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57화 (258/527)

제45장. 바다 보러(4)

자주빛의 와인을 보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세리에의 머리색을 닮아서 독주를 물리고 와인을 즐기게 되었음을 안다. 물론 칼리안이 아니라 베른의 지식이었다.

"조금 전의 일은 미안했습니다, 지그프리드 공."

얀과 드미레아의 아버지인 슬레이만 말고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가주 슬레이만. 사적인 부분을 배제한 왕자의 입장에 섰을 때 공작인 그를 온전히는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사과였다.

"여기에서 사흘은 더 가야 나오는 집에서 아들 애칭 딴 강아지나 쓰다듬고 있어야 할 사람이 피 냄새를 풀풀 풍기며 들이닥쳤으니 놀라셨을 법도 합니다. 게다가 듣자하니 작은 코끼리가 좀 다른 곳으로 걷기 시작한 듯 하던데, 이런 상황에서 집에 놀러 온 새끼 늑대를 마냥 반겨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실 만도 하고. 그러니 이해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라가 아주 흥미진진하게 돌아갈 것 아닙니까."

시원한 목소리로 대답한 슬레이만은 칼리안이 보여 준 모습이 다시 생각났는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웃음을 멈춘 슬레이만이 칼리안의 앞에 놓인 와인잔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안전하게 잘 자고 있을 새끼 늑대 내버려 두고 왕자님도 이만 한 잔 하시지 그러십니까."

"저는 술 끊었습니다."

언젠가 플란츠에게도 했던 대답이 똑같이 나왔다.

외모와의 괴리감이 깊은 대답이겠지만 뭐 어떻겠나. 희멀건한 그 풀대가리도 술 끊었다는 소리 듣고 사는데.

"이 좋은 것을 끊으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아니었으면 아마 망나니 꼬리표는 형님이 아니라 제가 달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좋아하셨습니까."

"······ 글쎄요, 그냥 기대어 살았습니다."

열 여섯 살 왕자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슬레이만은 비웃음 없이 고개만 주억거리다 입을 열었다.

"왕자님 알맹이가 본래에는 어땠을지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한 번 쯤 직접 만나봤으면 좋았겠다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미 그 알맹이와 만나고 계시지 않습니까."

"초대왕께서 나이를 드심에 따라 시스파니안께서도 흰 머리를 만드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했던 영웅이라 하나 사람인 이상 겉모습에 구애받지 않고 살 수는 없으니 시스파니안께서 맞춰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투명한 보랏빛의 와인 한 모금을 넘겨 목을 축인 슬레이만이 말을 이었다.

"왕자님도 사람이니 똑같으실 겁니다. 어떤 알맹이든 결국은 껍데기에 맞춰지는 법이니 그 대단했을 원래 알맹이가 궁금할 수 밖에요."

칼리안은 대답 없이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어떤 분이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어떤 사람이었을까."

붉은 빛의 눈이 찻잔을 향했다.

무엇인지 잘 모를 노란 빛의 꽃이 들어간 차에서 참 좋은 향이 났다. 따뜻한 차를 마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어쩐지 얀이 생각나서 따뜻한 차를 달라 했다.

얀 대신 술에 기대 살았고, 히나 대신 발 끝을 보고 살았고, 술에 취해 키리에에게 업힌 적은 있었지만 다친 채로 누군가에게 업힌 적 없었던 사람을 잠깐 떠올리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내기를 곧잘 하고, 칼 잘 쓰고, 잘 지키고. 끝내 불행하지는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 참 지그프리드와 잘 어울렸겠습니다."

슬레이만은 자세한 것 하나 없는 그 이야기가 썩 마음에 든다는 듯 또 한 번 웃음 소리를 냈다.

시장저의 옥상에 만들어진 작은 정원에는 아직 풀내음이 짙었다. 이곳이 카이리시스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고, 또 그만큼 세크리티아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찻잔에 시선을 둔 채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칼리안의 귀에 슬레이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에게 밴 피 냄새가 시오나의 것입니다."

