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62화 (263/527)

제46장. 왕자다(3)

노크 소리가 들릴 일이 없었다.

복도를 지나 집무실 앞에 다가서자 문을 열고 반갑게 맞이해주는 이가 있었다.

"어서 오게, 베른 경."

방문한 이는 히나였고 맞이한 이는 앨런이었다. 한 팔 가득 오는 무언가를 품에 안고 눈만 빼꼼히 내민 히나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뜻밖의 물건이 퍽 무거워 보였던 탓에 앨런이 히나의 손에서 얼른 그것을 받아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 사이 히나를 따라 함께 온 에일라가 예를 보인 뒤 밖에서 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일별한 앨런이 히나가 들고 온 것을 보며 물었다.

"카바니아 아닌가? 값이 꽤 나갈 터인데."

- 네, 맞아요.

붉은 꽃에서는 꽃 향이 아닌 단 향이 났다.

얼핏 작약을 닮았으나 크기가 훨씬 작고 그 꽃잎의 생김이 독특했다. 신비로운 꽃이 한가득 피어난 화분을 내려다보던 앨런에게 히나가 말을 이었다.

- 약재인 줄 알고, 힘들게 구해왔는데, 베,로,니,카,가 찾던 것이, 아니라고 해서, 집무실에서 키우려고 했어요. 그러다, 꽃이 핀 것을, 보니까, 군단장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보석처럼 투명한 붉은 꽃잎.

그것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어여쁜 제자의 눈이 생각난 앨런이 달달한 향기 만큼이나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그래도 칼리안을 보지 못한지 한참이 되어 눈앞에 꽤 어른거리는 상태였다.

"마음 써주어 고맙네. 내 정성껏 잘 키워 보겠네."

히나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따로 용건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화분을 전해주러 왔으니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앨런이 아차, 하고 얼른 일어나 차를 준비했다.

아무래도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새여서 히나는 다른 말을 하거나 에일라가 함께 들어와도 되는지 묻지 않고 그냥 잠시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청량한 향이 나는 민트차 두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그 뒤 다시 히나의 맞은편에 앉은 앨런이 슬쩍 문 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빌헬름 관의 일은 전해들었네. 문 밖에 서 있는 저 친구 생각보다 손이 맵다던데 같이 지낼 만 하던가? 모난 곳은 없고?"

- 호위님이요? 네, 잘 지내고, 있어요. 많이, 친해졌어요.

"혹시라도 지내다 불편한 것 있으면 얘기하게. 왕자님이 자네 잘 챙겨주라며 어찌나 성화인지 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니."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건네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은 뒤 말했다.

- 신기해요. 같은 잎인데, 맛도 다르고, 향도 달라요.

앨런이 타 주는 민트차는 히나가 마셔 본 그 어떤 차보다 맛이 좋았다. 향은 시원한데 따뜻한 맛이 났다.

"그래도 난 이것 끓이는 것이 늘 어렵네. 커피는 무조건 진하게만 끓이고 딸기차는 무조건 연하게만 우리면 되니 늘 이 녀석이 문제 아니겠나."

앨런이나 아르센이 마시는 커피는 무조건 진하게, 플란츠를 위한 딸기차는 무조건 연하게. 그리고 칼리안이 마시는 민트차는 무조건 맛있게. 때문에 칼리안을 위한 차가 가장 어렵다.

그런 말임을 잘 알아서, 히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 그런데, 에일라님은, 세,크,리,티,아, 사람이에요?

안그래도 에일라가 히나와 잘 지내는지를 묻기 위해 히나를 앉혀두었던 앨런이지만 히나의 손 끝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도리어 놀란 얼굴이 됐다.

사실 히나가 눈치 챈 것이 그리 큰 일은 아니었다.

비록 칼리안과의 로젤리타 동행 때 에일라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으나 에일라의 출신지가 '휘트린' 영지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아니네. 혹시 그것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가?"

