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58화 (259/527)

제45장. 바다 보러(5)

- 딸랑.

검은 머리, 빨간 눈.

너구나.

- 카아아앙!

공기가 찢겨나갔다.

검붉은 검에서 섬광이 쏟아졌다.

호수 위로 하나 둘 떠오르는 불꽃같던 모닥불 불티 말고, 결코 식지 않을 용암에서 튀어오르는 듯한 불티가 비산했다.

- 카아앙! 카앙!

섬뜩한 빛이 끊임없이 명멸했다.

순식간에 수 차례의 검격이 오갔다.

'물러나 계십시오.'

방금 전, 방울 소리가 한 번 더 울림과 동시에 들려온 칼리안의 말. 그 이후로 눈 앞에 펼쳐진 갑작스러운 광경이었다.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었다. 니들렌을 포함한 마법사들이 거대한 실드를 펼치고 기사들이 마법사를 둘러싸는 동안 이미 십수 번 이상의 섬광이 어둠을 밝히다 사라졌다.

- 딸랑.

- 쉬이이익! 카아앙!

칼리안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옅은 분홍 빛을 띠는 상대방의 머리카락이 간혹 흔들리듯 눈에 보이다 사라질 뿐, 어둠 속에 잠겨든 칼리안의 그림자를 식별해내기엔 마법사의 시야가 너무 좁았다.

- 카강! 캉!

검은 로브가 펄럭이는 소리, 귀를 어지럽히는 방울 소리, 땅을 박차는 소리, 검이 맞부딪히는 굉음. 그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불 꺼. 실드만 유지해."

말이 나온 직후 실드 위를 흐르며 옅은 빛을 내던 니들렌의 푸르스름한 전류가 사라졌다. 모닥불 위에 모여든 투명한 구체에서 물이 쏟아져내렸다.

- 치이익!

주변을 비추던 밝음이 완전히 사라진다.

불에 타고 남은 재가 물에 잠기며 특유의 시큰한 냄새를 풍기다 서서히 지워져갔다.

- 카앙! 카아앙!

어둠이 내려앉았다.

더더욱 좁아진 시야 속에 두 개의 그림자가 다시 맞붙었다.

일반인에게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어둠이 방해가 될 수 있겠으나 시오나는 어둠에 그리 구애받지 않았다. 그러니 검을 휘두르고 막는 것에 조금의 문제도 없었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있어 어둠이란,

- 카아아앙!

완전한 은신처였다.

어느새 날아온 검붉은 오러의 날이 시오나의 심장 앞에서 멈춰섰다. 곧바로 시야에서 사라진 검이 뒤에서 뻗어나와 시오나의 목을 스치듯 지나쳤다.

검의 경로를 볼 수가 없다.

공격을 마친 직후 흩어지듯 사라졌다가 어느새 어디선가 나타나 다시 찔러오는 검붉은 검은 궤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 카앙!

그럼에도 시오나는 당황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조금 전 목을 스친 검이 등 뒤에서 날아들고 있는 것을 침착하게 막았다. 시오나의 휘어진 검 끝이 칼리안의 심장을 노리고 들어갔다.

- 딸랑.

- 펄럭!

시오나의 검이 크게 휘둘러졌다.

그와 동시에, 달을 등진 검은 로브자락이 하늘에서 내리떨어졌다.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던 하얀 손에 어느새 검이 들렸다.

- 카아아앙!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시작된 싸움.

두 검이 다시 얽혀든다.

"부군단장님. 뒤로 와주십시오."

니들렌이 입을 열었다.

실드를 펼쳐 사방을 막았다. 소드마스터의 오러는 당연히 막을 수 없겠으나 그 밖의 다른 공격은 막힐 것이다.

- 카앙! 카아앙!

칼리안의 검이 시오나의 검을 막은 뒤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살짝 휘어 있는 검날에 미끄러진 검붉은 검이 시오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군단장님."

두 번째의 부름에,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보기나 해."

"네?"

주변에 다른 이가 더 있는 기척을 느꼈다면 물러나 있으라 말할 놈이 아니다.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로브 입은 채 싸울 놈이 아니다. 경계해야 할 상황이라면 일행을 두고 상대방과 따로 맞붙을 놈이 아니다.

그런 놈이 좀 더 여유있게 싸울 수 있도록 불빛을 꺼주고 나니 이제 더 할 일도 없었다.

"더 할 일 없으니까 입 다물고 소드마스터 둘이 인사하는 것 보라고."

검붉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검은 로브자락이 바람에 섞여들었다.

- 카가강! 카앙!

그렇게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어느 정도가 흘렀는지 정확히 가늠조차 안 될 시간이 지났다.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날이 새도록 싸웠다는 것.

짙은 어둠이 걷히고 멀리 하늘이 어느 마법사 머리 색처럼 밝아져 가도록 싸움이 끝나질 않았다.

마법사들의 피로를 생각해 실드를 걷고 경계만 하도록 일러두었다가 이제 경계도 그만하라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한 플란츠의 고민이 시작되었을 때 쯤.