빈 잔에 와인 채워지는 소리가 잠시 청량하게 울렸다. 방금 채운 술잔을 금세 되비운 슬레이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왕자님. 소공작이 대문을 닫았던 날에 왕자님께 해를 입힌 이들이 대사막의 늑대였습니까."

"맞습니다."

"대사막의 전사들이 아무리 강하다 하나 왕자님을 그렇게 만들 사람은 한 명 뿐인 것으로 압니다."

"······ 시오나 힐 뿐이겠죠."

대사막의 전사.

정확히는 대사막의 전사였던 소드마스터.

"혹시 그럼 그 때 왕자님을 공격한 이가······."

"아닙니다. 저를 공격한 것은 다른 전사들이었습니다. 제온이라는 단체에 속한 이들입니다."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제온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 뒤에는 얀과 퍽 닮은 둥근 눈매가 생각에 잠겨드는 것을 보며 물었다.

"시오나가 그들에게 당했습니까."

"오러에 의한 상처를 입고 다 죽어가는 채로 찾아왔습니다. 왕자님의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되는군요. 그 단체의 소행이었나 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한 슬레이만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뒤쫓던 이들은 영내로 들어오지 못한 채 도망쳤고 시오나는 어찌저찌 근 한 달에 걸쳐 살려냈습니다. 계속 제가 옆을 지켰으니 그렇게 피 냄새가 짙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혹시 아직 이곳에 있습니까."

"어제 아침에 사라졌습니다. 다 낫지 않은 몸이라 지금껏 찾아다녔는데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슬레이만이 칼리안에게 '손님을 마중하러 온 것인지 배웅하러 온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시오나가 다시 찾아올지, 이 땅에서 영영 사라졌는지 확신하지 못한 탓에.

"제온과 연관은 있되 그들과 같은 편은 아니라는 소리겠군요. 크게 다쳤다 하니 시오나가 그 힘에 휘둘리는 것도 아니라는 뜻일 테고."

우선은 적당히 안심할 수 있을 소식이었다. 칼리안이 걱정한 것은 소드마스터의 개죽음이 아니라 소드마스터가 체스 말로 이용당하는 일이었으니까.

"혹시 쫓기고 있다면 앞으로는 어찌 될 지 알 수가 없으니 그 행방도 계속 추적을 해봐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왕자님."

어쩐 일로 슬레이만이 앞서서 나섰다.

그것이 낯설어서 쳐다보니, 슬레이만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둔해 빠진 왕이나 입에 가시 박힌 마법사 만큼이야 아니지만 그 쪽 역시 그럭저럭 오래 된 친우입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니 제가 수소문하여 보겠습니다."

"혹시 알게 되면."

"네. 왕궁이나 수도의 공작저로 연락을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공께서도 조심하시고요. 만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알고 있는 소드마스터라고는 딱 셋 뿐인데 그 중 둘을 잡아버릴 뻔한 놈들 아닙니까.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칼리안, 테일란 카스트린, 시오나 힐. 이렇게 셋이다.

에반과 그레이는 아예 계산에도 넣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참동안 향을 음미해가며 와인을 마신 슬레이만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소공작이 저 모르게 아이 하나를 키운다 들었습니다만 도무지 말을 해주질 않아서 궁금합니다. 왕자님 혹시 아십니까."

처벌 때문에 올해 안에는 수도에 들어오지 못할 슬레이만이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저도 모르게 주변에 가득한 잔디를 응시하던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브리센의 핏줄을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 데려갔다는 이야기는 제3자를 통해 전할 내용은 아니었다.

"소공작에게 직접 들으실 일인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와인잔에 보랏빛이 채워졌다.

* * *

타닥, 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가 싫지 않다. 아니, 오히려 반갑다.

첫 노숙에 전부 다 불침번을 서겠다고 나서기에 계속 고집부리면 전부 다 강제로 재우겠다 말했다. 일단 칼리안은 며칠은 잠들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고 왕궁과 지그프리드령을 벗어난 이후로 왕자보다는 일행 중 가장 강한 사람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칼리안이 아직 슬립 마법에 서툴다는 사실과 아르센 뒷목의 시퍼런 멍을 함께 떠올려 본 대원들이 곧바로 침낭 안에 쏙쏙 들어가 잠에 빠져들었다.

