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장. 왕자다(4)
생각보다 많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특별히 더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하는 짓들을 봐 온 탓에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조금 더 확신을 하게 됐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얼만큼의 시간을 거슬러 왔는지 알 수도 없고 체이스와 몇 살 차이가 나는지도 몰라서 적당히 가늠만 해 보다 그냥 고개를 돌려 달빛 바스라진 바다만 봤다.
언젠가의 이 날에 살았을 옆 나라의 왕자가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무엇을 앓고 있었을지. 그냥 적당히 가늠만 해 보다 바다만 봤다.
바다를 보면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소금내가 낯설다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들었다. 발등을 적시던 바닷물이 발목까지 차오르도록 들었다. 일렁이는 달빛이 머릿속에 새겨지도록, 이제는 그저 열 여섯인 한 사람의 울음소리를.
한참동안 들었다.
"칼리안."
"네."
그래.
결국 이렇게 바다에 와서 고래 울음을 들었다.
"놔."
"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동생 하나가 생겼다.
* * *
실로 아름다운 세크리티아.
칼리안은 세크리티아를 그렇게 소개했었다.
"카이리스는 사실 많은 곳을 가본 것이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세크리티아에서는 어딜 가든 다 좋았던 것 같습니다."
조금 전.
칼리안이 두 말 없이 옷깃에서 손을 떼어냄과 동시에 피냄새가 사라졌다. 옷깃을 붙든 손에 기대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옷을 가리고 있던 까만 뒷통수가 치워지자 어느새 깨끗해진 하얀 옷만 보였다.
발목이 여전히 물에 잠겨 있으니 물 밖으로 나가서 지워도 될 텐데도 기어코 그 핏물을 지워내고는 참방참방 걸어 나가 모래사장 위에 앉는 것을 본 플란츠가 생각했다.
쟤 지금 엄청 부끄럽구나, 라고.
그래서 그냥 다른 말 없이 그 옆으로 가 앉았다. 그러다 지금 칼리안이 여전히 입고 있는 정복에 아무것도 넣어두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곤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 뒤에는 손수건을 받아 주먹 안에 말아 쥔 칼리안이 또 두서없는 말을 꺼내놓는 것을 그냥 듣기 시작했다. 새빨간 저 눈이 원래의 빨간 눈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기다려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다지만요."
"그렇겠지."
"아, 생각해보니 바다에 두 번째로 들어갔네요. 두 번은 안 들어갈 줄 알았는데."
"······ 그렇게 그리워하는 것 같더니."
그리 가보고 싶어하던 바다에 들어간 건 고작 두 번 뿐이라고 했다.
그나마 발목을 적신 것이 두 번째라면 파도 근처에도 오지 않았던건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이 곳에 온 뒤로도 칼리안은 계속 멀찍이 서있기만 하고 파도 앞으로 오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왜."
"숨막혀서요."
플란츠가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칼리안이 손을 들어 달 기우는 수평선을 가리켜보였다.
"저 너머 어딘가로 배를 타고 갔던 날이 있었는데, 배 밖으로 던져졌던 걸 잊질 못해서요. 그때 체이스 왕세자님께서 같이 뛰어드는 바람에 꽤 오래 고생을 하셨었는데 그 기억이 지워지질 않아서 못 들어갔습니다."
"암살될 뻔 했다는 건가."
"아뇨."
고개를 가로젓더니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나름대로의 시험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확인을 받았습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며 칼리안의 말 뜻을 생각하던 플란츠가 기가 찬 웃음소리를 냈다.
"······ 잊어. 곧 없어질테니."
"네. 잊어버려야죠. 곧 없어질 사람이니까."
"반말."
"아까는 그냥 두셨으면서."
"또."
"저희 아직 동갑인데요, 형님."
"짖지."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발 끝으로 모래를 몇 번 밀어보다 말을 이었다.
"아무튼. 세크레타를 떠나 있던 1년 동안 가능한 세크레타에서 먼 곳, 앞으로 두 번은 가보지 못할 곳들만 찾아다녔는데 다 좋았습니다."
세크리티아에서는 왕족이 왕궁을 떠나 있어야 하는 기간이 없었다. 로젤리타와 같은 성인식도 카이리스에만 있었으니 왕궁에서 평생을 보낸 왕족이라면 수도 세크레타를 떠나 있어야 할 특별한 일이 없었다.
때문에 그것이 의외라 생각된 플란츠가 옆을 쳐다봤다. 질문을 담은 목소리 대신 파도 소리가 들렸고 바람이 불었다.
