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65화 (266/527)

제47장. 제가 덫을 좀 잘 놓습니다(1)

투명한 벽 너머로 보이는 짙푸른 바다.

새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 황금빛 가시가 돋은 선인장과 거대한 녹빛의 잎을 가진 나무가 가득한 실내 정원. 그리고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분수.

장담하건대 시스파니안이 바다가 좋다 했으면 하츠아라는 지금 이곳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왕궁을 지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바다까지 영토를 확장시켜서 건국을 했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면 북문에 숲 대신 바다를 하나 만들어 놨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애석하게도 눈을 좋아하셨던 고룡 덕에, 칼리안은 이런 멋진 풍경을 열심히 눈에 담아 놓는 수밖에는 없었다.

"주시니까 먹기는 하는데······."

육포 먹으면서.

"사실 저는 말린 고기보다는 구운 고기 좋아합니다."

여전히 벤치에 앉은 채 육포 조각을 오물오물 씹어 삼킨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그러다 그게 지금 그 많던 육포 한 자리에서 다 처먹은 놈이 할 소리인가 싶어서 결국 한 마디를 했다.

"이번엔 들킬 일 없겠군."

숨길 일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누가 저놈을 하프엘프로 보겠느냐고.

대장로 나르잔이 초대한 오찬에 다녀온지 두 시간도 안 지났다. 대충 봐도 자신의 하루치 식사는 될 법한 육포를 식후 디저트 삼아 먹어치우지만 않았어도 그런 생각은 안했을 거다.

생각한대로 정복은 넉넉한 듯 적당히 잘 맞고 키도 늘 비슷비슷한데 이제 오러도 안 감추면서 도대체 너 먹는 건 다 어디로 가느냐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궁금증을 가까스로 집어넣은 플란츠가 꽤 정상적인 질문을 하나 꺼내들었다.

"프레이야 왕비의 핏줄들은 만나 볼 생각 없는 건가."

프레이야에게 동생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엘프라 했으니 다른 문제가 없었다면 프레이야의 부모 역시 살아 있을 것이 아닌가.

"만나봐야죠. 안 그래도 어디에 있는지 대장로에게 물어볼까 했는데 걱정이 되어서 주저했습니다."

"내 아우님께서 주저하는 법도 아시나."

지금까지 주저함 없이 살았으면 형님 너는 나 바뀐 첫날에 세상에서 없어지셨을텐데요. 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 된 칼리안이 얌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지는 않습니다."

"왜 주저했는데."

"지겹게 들은 얘기 또 들을까봐요. 조금 다를지 몰라도."

붉은 눈. 온전하지 않은 핏줄. 혼혈. 돌연변이.

지긋지긋하게 들은 말의 가짓수만 늘어날 뿐 아무 의미 없는 만남이 될까봐.

"······ 알 수 없지."

"네. 만나기 전에는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죠. 아무튼 세크리티아의 일에서 눈을 뗄 수 있게 되면, 그때 쯤 찾아서 만나 볼까 합니다."

"그래."

대답을 한 뒤 칼리안을 지켜보던 플란츠가 남은 육포가 더 있던가 잠시 생각해보다 입을 열었다.

"제온. 왜 안물어보는데."

남은 거 없다.

다른 생각이나 더 하게 해야지.

"처음 봤을 때보다는 우호적으로 나오고 있다고는 해도 역시 엘프는 엘프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지금 물어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언제."

"그것도 우선 세크리티아 쪽 일 해결한 뒤에요. 제온과 엘프들이 친밀한 관계일 가능성도 있는데, 만약 그런 상황이라 가정했을 때 제가 제온에 관심을 가진 것을 대장로가 알면 세크리티아 일 해결할 때 제대로 돕지 않을 것 같아서요."

칼리안이 이렇게 이야기를 일단락지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플란츠가 잠시 분수 안의 인어 조각상을 봤다. 그러다 생전 처음 보는 식물 쪽으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하얀 솜털같은 잔가시가 가득한 넓은 잎을 손 끝으로 건드려보는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바나나 나무인데 형님 그거 처음 보시죠. 그 솜털 가져다 심으면 바나나 됩니다."

"······ 더 짖으라고 준 육포 아닌데."

안 속았다.

솔직히 잠깐 믿을 뻔 했지만 동생 놈 목소리가 평소와 다른 것 같다 여기다가 책에서 봤던 바나나 나무가 이렇게 안 생겼다는 것을 떠올렸다. 다행이다.

아무튼 거짓말은 진짜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햇빛을 가득 받아 반짝이는 잎을 몇 번 더 쓸어보던 플란츠가,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칼리안을 쳐다봤다.

"거짓말 못하는 건 그런 이유인가."

