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장.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5)
상관없었다.
칼리안이 굳이 엘프의 도시 밖으로 나와 멀쩡했던 바위를 부순 것은 아마도 이 검이 오러를 버티는지를, 얼마나 강한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터였다. 그러다 자신의 오러 색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덤으로 알게 되었으리라는 것도 잘 알아들었다.
그런데 상관없었다.
지금 손에 든 것이 얼마나 좋은 검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 상관없었다.
"시나스타······."
완연한 은색도 아닌, 그렇다고 완연한 푸른색도 아닌 빛의 검.
- 어디 두고 다니지 마시고요. 이번에는.
익숙한 묵빛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었다.
마법사의 손 끝에서 불길이 일고 기사의 손 끝에서 칼날이 이는 세상이니.
시간을 되돌리고 멀쩡하게 살아 숨쉬었던 이의 존재를 지우고 그의 영혼을 다른 곳에 옮기고. 그 이름이 전해지는 것도 막아버리는 세상이니, 그래.
가능하겠지.
별똥별이 되어 떨어지기 전의 모습.
겉도 속도 새카맣게 타버리기 전의 모습.
"진짜 내 검이겠군."
진짜, 별의 조각.
그것을 알아봤는데 무엇인들 상관있을까.
"역시 형님은."
짧은 말로 긍정을 보인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을 덧붙였다.
"네. 형님께서 지니고 다니셨던 검입니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칼리안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웃고만 있었다.
"······ 너."
이제껏 단 한번도 칼리안은 과거의 플란츠를 그렇게 부른 적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의 플란츠와 다른 이로 보려 했고 그리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똑똑한 플란츠는 그것 역시 알아들었다.
바닷가에서 그 난리를 피웠다 해도 그건 결국 지금의 칼리안과 플란츠의 일이다. 그 일로 플란츠를 진짜 제 형제로 여기게 되었다 해도 과거의 플란츠와는 관련 없는 일이다. 그런데 칼리안이 과거의 플란츠를 지금과 똑같이 불렀다. 그 때의 플란츠나 붙일 법한 이름을 새겨 놓은 별빛의 검 한 자루를 가져다 주면서.
그 이유 역시 플란츠는 알아들었다.
"잘도 참았군."
봤을 것이라고.
그 날의 악몽을 눈앞에서 보고, 그 날의 플란츠를 마주하고, 그 날의 플란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한 술을 더 떠 그 때의 플란츠가 지니고 다녔을 검을 제 손으로 직접 챙겨와서는 이렇게 돌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또 저렇게 웃고 있는 거다.
그 날의 플란츠를 봤다면 그 날의 그 왕제도 봤을 테니까.
"네. 인사를, 했습니다. 저에게."
베른에게.
옛 칼리안에게.
헤실거리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니 만약 나중에 언젠가 형님께서······."
"알아들었어."
"네."
애초부터 플란츠는 기억도 못할 그 날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다르게 두고 보지 않았었다.
그 둘을 애써 구분한 것은 칼리안이었다.
그 일을 두고 지금의 플란츠를 원망할 수 없었으니까. 원망해서는 안 되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런 마음을 조금 바꿨다고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말해준 것이다. 언젠가 만에 하나 플란츠가 그 때의 기억을 찾는다 해도 지금과 다르게 보지 않을 테니, 그런 날이 오게 된다면 혹시라도 숨기지는 말고 얘기해달라고.
그런 말을 하려고 굳이 안에서 겪은 일을 알려준 것임을 이해한 플란츠가 칼리안의 말을 잘랐다. 굳이 입에 담고 귀로 들을 필요 없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하고싶었던 대로 태워버리고 와도 괜찮았을 텐데 정말 잘도 참으셨군, 내 아우님께서."
"테스만 경이 설명해주는 걸 들었는데도 크리스털에 불을 어떻게 붙인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제 주종은 바람이잖아요."
"파란 머리 마법사 주종은 얼음이고."
칼리안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방법이라 이해는 못해줘도 왜 그랬는지는 알겠어서. 그렇게나마 보게 된 것이 저는 조금 반갑고 좋았어서. 그래서 그냥 얌전히 나왔습니다."
향도 좋고 맛도 좋은 차도 많지만 향도 없이 쓰기만 한 약을 건네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그러했고.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그러했듯이.
"······ 알았어."
잊히는 것이 무섭다 했던 사람에게 죽음을 기원하며 위로를 건넨 시스파니안이 떠올랐다.
