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64화 (265/527)

제46장. 왕자다(5)

음.

그러니까.

"출생의 비밀, 뭐 이런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혼잣말인듯 중얼거린 칼리안이 잠시 플란츠를 쳐다봤다.

형님 너 혹시 아는 것 있냐는 얼굴을 본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기사 플란츠가 뭔가를 알 정도였다면 칼리안도 알고 있었어야 했는데, 기억을 뒤져도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베른일 적에 키리에의 말을 떠올리며 잠시 숲을 찾아갔던 일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숲 속의 엘프 마을은 물론 엘프 그림자도 못 본 채 돌아나왔던 기억만 났다.

"들어본 적 없는 얘기야. 내 어머니가 하프엘프였어?"

"하프엘프는 아니다. 왕비 프레이야는 엘프와 엘프 사이에서 태어났으니까."

"말이 좀 이상한데. 엘프와 엘프 사이에서 태어났다면 엘프인거지 설명을 왜 그렇게······."

톡, 톡, 톡.

말을 멈춘 칼리안의 손 끝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나르잔이 의미심장한 눈을 한 채 칼리안에게 시선을 맞춰오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까닭이다. 정확히는 프레이야를 꼭 닮은 빨간 눈을 보고 있었다.

잠시 프레이야의 초상화를 떠올려보던 칼리안이 다시 나르잔을 쳐다봤다.

아무리 르메인이 르메인이라지만 잘린 귀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막눈은 아니다. 르메인이 감춰주려 한들 그 좁은 왕궁 안에서 잘린 귀를 숨기는 것은 어렵다. 불가능하다. 그렇다는건.

"설마······."

"엘프들이 가진 외형적인 특징은 아무것도 지니지 못했던데다 성장 속도는 인간과 같았다 했지."

엘프와 엘프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뾰족한 귀를 가지지 못하고 태어나 인간과 같은 속도로 자란 프레이야. 시스파니안 외에는 지닌 이 없던 빨간 눈을 하고 태어난 프레이야. 그래서.

"그래서 추방되었네. 인간의 몸과 용의 눈을 지니고 태어난 돌연변이 엘프였기 때문에."

"형편없는 짓을 했군."

플란츠의 목소리가 들렸고 테이블을 두드리던 소리가 멈췄다.

형님 너도 내 눈 가지고 뭐라 했던 거 나 죽을 때까지 안 까먹을건데 왜 형님이 쟤들 욕하냐, 하는 얼굴로 플란츠를 한 번 쳐다본 칼리안이 나르잔을 쳐다봤다.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내 전대 대장로의 문제였지. 그 전이나 지금은 그런 이유로 동족을 내치지 않으니까."

"전대 대장로라는 그 엘프는 어디 있어."

"그 일을 포함한 다른 여러 문제들을 일으켜서 가장 강한 형벌을 받았네."

엘프들 사이에도 규율이 있다.

저들이 말하는 가장 강한 형벌이란, 물론 처형이다. 처형된 엘프는 어머니 나무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때문에 어머니 나무가 삶의 근원인 저들에게 있어 처형이란 인간들의 사형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력한 형벌이라는 것을 칼리안도 알았다.

"내 어머니에 대해 다른 아는 것은 더 없어?"

"거기까지만 알고 있네."

손도 대지 않은 오디 잼을 괜스레 한 번 뒤적이며 생각을 정리한 칼리안이 식기를 내려놓고 나르잔을 쳐다봤다.

"그래. 알았어."

칼리안이 얌전히 넘어가자 오히려 나르잔이 이상하다는 듯 칼리안을 쳐다봤다. 플란츠는 그런 반응일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하게 차만 한 입 더 마셨다.

"또 화를 내거나 한 마디 쓴 소리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미 벌 받은 놈 원망해봐야 나만 피곤하지. 여기서 추방됐다고 해서 내 어머니가 꼭 불행했으리라고도 생각 안 해."

실리케가 그러지 않았던가.

프레이야가 칼리안을 낳은 뒤 좋아했다고.

그것이 모정이었든, 실리케와 마찬가지로 권력에 대한 욕망이었든,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르메인에 대한 애정이었든, 혹은 또 다른 무언가든. 프레이야는 좋아했다고 했다.

"만약 여기에서 계속 사셨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건 솔직히 의미 없는 망상이고. 그러니 됐어."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엘프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프레이야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들은 칼리안의 손에 이미 다 죽었다.