- 딸랑, 딸랑.

- 카강! 카아앙!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쇳소리가 숲을 흔들었다.

저문 달 대신 떠오르는 태양을 뒤에 둔 채로도 검붉은 검은 빛을 잃지 않았다.

둘을 지켜보던 플란츠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피 냄새.'

조금씩 짙어지는 피 냄새 때문이었다.

상처가 모두 회복되지 않았을 소드마스터.

움직임에 방해되는 옷을 입은 소드마스터.

둘의 싸움이 호각을 이룬다. 아무리 로브를 입었다 하나 상대방은 다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보는 플란츠가 굳이 호각이라는 평을 한 이유는 단순했다.

- 펄럭!

칼리안에게서 소리가 나고, 그 움직임이 흐릿하게나마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시오나가 다쳐서 제 힘을 못 내고 있는 만큼 칼리안 역시 온전한 힘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 쉬이익! 카강! 카아앙!

넓게 펼쳐내듯 내뻗은 시오나의 공격을 막아낸 칼리안의 검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한 발을 물려 공격을 피한 시오나가 앞으로 달려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칼리안의 모습이 사라지자 시오나가 허리를 틀며 검을 뻗었다.

시오나가 움직임을 멈췄다. 해를 등지고 선 칼리안의 검은 그림자가 비로소 눈에 보였다. 흩어지듯 사라져가는 검붉은 검이 잔상이 되어 눈에 남았다.

떠오르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찰나와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 ······ 툭!

- 딸랑!

시오나의 검 손잡이에 달려 있던 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안. 시끄러워서."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빌헬름 관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

이 추운 카이리시스에 햇빛 잘 드는 곳보다 좋은 장소는 또 없을 터였다. 그런 좋은 곳에 바로 히나의 집무실이 있었다.

햇빛을 즐기러 온 루시를 따라왔을 안네가 앞발을 들어 몸에 닿으려는 손을 밀어냈다.

그 앞발을 살짝 잡아 인사하듯 흔들어 준 손이 움직이자 안네의 입에서 싫어하는 소리가 잠시 나왔다.

"니우웅."

루시의 털을 모두 빗겼으니 이제 안네 차례였다.

때문에 히나는 싫어하는 것을 살살 달래가며 빗질을 시작했다.

털 빗기를 피하려던 안네가, 의외로 시원한 기분이 든 것처럼 얌전히 있더니 오래지 않아 하품을 했다.

그렇게 빗질을 마쳤을 즈음에는 완전히 잠들어버린 안네를 두툼한 방석 위에 몸을 말고 있던 루시의 곁에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안네의 잿빛 털이 보드랍게 변한 것을 알기라도 한 것인지 기분 좋은 소리를 낸 루시가 앞발을 움직여 안네를 끌어안고 함께 졸기 시작했다.

- 루시가 착해서 안네를 잘 돌봐요. 루시한테 배우는 안네도 착한 고양이가 될 것 같아요.

빠르게 써내려간 글자를 본 에일라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른 아침부터 빌헬름 관을 찾은 히나는 자신을 찾아온 두 고양이 배가 빵빵하게 부른 것을 확인하고 간식 대신 빗을 들었다. 그 후 공을 들여 고양이 빗질을 다 마치도록 에일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였다.

- 차 마실래요?

"녹차는 별로예요."

이렇게 건네진 말에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마 전에 겪어 본 비슷한 일을 떠올린 에일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 할 줄 알아요."

베로니카에게는 버터 많은 랍스터 때문에 입을 열었고, 히나에게는 떫은 녹차 때문에 입을 열었다.

- 녹차 말고 다른 것 가져올게요.

발칸의 치유사이자 자작.

그런 치유사의 호위.

그런데 차를 타오는 것은 늘 히나였다. 평민이었던 버릇을 아직 치워내지 못했거나 히나가 친절한 성격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에일라의 차가 너무 맛이 없었던 탓이다. 에일라의 차는 얀이 타오는 것들 중 실패작이라 할 수 있을 수많은 차보다도 훨씬 더 엉망이었다.

맛있는 것을 좋아한다 해서 차를 잘 타리란 법은 없었으니까.

앨런이 선물해 준, 정확히는 마법사 협회의 보물창고에서 앨런이 훔쳐와 가져다 둔 것을 칼리안이 주워다 히나의 집무실에 놓아 준 급수 장치에서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사실 앨런은 그런 것이 없더라도 물을 만들고 끓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 말 할 수 있는 줄 몰랐어요.

보글거리는 소리 만큼이나 부드러운 필체의 말을 본 에일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별히 말을 해야 할 일이 없어서 그랬어요."

에일라를 데려온 아르센이 서로 이름을 알려주며 소개를 시켜줬다. 그 후 히나는 에일라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며 시간을 보냈고 에일라는 별다르게 입을 열지 않고 고갯짓으로만 대답을 했다.

