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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67화 (268/527)

제47장.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3)

나의 비좁은 세상 속에서 오롯이 나 홀로 미치지 않았다.

지극히, 정말 지극히 객관적인 잣대를 두고 따져본 뒤 내린 결론에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 내기."

"네, 부군단장님. 어제 힐 경이 졌던 그 내기입니다."

"내기에 내 아우님을 걸었다는 건데."

플란츠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변명이다. 그 다음으로 싫어하는 것이 회피다. 그러니 지금 와서 무엇이든 입을 열면 플란츠가 또 해맑게 웃을 것이 뻔해서 발칸의 대원들은 일단 모두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 언제나 괴로운 것은 늘 중간관리자인지라.

한 발 나선 니들렌이 입 다문 대원들의 마음을 플란츠에게 전했다.

"죄송합니다, 부군단장님."

시오나와 발칸 대원들 중에 누가 더 고기 먹는 것을 오래 참을지를 두고 내기를 했었다. 시오나가 지면 대사막의 늑대들이 어떻게 싸우는지를 가르쳐주기로 했단다.

그래. 거기까지는 괜찮다.

시오나가 이겼을 때 칼리안과 시오나의 대련을 부탁해 주겠노라 약속만 안했다면 진짜 괜찮을 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오나가 제안하고 발칸의 대원들이 수락한 내기라지만 어찌됐건 발칸의 대원들이 3왕자인 내 동생을 팔았단다.

소드마스터간의 대련은 쉬이 이뤄지기 어렵다. 실전이 아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이 없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니다. 테일란과 대련했던 슬레이만은 가슴팍이 갈라졌었다.

"여기가 왕궁도 아니고. 책임질 목숨을 마흔 한 개나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내 아우님이 저 닭 잡아먹는 엘프와 다시 대련하려 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그런데 그것을 내기로 건 것이다.

이 일을 칼리안이 알았을 때 보일 반응은 딱 두 가지다.

재밌다고 웃으면서 칼을 들거나 재밌다고 웃으면서 다 죽이려 들거나. 뭐, 결과는 비슷할 거다. 그걸 모를 발칸이 아니다.

"왜 그랬냐고."

"내기에서 누가 이길지가 너무 궁금해서 내기를 받았습니다."

"······ 그런 이유로."

"정말입니다, 부군단장님."

정말이라고 말 안해도 그게 정말이라는 것을 알아서 내가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정신 나갔지."

이 말을 들은 니들렌이 살짝 웃었다.

다 미쳤다.

마법사들 미친 것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기사들까지 물이 들었다.

미친놈들 한 가운데에 홀로 우뚝 선 플란츠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렸다. 바로 어제 인내심 세 번을 한꺼번에 쓴 것을 기억한 덕에 오늘은 일단 넘겼다. 발칸 놈들은 원래 저런 놈들임을 알았기 때문에 인내심 한 번을 쓸 것도 없이 그냥 넘겼다.

- 저런. 그새 들켰습니까. 어쩌다가.

잊는 것도 모르는 똑똑한 머릿속에 자꾸 얍이니 슉이니 하는 말이 떠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해가며 정말 힘들게 마력 불어넣기를 성공했다. 그랬더니 통신 연결이 잘 되는지 확인차 연락을 했었다던 새 좋아하는 보라색 눈 왕세자가 저딴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되어서, 아침부터 안그래도 이미 인내심 한 번을 썼다.

- 조금 더 조심을 했다면 좋았을텐데요. 플란츠 왕자.

아니.

두 번을 썼다.

"여하간 너무 화내지는 말지. 어쨌든 내가 졌으니 상관 없지 않겠나. 그나저나 네 동생과 대원들이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나보군.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네 동생을 팔기에 퍽 친한 줄 알았더니."

체이스의 말을 떠올리고 있던 중 닭 잡아먹는 엘프가 옆에서 전해 온 말에, 저도 모르게 인내심 한 번이 더 깎인 플란츠의 눈매가 바뀌었다.

"체력단련하러 가자!"

어제 보았던 웃음을 또 본 니들렌이 재빨리 말했고 너나 할 것 없이 모래사장이 있는 곳을 향해 후다닥 뛰어나갔다. 플란츠가 저럴 땐 먼저 나가서 매를 맞는 것이 제일 낫다는 것을 다들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래지 않아 어제는 세 명이 달리던 모래사장에서 새하얀 옷 입은 마흔 명의 군인들이 달리기를 시작했다.

멀찍이서 그 훈훈한 모습을 보던 시오나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혹시 나도 뛰어야 하나."

"······ 시끄러."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한 플란츠가 제자리에 선 채 발칸의 대원들을 지켜봤다. 그러다 무언가 궁금한 것이 생겼다는 듯 플란츠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는 너도 같이 뛰었다더니 오늘은 가지 않는군."

"내 아우님이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몰라서."