스스로도 어쩌지 못해 마지막으로 남겨둔 응어리에 작별하는 법을 알려 준 어머니 나무를 욕해야 할지 아니면 칭찬해야 할지 이번에도 결정하지 못한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안 두고 다녀. 이번에는."
대신 약속을 해줬다.
"네."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새가 울고 바람이 불고 하늘에는 구름이 떠 있는 이곳이, 발 밑에는 아무도 없고 머리 위에는 붉은 별이 떠 있던 마음 속의 익숙한 길보다는 더 좋다는 것을 잘 알아서였다.
* * *
처음.
하나의 생명이 눈을 떴다.
홀로 피어난 순수한 생명은 최초의 녹빛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 도왔다.
생을 나누어 받은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나 가지를 내고 잎을 틔웠다. 살아갈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었다.
나무는 거대해지고 굳건해졌으며 온전한 스스로의 의지를 지니게 되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게 되었다.
- 너를 내가 보았다.
시간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지켜보았다.
- 그리고 그저 관조하였다.
시간이 되돌아감을 기억했다.
많은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잊지 않았다.
거스르지도 않았다. 흐르는대로 지켜보았다.
- 하지만 너는······.
* * *
"그래서."
플란츠가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왜 부른 건데."
무릎 위에 올려둔 검에 새겨진 글씨. 자신의 말에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던 이가 직접 정했을 그 검은 글씨 위에 여전히 손을 올려 둔 플란츠가 이렇게 물었다.
"어머니 나무가 저를 왜 불렀는지 얘기 한 것도 없었고, 특별한 대화 나눈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안 특별한 대화. 뭐냐고."
"정말 별 것 아닌 대화요."
또 뭔가를 숨기려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아무리 바빠도 옛 언어로 된 단어 하나 알려주는 건 할 수 있겠지."
아, 진짜.
바질 새싹마냥 시도때도 없이 파릇하신 형님 같으니.
쇠약해진 심장 고쳐놨더니 이제는 심장 말고 체이스에게 이름 뜻 알려달라 하겠다는 말로 협박을 해오는 플란츠를 보는 칼리안이 참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건 형님 생각해서 안 알려드리는 건데요."
"뭐든."
"그리고 왜 그런 말씀 하실 때만 말이 길어지시는 겁니까."
"필요해서."
"평소에는 왜 그렇게 짧으신데요."
"알아들으니까. 넌."
잘못 들여놨다.
버릇을 완전히 잘못 들였다.
"그래서. 뭐냐고."
내 형님 내가 저렇게 키워놨으니 누구 탓도 못하고 이런 하소연 들어줄만한 사람이라고는 저기 앉아 계시는 참 애증하는 형님 뿐이라 어디 다른 데 말도 못하고 내 속만 계속 썩는데 그게 결국 나 때문이니 아니 이걸 어쩌나.
"부탁이라 해야 할지, 조언이라 해야 할지. 그런 말 하나를 들었습니다."
말해줘야지 어쩌긴 어쩌나.
"무슨 말."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주었던 검을 손에 쥔 순간 들려오던 어머니 나무의 말을 떠올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너는. 이번에는. 네가 무엇을 알게 되더라도.
"무엇을 알게 되더라도······ 순응할 필요 없다 했습니다."
순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어머니 나무가 그런 말까지 해야 할 만한 일이 무엇인지 지레 걱정할까봐 또 굳이 숨기려 든 칼리안을 향해 플란츠가 담담한 목소리를 전했다.
"걱정 안 해."
"······ 왜 안하시는데요."
"순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데. 무엇이든 상관없는 것 아닌가."
말 안 듣는 것은 이제 진짜 잘하게 된 플란츠의 대답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하긴 그렇네요."
"다른 건."
"다른 말은 더 없었습니다. 브리지트 쪽 숲의 길을 늦지 않게 여는 것 말고는요."
"그래."
이야기를 마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플란츠의 검을 가리켜보이며 다른 말을 꺼냈다.
"에반의 검을 드미레아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형님께서 쓰실 검도 그 검처럼 조금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플란츠가 지닌 두 검의 형태를 바꾸어, 평소에는 하나의 검으로 다루다가 필요할 때에는 세로로 나뉘어진 두 자루의 검으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떤지를 묻는 말이었다.
이미 완성된 검을 깎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충분히 해낼 만한 사람을 이미 알고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는 일이었다.
"두 자루의 검을 쓰는 것을 숨길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형태의 검에 맞춰진 것이 브리센의 검술이니까요. 평소에 지니고 다니시기에도 그 쪽이 나을 테고요."