"쫓겨났어요. 왕궁 밖으로. 그래서 여행을 다녔습니다."
플란츠의 시선을 느낀 칼리안이 어깨를 으쓱이다 실소했다. 왕궁 밖으로 쫓겨났던 날에 느낀 억울함, 서러움, 어처구니 없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누가."
"체이스 왕세자님께서 왕궁에 들어오지 말라고 내쫓으셨습니다."
"왜."
칼리안의 입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나왔다.
"왕자에서 왕제가 되고 나서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사는 내내 가장 날 서 있던 시기가 아마 그때였을 겁니다. 오히려 그 전보다도 더요."
잠시 파도소리를 듣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였을지 안다.
"저한테는 고양이가 없었으니까요."
"그래."
플란츠와는 많이 다른 이유겠지만 이해는 됐다.
아마 데블란이 살아 돌아올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살아있던 채로도 그 왕제를 지옥에 넣은 사람의 그림자는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동생이 뭘 했는지 몰랐던 체이스는 왕위에 오른 뒤 정신이 없었을 테니, 하얀 고양이도 없고 500년 된 건물 하나 쯤 아무렇지 않게 부수는 까만 고양이도 없었다면.
무너졌겠지.
이미 죽은 이가 만들어두었던 지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났더니 체이스 왕세자님께서 저를 왕궁 밖으로 추방시키셨습니다."
그 체이스가 그랬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산산조각난 유리조각처럼 살았던 건가, 하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플란츠의 시선을 무시하고 넘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며칠을 두고 술만 마시다가 그대로 세크레타 밖으로 나가서 1년쯤,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이곳 저곳 참 많이 다녔습니다. 그렇게 속에 담기는 것들이 많아지니 이전에 봤던 것들이 조금씩 뒤로 밀려나더군요."
칼리안이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놓았다.
"그냥, 형님께서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새 피가 멎은 상처가 보였다. 그 뒤로 여전히 남아있는 긴 흉터를 한 번 본 칼리안은 잠시 입을 다물고 플란츠를 봤다.
확실히 플란츠는 말 하는 것을 귀찮아해서 그렇지 못하는 건 아니다.
언젠가 욕은 안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따져보니 욕도 잘 한다. 아는 욕이 두 세 개밖에 없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필요하면 잘 돌려써가며 하긴 한다. 그래도 욕은 더 가르치지 말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르쳐 놔봐야 그 욕 들을 사람은 칼리안밖에 없으니까.
아무튼.
말 하는 것을 귀찮아하지만 못하는 건 아닌 사람이 굳이 입 밖으로 안 꺼내놓으려 하던 것을 전부 듣고 전부 보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모닥불 불티에서 호수 불꽃 보시는 대신 나무 갈라지는 소리도 좀 들어보시고, 무지개에 물들지 않는 것 보면서 안심하는 대신 손끝에 감기는 그 물안개가 얼마나 시원한지 느껴보시고, 들리지도 않을 소리 생각해가며 파도 끝에 서는 대신 체르밀까지 닿지 않을 바다냄새 맡으면서, 그렇게 다니세요."
- 쏴아아아······.
시원한 바람결에 파도 소리가 가득찼다.
"잊지 못하시는 분인 것 알고 있으니 그렇게 조금씩만 뒤로 미뤄가면서 사세요."
말하는 것 귀찮아하는 플란츠는 이번에도 다른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바다 속으로 잠겨 들어가듯 수평선 너머로 조금씩 사라져가는 달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독에서 깨어나고 잠들었던, 그 날에."
연두색 눈이 끝내 감겨들었다.
그것이 누군가의 마지막 이야기임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 * *
동그란 테이블 위에 참 다채로운 색이 올려졌다.
계란과 우유를 넣은 빵은 칼리안과 플란츠 쪽에 놓였다. 잘 익은 계란 프라이도 두 개. 마찬가지로 칼리안과 플란츠 쪽에만 놓여 있었다. 외부에서 온 방문자를 위한 그들 나름의 배려였다.
그리고 그 배려는 딱 거기까지.
잘 구운 피망과 아스파라거스, 여러 종류의 버섯 볶음, 무화과와 아보카도가 가득 들어간 샌드위치, 구운 바나나, 굳이 필요할까 싶은 샐러드, 그리고 보랏빛의 포도 주스.
고기가 없다.
그래, 이해하지만 고기가 없다. 당연한 일이지만 고기가 없다. 계란과 우유로도 고맙게 생각은 하지만 고기가 없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시종이 없으니 직접 움직일 수 밖에.
