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60화 (261/527)

제46장. 왕자다(1)

체르밀 궁의 앞에는 호수가 있다.

아르피아 궁의 후원에는 작은 개울이 있다.

아름다운 연회장인 지그프리드 관의 후원에도 개울이 흐른다. 아르피아 궁에서 흐르는 물이 지그프리드 관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뉴 관을 빙 둘러 조성된 산책로같은 나무 회랑을 지나다 보면 바로 그 개울을 건너는 징검다리를 지나야 했다.

이렇듯 카이리스 왕궁 곳곳에는 크고 작은 호수와 분수, 여러 갈래로 나뉘는 개울이 있었다.

눈을 좋아하고 비를 싫어하던 시스파니안.

좁고 답답한 것은 질색이라던 시스파니안.

이것 말고 다른 무언가를 좋아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그 호오를 알려주지 않은 시스파니안 덕분에 카이리스 왕궁에는 바다를 제외한 많은 자연경관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조성되어 있었다. 시스파니안이 뭘 좋아하는지 몰랐던 하츠아라가 그냥 이것저것 다 집어넣고 짓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삐약!"

덕분에 노란 생명체 하나가 신났다.

왕족이거나 왕족과의 동행이 아니라면 걸음하지 못하는 체르밀 궁의 호수나 아르피아 궁의 개울 말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세뉴 관. 그 곳의 징검다리 위에 서 있던 샛노란 새끼 오리 한 마리가 삐약삐약 소리를 냈다.

"자네 거기 들어가려면 아직 멀었으니 그냥 구경이나 하게."

알에서 깨자마자 눈에 들어온 새파란 머리의 마법사를 엄마로 삼아버린 새끼 오리 덕분에, 술 먹고 뻗었다 일어나니 내새끼 한 마리가 생겨 있는 상황을 겸허하게 잘 받아들인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바람 다 쐰 것 같은데 이만 이리 오게. 그러다 진짜 뛰어들겠네."

아직 태어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끼 오리가 벌써부터 징검다리 끝에 서서 물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 영 불안했던 아르센은 얼른 새끼 오리를 두 손으로 잡아 들었다.

"삐약!"

얌전히 아르센의 손에 올라온 새끼 오리가 종알종알 소리를 냈다.

- 아가 고양이도, 쑥쑥, 크는데, 오리는 더, 빨리 자라는 것, 같아요.

한가로운 점심 시간.

함께 나와 있던 히나가 신기한 얼굴로 새끼 오리를 쳐다봤다. 쳐다만 보고 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새끼 오리가 아르센 말고는 아직 아무도 따르지 않아서다.

며칠 사이 정말 티가 날 만큼 무거워진 새끼 오리를 쳐다보면서 아르센이 흐뭇하게 웃었다.

"원래 작은 것들은 하루 하루가 다른 법이라고 군단장님께서 그러셨다네."

지금쯤 집무실 안에서 자고 있거나 식사 중인 발칸의 대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놀고 있을 루시와 안네를 생각하던 히나가 마주 웃었다.

"삐약!"

"돌아다니니 배고프나? 잠깐 기다려보게. 이 엄마가 먹을 것을 줄 테니."

에우리아가 그랬다.

새끼 새가 처음으로 눈에 담은 건 무조건 엄마라고. 그 말 잘 들은 아르센은 오리 엄마 노릇을 아주 훌륭히 해 나가고 있었다.

새끼 오리를 잠시 다시 바닥에 내려 둔 아르센이 지니고 다니던 마법사의 주머니 속에서 주섬주섬 모이 한 줌을 꺼내 오리 앞에 내밀었다. 그러다 문득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왕자님께서 이런 걸 보시면 꽤 복잡한 얼굴이 되시겠군."

- 자상한, 왕자님이, 왜요?

"발칸 부군단장 하라고 앉혀놨더니 한 분은 고양이 털을 묻히고 다니시고 남은 하나는 오리 모이를 가지고 다니고 있으니 말일세."

칼리안의 기억 속에서는 악마와 같던 이들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군대를 이끄는 두 명이 위엄 대신 달고 다니는 것이 고양이 털과 오리 모이라니.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할 일이 아닌가.

- 좋아하실,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

- 군대니까요. 발, 칸, 은, 빼앗으려고 만든, 군대가, 아니잖아요. 살아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아시게 되는 거니까, 오리 모이, 들고 다니시는 것도, 좋아하실 거예요.

"자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던가?"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자상한 왕자님이, 마법사들을 모은 이유는, 아마 그래서일 거라고, 생각해요. 소공작님 손에, 상처가 많은 것도, 다 같을 거예요. 우리 오빠가 그랬거든요. 다른 사람 다치게 하려고, 싸운 게 아니라, 제가, 안 다치게 하려고, 싸웠어요.

물갈퀴 달린 작은 발로 뒤뚱뒤뚱 걸어 온 새끼 오리가 신나게 모이를 먹는 모습을 보던 아르센이 싱긋 웃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이해하였네. 그럼 내가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나?"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센이 잠깐 빌헬름 관 쪽을 쳐다보다 말했다.