"아뇨. 원래 못합니다. 하프엘프라서 못하는 것 아니고요. 키리에는 곧잘 합니다."

왜 이렇게 예쁘게 생겼나 했더니 그건 하프엘프라서 그런 게 맞나보다고 말을 하면 당장 꺼지라고 할 게 뻔해서 그냥 집어넣었다. 그런 말 받아줄 사람은 얀과 앨런밖에 없다는 것을 칼리안도 잘 알았으니까.

더불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기 전에는 거짓말도 곧잘 하지 않았었느냐는 말 역시 굳이 꺼내지 않은 칼리안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 레니시타입니다."

광장의 레니시타.

플란츠가 잠시 잎에서 손을 뗐다.

저 많은 선인장 중에 고르고 골라 손을 댄 것이 왜 하필이면 레니시타인지. 소리 없는 한숨을 쉰 칼리안이 짧은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너무 신기하게 보지는 마세요."

사실 마법이 있으니 굳이 레니시타 잎을 깔지 않아도 될 텐데 왕실에서는 계속 그런 방법으로 형을 집행했다. 경고의 의미. 즉, 상징성을 유지하여 사람들의 머릿속에 사형에 대한 경각심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레넌 브리센을 위한 레니시타 잎이 광장에 깔렸다.

레넌을 후려쳤던 그 날처럼 팔이 저린 듯한 기분을 느낀 플란츠가, 잠시 양 주먹을 쥐었다 편 뒤 레니시타 잎에 다시 손을 대며 말했다.

"이것저것 직접 보라며."

작은 웃음소리를 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져다 심어 보세요. 바나나 자라나 안 자라나."

"그만 짖고. 물."

"네."

여전히 플란츠의 말 하나는 참 잘 알아듣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방울 하나를 만들어 레니시타 잎 위에 올려주었다.

주먹만한 물방울이 바닥으로 흘러 떨어지는 대신 순식간에 흡수되며 사라져가는 그 모습이 꼭 모래사장 안으로 스며 없어지던 파도 거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동안 그것을 쳐다보고 있던 플란츠의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세크리티아에도 있나."

"네. 우리와 같은 용도로 쓰지는 않지만 레니시타는 자랍니다. 돌아다녔을 때 봤어요. 지그프리드령 남쪽에서도 아마 자랄 겁니다."

고개를 끄덕여보인 플란츠가 어느새 물을 완전히 흡수한 레니시타 잎을 한 번 더 쓸어내렸다.

"그래."

그런 모습에, 칼리안은 어느새 다 아물어 원래의 흉터만 남은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녹음 가득한 곳에 서 있어도 지지않고 제일 파릇한 연두색을 향해서였다.

머리는 얼마나 좋은지 아직도 가늠이 잘 안되고 정신연령은 아르센과 말싸움 하는 정도에 진짜 나이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다.

그런데 가진 경험은 루시와 안네 수준이다.

그 나이의 베른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차라리 레이븐이 본 것이 더 많을 지경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문득, 왕궁을 벗어난 뒤로 계속 발칸의 제복을 입고 있었던 플란츠가 지금껏 한 번도 재킷을 벗거나 셔츠 단추를 풀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형님 왜 숨막혀 하셨는지 알겠네요."

그래서 흘러나온, 또 뜬금없는 말.

플란츠가 잠시 칼리안을 쳐다보다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참동안 정원을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켜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본 칼리안이 대답했다.

"파인애플입니다. 가운데 있는 꽃이 커지면서 안에서 파인애플 나와요."

"너 또."

"진짜로요. 파인애플 땅에서 자랍니다."

아는 건 아는 대로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오랫동안.

"이건."

"제가 가덴 지방에 갔을 때 봤던 건데 이름이 기억 안나네요. 아무튼 겉은 초록색이고 속은 분홍색인 열매가 열립니다. 처음은 엄청 단데 끝맛이 텁텁해서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사실 열매보다는 줄기가 좀 특이한데, 껍질 벗기면 나오는 하얀 부분을 상처에 올려두면 지혈도 빨리 되고 상처가 곪는 것도 막아줍니다. 그때 술마시고 절벽에서 굴러내려갔다가 눈 떴더니 온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더라고요. 아, 이런 건 배우지 마시고요."

"······ 알아."

"네."

꽤 오랫동안 플란츠는 물어보고 칼리안은 대답을 했다.

* * *

마법사가 열 명, 기사가 서른 명.

그리고 소드마스터 한 명.

누가 이길지 내기를 했다.

물론 싸움 내기는 아니었다.

비슷한 수로 칼리안과 대련을 했을 때 순식간에 발칸 대원들이 다 드러누웠던 것을 니들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먼저 참지 못하고 숲 밖으로 나가 고기를 먹고 올지를 두고 내기를 했다.

