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장. 바다 보러(3)
······ 티끌 같기도 하고.
저 놈 가디건에 늘상 붙어있던 안네 털 같기도 하고.
백조 무리에 낀 까마귀도 아니고 나만 까매. 나 혼자 까매. 혼자 음침한 것 같기도 하고 나쁜 짓 하다 잡힌 범인 같은 기분인데 이거 뭐야. 뭔 상황인데.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죄다 하얀 가운데, 실로 도도하리만치 홀로 새까만 칼리안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본 레릭이 함께 서있던 다른 시종 한 명에게 눈짓을 했고 무언가를 가지고 다가온 시종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정복입니다, 칼리안 왕자님."
왕자의 정복.
지금 로브 안에 입고 있는 검은 정장과 비슷하게 까맣지만 제대로 격식을 갖춘 옷을 본 칼리안이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아주······."
아주 작정을 했구나.
플란츠.
차마 이 자리에서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을 삼키며 웃던 칼리안이 정복을 받아들고 다시 웃었다. 기가 막혀서 한참을 웃다가, 하도 웃어서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을 한 채로 레이븐의 안장에 매어 놓은 까만 가죽 가방을 열어 받은 것을 욱여넣었다.
앨런에게 빌린 것 말고 칼리안의 공간과 연결된 레이븐의 가방 안에 거추장스러운 정복과 붉은 망토가 차곡차곡 잘도 들어갔다.
"형님."
가방을 닫은 칼리안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플란츠를 부른 뒤 천천히 움직였다. 조용한 발굽 소리가 레릭의 귀에 몇 번 들리다 갑자기 잠잠해졌다.
사일런트를 발현한 것이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내 정복이지만 아우님께도 맞을 듯 해서."
물론 지금 칼리안이 궁금한 것은 그런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으나,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플란츠는 제 할 말만 했다. 그것이 답답했던 칼리안이 짧게 대꾸했다.
"그것 말고요."
"같이 가려는 이유는 설명했는데. 다른 문제 있나."
"형님께서 나서야 할 일 아니라는 것 아실 테고 이유도 잘 아실 분이 왜 이러십니까. 그렇게까지 도와주고 싶으시다면 제가 대원들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협상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권한 없이 힘만 가져간 놈의 말이 잘도 통하겠군."
실제로 발칸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없이 대원들만 데리고 가 보아야 아무 소용 없다는 말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처음부터 저는 제 힘만 가지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권한 없이 힘만요. 마법사도, 기사도, 왕자의 정복도 두고, 형님도 두고, 그냥 저 혼자서요. 그렇게 다녀와도 충분히 잘 끝날 일입니다."
"잘 끝난다는 것이 유리하다는 말은 아니지 않나."
"불리하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인 것도 아닙니다."
"쉬운 길을 두고 왜 혼자 가겠다는 건데."
"혼자 가야 다른 문제 없이 해결 될 일이니까요."
"짖지 말고."
플란츠의 입에 조소가 올라갔다.
"굳이 뱀 잡는 일에 그 자리를 써먹을 생각이 없는 것 아닌가. 세크리티아 국왕과 연관된 일에 카이리스 3왕자가 가진 것들을 이용하기 싫어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싫은건지. 아니면 미안한건지."
이 말까지 들은 뒤에야 칼리안이 비로소 상황을 이해했다. 플란츠가 '하나 뿐인 아우님' 소리까지 해가며 길을 막아선 이유를 알게 됐다.
데블란과의 일을 해결하는 것에 '칼리안'의 권한을 쓰는 것이 꺼려져서 이렇게 혼자 도망치듯 왕궁을 나섰다고 생각해 이 난리를 피운 것이다.
오해를 풀겠다는 듯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싫은 것도 아니고 미안한 것도 아닙니다. 제가 누구로 살겠다 마음 먹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이제 그에 대해서는 고민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럼 뭔데."
"이 자리에 대한 부채감이 아니라 이 자리에 대한 부담감을 가졌기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타국과 연관된 문제에 군대 끌고 나섰다 일 틀어지면 전쟁납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전쟁 일으킬 생각 없는 사람이고요."
"파란 머리 마법사 말고 내가 왔으니 된 것 같은데. 틀어지면 군대 데려온 부군단장 말고 발칸 대원들 호위로 끌고 온 2왕자 하면 되는 일인데 문제 될 것 있나."
"참 쉽게 말씀하시네요. 이건 왕실에도 영향을 미칠 문제라는 것은 아십니까."
플란츠가 별 일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전하께 설명드렸고 마나실 군단장에게는 대원 차출 허가받았고, 파란 머리 마법사와 상의 끝낸 일인데."
"형님."