"기사 베른 경은 자네를 지키고, 소공작께서는 정혼자를 지키고, 왕자님은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키려고 힘을 배우는 것인데. 왕자님의 형님이신 부군단장 왕자님은 무엇을 지키시려는 것 같아 보이던가? 나는 그 분이 왜 그렇게 검을 배우고 마법을 배우려는지 이해가 안 되거든."

맨날 말버릇처럼 내가 왕자다, 내가 부군단장이다 하는 플란츠 아닌가. 그 직위를 이미 힘으로 써먹고 있으면서 굳이 검을 드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후작위에 오른 뒤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배운다 하기엔 이미 그 한참 전부터 검을 배워왔었지 않았던가.

- 잘은 모르지만, 좋은, 왕자님은, 저랑, 같은 이유일 거라고, 생각해요.

히나가 잠시 손을 멈추고 자신의 귀를 한 번 만졌다. 얼마나 길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본래의 귀를 떠올리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 저는, 약한 사람이, 되기 싫었어요. 어떤 방식으로든, 이용 당하지는 않고 싶었어요. 아마, 좋은 왕자님도, 그래서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상한 왕자님도, 그걸 알아서,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아르센이 새끼 오리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자네는 가끔 내 스승님 같을 때가 있네."

아르센은 히나와 대화하는 것을 퍽 좋아했다.

마법사같으면서도 마법사같지 않던, 아르센이 따라갈 수 있을 지표를 하나씩 알려주던 모습이 히나에게서 보여서였다.

"삐약, 삐약!"

밥 다 먹은 새끼 오리가 아르센을 향해 다시 울었다. 손 위에 물 덩어리 하나를 만들어 그 앞에 내미는 아르센을 보던 히나가 고개를 돌렸다.

세뉴 관 후원에 마련된 여러 테이블 중 한 곳에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에우리아와 에일라의 모습이 보였다. 에우리아가 담당하고 있던 정보 조직 보스 자리를 에일라에게 위양하는 일에 대한 내용을 주고 받는 것이었다.

히나가 보는 방향을 슬쩍 살핀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의외로군. 왕자님께서 자네 호위를 저 자에게 맡기다니."

- 괜찮은 사람, 같아요.

"그리 보이나?"

- 네. 아니었으면, 자상한 왕자님이, 제 옆에 있게 하지, 않았을 테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괜찮은 사람, 같아요.

"왕자님은 참 믿음의 기준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분일세. 저 자와 썩 좋은 관계로 만났던 것이 아니었거든."

- 그런 첫인상만 가지고, 사시는 분, 아니시잖아요. 개인적인 감정이랑, 다른 것들, 구분하시는 분이고요. 부군단장님처럼요.

갑자기 히나가 자신을 언급하자 아르센이 조금 놀라 물었다.

"나는 왜?"

- 오늘, 협회장님이랑, 아무 말도, 안하셨잖아요. 계란인 줄 알고, 오리알 사서 주시고, 보라색 꽃도, 사셨으면서.

이렇게 말하며 생긋 웃은 히나가 말을 이었다.

- 오리는, 고양이들이 못 찾아가게, 제가 잘, 볼 테니까, 일 끝나시면, 저녁 같이 드시고, 오세요.

들키는 것 잘 하는 사람 따까리로 살다보니 똑같이 잘 들키게 되어 버린 모양이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묻지도 못하고, 아르센은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 * *

아르센은 변명을 못했다.

칼리안은 짖지를 못했다.

잘 짖으려던 계획을 미루게 된 칼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낮에는 숲 속에서 폭포를 보았는데 밤이 되니 모래사장에서 파도 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에 대해서는 그리 감명받지 못한 채였다.

크리스털 벽과 백금 기둥으로 만들어진 지그프리드 관을 펼쳐 세워두면 저런 모양이 아닐까 생각되는 아름다운 어머니 나무가 칼리안의 뒤에 서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그래.

- 쏴아아아······.

바다가 있었다.

그렇게나 그리워하던 바다를 앞에 두었는데, 지금 칼리안은 마음껏 즐거워하질 못했다. 애초에 보고 싶던 바다는 이곳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다른 생각이 많았던 탓이다.

'어서오십시오, 카이리스의 3왕자님.'

달랐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칼리안의 일행을 대하는 엘프들의 태도가 참 많이 달랐다. 과거에 만났던 장로 제르만의 문제인지 아니면 이번에도 무슨 꿍꿍이가 있어 저러는 것인지 몰라도 엘프들은 칼리안을 '인간 대표'가 아니라 '카이리스의 왕자'로 예우했다.

'대장로께서 내일 오실 예정입니다. 하루를 쉬시고 내일 바로 만나시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일행의 앞으로 다가온 엘프들의 대표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 어떻게 짖겠느냔 말이다. 또 인간의 왕이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하면 가만 두지 않겠노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 곳의 엘프들은 나보다 너를 더 환영하는군."