"······ 나갔다니."

"점심식사 마련된 테이블 한참 쳐다보다가 잠깐 다녀오겠다며 도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부군단장님."

그리고 시오나가 졌다.

물론 엘프가 맞다.

시오나의 나이는 서른 여덟.

인간 수명의 세 배 정도를 사는 엘프다. 그렇다 해서 정신연령까지 세 배 느리게 자라는 것도 아니고, 청년기의 성장이 가장 느린 까닭인지 몰라도 지금의 외모는 20대 후반 쯤으로 보인다. 아무튼 철이 없을 나이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 나갔단다.

이곳에 온 지 고작 사흘째 되던 날 오후의 일이었다.

"하."

왕궁에서 나온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하루하루가 긴지. 그새 참 많이 자랐을 안네와 여전히 예쁠 루시가 정말 보고싶어진 플란츠가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원들은."

"모두 여기 있습니다. 힐 경 혼자 나갔습니다, 부군단장님."

이 말에 플란츠가 미간의 주름을 하나 더 늘리며 입을 열었다.

"오렌지 머리 마법사 어딨는데."

"오렌지 머리 마법사 말씀이십니까?"

"케인 테스만. 어딨냐고. 여기 지금 서른 아홉 명 밖에 없잖아."

그럴 리가 없다는 눈으로 대원들을 살피던 니들렌의 얼굴이 조금씩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세어 봐도 한 놈이 모자랐다.

"크리스털에 불 지르는 법 알 것 같다면서 방금 전에 나갔습니다, 부군단장님."

그리고 다른 대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 아."

잠시 이마를 짚고 있던 플란츠가 니들렌을 향해 낮은 목소리를 냈다.

"잡아와."

"네, 바로 잡아오겠습니다."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가 재빨리 대답한 뒤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칼리안의 웃음이 또 터졌다.

모래사장 위를 하염없이 뛰고 있는 분홍 머리 마법사와 오렌지 머리 마법사를 보면서 한참을 웃어댔다. 체력단련이라는 명목을 가진 기합이었다.

- 그래도 어머니 나무에 정말 불을 붙일 생각은 아니었다 하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칼리안 왕자.

이 말을 들은 칼리안이 또 웃었다.

플란츠가 해맑게 웃는 모습을 참 오랜만에 봤다. 그게 너무 웃겨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 네. 크리스털 잔을 가지러 나간 정도여서 다행입니다. 외부의 마법사들보다는 제어가 된다지만 무엇이든 당장 확인을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 성격까지는 붙들기가 쉽지 않네요.

- 왕궁 밖에서 마법사들을 그 정도로 관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겁니다. 플란츠 왕자가 그래도 제 몫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마법사들 성향이 참 다채롭지 않습니까.

두 마법사 옆에서 함께 달리고 있는 파릇파릇한 머리를 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홍색, 오렌지색, 한 다섯 겹 떼고 남은 양배추 색.

- 네······ 다채롭네요.

무지개 윗부분 같기도 하고.

좀······ 마카롱 같기도 하고.

- 안그래도 연락을 하려 했는데 때마침 칼리안 왕자가 먼저 연락을 했으니 신기한 일입니다.

알록달록한 색채의 향연을 잠시 보고 있으려니 체이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조금 전에 린 후작이 체포됐습니다.

아리안느의 어머니임을 바로 알아들은 칼리안이 침음을 냈다.

- 혹시 린 후작의 사병 때문입니까.

-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 아리안느가 후작의 대리인이 되면 체이스 왕세자께서 후작의 사병을 보다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거기에 더해 후작 이상은 왕궁에서 머무를 수가 있으니 아리안느를 왕궁 안에서 보호하실 수도 있을 테고요.

- 아. 두 가지 이유를 칼리안 왕자가 그렇게 바로 알아내버리면 나는 조금 불안한데.

깊은 숲 속에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같은, 체이스의 목소리.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던 칼리안이 잔잔하게 웃었다.

- 세크리티아 국왕도 눈치를 챌까 불안하십니까.

-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 어차피 세크리티아 국왕을 유인할 미끼일테니 눈치를 채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이 말을 들은 체이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린 후작을 체포하고 후작의 사병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아리안느가 잠시 휘두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체이스는 아리안느를 왕궁으로 불러와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의도 아래, 린 후작이 체포되는 것을 체이스가 묵인했음을 데블란이 눈치채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칼리안이 바로 눈치챘다.

