 내가 싫다고 해야지."

"그래도 쓴 것은 영 입맛에 맞질 않으니 어찌하겠느냐."

머리카락 생김은 꼭 닮았으면서 입맛은 정반대인 손녀를 향해 앨런이 이렇게 또 볼멘소리를 했다. 세상에 맛있고 달고 몸에도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저리 쓴 차를 주는지.

"그래도 이 정도로 넘어가 주려무나. 어여쁜 손녀가 주는 것이 아니었으면 입에도 안 댔을 터이니."

앨런의 눈에 부드러운 웃음이 어리자 베로니카가 똑같은 얼굴을 해 보였다.

"알았어. 넘어갈게."

가까이 두었으면서도 볼 때마다 쑥쑥 자라 있는 것 같은 베로니카를 향해 앨런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느냐?"

"응? 무슨 소리야?"

짐짓 모르는 척 되묻는 말에 슬쩍 웃은 앨런이 다시 말했다.

"도와 줄 일이 있어 이렇게 뇌물을 가져온 줄 알았는데, 아니면 말거라."

겉보기로는 아르센보다도 훨씬 어려보이면서 속에 든 것은 확실히 베로니카의 할아버지다. 베로니카가 자신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내 머리 위에 서 있지 말고 내려와."

머리 꼭대기에서 말하지 말라는 귀여운 투정에 앨런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던 베로니카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나 마법 학교 그만 다닐래."

"그리하거라."

베로니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유도 안 물어봐? 엄마랑 얘기해본다는 말도 안 하고 할아버지 맘대로 그냥 그래라 하고 끝이야?"

"이미 얘기했으니 걱정 말고."

"엄마가 화 안 내?"

"레이첼이 네가 학교를 몰래몰래 빠진 것에는 화를 낼 만 하다만 네가 하기 싫다는 것에도 화를 낼 사람은 아니지."

"그럼 엄마가 안 속상해 해?"

"무엇을 속상해 하겠느냐."

"아빠가 하던 것 나도 하려고 해서."

엄마인 레이첼 따라 마법사 되는 것 말고 아빠인 로닐 따라 약사 하겠다는 말을 한 베로니카가 잠시 앨런의 빈 찻잔을 보다 말을 이었다.

"엄마가 아빠 생각할까봐 말 못했어. 엄마가 그랬거든. 잊고 살아야 산다고."

언젠가 히나와 드미레아에게도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꺼낸 베로니카가 앨런을 쳐다봤다.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앨런을 물끄러미 보던 베로니카가 작은 목소리를 냈다.

"미안해, 할아버지."

약을 볼 때마다 로닐을 떠올릴 사람이 비단 레이첼만은 아님을 아는 탓에.

"그리 산다고 정말 잊힐 기억이겠느냐. 결국은 다 생각이 나고,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마는 것이지."

이렇게 말한 앨런이 팔을 뻗어 베로니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베로니카가 베실베실 웃다가, 앨런의 품을 꼭 안았다.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살거라. 아무 걱정 말고."

토닥토닥.

앨런이 베로니카를 달래주며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 * *

- 딸랑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조그만 방울 소리가 울렸다. 어쩐지 그 소리가 오늘따라 불만 가득함을 느낀 칼리안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웃지 말지. 아직도 아픈데."

"당신이 먼저 내 사람들 건드렸잖아."

한밤.

까맣고 적막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앨런과의 대화를 마치고 멀리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이 곳이 참 한적해 보이기에 찾아왔더니 자리를 피하는 척 도망쳤던 시오나가 있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아무 말 없이 시오나에게 달려들어 대원들의 원을 풀어줬다.

"성격 나쁜 왕자님이군."

"사기 치는 엘프보다는 낫지."

이렇게 대꾸한 칼리안이 날 없는 붉은 빛 칼에 얻어맞은 목을 주물거리며 궁시렁거리는 엘프를 잠깐 쳐다보다 무언가를 살짝 던졌다.

얼결에 잡은 것을 확인한 시오나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엘프 못 믿는다더니."

"대사막의 전사니까."

"대사막의 전사도 싫다더니."

"엘프니까."

시오나가 실소했다.

그리고 방금 칼리안에게 받은 검은 조약돌을 품에 넣었다.

"이상한 곳에 안 쓰도록 조심하지."

"당신 알아서 해."

믿는다는 의미를 담아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작은 발소리를 낸 레이븐이 풀밭에 앉아있던 칼리안의 뒤로 다가왔다. 고개 숙인 레이븐의 턱 밑을 몇 번 쓰다듬은 칼리안이 길고 검은 두 앞다리에 기대 앉았다. 마치 레이븐의 품에 안긴 것처럼.

