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장.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2)
붉은색이 세상에 내려앉는 시간.
온 사방에 가득한 석양 빛에 물든 체이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왕성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무탈히 다녀오신 듯 보여 마음이 놓입니다."
"내가 괜한 고집을 부려서 세자의 걱정을 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반겨하는 체이스의 말에 대답을 전한 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검은 실크 드레스의 긴 소매 끝이 살며시 흔들린다. 체이스가 그 손을 마주 잡아 안으로 이끌자, 검은색의 레이스와 꽃 장식이 더해진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곧 두 사람은 따르던 이들을 멀찍이 물리고 왕궁까지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넓게 꾸며진 화원에서 풍겨오는 향기와 아름다운 분수에서 들려오는 물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대신하고 있었다.
"마음은 조금 나아지셨습니까."
향기로운 바람인듯, 혹은 흘러내리는 물줄기인듯. 이 순간의 고요함을 담은 체이스의 목소리. 그런 소리가 실어온 물음에, 머리 장식과 이어진 검은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하늘색 눈이 바닥을 향했다.
"나아졌다 해야 할지, 더 깊어졌다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그 말과 함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체이스가 고개를 돌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전히 그렇게 그리우십니까."
"이 왕궁에 마음 터놓을 이라고는 한 분 뿐이었던 것을요. 그리 갑자기 떠나셨으니 몇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나는 이렇게나 생각이 납니다."
"어머님께서는 좋아하셨을 겁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잊지 않고 계시니 말입니다."
사망한 왕비 디에나의 무덤이 있는 곳에 마련된 별장에서 한 달을 보내고 온 후궁 루이즈가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체이스가 맞잡고 있던 루이즈의 손을 풀어 자신의 팔 위에 얹었다. 그렇게 조금 더 어머니를 가깝게 당긴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떠난 분에게 있어 기억해주는 이가 있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베른의 어머니 왕비 디에나.
그리고 체이스의 어머니 후궁 루이즈.
과거, 베른과 체이스에게 있어 둘은 똑같은 어머니였다. 둘에게 있어 형제는 똑같은 아들이었다. 두 어머니는 형제 사이가 왕위로 인해 틀어지지 않도록 키웠고 형제는 그 뜻대로 자랐다. 디에나가 죽기 전 루이즈에게 베른을 부탁했을 만큼 서로의 친분과 신뢰도 깊었다.
이번 생에서는 베른이 없었으나 둘의 관계는 같았다. 베른 대신 체이스 하나만 아들로 두었던 디에나가 사망한 뒤, 루이즈는 때때로 이렇게 디에나 곁의 별장에 다녀오곤 했다.
"그러니 어머님께서도 분명 기뻐하셨을 겁니다."
"부디 전해진다면 좋겠습니다."
체이스의 청은발이 그러하듯 루이즈의 백금발도 석양 빛에 붉게 물들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머리카락과 검은 드레스를 말 없이 바라보던 체이스를 향해 루이즈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에 린 후작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다기에는 생각 외로 왕궁이 조용하군요. 혹여 내가 잘못된 말을 들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체포된 것이 맞습니다. 소란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주어 그렇습니다."
"고된 일은 겪지 않도록 신경을 써 주세요. 아리안느의 걱정이 클까 우려되니."
"그리 하겠습니다."
대화가 오간 뒤 잠시 발을 멈춘 루이즈가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팔짱을 끼고 있던 체이스도 자연스레 함께 그 길을 따랐다.
태양의 색을 담은 붉은 베고니아가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었다. 체이스의 팔에 얹어두었던 손을 빼고 무릎을 굽힌 루이즈가, 꽃무리 위를 손으로 쓸어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여전하십니까."
한동안 말 없던 체이스가 눈을 내리뜨며 대답했다.
"네. 여전합니다. 병세의 차도도 없고 진전도 없습니다."
"지난 번에는 세자가 보낸 약을 물리셨다 들었습니다. 이번에 왕궁을 떠나기 전에는 내가 늘 준비해드리던 수면향도 더는 올리지 말라 하셨는데······. 병환이 그대로라면 이제는 주위를 더 못미더워 하시겠군요."
"그러니 이제 되도록 독대는 피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도 더 이상 좋은 모습만 보이시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루이즈가 조금 더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꽃을 향한 시선과 손길을 그대로 둔 채였다.
"린 후작이 잡혔다면 텐실의 치유사가 찾아올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네. 전하께서 그 쪽의 일에 가장 먼저 손을 대려 하실 테니까요."
체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이즈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 역시 치유사들이 들어오려는 것을 암암리에 방해하던 일을 중단할 생각입니다."
"치유사를 왕궁에 들이겠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어머니. 명확한 입장을 보이고 귀족들의 앞에서 공론화시킬 생각입니다. 전하께서 왜 계속 텐실의 치유사를 세크리티아의 영토에 들이려 하는지, 모든 귀족이 있는 곳에서 묻고 답을 요구할까 합니다."