- 대외적으로 세크리티아의 국왕은 체이스 왕세자님을 더없이 아끼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앨런이 데블란을 두고 조금 엄하지만 르메인보다는 나은 사람이라 평했을 만큼, 대외적으로 데블란은 체이스를 참 잘 대해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체이스가 데블란을 직접 끌어내린다면 귀족들이 할 생각은 한 가지다.

'그저 온화한 성정이라 알려져 있던 체이스가 알고보니 아비보다 더 냉혈한 자였구나' 라고 말이다.

안 그래도 데블란의 폭정으로 인해 숨죽이고 있는 귀족들이 그런 체이스의 즉위를 환영할 리 없지 않은가. 전왕이 사망하고 새 왕이 즉위하는 시기에 아예 왕가의 핏줄을 새로 세우려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 그러니 보여줘야죠.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사실 체이스 왕세자님을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 숨김없이 드러내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데블란이 체이스를 아들이 아닌 '경쟁자'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귀족들에게도 들키게끔.

데블란의 칼 아래 몰래몰래 손 잡고 있던 귀족들이, 마지막 희망처럼 여기고 있던 체이스마저 데블란에게 희생된 이후의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도록.

그리하여 그들이 조금 더 과감하게 체이스 쪽으로 손을 뻗어 지금의 체이스가 가지지 못한 명분과 검을 직접 만들어 쥐여주도록 하기 위한 첫 번째 계획이었다.

- 네. 맞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치유사를 계속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카이리스의 국왕으로부터 질책 가득한 메시지까지 전달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쯤이면 아버지의 마음이 많이 조급할 것 같아서, 텐실 치유사의 유입을 막고 있던 린 후작이 체포되는 것을 일단 묵인했습니다.

- 이 쪽에서는 세크리티아 국왕을 엘프들의 도시로 불러낼 생각입니다. 그리 의심 많은 분이니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지만 우선 대응하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체이스가 대답 대신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카이리스의 왕궁에 보내 둔 전서구를 통해 전달된 짧은 편지였다.

'귀족들을 등에 업을 생각이라는 걸 알아. 당신 정혼자 쪽 세력을 눈가리개로 두리라는 것도 알아. 그 이후에 어떻게 할 계획인지 나한테 알려줬으면 하는데.'

숨기는 내용 하나 없이 적어내려간 문장. 한 끗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고 힘있는 칼리안의 글씨와 달리 흘려쓰는 듯하지만 유려한 가는 필기체. 언젠가도 한 번 받아보았던 플란츠의 편지였다.

-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무리하고 있지 않으니 걱정 말아요, 칼리안 왕자.

이렇게 대답한 체이스의 손이 서신을 들춰냈다.

함께 동봉되어 있던 반지를 보던 체이스가 부드럽게 웃는 사이, 칼리안의 말이 들렸다.

- 세크리티아의 국왕은 제 손으로 거둬내야 할 유령이기도 합니다. 필요한 도움이 있으면 꼭 얘기해주십시오. 무엇이든지요.

- 알겠습니다.

이곳에 오는 내내 소매 한 번 걷지 않은 플란츠의 손목에 뭐가 있는지, 카이리스 왕궁에서 참 잘 지내고 있는 전서구가 보낸 매가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에게 무엇을 전달했는지 꿈에도 모를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야말로 새빨간 태양이 푸른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붉음과 푸름의 사이에 놓인 하늘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석양의 빛을 받아 함께 황금빛을 띠게 된 눈을 깜빡인 칼리안이 말을 더했다.

- 지금 이곳에서는 해가 지는 것이 보입니다. 세크리티아의 그 작은 바다에서 해 뜨는 것을 보던 게 참 좋았는데 여기에서는 해가 뜨지 않아 조금 아쉽네요.

- 순간순간을 본다면 떠오르는 해와 저무는 해가 서로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 둘 모두 한 순간 한 순간 참 아름답지만 그래도 기분이 조금 다른 것은 어쩔 수가 없으니까요.

- 그럼 언젠가 이곳에 오게 되는 날. 그날에 보면 되겠네요. 칼리안 왕자.

칼리안은 지쳐 널브러진 오렌지 색 머리와 분홍색 머리 마법사, 그리고 그 곁에 선 채 둘을 채근하는 형을 보다 다시 드넓은 바다를 봤다.

- 즉위식에, 가겠습니다.

떠오르는 해도 볼 겸.

그 바다에 이제는 발도 좀 담가 볼 겸.

보고싶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해 볼 겸.

안전이고 정세고 자리싸움이고 뭐고 다 필요없이 그것만은 꼭 하고 싶어서.

- 형님.

욕심을 하나 더 부렸다.

그 후로 한참동안.

한참동안 체이스는 아무 말을 전해오지 않았다.

- ······ 기다리고 있으마.

그리고 이렇게 대답을 했다.

정말 한참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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