"소금 좋아하는 분홍 머리 마법사 포함한 발칸 대원들한테 동행 동의 받았으니 됐고."
"형님."
"브리센 후작은 아직 정신 못차리고 있으니 왕자 둘이 밖에 있다 해서 다른 일은 못 꾸미지 않나. 란델 형님은 아직 심장이 묶여 있으니 동생 둘이 없어진다 해서 왕궁 문 닫을 생각은 못하실 듯 한데."
"형님, 좀."
"내가 이 이상 어떤 부담감을 가져야,"
"플란츠."
"······ 왜."
플란츠가 자신의 말을 자른 이를 노려봤다.
"굳이 나서야 할 일 아니라는 것도 잘 아시면서 같이 가야 할 핑계 찾아 입에 올리고 있는 건 제가 아닙니다. 고집 부리지······."
"체이스처럼 취급하지 마. 짜증나니까."
그래서 플란츠도 똑같이 말을 잘라먹었다.
"얘기 한 것 같은데. 나는 전부 다 당신한테 맡겨두고 물러나 있을 생각 없다고."
플란츠가 불꽃 담은 눈 속에 든 사람을 똑바로 마주봤다. 그 입에서 느릿한 말이 이어졌다.
"살려놨고 가르쳐놨으면 제대로 써. 쉬운 길 돌아갈 생각하다 또 뒷통수 맞지 말고."
"······ 말씀 참 잘하시네요."
"내 아우님이 워낙 잘 가르쳐주신 덕분에."
미간을 찌푸리던 칼리안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르친 것 써먹으라 하는데 뭔 소리를 더 하겠나 싶다. 그러니 결국 이번에도 한 발을 물릴 수 밖에.
"평소에도 저렇게 길게 말하면 오죽 좋을까."
그럼에도 심기 불편한 것은 가라앉질 않아서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무 하나 협박하러 가는데 그게 이렇게 비장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제가 다 벌인 일이니, 알겠습니다. 원하시는대로 같이 다녀오시죠."
허락일지 수긍일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됐건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동행하겠노라는 소리에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님."
하지만 칼리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또 뭐."
칼리안이 손가락 하나를 펼쳐 플란츠를 가리켜보였다.
정확히 말한다면 플란츠라 하기보다는 티 하나 묻지 않은 제복을 향해 손을 뻗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리 똑똑하시니 이미 잘 아시겠지만 이동 마법진 써야 해서 짐도 참 단촐하고 요리사는 당연히 없습니다."
구운 대구는 둘째치고 덜 익힌 스테이크도 못 먹고 맨바닥에 앉아 본 것은 딱 세 번 뿐인 플란츠의 얼굴은 하나도 못 본 척, 칼리안이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곱게 자라신 우리 형님······ 제 뒷통수 칠 생각 말고 노숙할 각오는 하고 오셨는지."
칼리안의 새빨간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 *
책 한 권 정도의 두께였다.
크기는 앨런의 손바닥을 세 개 쯤 합쳐놓은 정도였다.
'선물 보낼 때가 아닌데 이것만 따로 왔어요, 후작님.'
에우리아를 통해 받은 것이었다.
7서클의 다른 두 마법사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아봐달라는 칼리안의 부탁을 받고 리베른에 전서구를 보냈다. 그 후 도착한 선물이니 아마도 앨런의 질문에 대한 답일 터였다.
"그냥 새를 쓰면 될 것을 어찌 이렇게 거창하게 구시나."
투명한 수정판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린 앨런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날카로운 눈 속에 들어찬 여러 해묵은 것들을 그렇게 집어넣은 뒤 수정판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 우우웅······.
미세한 진동과 함께 수정판에 빛이 돌았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으나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를 만큼 어수룩한 앨런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진한 커피 향이 익숙해진 코 끝에 더 이상 아무 향기도 느껴지지 않을 때 쯤. 세워두었던 수정판 위에 커피 향기 만큼이나 익숙했던 얼굴이 그려지듯 나타났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대는 여전히 버릇이 없네."
그러다 이렇게, 장난스러운 말이 건네졌다.
갈색이라고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밝은 금발, 그리고 짙은 분홍빛의 눈동자를 보며, 앨런이 입매를 끌어올렸다.
"갈 수록 능력은 좋아지고 나이도 늘어나니, 버릇 정도는 없어져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인사는 할 줄 알았거든."
"굳이 그런 것을 따질 사이가 아니리라 생각했지요."
수정판 안의 얼굴이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베른의 국왕이시여."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을 빼면 달라진 것이 없는 앨런을 본 엘린느가 물었다.
"좀 피곤해 보이는데?"