테이블 위를 보고 아주 잠시 시무룩해하던 칼리안이 플란츠의 옆에 있던 오디 잼을 향해 팔을 뻗었다. 식사에 앞서 손을 씻도록 놓여 있던 투명한 물그릇 위에 띄워진 노랗고 빨간 향기로운 꽃을 내려다보던 플란츠의 눈 앞으로 칼리안의 팔이 지나갔다.
그리고 꽃이 사라진 것을 보았다.
손 씻을 물 위에 띄워진 꽃 가져다 제 앞에 두는 것에 능력 잘 낭비한 소드마스터 동생놈이 식사를 시작하는 것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꽃 치워진 물그릇에 손을 씻은 뒤 피망만 없다면 입맛에 아주 딱 맞을 식사를 했다.
"장로 제르의 일은 진심으로 미안하네."
그 식사가 끝날 즈음, 맞은편에 앉아있던 나르잔이 이런 말을 했다. 전날 그렇게 웃음소리를 내던 모습을 보며 나르잔이 아무래도 자신의 성정을 시험해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칼리안은 크게 놀라는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크리티아로 이주하는 건 재고했으면 해."
그리고 칼리안 나름대로의 협상을 비로소 시작했다.
"포도든 밀이든, 어머니 나무의 힘 덕에 많은 득이 있다는 건 우리도 알아. 그러니 긴 말 오갈 것 없이 불편한 것 있으면 얘기해."
남부 지방 대부분의 큰 숲에 엘프들이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고 그 숲의 나무들을 보존해주는 것을 대가로 받고 있는 일종의 세금. 바로 어머니 나무의 힘이었다.
식물 키워내는 능력 하나는 일품인 어머니 나무 덕분에, 어지간한 가뭄이나 수해에도 흉년이라 할 만큼의 농작 피해는 거의 발생되지 않았다. 메뚜기 떼가 생긴다거나 이미 다 경작한 곡물이 물에 잠긴다거나 하는 등의 일에서까지 피해가 없을 수는 없지만 농작물 자체는 언제나 훌륭히 잘 자랐다. 뿐만 아니라 카이리스에는 지진이 없었고 온천은 있되 화산이 폭발한 경우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대가를 주는 것은 아니라 하나 그런 어머니 나무가 사라지면 카이리스도 썩 편하지만은 않을 테니 전날 나르잔도 '이러니 이주를 생각하지' 라는 식으로 나왔던 터였다.
"불편하다 하기 보다는 좀 난처한 일은 있네."
"세크리티아 국왕과 만난 것 같던데."
나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몰라도 세크리티아 국왕과 닮았고, 닮았다는 말을 꽤 싫어하는 듯 했다. 순간적으로 칼리안에게서 쏟아져 나온 살기를 나르잔도 느꼈다. 둘째 왕자가 무릎에 차를 쏟아 가며 칼리안을 말린 것도 알았다.
덕분에 어제에 비해서는 상당히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된 나르잔이 대답을 했다.
"엘프 치유사를 보내달라는 요구를 해 왔는데 알겠지만 우리는 동족 외에는 치료하지 않기 때문에 거절을 했었네."
"어차피 그들이랑 엘프가 관련 있던 것도 아니니 그냥 거절하고 말면 되는 일일 텐데 그게 왜 난처한 일인지 이해 안돼."
이 말을 들은 나르잔이 잠시 뜸을 들였고 칼리안은 다른 말 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그 사이 식사를 마친 플란츠는 말린 로즈마리와 레몬이 들어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사실 세크리티아 쪽에도 엘프들이 사는 숲이 하나 있네. 그런데 세크리티아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엘프들이 그동안 거주해왔던 것에 대한 대가로 치유사를 보내라 요구하고 있어서 곤란한 상황이네."
브리지트 숲일 것이다.
최근 기억해 냈던 한 숲의 이름을 떠올린 칼리안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러 이유로 추방된 엘프나 하프엘프가 있는 곳이지. 아마 그대도 알지 않을까 싶은데."
"세크리티아에 엘프 숲이 있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말에, 오히려 나르잔의 얼굴 위에 의문이 생겼다.
나르잔이 플란츠를 보며 물었다.
"그대의 형제가 너무 어렸던 터라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혹시 그대들이나 그대들의 국왕도 사실을 모르는 것인가."
"뭐를."
여전히 차분하지만 예의라고는 방금 마신 저 차에 같이 담아 잘 삼킨 듯한 플란츠의 낮은 목소리를 들은 나르잔이 다시 칼리안을 쳐다봤다.
"브리지트 숲. 프레이야 왕비가 그 곳 출신인 것을."
칼리안의 미간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