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장.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4)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여러 해에 걸쳐 어느새 몸에 밴 시종으로서의 습관은 하나 뿐인 동생을 앞에 두고도 쉬이 버려지지 않았다.
"색 예쁘네. 향도 좋고."
차를 마신 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뻔하다. 차가 정말 좋거나 그다지 할 만한 말이 없거나, 아니면 할 말을 꺼내기가 어렵거나.
"달맞이꽃입니다."
낮에는 아끼듯 접어 두었던 꽃잎을 달빛 아래 피워내는 꽃. 샛노란 그 작은 꽃으로 만든 차라는 설명에도 얀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미 알고 있던 탓이다.
칼리안이 워낙 차를 즐겨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차를 준비하는 얀이 아니던가. 독차를 물린 이후부터 칼리안의 차는 무조건 얀이 손수 준비해왔으니 말이다.
고상하게 차를 즐기게 된 이유가 그 좋아하던 술을 끊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말리고 물을 부어 마실 수 있는 모든 꽃과 과일은 얀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잘 들어 있었다.
"그나저나 꽃이 든 차는 오랜만이다. 왕자님께서 차를 즐기시기는 하는데 요즘에는 꽃차를 멀리하시거든. 민트를 워낙 좋아하시기도 하고."
이제 드미레아는 확신했다.
얀이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고 왔으리라는 것을.
"칼리안 왕자님께서는 아직 연락 없으십니까."
그래서 그냥 먼저 운을 떼 줬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글동글한 청회색 눈에 시름이 한가득 들어앉았다.
"레아. 왕자님이 나 까먹으셨나봐."
"오라버니 말고 엘프들 생명을 까먹고 계실 것 같은데."
"플란츠 왕자님은 레릭에게 다 말했다는데 우리 왕자님은 그냥 도망가셨어. 확인해보니까 금고 속에서 돈까지 꺼내들고 가셨는데 나한테는 말을 안하셨어."
방금 전에 드미레아가 한 말은 안 들린 것이 분명하다.
내 정혼자가 집을 나갔는데 집 나간 내 정혼자를 내가 아니라 내 오빠가 걱정하느라 잠 못 이루고 있는 이 상황을 담담하게 잘 받아들인 드미레아가 차를 마셨다.
그 뒤에는 얀이 가져다 준 카라멜을 몇 개 쯤 집어 먹었다.
그렇게, 우리 꽃같은 왕자님이 어디 한 군데 긁혀 오시기라도 하면 나는 어쩌나, 혹시라도 그 여린 마음에 어디서 험한 말이라도 듣고 오시면 나는 어쩌나 해 가며 한참동안 우는 소리를 하던 새끼 코끼리가 좀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무탈히 오실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어디 한 군데가 긁히든 어디서 험한 말을 듣고 오든 상관 없이 오라버니는 그냥 그 상대방을 위한 안네루시아만 준비하면 된다는 말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적당히 안심만 좀 시켜 준 뒤 계속 카라멜만 집어먹었다.
입이라도 달아야 귀가 덜 쓰지 싶어서였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런 식으로 나가서 옆구리를 찢어먹고 오든 배에 구멍을 내고 오든 했었으니 저렇게 걱정을 하는 것도 이해가 영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너한테 얘기하고 나니 좀 낫네."
드디어 걱정하기를 끝마친 얀이 이런 소리로 말을 맺었다.
"기사 베른 경이나 2왕자님의 시종에게는 그런 말씀 안하셨습니까."
"이제 더 안 들어주려고 하더라."
"······ 아."
얀의 저 걱정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하는 생각에 드미레아가 작게 실소했다.
"아, 레아. 그런데 왕자님 얘기만 하려고 온 건 아니야."
이 말에 드미레아가 얀을 쳐다봤고 얀이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드미레아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들고 펼친 드미레아의 눈에, 펜을 든 이를 쉬이 떠올리기 힘들 만큼 우아한 글씨가 보였다.
- 사랑하는 우리 소공작에게.
슬레이만의 편지였다.
맨 윗줄을 보자마자 곧바로 편지를 다시 접은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이것을 왕궁으로 보내셨다고요."
"왕궁은 아니고 마나실 후작저로 보내셨어. 답장 꼭 달라시던데."
"차라리 제가 행보를 바꾼 것을 물으시면 무어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드미레아가 한숨을 쉬었다.
"칼리안 왕자님을 돕기로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으시면서 다른 것을 궁금해하시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슬레이만은 에반과 얽힌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수도에서의 일을 맡긴 순간 수도에서 해야 할 모든 처신에 대해서도 전부 다 넘긴 셈이었던데다 아직까지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옹립하겠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취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두었다.