"요즘 잠을 잘 이루지 못해 그렇습니다. 걱정은 마십시오."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엘린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 그럼 이제 무슨 말을 할까. 그대가 궁금해했던 것을 바로 얘기해주고 말을 마치기에는 너무 삭막한데. 리베른에서 새로 만든 통신 마법 자랑부터 할까. 아니면 그대 나라의 과묵한 국왕에게도 그렇게 잔소리를 하는지를 물어볼까."
"새로 만든 통신 마법이 참 대단하다는 것은 지금 보고 있으니 그것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소 같기만 한 분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기도 피곤하니 그것도 되었습니다."
"흠. 그럼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이렇게 한동안 이야깃거리를 고민하던 엘린느는, 결국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가능한 늦게 전하려던 본론을 입에 올렸다.
"두 마법사는 지금 마탑에 있어. 지켜봤지만 의심되는 것은 아직 못 봤고."
"전해드린대로, 그들의 힘이 대마법사에게 닿으면 막기 어려우실 겁니다. 마력탄에 불 붙지 않도록 잘 지켜보십시오. 물론 다른 고서클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인이 소드마스터의 힘을 쓰도록 만든다 하니 어느 정도 위험한 물건일지 상상도 잘 안되지만. 그만큼 주의해서 살펴볼 테니 너무 걱정 말아."
"알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을 주시지요."
이렇게 말한 앨런이 수정판을 톡톡 치며 말했다.
"이것을 곁에 두고 항시 살필 터이니."
"그거 비싼 거야. 그대 마차보다 더 비싸니까 그렇게 툭툭 건드리다 망가뜨리지는 마."
앨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말이 끊겼다. 본론이 나와버렸으니 더 할 말이 없었던 탓이다.
괜스레 아쉬웠는지 혹은 다른 궁금한 것이 있었는지 몰라도, 엘린느는 대화를 마무리하지 않고 가만히 앨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앨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드님은 잘 계시는지요."
엘린느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앨런이 삼켜낸 해묵은 것들이 엘린느의 얼굴에 잠시 올라왔다 사라진다.
대마법사에게서 아들을 앗아간 원인이 자신임을 알면서도 아들 잃은 것의 복수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던 왕이 소리 없는 긴 숨을 내뱉었다. 세상 그 어떤 귀한 것을 선물해도 갚을 길 없는 빚을 진 탓에 죽을 때까지 갚기만 해야 할 사람의 후회가 스치듯 비쳤다.
"작은 왕관을······ 씌워놨더니."
침묵을 이어나갈 권리도 없을 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매사 어찌나 참견이 심한지. 골치는 좀 아프지만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어."
"그래요. 더는 엇나가지 않는 듯 하니 다행한 일입니다."
"그래."
"제 걱정은 마시지요. 잘 지내고 있으니."
그리고 앨런은 이렇게, 엘린느가 가장 궁금해하고 있을 것에 대한 답을 꺼내어 기어코 엘린느의 고개를 꺾어놨다.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앨런의 말을 받아 넘긴 엘린느가 다시 앨런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알려주어 고맙다 하면 내가 나쁜 사람인가."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으실 분이니 상관 있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더 나빠질 것이 없지."
이렇게 대꾸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엘린느를 향해 앨런이 다른 말을 하나 꺼냈다.
"새 아들이 하나 생겼습니다."
엘린느가 말 없이 앨런을 바라봤다.
"제 속 앓는 만큼 아비 속도 앓게 만드는 어여쁜 놈입니다. 빈 자리를 채우려 들지 않고 새 자리를 만드는 마음 깊은 아이입니다."
세상 그 어떤 귀한 것을 보내도 거절 않고 다 받아주는 것으로 하나씩 용서해가고 있는 마법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그러니 다음에 보실 때에는 잘 지냈느냐 먼저 물어보셔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엘린느의 입가가 잠깐 흔들리다 웃음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 그래.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고맙다는 말이기도 했고, 미안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것을 다 알아들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루를 꼬박 달렸다.
급할 것은 없었으나 느긋하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왕궁을 오래 비워둘 수 없었던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식사는······."
레릭이 걱정하는 마음으로 포장해 준 식사는 점심에 다 먹었다. 마법사들에게 보존 마법 부탁해가며 자신이 먹을 음식 싸가지고 갈 위인이 못 되는 탓에 딱 한 끼만 챙겼다.
덕분에.
"꽃 장식은 전부 빼게. 고생해서 꾸밀 필요 없어. 고기는 다 바짝 익히고 향신료는 되도록 쓰지 말고. 해물은 내오지 말게. 야채 많으면 좋은데 피망은 됐어. 양파는 다 익혀서······ 아니 그냥 양파도 빼게. 빵은 호밀은 아니었으면 좋겠고 다른 것 안 넣은 그냥 흰 빵이면 되네. 아, 혹시 완두콩 있나? 완두콩 좀 팍팍 넣어주면 좋고. 완두콩 많이. 엄청 많이."