"왕자님이 여긴 왜 혼자 올라왔나."

"바다 보러. 그리고 혼자 안 왔어. 레이븐이랑 왔지."

"그래."

"당신은 여기 왜 왔는데."

"바다 보러."

"그래."

친한 듯 서먹한 듯 어색한 몇 마디 말이 오가자 다시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먼 바다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네 어머니를 안다."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시오나가 이런 말을 꺼냈다.

"알겠지. 왕비신데."

"내가 대사막에 가기 전까지 함께 지냈고. 브리지트 숲에서."

"······ 그래."

특별히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대꾸하는 말에 시오나가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런 말에 놀라기에는 내 생이 좀 비범해서."

시오나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가 뻔해서, 칼리안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하는 칼리안을 보던 시오나가 말을 더했다.

"나는 브리지트 숲에서 태어났고 프레이야는 숲으로 쫓겨났지. 열 두 살 즈음인가······ 카르테 힐, 내 스승님이었던 분 따라서 대사막으로 가기 전까지는 프레이야와 그럭저럭 친하게 지냈다. 그 후로 본 적은 없었지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여서 잘 기억은 안 나도 엄청 예뻤던 건 기억이 나는군."

"그건 나도 알아. 내가 이렇게 생겼는데."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 때문에 좀 멍한 표정을 지어보인 시오나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성격이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프레이야와 성격이 닮았을 리는 없을 것이라 말하려던 칼리안이 그냥 다른 대답을 했다.

"아무튼 고마워. 알려줘서."

처음 시오나가 칼리안에게 화풀이 삼아 공격을 하기 직전에 '검은 머리, 붉은 눈.'을 말했던 것이 칼리안이라는 소드마스터를 알아봤다는 뜻인지, 아니면 친구의 아들인 소드마스터를 알아봤다는 뜻인지. 프레이야가 카이리스에 온 이유를 혹시 아는지, 프레이야의 가족들은 프레이야와 함께 지냈는지. 함께 지냈다면 프레이야를 어떻게 대했는지.

내 어머니는, 그 곳에서 잘 지내셨는지.

- 쏴아아아······.

꺼내지 않을 많은 질문을 고요한 파도에 쓸려 보낸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시오나가 물었다.

"더 있다 올 건가."

"응. 당신 먼저 내려가."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시오나가 가볍고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작은 방울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다 점점 멀어져 사라졌다.

대신 그만큼 규칙적인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한동안, 혹은 영영 다시 보지 못할 짙푸른 빛의 바다.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좋은 시력으로 바라보아도 다를 것 없이 그저 적막한 바다.

"저게 바다라는 거야, 레이븐. 너도 잘 봐둬."

그 적막함이 괜스레 싫어진 칼리안이 이렇게 말을 건넸다.

푸르릉 하고 레이븐이 대답을 했다.

그리고 정말로 칼리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바다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제 저기는 다시 못 볼 지도 몰라."

그 바다를, 칼리안이 한참동안 바라봤다.

아무것도 채근하지 않고 주인의 등을 받치고 선 레이븐의 큰 눈에도 바다가 한가득 담겼다.

그러다 문득.

레이븐의 까만 눈동자에 파란 불빛 하나가 비췄다.

레이븐이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파란 불빛 하나가 바다 위에 띄워졌다.

하나 더.

그리고 또 하나가 더.

파도 위에 넘실거리는 파란 불빛들이 늘어났다.

어둠 가득한 파도 앞에, 바다 앞에.

니들렌이 보였다. 케인이 보였다. 새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보였다.

어둠 가득한 파도 위에, 바다 위에.

니들렌의 파란 불빛이 올려졌다. 케인의 파란 불빛이 올려졌다. 새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의 파란 불빛이 올려졌다.

마지막 날이 언제였는지는 몰라도.

칼리안으로부터 마지막 인사를 받은 그 왕제가 떠나간 날은 오늘이라서.

다 모르겠고 너네들 그냥 다 나와서 일단 경건한 마음으로 마법 좀 쓰라는 부군단장 말 잘 들은 마법사들의 손 끝에서 만들어진 파란 불빛들이 늘어났다. 칼리안은 어떻게 만드는지도 모르는 파란 불빛이 계속 그렇게.

"······ 하."

칼리안의 입에서 짧은 소리가 나왔다.

파란 불빛이 하나 둘, 늘어난다.

작고 작은 파란 불빛들이 파도를 따라 넘실거렸다.

새하얀 망토를 걸친 희멀건한 형님이 보였다.

그 손에 올려진 파란 불꽃 하나가 붉은 눈에 비쳤다.

"또 올려주시네······."

파란 별이 바다 너머 먼 곳으로 흘러가던 밤.

칼리안이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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