- 아니요. 호위님의 성이요.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요. 그래서, 정말 그곳에서, 온 사람인지, 아니면, 왕자님께서 지어주신, 성인지, 궁금했어요.

"왕자님께서 지으신 것이라 알고 있네. 혹시 세크리티아에 그런 곳이 있나?"

- 네. 있어요. 작은 숲이라고, 들었어요.

앨런이 히나 몰래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했다.

아이고, 우리 어여쁜 제자가 또 들킬 거리 하나를 만들어냈구나. 내 언제 체이스에게 연락을 해서 브리지트라는 곳의 이름을 좀 바꿔달라 해야지. 꽃 같은 내 제자가 제 사람 이름 짓는 것에 실수로 세크리티아 지명을 가져다 썼으니 이를 어쩌겠나. 그 지명을 바꿔야지, 아무렴.

앨런이 이렇게 스스로 큰 일거리 하나를 만들 계획을 짜는 사이 히나의 말이 이어졌다.

- 돌아가신 엄마가, 남겨둔 편지에, 써 있었어요. 엄마랑 아빠랑, 처음 만났던, 곳이라고 했어요.

히나의 어머니.

무언가를 잘못하고 추방된 엘프였던 걸까. 그래서 카이리스도 아닌 세크리티아의 숲에서 숨어 살았던 걸까.

- 이 나라에서, 오빠를 낳으면, 엘프 숲으로, 다 함께,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대요. 그래서, 엄마랑 아빠랑, 오빠랑 저랑, 다 같이, 그 숲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다고 했어요. 아팠대요, 우리 엄마. 좀만 기다렸으면, 제가 고쳐 줄 수 있었을텐데.

히나가 찻잔 속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저는, 엄마도 아빠도, 기억이 안 나서, 오빠한테, 맨날 그렇게 말을, 했었어요. 나중에 우리가, 대신 거기에 가서, 살자고요. 이제는 그 숲에 갈,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자상한 왕자님을, 만나기 전에는, 거의 매일같이, 그 말을 했어요. 어디 있는지 잘 모르는, 곳이어도, 분명히, 행복한 곳이 아닐까, 상상하면서요. 그래서 호위님 이름을, 들었을 때, 반가웠어요.

'체이스에게 연락할 필요 없겠군.'

칼리안이 왜 그 이름을 썼는지 어렴풋이 이해한 앨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래서야 체이스가 먼저 이름을 바꾸겠다 해도 나서서 말려야 할 판이다. 그래서 그냥 에일라 이름을 듣고 혹시나 의심을 하는 놈이 있으면 그 놈을 없애 버리는 쪽으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과거, 히나를 잃은 키리에가 굳이 세크리티아로 간 이유를 알게 됐다. 그렇게 키리에가 세크리티아를 찾아갔기에 베른이 키리에를 만났다. 아니었다면 칼리안은 지금까지도 키리에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으리라.

만약 앨런이 히나와 키리에 남매에게 '베른'이라는 성을 멋대로 지어주지 않았다면 남매의 성은 분명 '브리지트'가 되었을 터였다. 그 성을 왜 에일라에게 주었는지는 칼리안만 아는 또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튼 아무 생각 없이 준 성은 아니라 하니 다행한 일이다.

아들내미 속내를 이렇게 또 하나 알게 된 앨런이 히나를 보며 물었다.

"그래. 그럼 이제 자네는 그곳보다 이곳에서 사는 것이 나을 것 같은가?"

히나가 고개를 들어 앨런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민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군단장님. 여기는, 정말, 이상한 곳이에요.

목걸이 줄에 길고 긴 이름을 적어 놓은 고양이 두 마리가 누구에게서든 소금 안 든 닭고기를 얻어 먹고, 우르르 몰려온 동료들에게 치유사의 황금빛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자랑하는 전서구가 살고, 그 전서구한테 탄산수 가져다주는 부군단장이 오리 모이를 챙기는 그런 이상한 곳. 정말, 이상한 곳.