- 우리 집안에 딸이 하나 생겼다던데 내가 도통 기억이 안 나는구나.
대신, 집요하리만치 리리에를 궁금해했다.
리리에가 어느 집안의 핏줄인지 알 텐데 그것을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했다. 언제 데리고 와서 보여줄 거냐, 그 애는 내 딸이냐 네 딸이냐, 내 딸이면 멍멍이 얀의 동생이 되는데 그건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어찌 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내가 요즘 잠을 못 잔다. 그런데 필요한 건 없느냐, 옷을 보내줄까, 쿠키를 보내줄까, 선생을 보내줄까, 등등.
"레아."
"네."
이번에도 똑같은 내용이 적힌 편지를 다시 대충 훑어보는 드미레아를 부른 얀이 드미레아의 눈과 편지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저택의 집사도, 기사 유란과 로난시테도, 아르센도, 모두 다 리리에에 대한 일을 걱정해왔다. 때문에 얀 역시 같은 말을 할까 생각한 드미레아가 지친 표정을 한 채 얀을 쳐다봤다.
"고마워."
하지만 얀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것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어린아이 챙겨주는 사람으로 잘 커줘서 고마워. 나는 그냥 계속 여기에 있었는데."
잠시 칼리안의 입장을 뒤로 한 채 그냥 지그프리드의 장자로,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동생이었던 드미레아의 오빠로서 그냥 고맙다는 말만 했다.
드미레아가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리에는 아버지 딸 아니고 그냥 내 동생 삼을 거니까 걱정 안하셔도 된다. 호두랑 아몬드 쿠키 좋아하니까 그것이나 좀 보내시라'는 내용의 답장을 쓰기로 했다.
* * *
단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걸어왔던 길.
- 이제는 먼 언젠가의 이야기일 뿐이니.
정작 누군가에게는 미뤄두며 살라 하였으면서 스스로는 일순간도 잊지 않고 되새겨온 길.
그 길을 고스란히 만들어 눈앞에 보여준, 그리고 미처 보지 못했던 모습 하나를 더해준 어머니 나무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의 입에 고요한 미소가 그려졌다. 다른 건 다 이해해도 엘프들은 역시 이해를 못 하겠어서 그냥 웃었다.
"걱정을 해주려면 곱게 해 줄 것이지······."
하늘에 떠 있던 붉은 보석 가루가 흔들렸다.
모닥불 불티처럼 붉은 불꽃이 되어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제껏 칼리안이 걸어온 저 먼 길 끝에서도 불티가 날렸다. 모두 다 태워 없애듯 저 멀리서부터 조금씩, 하지만 멈추지 않고 모두 다 작은 불꽃이 되어 하늘을 향했다.
언젠가의 베른이.
언젠가의 칼리안이.
잊지 못하던 아픈 것들이 다 그렇게 하나씩 떠올랐다.
멀리 세워진 첨탑을 다시 바라봤다.
그곳에 올라가볼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앞에 선 이의 연두색 눈을 바라봤다.
잠시 말을 건네볼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그들 역시 언젠가의 이야기였으니 이제는 그냥 두어야 함을 알아서 그리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무엇보다 커다란 불꽃들이 첨탑에서 그리고 눈 앞에서 고요하게 떠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잊혀야 할 이의 남은 기억에 올려진 시나스타를 쓸어내린다.
"고생······ 많았어."
이제는 사라진 이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루만진다.
"수고했어. 잘 버텼어. 이제 다 괜찮아."
그것이 비록 참극이었다 하더라도.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들이 차마 종결짓지 못한 마지막 장이었다 하더라도.
끝내 불행하지만은 않았기에 잘 살았노라고.
"베른."
위로를 보냈다.
불꽃은 별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별을 남겼다.
* * *
우려했던 폭발도 없었고 칼부림도 없었다.
대신 예상하지 못했던 소식이 전해졌다.
"나갔다니."
"도시 밖, 숲으로 나가셨다고 합니다. 방금 전에요."
플란츠가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엘프 옆에 붙어 있어."
이 말을 들은 니들렌이 '부군단장님께서 칼리안 왕자님 찾아 오실 때까지 대원들 데리고 힐 경 곁에서 잘 놀고 있으라는 말인지'를 물으려는데 플란츠가 저벅저벅 걸어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니들렌은 자신이 생각한 의미가 맞겠거니 하고 알아서 대원들을 잘 통솔하기 시작했다. 같이 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탄산수 마시면서.
아무튼 이런 발칸을 떼어 놓은 플란츠가 자신의 말에 올랐다. 그리고 칼리안이 향했다는 숲 쪽으로 따라 나섰다.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 콰아앙!
굉음이 울리는 곳으로 향하면 될 일이니까.