시오나의 말에, 칼리안은 바다 소금내 사이에 섞인 피 냄새를 느끼며 대답했다.

"역시 치료를 거부당했던 건가."

"내가 여기 왜 왔었는지 너에게 얘기를 했나?"

칼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등 뒤로 보이는 어머니 나무를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엘프 도시에 갔다 나오는 길이라고는 했어. 몸에 칼자국 생긴 엘프가 엘프 도시에 찾아간 이유야 뻔하지. 그런데 여전히 다친 채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면 거절당한 거겠지."

"아. 그래. 치료 받으러 왔는데 거절하더군. 나를 온전한 엘프로 보기 어렵다고 했지. 엘프들은 다른 종족을 치료하지 않으니까."

"네가 대사막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렇겠지. 거기에 더해 고기도 먹고."

쓴웃음을 짓던 시오나가 어두운 바다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밖을 배척해가며 종족을 보호하는 게 엘프들의 생존 방식임을 알지만 기분이 좀 상해 있어서 다짜고짜 덤볐던 것 같아. 미안하군."

"됐어. 지금은 화 안 났어. 사과를 할 거면 제 때 했어야지."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제 때 했어야지."

중얼거리듯 꺼내놓은 말에 시오나가 칼리안의 시선을 따라갔다. 낮에는 무지개 속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이제는 파도 앞에 서있는 왕자가 보였다.

"네 형인가."

"응."

"풀을 잘먹던데."

"응······."

"그래도 제 나이에 비해서는 강해 보이는군, 근육도 좀 있고."

"······ 콩 드셔."

"아. 그래."

"응."

잠깐의 침묵을 채우듯 파도소리가 들렸다.

시오나가 다음 말을 찾아 꺼내들었다.

"그······ 검을 잘 다루는 건 왕가의 핏줄 덕인가."

"아니. 그냥 잘 배우시는 거야. 첫째 형님은 안 저러시거든."

옥수수수염같이 좀 뭐랄까.

더 약한데 더 뻣뻣한 그런 사람도 하나 있어.

라고, 말 못할 소리 하나를 삼킨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런 칼리안을 보던 시오나가 물었다.

"저쪽에게도 제때 사과 못 받은 일이 있나?"

"형님에게?"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을 본 시오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도 엘프만큼 거짓말을 못하는군."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러더니 시오나에게도 클린 마법을 써 주며 말했다.

"당신 상처 벌어졌어. 내일 대장로 만나면 치료해달라고 말할 테니까 멀쩡한 척 말고 가서 쉬어."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오러로 붙들어 놓고는 있다지만 아침을 그렇게 화끈하게 시작하고 이제껏 돌아다녔으니 몸에 무리가 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아직 괜찮으니 걱정 안해도 돼."

"내 일행들 상태 안좋아서 쉬러 들어간 것 아니야. 여기서는 당신이나 나나 이방인이니까 컨디션은 제대로 유지해. 내 짐 늘리지 말고."

그제야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간단히 대답하고 몸을 돌린 시오나에게서 '딸랑' 하는 방울 소리가 났다. 한동안 그런 시오나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파도 소리가 났고, 방울 소리가 멀어졌다.

바람 소리가 났고, 플란츠는 여전히 파도 앞에 서 있었다.

* * *

대장로가 있는 곳에 오른 칼리안이 창 밖을 봤다.

맑은 하늘 아래 짙푸른 바다가 발 밑에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리베른의 영역인가."

세크리티아의 인근 바다는 저렇게 짙은 빛을 내지 않았다. 텐실은 치유력을 지닌 엘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만약 엘프들이 어딘가에 도시를 세우고 카이리스와 연결을 해 두었다면 리베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꺼낸 말이었다.

말린 복숭아와 사과를 넣은 녹차 세 잔을 내려놓은 엘프 한 명이 밖으로 나간 뒤, 칼리안의 앞에 있던 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리베른과 대사막의 사이, 주인이 없는 땅이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왜 엉뚱한 곳에 가서 살려고 해."

찻잔을 들어 향을 맡고 한 입을 마시던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저 동생 놈이 적어도 인사는 하고 말을 할 줄 알았더니 곧장 본론을 꺼내들 줄 몰랐던 탓이다.

미처 자신의 이름도 소개하지 않은 대장로가, 검은 정복을 갖춰입고 앞에 앉아 있는 칼리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르잔이네. 엘프들은 성을 쓰지 않으니 참고하게."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은 채 나르잔이라 자신을 소개한 대장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는 이유를 한참 생각하던 나르잔이 플란츠 쪽을 잠시 보다 대답했다.

"언제까지고 카이리스에 약자일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

"그대가 누구인지는 말해주지 않을 텐가."

기어코 칼리안의 입으로 제 이름을 올리게 하려는 듯한 말에,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그 뒤에는 고개를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카이리스의 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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