"원래 하던 얘기나 계속 해."

이렇게, 프레이야에 대한 이야기를 끝낸 칼리안이 포도주스를 한 입 마신 뒤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크리티아에서 브리지트 숲에 추방자들이 살았던 걸 알아내서 대가로 치유사 내놓으라 했다는 건데. 궁금한 게 있어. 너희들은 왜 세크리티아에 '대가'를 치르지 않았는지."

나르잔이 대답할 말을 생각하는 사이 칼리안의 질문이 이어졌다.

"엘프들은 대가 없는 도움은 절대 안 받잖아. 그런데 카이리스도 아닌 세크리티아 숲에 사는 것에 대해 왜 세크리티아 쪽으로는 아무 것도 지불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내 어머니가 거기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곳의 존재를 모르던 것도 아닌 듯 한데."

"그들은 동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아닌가. 그들이 추방된 이유는 왕비 프레이야와는 다르네."

"죄를 짓고 추방된 엘프나 하프엘프들이라서, 모여 사는 곳이 어디인지는 파악해 뒀지만 관리를 하거나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는 소리야?"

"그렇지."

톡, 하고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짧게 두드렸다.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심기가 불편해진 것에 대한 표현이었다.

"하프엘프에 대해서까지 그렇게 대하는 건 썩 마음에 드는 처신은 아닌 것 같네."

"계속 줄어드는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다. 대장로라 해서 항상 마음에 드는 일만 할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무시하고 산 이들이면 굳이 대장로 당신이 대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잖아."

"일이 틀어지면 그 곳의 엘프들을 전부 처형하겠다 하더군. 그들이 그곳에서 처형되는 것은 막고 싶네."

"완전한 동족은 아니라서 지금까지는 어디서 어떻게 살든 무시해왔지만 처형되는 건 싫다는 소리네."

나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엘프들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공감이 어렵다. 대체 이게 무슨 2년 전 르메인이나 할 법한 말이란 말인가.

고개를 돌리니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칼리안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문득, 오래 전 귀족 회의 때 플란츠가 비웃음 소리를 낸 일이 생각났다. 그러지 말라는 얘기를 했던가 안했던가를 잠시 생각하던 칼리안의 귀에 나르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대장로로서 그들이 이 곳에서 살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나 엘프 나르잔으로서는 그들이 처형되도록 둘 수가 없었네."

칼리안이 실소했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나 하네."

"그래서 직접 그들의 국왕을 찾아가 다른 방법으로 지불하겠다 말을 했는데 통하지 않더군."

그랬겠지.

치유사를 부르기 위해서 간신히 찾아낸 꼬투리일텐데 무엇을 준다 한들 통했을 리가.

톡, 톡, 톡, 생각을 하기 위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한동안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던 칼리안의 손 끝이 멈췄다. 생각을 마쳤다.

"여기, 주인 없는 땅이라고 했지."

"그렇네."

"일단 알았어. 생각 좀 해 보고 내일 얘기해."

다만 칼리안은 결정을 내리는 대신 이렇게만 말을 했다. 쓸데없는 말 안하고 얌전히 잘 앉아있던 낯가리는 플란츠가 그런 칼리안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 * *

자신의 집무실 문을 연 아리안느가 발을 멈칫했다.

"······ 깜짝이야."

이 시간에 이 곳에 있을 리 없을 사람이 있어서였다.

양 팔에 잔뜩 안아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소파로 가 앉은 아리안느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물었다.

"저하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계속 궁에 있더니."

"그냥, 심심해서."

"이상하네. 심심할 리가 없는데, 내 정혼자님이."

"정말로. 오랜만에 시간이 나서 왔어. 일 말고 그냥. 쉬고 싶어서."

오랜만에 마주한 보라색 눈이 반가운 것을 숨기지 못한 아리안느가 웃어보였다.

"그래. 쉬었다가 가."

곧 코코넛 쿠키 몇 개와 시원한 민트차 한 잔, 그리고 크림 가득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둔 아리안느가 커피 위에 올려진 크림을 휘적휘적 저으며 물었다.

"카이리스 후작 죽은 일, 세작 짓 아니지."

그러더니 '혹시 이것도 일 얘기야?'라고 물어서 체이스를 웃게 했다.

"일 얘기 아닌 걸로 쳐 줄게. 세작 짓 아니야."