잠잠해진 가운데 빨갛게 타오르는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는 칼리안의 머릿속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런이었다.

- 엘프들이 어디에 사는지는 찾으셨습니까.

- 아직이요. 지난 번에 들렀던 마을과 비슷하게 숨겨 두었을 테니, 시스파니안께서 일러주신 곳까지 가면 이리저리 살펴 볼 생각입니다.

- 당장 찾지 못하신다면 일단 돌아오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 제온의 일당이 인근에 있을지 모른다 하니 저도 고민을 했습니다만.

꽤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다시 수도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엘프들을 찾아갈지.

차라리 혼자 떠나온 길이면 에라 모르겠다 가던 길 마저 가자 할 텐데 딸린 짐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 발칸의 대원들은 제 목숨 하나씩은 어찌저찌 간수한다 하더라도 파피루스 새싹같은 한 놈이 아직 제 몫을 못 했으니 말이다.

- 누구든 함부로 덤비지는 못하리라 생각이 들어서 빨리 끝내고 돌아가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무턱대고 덤비기에는 지금 제 일행이 너무 비범해서요.

- 하긴. 비범하기로는 아마 시스테라 대륙에서 으뜸일 겁니다.

왕실의 군대, 서른 명의 기사와 열 명의 마법사. 일행 중 반의 반이 마법사인 만큼 결코 무시하지 못할 화력을 가졌다.

- 그래도 혹시나 주의를 놓치지는 마십시오. 혼자 움직이시는 것과는 다른데다 플란츠 왕자님도 그 쪽에 계시니.

- 네. 알겠습니다.

물론 칼리안은 파피루스 새싹의 실낱같은 목숨 정도는 충분히 건사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잘 마친 뒤였다.

- 왕궁에는 별 일 없습니까?

빛을 발하는 팔찌를 소매로 가린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체이스와 연결된 반지를 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양 쪽에 반지를 하나씩 끼기에는 영 불편해서 앨런이 반지를 끼고 칼리안이 팔찌를 꼈다. 왕궁 안에서 통신이 가능하도록 개조하는 것에 더는 신경쓰지 않기로 한 앨런이 알아서 기능을 바꾸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오랫동안 웃음을 터뜨렸는지 모른다.

- 전하께서 또 심장을 떨굴 뻔 하셨는데 별 일은 아닙니다.

-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 아드님 둘이 하루아침에 또 사라져서 그렇습니다.

- 왕궁 밖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형님께서 이미 설명을 드렸다 들었는데요.

- ······ 과연 그것을 설명이라 해야 할지.

앨런의 말 끝에 든 의문이 퍽 진했다.

- 왕자님이 도망칠 것 같아서 잠깐 나가 잡아오겠노라 했답니다. 그래서 잠시 외출하는 것을 허락했는데 알고 보니 발칸까지 싹 끌고 쫄랑쫄랑 따라나선 것이었으니 놀랄 만 하지 않겠습니까.

- 잠시 외출······. 전하께 허락을 받은 것처럼 당당하게 말하기에 대체 무슨 말로 허락을 받아냈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 아무튼 전하는 잘 달래 두었으니 신경쓰지 마시고 할 일 모두 마치면 돌아오시지요.

- 네. 고맙습니다.

어쩐지.

르메인이 호락호락하게 허락을 해줄 리 없다 여겼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다.

좀 떨어진 곳에 자신과 비슷한 꼴로 앉아 모닥불을 들여다보고 있는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래서야 몰래 도망친 칼리안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 에일라라는 그 아이는 한 시를 안 떨어지고 히나 옆에 잘 붙어 있습니다. 대신 왕자님 왕궁에 돌아오시면 새끼 코끼리에게 사흘 밤낮은 잔소리를 들으셔야 할 것 같으니 그건 각오하고 오시면 되겠습니다.

맑은 웃음소리가 잠시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 알겠습니다.