- 말 하기 귀찮아하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한 명이 더 있었네요.

장난스러운 말을 읽은 에일라가 살짝 웃었다.

누구를 말하는지 몰라서였다. 세작으로 일했다지만 아직 대면하지 못한 2왕자가 실제로 어떤 성격인지까지 알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히나가 살짝 식힌 찻물을 찻잔에 따른 뒤 에일라의 앞에 내려놓았다.

에일라의 시선이 은은한 향을 내는 차에 가 닿았다. 잔을 들지도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그 안을 들여다보는 에일라를 향해 히나가 다시 말을 써 보였다.

- 파란색 차 신기하죠? 머리 색이랑 비슷한 것 같아서 가져다 놨어요. 제비꽃이예요.

히나의 말대로 에일라의 머리색과 썩 닮은, 푸르고 맑은 바다 빛의 차였다.

에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의 비녀 끝에 달린 하얀 구슬이 흔들리며 이른 아침의 햇살에 반짝였다.

- 그거 예쁜 것 같아요.

비녀를 하고 온 모습을 처음 본 히나의 칭찬에 에일라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말을 할 수 있음을 알았으니 말을 하게 하려는 의도임을 눈치챘지만, 악의가 담긴 것은 아니었으니까.

"보여주긴 힘들어요. 예쁠지는 몰라도 안전하지는 않거든요."

히나가 눈을 다시 동그랗게 떠 보이더니 아, 하는 입모양을 만들어냈다.

- 무기?

"네. 독이 들어 있어요."

그것이 암기임을, 그리고 어떤 종류의 암기인지를 알려준 것은 에일라 나름의 신뢰 표시였다.

- 비슷한 무기는 많이 봤는데, 봤던 것들 중에는 제일 예쁜 것 같네요.

그리고 히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해서 에일라를 조금 놀라게 만들었다. 티 없이 산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랬다면 안전하지 않다는 말에 바로 무기를 떠올린다거나 무기를 많이 봤었다는 말을 하지는 못할 테니까.

다시 무언가를 열심히 써내려 간 히나가 그것을 보여주며 생긋 웃었다.

- 다음에는 보여 줄 수 있는 것을 하고 와 줘요.

에일라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그래도 괜찮은 곳이니까요.'

입모양으로 이어진 말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햇살 잘 드는 소파 위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잠을 자는 곳. 독이 들지 않은 비녀를 하고 와도 괜찮은 곳.

"수어 알려주세요. 배울게요."

그런 곳에서 함께 지내게 될 사람의 말을 다 배울 때 쯤이면, 흔쾌히 구경시켜 줄 수 있을 비녀를 하고 와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칼리안이 손에 들린 방울을 건넸다.

시오나가 한동안 가만히 있다 그것을 받아들었다.

딸랑,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떨어졌던 방울이 시오나의 손바닥 위에 올려졌다. 그 후 칼리안은 기사에게 무언가를 전달받아 시오나에게 직접 건넸다.

깨끗한 붕대였다.

"피냄새 심해. 일행 중에 되게 예민하신 분이 계셔서 좀 가려줬으면 좋겠는데."

곁에 앉아 있던 플란츠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시오나는 이번에도 다른 말 없이 그것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고맙다는 뜻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던 칼리안이 그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필요하면 도와주고."

"됐어."

은색의 링이 채워진 길고 뾰족한 시오나의 귀를 보던 칼리안이 쓴 것을 삼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스스로 잘라냈다던 히나의 귀도 본래는 저랬으리라는 생각이 다시 든 까닭이었다.

겉옷을 벗고 속에 입은 검은색의 얇은 셔츠 위에 건네받은 붕대를 대충대충 감은 시오나가 입을 열었다.

"시오나 힐."

"알아."

시오나의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칼리안은 어깨를 으쓱여 보인 뒤 무언의 말에 대한 답을 전했다.

"나는 내 입으로 내 소개를 할 필요 없는 사람이라."

상대의 이름을 들었으니 자신의 이름을 알려줘야 할 차례임을 알았으나 칼리안은 이렇게만 말했다. 어차피 상호 안면을 트자는 것이지 정말 이름을 몰라서 주고 받는 인사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인 뒤 겉옷을 걸쳐 입었다. 검 손잡이 끝에 떨어졌던 방울을 다시 묶기 시작하는 시오나를 보며 칼리안이 물었다.

"설명해야지. 나를 왜 찾아왔는지."

"슬레이만 목을 그어놓은 놈 칼이 어떤지 구경 좀 해보려고."

"엘프라 다행이네. 인간이었으면 왕족 공격한 죄로 사형될 텐데 체포를 못 하겠어."

시오나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이해심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지금은 혼자가 아니기도 하고, 엘프들에게는 내가 덜 너그럽기도 하고. 그러니까 제대로 설명해줬으면 해."

재밌다는 얼굴로 대답한 칼리안이 시오나의 금빛 눈을 쳐다봤다.

"왜 왔는지."

목을 죄는 살기가 숲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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