지그프리드령의 시트렌 시에 도착하자마자 칼리안이 바빴다.
이럴 줄 알았다.
차라리 레릭을 데려올 걸 그랬다.
시장에게 두 왕자의 방문을 미리 알리고 숙식 준비를 시키는 것은 말단 기사 둘이 했다. 그 정도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곱게 자란 저 놈의 식성이었다. 그것을 기사에게 구구절절 알려주면서 시장저의 요리사에게 일러주도록 시킬 수가 없지 않은가.
"제가 사실 기사들 틈에 껴서 술 마시고 춤 추면서 놀아 본 적도 있고 그러다 주먹질도 좀 해 보고 한데서 잠도 많이 자 봤습니다만."
플란츠의 맞은편에 앉은 칼리안이 앞에 놓인 음식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사일런트를 발현한 동생 놈이 생글거리는 것을 본 플란츠가 조용히 대답했다.
"내 아우님께서 또 짖으려나 본데."
"그런데 제가 누구 시종 역할은 처음 해 봅니다. 덕분에 이렇게 또 새로운 일을 해보네요. 형님."
"시끄러."
"경험도 쌓이고 화도 쌓이고. 되게 좋네요."
"시킨 적 없어."
그래. 안 시켰다.
주는대로 먹고 되는대로 지내겠다고 했다.
그럼 뭐하냐고.
해 떨어지기 직전에 배고파진 칼리안이 신나서 잡아온 야생 닭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 끄덕이던 희멀건한 놈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냔 말이다.
덕분에 잡은 닭 놔 주고 그냥 지그프리드령에 왔다. 노숙할 각오 했느냐고 비웃었던 기억은 그새 홀랑 까먹고 냅다 달려서 일단 왔다.
"형님 그냥 여기 계시겠습니까. 제가 혼자 슝 하고 다녀오면 그게 빠를 것 같은데요."
"싫어."
생글생글 웃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그럼 식사 하세요. 왕궁 밥과는 다르겠지만 아까 그 닭보다는 나을 겁니다. 내일부터 이런 저녁 당분간 못 드실 테니 많이 드세요."
대꾸할 생각도 안 든 플란츠가 산더미처럼 쌓인 완두콩 샐러드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이 누구 소행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걸로 싸우기에는 좀 피곤했다.
"완두콩이 엄청 많네요."
"짖지 말라고."
"안 짖었습니다. 그냥 완두콩이 많아서요. 그런데 완두콩 왜 이렇게 푹 익혔나 모르겠네요. 영 흐물흐물하네."
야생 닭 보는 누구같은데, 이거.
"너."
"네."
짜증은 나는데 짜증을 내면 저 완두콩이 나라는 말을 알아들은 티가 나니까 말은 못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짜증이 나서.
"······ 그만 좀."
루시와 안네가 이렇게 보고싶을 줄이야.
야생 닭 볼 때도 안했던, 괜히 왔다는 생각이 물씬 차올라 미간을 찌푸리는데.
- 달칵.
왕자들이 식사를 이어나가는 식당 문이 마음대로 열렸다.
방금 전까지 자리에 앉아 실없이 웃고 있던 칼리안이 문 쪽을 봤다. 그리고 플란츠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생겨 있는 실드를 봤다.
"또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시다니요. 이번에는 두 분이 함께 오셨습니까."
이런 말과 함께 덩치 큰 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왕자들이 있는 곳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 찾아와도 될 사람이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칼리안이 반가워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그프리드 공."
플란츠의 앞에 만들어졌던 실드가 사라졌다.
대신 칼리안의 등이 보였다.
"오랜만이라 하기에는 그렇지만 반갑습니다. 혹 근처에 계셨습니까."
"네, 왕자님. 볼 일이 좀 있어서 잠시 인근에 있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공에게서······."
반가워하는 웃음 가득한 얼굴을 지우지 않고 잠시 말을 멈추었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피 냄새가 짙은지."
플란츠의 앞을 막아선 채 묻는 칼리안을 본 슬레이만이, 무슨 오해를 샀는지 깨닫고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빈 손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손님이 잠시 찾아 온 탓에 마중인지 배웅인지 모를 것을 나온 길이었습니다. 오해 마십시오."
"손님이라니요."
슬레이만이 잠시 플란츠 쪽을 보다 입을 열었다.
"시오나 힐. 혹시 아십니까."
시오나 힐.
찾고 싶던 이의 이름을 들은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