엘프 도시의 경계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울창한 숲 속에 들어서게 된 플란츠가 조금 낮아진 기온에 잠시 적응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칼리안이 간 방향을 가늠해보는데 무언가를 강하게 내리치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큰 소리에도 크게 놀라는 것 없이 귀를 쫑긋 세우는 자신의 말을 툭툭 두드린 플란츠가 소리 난 방향으로 다가갔다.
아마도 지난 번에 무지개를 보았던 폭포로 이어지는 물길이 아닐까 생각되는 계곡이 있었고 물가의 바위 위에 칼리안이 앉아 있었다.
"또 왜."
모래사장에 하도 많이 앉아 본 탓인지 이제 큰 바위 쯤은 그냥 의자로 보이는 지경이 된 플란츠가 칼리안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앉으며 물었다.
"오셨습니까."
칼리안은 놀라지도 않았다.
올 것을 알았던 것처럼, 혹은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시 확인해 볼 것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멀찍이 흩어진 바위 파편들을 슬쩍 쳐다 본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확인이 아니라 화풀이 같은데."
"저 그렇게 폭력적인 버릇 있는 사람 아니에요."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흘러내려가는 물줄기를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시스파니안의 뜻을 헤아리는 것도 어려웠는데 어머니 나무는 더 하네요."
"뭐라고 했는데, 또."
"걱정되십니까."
"아니."
곧바로 나온 대답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글생글 웃었다.
"우선 대장로와는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더 이상 세크리티아 쪽으로 이주하겠다는 내용으로 우는 소리 안 하기로 했고, 치료를 받고 싶으면 대장로가 있는 곳으로 직접 오라는 서신을 데블란 쪽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답신이 오면 알려주겠다 했으니 일단은 왕궁으로 돌아가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플란츠가 잠시 칼리안을 쳐다봤다.
세크리티아 국왕이라는 호칭이 조금 바뀐 탓임을 모르지 않았으나 칼리안은 그냥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어머니 나무가 브리지트 숲 쪽으로 숲의 길을 열지 않았다 들었는데 그건 어쩐지 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숲의 길을 열지 않아야 그 일을 두고 데블란이 엘프들에게 협상을 요구하고, 결과적으로 제가 이곳까지 오게 되니까요. 특별히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어서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인과 관계를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퐁당, 하고.
작은 오러 덩어리 하나가 계곡 물 속으로 들어갔다.
칼리안 쪽에 두고 있던 시선을 돌리지 않은 탓에 그 모습을 보지는 못한 플란츠의 귀에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만에 하나 데블란이 그 숲에 문제를 일으키면, 늦지 않게 숲의 길을 열어서 그 곳의 거주자들을 피신시켜달라 했고 그렇게 하겠다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쪽 숲이 저한테는 조금 신경이 쓰이는 곳이라서 오지랖을 부렸어요."
"그래."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말을 이을 것 같던 칼리안이 입을 다물고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 우웅!
낮은 울림 소리와 함께 그 손 위에 작은 오러의 검이 하나 만들어졌고, 그것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닭 먹는 엘프 말이 틀리진 않았나보군."
많은 것을 꿰뚫어본다던 어머니 나무가 칼리안의 속을 좀 들여다 본 모양이다.
더 이상 불쾌함을 느끼지 못할, 죽음 아닌 다른 것이 생각나는 투명한 붉은 빛의 검이 눈 앞에 띄워져 있었다.
"그래."
무엇을 떨쳐내서 다시 저런 빛이 되었는지 묻지 않은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그 빛을 보다, 칼리안이 검을 다시 흩어낸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왔나."
오러가 변한 것을 확인하려고.
"아뇨. 이건 덤으로 알게 된 일이었습니다. 다른 것을 좀 확인해보려 하다가요."
"무슨 확인."
칼리안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엘프의 숲과 연결된 곳 쪽을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엘프들은 도움 받은 것에 대해서는 꽤 철저하게 계산을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오지랖이라 해도 엘프들에게는 도움이라 생각을 했는지. 대가를 주네요."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잠시 허리를 돌려 앉아있던 바위 뒤쪽으로 팔을 내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들어 플란츠에게 내밀었다.
"모두 사라진 자리에 별이 남았기에. 받기로 했습니다."
푸른 빛이 감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린 은빛의 검이 칼리안의 손에 들려 있었다.
불에 타고 남은 별의 잔재를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바꾸어 돌려준 어머니 나무를 잠시 생각하면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형님 쓰세요."
또, 검을 주겠단다.
생각지 못한 선물을 손에 든 플란츠의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 시나스타
검은 글씨 위에 저도 모르게 올려진 손가락이 한참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어디 두고 다니지 마시고요. 이번에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부탁 하나를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