루이즈의 손이 잠시 멈췄다.
"······ 그러지 말아요."
몸을 일으켜 세운 루이즈가 체이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물 위로 꺼내려다 세자가 다칠까 우려됩니다."
"그래야 귀족들도 알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건강 상태와 전하께서 저를 아들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모두가 아는 일입니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귀로 전해듣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다릅니다. 소문으로만 들려오던 일들을 확신하게 되어야 귀족들도 고개를 들 겁니다."
루이즈가 가만히 손을 뻗어 체이스의 뺨에 가져다 댔다.
한동안 그렇게 체이스의 찬 얼굴을 따스하게 매만지던 루이즈가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체이스의 손을 다시 잡으며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꺼냈다.
"이 왕궁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 내 어머니와 동생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왕비님도 세상을 등지셨으니 이제 남은 내 가족은 세자 뿐입니다."
"······ 알고 있습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체이스가 조용히 팔을 뻗어 루이즈를 꼭 안았다. 그리고 작은 등을 천천히 토닥이면서 대답을 전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베고니아 향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 * *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능했다.
속내를 완전히 꿰뚫어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생각을 파악하고 다루는 것을 잘했다. 찍어 눌러야 할 상대인지 아니면 존중하거나 배려해야 할 상대인지에 따라 말하는 방법도, 표정과 눈빛도, 목소리도,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다.
칼리안은 늘 그랬다.
누구를 앞에 두었든 상관없이 항상 여유를 잃지 않았다.
"별 것 없습니다."
가끔 그 여유를 완전히 까먹게 만드는 파릇파릇한 한 명이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그 한 명을 앞에 두고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마법을 쓸 때에는 얍 하면 슉 하고 발현되고요."
쏟아질 듯 모여있는 푸른 은빛의 별무리를 올려다보던 칼리안이 유난히 느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마력을 불어넣을 때에는 얍 하면 슝 하고 들어갑니다."
"······ 야."
너 이 내 동생 새끼야.
이것과 같은 뜻의 한 글자를 입에 담은 플란츠가 대답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칼리안을 내려다봤다.
"형님 또 뭐하시려는 건데요."
"어차피 눈치 챘으면 그냥 가르쳐달라고 하는 거잖아."
"형님."
"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플란츠의 손목 언저리를 가리켜보였다.
"눈치를 챈 건 챈 거고 직접 설명을 좀 해주십사 말씀드리는 것 아닙니까. 그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게 왜 형님 손목에도 있는지."
"반말."
"뭡니까, 그거."
"말버릇."
"대답. 이요, 형님."
걸렸다.
아이고 여기 왕자님이신 부군단장님이 사람 잡는다 하는 얼굴로 더는 못 달리겠다 드러누운 두 마법사를 결국 더 어쩌지 못하고, 됐으니 가서 놀아라 했다. 그 뒤에는 먼저 돌아가려 발을 옮겼다.
점심나절에 먹은 육포가 뱃속에서 불어 터져서 저녁은 그냥 건너뛰고 모래사장에 한가로이 앉아있던 동생 곁을 지나쳐 갈 때.
그래. 그 때. 딱 그 때. 하필 그 때.
소매 속에 숨겨 두었던 팔찌가 빛을 발했다. 체이스가 말을 건 것이다. 하필, 딱, 그 때.
마나의 흐름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칼리안의 눈에 참으로 익숙한 빛이 플란츠의 소매 밖으로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걸렸다.
"밖으로 나오니 더는 답답해하지 않으시는 것까지는 이해했는데 소매 걷던 버릇까지 고치신 것이 신기하다 생각했더니."
자신의 목 언저리에 잘 채워진 셔츠 단추를 톡 건드려보인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건 다른 이유가 있었네요."
팔찌를 맴돌던 빛이 금세 사라졌다.
다급한 연락이 아니라는 소리다. 플란츠가 곧바로 답을 하지 않으니 연락 보내기를 멈췄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지금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설명을 요구하고는 있다지만 어차피 저 팔찌와 연결된 반지를 누가 가지고 있을지 뻔한 일이 아닌가. 애초에 급한 일이었다면 플란츠가 아닌 칼리안에게 연락을 취했을 사람임을 칼리안이 안다.
그래서 칼리안은 느긋하게 플란츠를 상대하고 있었다.
"마나 모으는 것은 이제 조금씩 하고 계시니까 직접 해보시면 되겠네요. 방법은 알려드렸으니까요."
얍 하면 슝, 하고요.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칼리안을 향해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짖지 말고."
"대체 이건 언제 만드셨어요. 여기로 출발하던 날에 보내신 겁니까."