"무슨 짓을 저지른다니?"

칼리안이 혼자 어머니 나무를 만나러 갔다.

"칼부림. 폭발."

어머니 나무도 결국은 엘프 아닌가.

칼리안 속을 어떻게 긁어놓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칼리안이 어머니 나무 속을 어떻게 부숴버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발칸 대원들에게 벌을 주면서도 같이 뛰지는 않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 아. 그래."

놀랍게도 플란츠의 말을 이해한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멀리서 열심히 달리고 있는 이들을 똑같이 쳐다보며 말했다.

"사고방식의 차이다. 인간들은 살아가지만 엘프들은 생존해야 하니까. 네 동생이 겪었다던 그 장로같이 어긋난 놈들도 있지만 대부분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인간들에게는 그것이 이기적인 모습으로 보이겠지."

이 말을 들은 플란츠가 시오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료 못받아서 화내지 않았던가."

"아는 것과 이해하는 건 다른 문제 아닌가."

엘프의 이기심을 이해한다는 듯 말해놓고 결국 칼리안을 만나 화풀이를 했던 엘프가 멋쩍게 웃었다.

"닭 먹는 엘프."

그리고 플란츠가 이렇게 시오나를 불렀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시오나가 자신을 가리켜보이며 대답했다.

"나 말인가?"

"또 있나."

"시오나 힐."

"알아."

"어, 그래. 다행이군."

풀 잘 먹고 콩도 먹는다지만 그래서 저런 성격인 건 아닌 것 같은 이상한 왕자가 입을 열었다.

"만나본 적 있나."

"누구를?"

"너희들의 어머니."

"아니. 없는데."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 더 궁금한 것도 없다는 뜻이었으나 시오나가 굳이 입을 열어 설명을 더했다.

"간혹 정령이 깨어난다는 시간에 태어나는 엘프들이 있다. 그런 엘프들은 어머니 나무를 직접 만나 긴 이름을 받는다 하더군.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엘프들은 장로 정도가 된다면 모를까 사는 동안 어머니 나무를 만날 일이 없지."

"그래."

"듣기로 어머니 나무는 많은 것을 꿰뚫어보고 계신다 하니 네가 걱정할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 모를텐데."

그 놈 속을 온전히 알아볼 이가 있기는 할까.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한 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대원들 그만 뛰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무슨 일 생길지 몰라 대기중이면 체력도 아껴둬야지."

"그 정도는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가 알아서 해."

그 웃긴 호칭을 들은 시오나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사람을 왜 그렇게 부르는지 물어봐도 되나."

"분홍 머리 마법사가 둘이라서."

"이름이 있는데, 왜 굳이."

다른 이들은 차마 묻지 못했고 칼리안은 물어 볼 필요가 없던 질문을 시오나가 했다. 아마 대원들이 근처에 있었다면 귀를 쫑긋 세웠겠으나 애석하게도 놈들은 아직 달리는 중이었다.

"이름으로만 기억하면 잊어버릴까봐."

칼리안이 만든 것들을 혹시 다 잊어버릴까봐.

"음."

우리 부군단장님 머리가 얼마나 좋으시냐면요, 하는 이야기를 지난 며칠동안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어왔던 시오나가 입술을 다물고 잠시 고민을 했다. 그리고 플란츠의 대답이 단순한 기억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뭔 말인지 이해는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네 동생은 이름으로 부르던데."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나 더 했다.

하늘도 보고, 바다 냄새도 맡고, 바람도 느끼며 주변을 둘러 본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 안 잊어버릴 걸 알아서."

루시도 안네도, 히나도.

그리고 동생 한 명도.

* * *

나의 드넓은 세상 속에서 오롯이 나 홀로 미쳐갔다.

칼리안이 눈을 내리뜨며 긴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차오르는 기억 속에 다시 숨이 차서 한참동안 숨을 골랐다.

"취미가······ 좋지 않은데."

기댈 곳 없는 광막한 대지 위에 서 있었다.

그런 곳에 서서 오로지 숨을 쉬는 것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이 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상태가 됐다.

- 어머니 나무의 본신이라기에 가장 높은 곳에 있을 줄 알았더니. 의외네.

- 생명의 근간은 뿌리에 있는 법이 아니겠나.

지하가 있을 줄은 몰랐다.

어머니 나무를 만난다 하기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장로의 공간보다 더 높은 어딘가로 가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땅 속으로 들어왔다.

검고, 어둡고, 포근한 공간.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으나 답답하지 않았다. 대장로 나르잔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익숙한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만약 이곳부터 혼자 어머니 나무를 찾아가라 하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고, 이곳에서 당장 나가려 한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신기한데.

- 어머니 나무의 부름을 그런 식으로 거절한 것이 나는 더 신기하군.

- 한 밤에 대뜸 나오라고 하는 게 잘못된 거지.