- 그리고 리베른의 두 마법사는 별 일 없다 합니다.

아, 하고.

칼리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앨런은 늘 이렇게 중요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툭 꺼냈다.

- ······ 리베른에서 연락이 왔나보군요.

- 이야기는 잘 마쳤으니 염려 마십시오.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를 떠올린 칼리안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걱정 말아라 신경쓰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아라 하지만 지금 앨런이 얼마나 속을 끓이고 있을지를 잘 알고 있었다.

- 제가 스승님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엘린느를 떠올릴 때 함께 생각날 이가 있을 것이 뻔했다.

이런 때 눈치 없게 아버지 소리를 꺼내놓으며 어줍잖은 위로를 하겠노라 나설 수가 없어서, 결국 칼리안은 담백한 말만 앨런에게 건넸다.

- 이렇게 멀리 와서는 모닥불이나 구경하고 있네요.

-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제 아들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는데 위로는 커녕 걱정만 잔뜩 끼치고 있으니 이를 어쩝니까.

앨런은 그런 미안함마저도 받지 않았다.

하고 싶은 위로 해도 된다며 이런 상황에서도 칼리안을 읽고 살폈다.

그래서 칼리안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를 보냈다.

- 대신 좋은 술 사 갈게요.

- 좋지요. 히몰리카든 시즐리누든 좋으니 한 병만 사다 주십시오.

- 돌아가면 같이 마셔요······ 아버지.

아주 잠시동안 말 없던 앨런이 대답을 전해왔다.

- 그래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모닥불이 따뜻한지 말이 따뜻한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칼리안은 팔찌를 한참동안 내려다봤다.

같은 이름이라 해도 지방마다 맛이 다 다를 독주를 사갈지. 지그프리드의 와인을 사갈지. 그것을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둘 다 사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자 새빨간 눈 속에 고운 웃음이 들었다.

몇 마디 말을 더 나눈 칼리안이 앨런과의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는 마력이 사그라들어 서서히 줄어드는 팔찌의 빛을 잠시 바라보다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평온한 밤.

나무 타는 소리가 고요함보다 더 조용히 들려왔다.

"······ 춥지는 않으십니까."

"안 추워."

그래. 평온하다.

완두콩이 안 잔다는 문제만 빼면 말이다.

"주무시죠."

"아직."

"네."

도로 짧아진 대답에 짧게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채 똑같이 모닥불을 쳐다보는 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배는······."

"안 고파."

"네."

애석하게도 지그프리드 공작령은 마법사의 손이 닿지 않고도 싱싱한 것이 최고라 여기는 곳이었다. 그래서 보존 마법이 걸린 먹을 것을 구하지 못했다. 하필이면 플란츠가 잘 골라온 이들 중 보존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도 없던 덕분에, 칼리안은 그냥 시트렌 시장에게 건조 식품과 비스킷만 좀 받아내 플란츠의 손에 쥐여줬다. 야생 닭은 못 먹을 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놈이 먹었다.

야생 닭 말고 무려 야생 멧돼지를 먹었다. 물론 대원들 다 제쳐두고 또 혼자 신난 칼리안이 잡아 온 멧돼지였다.

딱 두 조각 먹고는 비스킷을 꺼내들긴 했지만 아무튼 인상 찌푸리지 않고 먹긴 했다.

부는 바람에 불티가 튀었다.

아마 그것조차 처음 보았을 플란츠가 바람에 흩날려 사라져가는 붉은 빛을 하염없이 눈에 담고 있었다.

"안 불편하십니까."

"불편해."

참 곱게 자라서 맨 땅에 앉는 것도 불편하고 맨 땅에 눕는 건 더 불편하고 제대로 간도 안 된 멧돼지 고기 먹는 것도 불편하고 날아드는 날벌레도 불편할 놈이, 한 번도 티를 안 냈다.

그래도 이제는 물어보면 칼리안에게는 솔직하게 대답을 해주니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울지 못해 웃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노릇이다.

"불편하다는 말은 또 왜 안하십니까. 싫다는 말도 안하시더니."