그 말에 플란츠가 잠시 검을 내려다봤다.
"남겨두고 싶은데."
과거의 플란츠가 무슨 생각으로 정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가늠해 볼 수는 있는, 검의 이름. 그것이 검신에 적혀 있지 않나.
검을 깎아내면 글자도 반이 사라지는 것이라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리 내키지가 않았다.
"저 글씨 잘 씁니다. 지워지는 부분은 제가 다시 새겨 드릴게요."
칼리안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청은빛의 검에서 지워질 부분을 묵빛의 검에 옮겨 적어 주겠노라고.
그 말을 듣고 가만히 글씨를 바라보던 플란츠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어차피 이 이름의 절반은 칼리안의 몫일 테니까.
* * *
바람이 불었다.
풀잎의 향기가 가득했고 두 마리의 말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바뀌었다.
바다의 소금내가 느껴졌고 두 마리의 말이 바닥을 밟는 소리는 여전했다.
엘프들의 도시로 돌아왔다.
"이름 지어주셔야죠."
멀리 다시 보이는 거대한 어머니 나무를 한 번 바라본 칼리안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당분간 플란츠 대신 지니고 있기로 한 청은빛의 검을 가리켜보이며 말을 이었다.
"형님 검도 이름이 있고 형님 고양이도 이름이 있고, 형님 동생 말도 이름이 있는데 형님 말만 이름이 없지 않습니까."
플란츠가 살짝 눈을 감았다.
한 마디를 해 주고 싶은데 참는 것이다.
차라리 히나의 말은, 손으로 부를 수 있을 만한 이름 중에 히나가 가장 바라고 있을 의미가 있기라도 하지. 저 대단한 말에게 까만 것, 아니면 큰 까마귀라는 뜻의 이름이나 붙여놓은 놈이 뭐가 잘났다고 저런 소리를 하나 싶어서였다.
레이븐이 푸르릉 소리를 냈다.
지금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대충 칼리안의 말에 대답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안 지었을 텐데. 그 때에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것에 의미 두고 살았을 것 같지 않아서."
플란츠 성격에, 과거였다면 분명 저 레이븐을 타기는 했을 것이라 생각을 했다. 다만 끝까지 이름은 지어 주지 않았으리라 여겼다. 자신이 그런 것을 챙겨 가며 살았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으니까.
"그래도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니까요. 먼 곳까지 같이 다닐 말인데 이름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먼 곳 어디."
예전 같았으면 저 놈이 이제 나를 탑에 데려다 놓으려나보다 하고 말았겠지만 이제는 아니지 않나. 그래서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를 가졌느냐는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데 칼리안은 대답 대신 또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형님 혹시 제가 진짜 검에 오러 씌운 것 보신 적 있습니까. 제가 만드는 검 말고요."
"없어."
"그럼 형님 제가 오러로 바위 부수는 것 보신 적 있습니까."
"없어."
칼리안이 생글거리는 눈으로 단도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마차 바퀴만한 바위를 향해 던졌다.
"제가 시끄러운 것은 질색이라."
- 파삭.
레이븐이 푸르릉하는 것보다 작은 소리.
마른 모래 뭉치가 바스러지는 정도의 소리가 났다.
대신 바위는 조금 전 계곡에서 본 것처럼 산산이 조각나 바닥에 흩어졌다. 조금 전과 같은 굉음은 전혀 터져나오지 않았다.
"제 오러 색이 바뀐 것은 새 검에 오러 둘러보면서 진작에 알았는데 어머니 나무에게 받은 검이 어느 정도 강도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프 도시 안에서 칼을 마음대로 휘둘러 볼 수는 없겠어서 나무나 좀 베어 보려고 밖으로 나갔더니,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크리티아의 새인가."
"네. 그런데 그 새가 정말로 저에게 들킨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들킨 것인지. 그건 아직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곧바로 숨기에 일단은 모르는 척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가면서 생각해보니까 그 새한테 좀 보여주면 좋겠다 싶은 것이 있더라고요."
이런 말을 듣고서야 다시 떠올랐다.
내 동생은 한 번에 한 가지만 얻어내지 않는 지독한 놈이라는 것을.
칼리안 찾으러 나올 것이 뻔한 플란츠를 기다리거나 데리러 돌아오는 대신 그냥 칼리안이 있던 곳으로 부를 겸. 엘프 도시 밖에서 칼리안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새 한 마리의 시선도 좀 끌 겸.