- 그대들은 정말 무례한 족속이네.

- 너희들은 정말 이기적인 족속이고.

검고 어둡고 포근한 그 분위기에 짓눌려 입을 다물 줄 알았는데 칼리안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결국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칼리안의 말에 나르잔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 세크리티아 국왕이 정말 이 곳에 올 것이라 생각하나.

- 절박함과 의심 중에 어떤 것이 이기는지에 따라 다르겠지. 세크리티아 국왕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너희들은 시간을 버는 거니까 나쁘지 않은 일인 것 같은데.

- 틀린 말은 아니다만.

- 물론 제일 좋은 선택지는 세크리티아에서 브리지트 숲을 다 태워버리기 전에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을 빼내는 것이겠지만. 숲의 길을 열면 도망쳐 나올 수 있을 텐데 왜 안 열어?

-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 이미 어머니 나무에게 얘기를 해봤다는 소리야?

- 가장 먼저 한 일이 그것이었지.

칼리안의 일행을 위해 숲의 길을 열어주었던 어머니 나무가 동족의 살 길을 막았다 했다. 그 역시 이유가 있으리라 믿는 나르잔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나르잔의 발이 멈춘 것이 느껴졌다.

- 남은 이야기는 돌아온 뒤에 하지.

이런 말과 함께 나르잔의 기척이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르잔이 사라졌다기 보다는 칼리안이 다른 어딘가로 이끌렸다 해야 맞을 터였다. 언젠가 시스파니안이 머물던 언덕에 발을 디뎠던 그 때처럼.

다만 그 때와 다른 점은.

"내 생이 궁금했으면 물어보지 그랬어."

아무도 없는 곳에 선 채로 칼리안이 이렇게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살아있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 서 있었다 해야 맞을 것이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붉은 별이 가득했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에 붉은빛의 별이 떠 있었다.

다만 그것이 별이 아님을 안다. 작게 부수어 조각낸 여러 붉은 빛의 보석 가루임을 안다.

그래.

만화경이다.

붉은 별이 반짝이는 곳에서 시선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 본 칼리안의 입에서 바람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굳이 보여 줄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잊지 않고 살았던 것들.

잊어버릴 생각조차 없던 모습들.

언젠가 푸른 별이 내리던 밤에 칼리안의 손 끝에서 생을 다한 이가 보였다.

뚜벅, 뚜벅.

숨을 삼킨 칼리안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하나, 둘, 누구 하나 잊지 않은 이들의 시신을 지나쳐 계속 걸었다. 참 많은 이들을 지나쳐 걸었다. 귀족들이 보였다.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의 가신들이 보였다.

어린 아이가 보였고 노인이 보였다.

그 하나하나를 전부 다 똑바로 마주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걸었다.

에일라가 보였다.

키리에가 보였다.

타오르는 세크레타가 보였다. 왕궁이 보였다. 무리지어 서 있는 새하얀 옷의 마법사들이 보였다. 케인이 보인다. 니들렌이 보인다.

- 너의 생이 지켜낸.

아르센이 보인다.

산산이 부서지는 새하얀 검이 보인다.

한 팔을 잃은 채 저무는 이의 긴 청은발이 보인다.

- 참극을 보라.

칼리안의 발이 느려졌다.

칼리안의 발이 멈췄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지 못할, 성별도 나이도 느껴지지 않을 목소리의 끝을 되뇌면서 허리를 숙였다. 다리를 굽혔다. 입고 있던 정복의 붉은 망토가 바닥에 닿는다.

평생 단 하나를 지키려 하였으나 결국 지키지 못한 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과 너무 닮은 누군가가 서 있을 첨탑을 향해 고개 돌린 채 눈 감은 이를 어루만졌다. 손 끝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참극이었나."

재우듯 달래주듯 한참을 그저 어루만졌다.

누군가 다가온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 눈 속에 생명이라고는 조금도 담지 않은, 빛 없는 연두색 눈동자가 눈에 보였다. 그 눈을 바라봤다. 하염없이 바라봤다. 저 사람을 나는 누구로 보아야 하는가. 그것을 알지 못해서.

생명 없는 이가 생명 잃은 이를 향해 걷는다.

손에 들린 검을 내려놓는다.

잿빛 검신에 적힌 검은색의 이름이 보인다. 붉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크게 일렁였다. 거세게 몰아쳤다.

아.

그날 왔었구나.

나를 봤었구나.

"하여튼 미련한 완두콩."

하여튼.

하여튼 미련한 형님 같으니.

전장에서 검을 버리면 어찌하려고.

고작 그 한 마디를 잊지 못해서.

칼리안의 입에 긴 웃음이 걸렸다.

홀로 미치지 못한 사람과 홀로 미쳐간 사람이 살아간 날. 그 눈물겨운 참극의 일면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보게 되어서.

"······ 올려주셨네."

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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