나무 둥치에 모포를 깔고 앉아있던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연두색 눈에 붉은 불이 비춰지는 것이 그리 잘 어울리지는 않는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쨌거나.

기억 속 끄트머리 어딘가의 일들을 꺼내 태워내는 듯한 저 모닥불 앞에 앉으면 속에 담은 것이 하나 쯤은 튀어나오게 마련이라.

"소용 없었어서."

플란츠가 이렇게 하나를 꺼내놨다.

싫다는 말, 불편하다는 말이 소용 없었다는 놈을 보니 덩달아 속에 담은 것을 꺼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 칼리안이 연두색에 든 불에서 눈을 떼고 자신의 발을 쳐다봤다. 그런 놈이 대체 '나'에게 왜 그랬느냐 묻고 싶은 것을 그 발 끝에 묻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난다 한들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고 그 누구도 이해해서는 안될 일. 그러니 그 누구도 아닌 지금의 칼리안만은 절대로 다가서면 안 될 일임을 상기하며 다시 묻었다.

"······ 불편하다 얘기하셔도 됩니다."

결국 이렇게, 플란츠는 하나를 꺼내놓고 칼리안은 하나를 집어넣은 셈이 되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칼리안의 눈에 흙 묻은 재킷이 보였다. 망할 놈이 고양이 털 떼주던 동생만 믿고 동생 입을 까만 옷은 챙겼는데 정작 자기가 입을 다른 옷은 안챙겼단다.

아니.

챙기긴 했다. 똑같이 새하얀 제복 한 벌은 더 있단다.

······ 누군 아주 마력이 남아나는 줄 알지.

[클린]

오늘 하루만 서른 번은 넘게 쓴 것 같은 마법을 다시 썼다.

"넌 왜 말 안하는데."

"무엇을요."

"마법. 불편하다고."

오늘 하루만 서른 번을 넘게 같은 마법을 쓰면서 왜 불편하다는 말을 안하는지. 굳이 이런 하얀 옷을 만들어서 괜한 고생거리를 만들었느냐는 말을 왜 안하는지.

"알 것 같아서요. 왜 하필 흰색인지."

과거의 르메인이 만들고 플란츠가 완성시킨 발칸 마법사들의 로브도, 지금의 플란츠가 만든 기사단의 제복도 왜 하필 흰색인지. 마법사들이야 늘 청결할 수 있다지만 왜 굳이 기사들의 옷도 하얗게 정했는지.

"저는 묻어두려 하고 형님은 떠올리려 하고. 그래서인 것 같아서."

그 옷에 묻을 다른 이의 생을.

"······ 반말."

"같아서요."

그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무세요."

"싫어."

"왜 싫으신데요."

"불편해."

"복습하십니까."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올랐다.

"그런데 색깔 좀 바꿔주시면 안 됩니까. 흰색 아니어도 뭐 묻은 건 티 나는데요."

"굳이 왜."

"같이 다니려니 저만 까마니까 좀 부끄러워서."

"반말."

칼리안이 정정하지 않고 씩 웃었다.

다 하얀데 머리만 파릇한거 너 그거 되게 양파같은 줄은 아시느냐고. 입을 열면 그 말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자칫하면 이제 몽글몽글 익힌 것도 안 먹는다 할까봐.

"아무튼 이제 정말 주무셔야······."

생글거리며 꺼내놓던 말이 멈췄다.

- 화악!

어느새 소름끼치는 눈빛을 한 칼리안이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뒤로 돌아섰다.

타닥, 타닥.

눈에 띄는 것 상관 않고 피운 모닥불이 타오르는 평온한 밤.

- 딸랑.

눈치 채는 것 상관 없이 소리를 내는 이의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새 자리에서 일어난 대원들과 플란츠, 그리고 손님.

그 사이에 선 칼리안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대사막의 늑대였던 소드마스터.

허리에 찬 검 손잡이 끝에서 딸랑, 하고 작은 방울 소리가 울렸다.

"······ 시오나 힐."

뾰족하고 긴 귀 끝에 채워진 은색의 작은 링이 모닥불 빛에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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