그런 곳에서 사는 히나가 포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곳을, 이렇게 만든, 자상한 왕자님이, 제일, 이상한 사람이라서, 그런가봐요. 저는, 상상만 해오던, 행복한 곳보다, 이상한 것 많은 이곳이, 더 좋아요.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자네도 이상한 사람 다 됐군."

시간을 거슬러 적국에 온 왕자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것 같은 비밀을 전부 들키고 다니는 곳이라 그런가. 아니면 반드시 해야 할 것 같은 복수는 안하고 전부 다 살려내려 드는 곳이라 그런가.

이런 생각을 하던 앨런이 마주 웃었다.

* * *

파도에 깎인 모래 사이로 발이 파고든다.

모르는 사이 조금씩 그렇게 파묻혀갔다. 발 끝에 닿던 파도에 어느새 발등이 젖는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는 있습니까."

파도는 넘실거리는데 악다문 입 사이에서는 높낮이 하나 없는 목소리만 새어나왔다. 칼리안의 그런 얼굴을 참 오랜만에 보았음에도, 플란츠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나한테는 욕심내고 살라더니 아우님은 안 그러는 것 같아서."

"제가 왜 그러는지 모르시는 분 아니잖습니까."

"어느 한 쪽도 선택하질 못해서 결국 내 옷에 묻은 풀물이나 지워주고 있던데. 그렇게 하면 내 잘못이 아예 없던 일이 될까 믿는 것처럼. 당신 잘못은 이미 다 지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내 잘못도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면 똑같은 눈높이로 보일까 생각한 거잖아. 그래서 묻으려던 거잖아."

억세게 붙들린 옷깃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은 채, 플란츠는 칼리안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 잘못은 그 왕제와 함께 다 지워진 것 같아서, 그래서. 얼룩 하나 안 묻은 흰 옷으로 되돌려가면서 그렇게 억지로 눈높이 맞춰가면서 용서도 책망도 안하고 전부 다 묻어버리려고 하면. 그게 될 것 같았나본데."

옷깃을 붙든 손 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는 안 돼."

- 몇 명입니까.

- 무슨 소리야, 갑자기?

- 왕자님께서 남모르게 지운 목숨. 몇 명인지 여쭙는 겁니다.

잘못. 돌이킬 수 없는.

이미 쏟아져 흘러내린 찻물 같은 것. 데인 상처를 만들고 물집이 터져 흉터를 남기는 것.

-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 어제 우연히 티온 백작가에 들어가시는 왕자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바로 그 가문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따져 생각해보니 왕자님께 피냄새가 짙던 날마다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 잊어버려.

- 그 많은 이들을 죽여 없애야 했던 이유, 무엇이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잊으라고 하지 말고 말씀해주십시오. 이해하려 노력하겠습니다.

- 얘기한다고 달라지는 것 없어. 앞으로도 계속 같을 테고. 그러니 거기까지만 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후회. 아무 소용 없는.

깨진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빗물같은 것. 막으려 해도 결국 들이쳐서 온몸을 차갑게 적시는 것.

- 얼마 전에 전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기사 말고 다른 것 해 볼 생각 없는지 물으시기에, 이름없는 새가 되어 살고 싶지는 않다 했습니다. 긍지 속에 살고 명예롭게 죽겠다 했습니다. 왕자님같은 기사로 살다 죽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 에일라.

-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용서. 구할 수 없는.

많은 말을 담아 흘러간 강물 같은 것. 무슨 짓을 해도 이제는 보여주고 들려주지 못해 그저 침묵하는 것.

- 왕제님. 푸른 솔새가······ 날개를 접었습니다.

- ······ 시신은.

- 텐실로 간 새들을 통해 수습하도록 이르겠습니다.

- 찾아와. 여기로 데려와.

그리하여 결국 저 깊고 검은 물 속에 내몰려 홀로 침잠한.

고래의 울음.