거창하게 바위를 한 번 부쉈다는 소리다.
"뭘 보여주려고 했는데."
"데블란을 좀 속일 만한 방법이요."
조금씩 가까워지는 어머니 나무를 향해 고개를 돌린 칼리안이 그 상태로 입을 열었다.
계속 이야기 하라는 듯 플란츠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번에 바뀐 제 오러 색이 제온의 것을 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쪽에서 쓰는 힘의 색이 더 탁하기는 하지만 이런 밝은 날에는 그럭저럭 비슷해 보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다면 제가 제온과 연관이 있다고 데블란을 속여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계곡에서의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 꺼내놓았던 것.
그들이 쓰던 것과 썩 비슷하다 여겨질 만한 투명한 붉은 빛의 오러.
"굳이 왜."
"잠시 데블란의 시선을 좀 돌리려고요. 제온 쪽으로."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제가 여기에 왔다는 것을 안 이상 데블란은 절대로 이곳에 안 올 겁니다. 엘프들과의 협약을 핑계로 저와 히나를 부르는 것은 전하의 서신이 있었으니 물건너갔고, 안전하지 않을 것이 뻔한 이곳에 올 수는 없고. 그런 와중에 체이스 형님께서는 귀족들 앞에서 데블란이 병중에 있는 것을 알리려 하실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해야 체이스 형님의 자리가 안전하니까요."
"그렇겠지."
체이스에 대한 호칭이 바뀐 것을 눈치챘으나 플란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가 아는 데블란은 그 정도로는 못 다룹니다. 그렇게 몰리면 데블란은 분명 저에게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할 겁니다."
이런 말이 곧바로 나온 탓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기 보다는 보이지 못했다 해야 맞을 일이다.
"약점을 잡으려 들 것이라는 말인가."
약점.
베른이 무엇 때문에 어떤 생을 살았는지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었으나 플란츠는 이미 알았다. 칼리안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그런 생각을 해봤을 겁니다. 저도 뱀의 새끼였으니. 그리고 제가 하는 생각은 데블란도 똑같이 할 테고요."
똑같은 생각을 하지만 칼리안은 실행하지 않는 것.
그리고 데블란은 실행하는 것.
"아리안느든, 아니면 후궁 루이즈······ 제 어머님이든. 체이스 형님을 옥죌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용할 사람입니다."
때문에 데블란의 시선을 잠시 돌려놓으려 한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칼리안이 이 곳에 와 있다는 것을 데블란이 안다. 새까지 따라 붙어 있던 것을 알았으니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엘프들이 치료를 해주겠다며 불러내는 것이 참 위험한 초대임은 데블란도 눈치를 챌 터였다.
"그래서 시선을 잠시 돌리려고요. 제가 엘프들과 사이가 꽤 좋아보이는데 제온이 사용하는 힘까지 얻은 것으로 보여진다 하면, 이미 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의심하고 있으니 제온에 대해서도 알아보려 할 테니까요. 데블란과 제온이 손을 잡았든 말든 상관 없이."
"오랫동안 숨길 수는 없을 텐데."
"네. 그렇다고는 해도 정보를 모으는 기간이 있을 테니 한 두 달 정도는 숨겨질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 사이에 저는 데블란이 절대 생각하지 못할 일을 하나 하면 되니까요."
"무슨 일."
칼리안이 잠시 말을 멈추고 레이븐의 안장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버릇처럼 생각을 정리한 칼리안의 입에서 플란츠가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 나왔다.
"처음에 형님께서 세크리티아에 가겠다 하셨고 제가 말렸죠."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형님께서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사실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
설마 그걸 내가 모를까.
이렇게 생각하는 플란츠의 귀에 다음 말이 계속 들려왔다.
"그런데 제가 친 덫으로는 뱀 못잡아요."
얘기한 것처럼, 칼리안은 뱀의 새끼였으니까.
"대신 제가 생각 못한 건 데블란도 생각 못 합니다."
"······ 그래서."
"형님. 구운 대구, 혹시 정말로 드셔 볼 생각 있습니까."
플란츠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 궁에 돌아가면 절대로 나가지 못하게 할 르메인을 또 어떻게 잘 '설득'해야 할지, 이번에는 다른 옷을 좀 챙겨야 되겠는데 무슨 옷을 얼마나 챙겨야 할지, 루시와 안네는 또 두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든 탓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먼 곳까지 같이 가야 할 하얀 말의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