아무튼 들키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저 놈이나 저 놈의 옛날 형님 덕분에 나까지 들켰다. 짜증 가득한 얼굴이 된 플란츠가 칼리안의 말을 무시하며 한 발을 옮겼다.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한테 옆 나라 왕세자와 연락 취할 테니 마력 넣는 방법 알려달라 하면 참 좋은 말 나오겠군."
"형님."
"왜."
분홍 머리 마법사가 소금 넣은 것을 먹든 말든.
그건 모르겠고 일단 니들렌이 그걸 알면 안 될 것 같다. 때문에 플란츠를 불러세운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알려드릴게요."
져주는거다.
지는 거 아니고 져주는거다. 도와주겠다고 했고 도와달라고도 했었으니까 내가 져주는거다.
"대신 세크리티아의 일에 대해 저한테 숨기는 것은 없었으면 하는데, 어려우시겠습니까."
"······ 알았어."
곧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맞은편을 가리켜보였고 플란츠가 그 곳에 앉았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한 칼리안이 플란츠의 팔찌에 손 끝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플란츠가 궁금해했던 것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언젠가 느낀 것처럼 따스한 바람같은 칼리안의 마력이 플란츠의 팔 주변을 감쌌다. 마력을 모아 둔 곳에서부터 어떻게 마력을 이동시켜 물건에 힘을 불어넣는지, 말을 이어가는 순서에 따라 칼리안의 마력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동안 이어진 설명을 마친 칼리안이 손을 떼며 말을 맺었다.
"혼자 하기 어려우시면 얘기해주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알았어."
이렇게 대답한 플란츠가 잠시 칼리안의 눈을 들여다보다 입을 열었다.
"검을 쓸 때와 다른데. 같은 마력이라며."
플란츠의 눈이 칼리안의 손 끝을 향했다.
의미를 이해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같은 마력으로 마법도 쓰고 오러도 쓰는데 기운이 조금 다릅니다. 아마 마법과 오러를 배울 때의 제가 서로 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정확히는 저도 모르겠네요."
옛칼리안의 마법.
그리고 베른의 오러.
마법을 쓸 때에는 지금의 칼리안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따스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오러는 옛칼리안의 것을 베른의 방식대로 전부 바꾼 탓에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 기운만으로도 이미 냉혹한 칼날과 같았다. 둘의 차이가 극명했다.
"그래."
"마법 배우시는 건 재미있습니까."
문득 칼리안이 이런 질문을 했고 고개를 들어올린 플란츠가 대답했다.
"별로."
"그럼 고양이 털 떼는 마법 말고 다른 것은 더 안 배우실 겁니까."
"안 배워."
"왜 안 배우실 건지 여쭤봐도 됩니까."
"그럴 필요 없어진 것 같아서."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쳐다보다 이내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얼굴이 됐다.
생각이 난 탓이다.
저 파릇파릇한 형님이 마법을 왜 배우겠다 했었는지.
"그럼 검은 계속 배우실 생각이십니까."
"······ 소공작이 그러던데. 검은 무겁다고."
많은 것을 책임지게 하는 무게감.
결국 플란츠를 발붙이게 한 그 무게가 마음에 든다는 소리일 터였다.
이제 칼리안도 땅에 발을 잘 붙인 것 같으니 굳이 배울 필요 없는 마법은 더 관심가지지 않겠지만 검은 계속 배우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네. 그럼 고양이 털 떼는 것까지만 알려드리고 제가 계속 검 가르쳐 드릴게요."
"알았어."
그 어떤 바람이 불어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책임지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푸른 은빛의 만화경 속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빛나는 하늘. 별빛 쏟아지는 어두운 밤.
- 딸랑.
대화도 마치고 가르쳐주는 것도 마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모래사장 끝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숲에서 사냥한 야생 닭고기 혼자 잘 구워먹고 돌아온 시오나가 특유의 가벼운 걸음걸이로 둘에게 다가왔다.
"대장로가 지금 좀 와달라고 하던데."
그러더니 대장로의 말을 칼리안에게 전했다.
하다못해 니들렌이나 기사도 아닌 시오나를 통해서, 안 그래도 내일 다시 만나 협상을 마무리 짓기로 했는데 왜 하필 이 시간에 칼리안을 다시 부르는지.
"지금?"
그런 의문들이 가득한 칼리안의 얼굴을 보며 시오나가 설명을 더했다.
"어머니 나무가 널 보시겠다 했다고."
플란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발칸의 대원이 아닌 '엘프' 시오나가 말을 전해야 했는지를 이해한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나무라서 호기심이 적으신가 했는데. 좀 늦는 거였네."
시스파니안조차 현신하게 만들었던 참 특이한 체질의 왕자가 멀리 보이는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 엘프 아니야."
엘프도 아닐 뿐더러 뒤끝도 있는 사람이라서.
"내일 아침에. 갈게."
시키는대로 안 할 거라고 대답을 했다.
시오나가 재밌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