"과거로 되돌아와서. 용서 구해야 할 사람들이 전부 다 잊고 다 살아났으니까. 다른 놈 손에 죽든 말든 당신 손에 피 묻을 일 없으니까. 그러니 이제 속죄할 대상 없어졌다고 맘 편할 새끼 칼이 그딴 색이면. 그런 새끼 형 노릇 하겠다고 아등바등 안 살아, 나도."

소금 냄새 가득한 비린내가 났다.

그 바다 비린내가 어쩐지 익숙하다는 착각이 든다. 그 바다에 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무도 모르는 피냄새에 파묻혀서 미친 새끼는, 그 피 흘렸던 놈이 살아있든 죽었든 신경쓰지 말고 속편하게 평생 속죄하면서 살아. 그게 당신 몫이야. 저 물 밖으로 빠져나와서 말라 죽지 말고 그냥 그 안에서 숨막혀 하면서 계속 살아."

베른으로서의 생.

"당신이 그 애······ 예전의 칼리안이 아니었다고 해서 자격 없다고도 생각하지 마. 내가 칼리안에게 한 짓을 용서하는 건 당신이 못해도 용서 못하는 건 당신이 할 수 있어. 해도 돼. 기억은 다 있으면서 당신은 가짜라는 생각에 억지로 못 본 척 외면하지 마. 그렇게 되면 체이스는 뭐가 되는데. 당신 예전 형까지 없어진 사람으로 만들지 마."

그리고 옛칼리안으로서의 생.

"전부 다 떠안기로 했으면 책임도 권리도 다 가져가라고. 책임질 것만 가져가지 말고 전부 다 가져가라고. 그게 당연한 일인 것 같으면 당연하게 가져가. 욕심인 것 같으면 욕심 부려. 당신은 그래도 된다고."

- 형님, 여기······ 만화경이요. 어제 정원에 두고 가셨어요. 아, 빨간색······ 싫어하시는 줄 몰랐어요. 그럼 이거 제가 가져도 돼요?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할게요.

- 형님, 혹시 이 안에 뭐가 있는지 본 적 있으세요? 꼭 빨간 별이 반짝이는 것 같아요.

- 형님, 그런데 그거 아세요? 우리처럼 세크리티아도 꽃으로 장례를······. 저는 저를 위한 꽃이 빨간 별이 되어 날아갔으면 좋겠어요.

- 형님, 아니에요. 그냥 꺼낸 말이에요. 무슨 일 있는 것 아니에요. 만화경 안에 든 보석들 때문에요. 별이 들어있는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 일 없었어요. 아니에요. 안 오셨어요. 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로 그냥 한 말이에요.

- 형님······.

밀려드는 기억에 잠겨든 고개가 떨구어진다.

비릿한 소금 냄새 사이로 다른 비린내가 났다.

"그러지 말지······."

원망을 했다.

더 참지 못한 숨을 토해냈다. 숨을 쉬었다.

"내 말 하나로 갑자기 그렇게······ 그러지는 말지."

매달리듯 붙든 하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손바닥 위에 새겨진 긴 흉터 위에 기어이 새 상처가 났다. 힘주어 잡은 새하얀 옷깃에 핏물이 번진다.

"말을 안해주면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아들어······ 형님이 말을 안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 설명을 했어야지······ 설명은 해줬어야지!"

옛칼리안이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하였으나, 누구 하나 살리지 못해 아무에게도 용서를 구하지 못했던 베른이기 때문에. 끝내 용서받지 못할 형제를 끝끝내 책망만 하지는 못하여서.

"왜 하필 그렇게 닮아서. 하필 왜 형님이 닮아 있어서, 나랑. 대체 당신은 왜 그렇게 나를 닮아서."

결국은 이해하게 되어서.

그것이 지금의 칼리안이기 때문에. 결국은 이해할 수밖에 없어서.

"형님······."

욕심을 부렸다.

모르는 사이 어느새 바다에 잠긴 발등 위에 켜켜이 쌓아둔, 더는 감추지 못한 투명한 감정들이 하나씩 떨어졌다. 똑같은 소금 냄새 가득한 물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 파도가 가만히 밀려왔다가 가만히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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