카이리스의 2왕자를 암살하려던 세크리티아 세작이 붙잡힌 일, 세작들에 의해 에반 브리센 후작이 죽고 3왕자가 크게 다친 일. 카이리스에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데블란으로 하여금 그 일에 대한 해명과 사과, 해결 방안을 요구했다.

꽤 오래전의 일이었으나 그동안 아리안느와 체이스가 계속 만나질 못했다. 데블란의 눈도 피해야 했고 각자 바쁜 일이 많았던 탓에 이제서야 묻는 중이었다.

"칼리안 왕자인데. 새들한테 다칠만큼 약한 사람 아니잖아."

"많이 다쳤대?"

"응. 많이 다쳤다고 했는데 지금은 다 나았을 거야."

그 칼리안이 지금 다 나았을 뿐만 아니라 그 새를 못 참고 가출해서 어머니 나무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체이스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

"당신이 걱정 많았겠네."

"걱정도 됐지만 아프다는 말을 처음 한 거라서 안심이 되고. 나는 그랬어, 아리안느."

그런 체이스를 한참 쳐다보던 아리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체이스의 앞에 놓인 민트차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당신 동생이 그렇게 한 걸음씩 가고 있는데 당신도 그렇게 해야지. 형이잖아. 그러니까 뜸들이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당신 여기 왜 왔는지."

체이스가 대답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이 석연치 않아서 아리안느가 다시 물으려 했을 때,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 어머니, 린 후작."

"응."

"오늘 체포될 거야."

커피로 가져가려던 아리안느의 손이 잠시 멈췄다. 곧 아리안느가 다시 손을 뻗어 커피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신이 못 막은거야, 안 막은거야?"

"안 막았어."

"그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아리안느가 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체이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말해. 후작 대리인이 내일부터 뭘 하면 되는지."

어머니가 체포되어도 체이스가 어떻게든 목숨만은 구제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인한 태도임을 알기 때문에, 체이스는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보인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는 그 높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속이 빈 투명한 나무 속에 엘프들이 층층이 모여 살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어찌 생각하면 퍽 괴이하다. 인간으로 따지면 세렌티의 몸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나.

사방이 크리스털 벽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어머니 나무의 가운데 층에 마련된 정원. 한쪽에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심겨져 있었고, 창문이라 해야 할지 어머니 나무의 겉껍질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을 벽 너머로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 퐁당······!

정원의 분수대 옆 벤치에 앉은 칼리안이 분수대 속의 인어 조각상을 향해 조그만 오러 덩어리 하나를 던져넣었다.

"상관 없지 않나. 하프여도."

벤치 옆에 서 있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심기가 복잡해서 그런 행동을 한다고 여긴 것이다.

"아, 네. 일반적인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게 신경쓰이네요. 세크리티아에 계셨던 분이 어쩌다 카이리스까지 와서 왜 하필 전하같은 분을 만났는지."

이 말을 들은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마치 숨겨온 비밀을 털어놓은 이후 아르센이 한 말을 들은 칼리안과 같은 표정이었다. '믿기 어려운 것이 내가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사실이 아니라 네가 형님 밑에서 일했다는 쪽이냐' 했던 것 말이다.

"······ 그래."

다만 애석하게도 칼리안이 왜 그것에 의문을 가지는지 참 잘 이해하고 있던 탓에, 형제간의 묘한 동질감을 느낀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플란츠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칼리안에게 건넸다.

말도 없이 눈 앞에 불쑥 내밀어진 무언가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안에 든 것을 본 뒤 웃음을 터뜨렸다.

육포였다.

"저 루시 아닌데요."

"대신 짖잖아."

지그프리드령에서 챙겨준 건조 식품에 있던 육포. 생각한대로 손도 안댔는지 시장이 준비해준 모양대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생각한대로 해. 고민하지 말고."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여전히 서 있는 플란츠를 올려다봤다.

"세크리티아 일. 뒷감당 고민하지 말고 계획한대로 하라고."

"제가 무슨 생각하는 줄은 아십니까."

"뱀을 여기로 부르려는 거잖아. 오면 치료해주겠다는 거짓말로. 주인 없는 땅이니 여기서 뭘 사냥하든 카이리스와는 엮이지 않을 테니까."

"······ 내 형님께서는 어찌나 눈치가 빠르신지."

칼리안의 짖는 소리는 적당히 넘긴 플란츠가 칼리안의 손에 들린 육포를 가리켜보였다.

"아우님은 좋아하시는 고기나 드시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육포 쳐다보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정말로 루시 취급을 받는 기분이 든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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