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55화 (256/527)

제45장. 바다 보러(2)

하나를 읽었고 하나를 놓쳤다.

샤워를 하는 동안 창문을 잠갔다. 혹시 몰라 반지도 그냥 끼고 씻었다.

대련하다 말고 뚫어져라 반지를 쳐다보기에, 영글다 만 키위같은 그 머릿속에 뭔 생각이 떠올랐을지 눈에 훤히 보여서 창문을 잠근 것이었다. 아주 꽉꽉 닫고 꼭꼭 다 잠갔다.

"도대체 그걸 왜 그렇게 궁금해하시는지."

키리에가 대련 중에 제 심장에 칼 꽂을 뻔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면서, 화를 내기는 커녕 동생의 시종이 자신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문도 보이지 않은 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는 꼬락서니에 속이 터졌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지만 그 때 놈은 사는 것에 일말의 여한도 없던 그런 상태였으니 그 일을 두고 키리에에게 화를 내는 건 아예 기대조차 안했다. 대신 뭐든 좋으니 형님 너도 궁금증이라는 것을 좀 가져봐라 했더니 예상치 못한 것을 궁금해했다.

- 그래서 뭐냐고, 내 이름.

쇠약한 심장 기껏 고쳐놨더니 이 질문을 다시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닷새 동안 눈만 마주치면 그 파릇파릇한 눈을 번뜩이면서 이름 뜻이 뭐냐고 물어보는 통에 아주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집요하기로 따지자면 창밖에 튄 빗물 잡으려는 루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다.

그렇다고 적당히 둘러대려 해도 망할 입이 도통 거짓말을 못하니 이러다간 가위라도 눌릴 것 같았다. 호기심을 가르쳐 줬더니 어디서 고집을 같이 배워 온 모양이지 않은가.

"대체 왕궁 어디에서 그런 걸 배운 거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삭막한 왕궁 어디에서 그런 걸 배웠는지······ 하고 한탄을 하다가.

"······ 나구나. 나였겠네. 나 말고 누구겠어. 나 밖에 더 있나. 내가 가르쳐 줬겠지. 나겠지. 그래, 내가 그랬네."

가볍게 마력을 운용해 새카만 머리에 잔뜩 맺힌 물기를 털어내 말리고 시녀들이 준비해두고 나간 옷을 알아서 갖춰 입던 칼리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뺏길 뻔했던 반지에 시선이 닿았다.

그래도 뭔 수작을 부리려는지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고 있는 스스로가 웃겨서 참 복잡한 마음이 되어버린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우리 형님께서는 생각이 어찌나 뻔하신지."

그러다 이런 말을 하며 피식 웃었다.

아직 사춘기가 다 안 끝난 탓에 칼리안 말은 절대 안듣기로 했던 굳은 결심을 조금도 잊지 않은 질풍노도의 완두콩이 내일 무슨 짓을 벌일 계획을 세웠는지는 상상조차 못한 채였다.

그렇게, 플란츠의 작은 계획 하나를 읽고 원대한 계획 하나를 놓쳤으나 놓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칼리안이 문 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고 해."

"네, 왕자님."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얀의 목소리가 곧바로 들린 뒤 조용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첫날보다는 조금 더 편한 차림이 된 에일라가 들어섰다.

"어서 와, 에일라."

아마도 칼리안과 같은 이유에서 좋아하는 것이 분명할 색의 옷. 어찌 보면 참 안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그보다 더 잘 어울릴 색이 또 있을까 싶은 검은 무광의 가죽 바지와 재킷을 걸친 채였다.

"오래 기다렸어?"

"조금요."

"미안. 윗층 사시는 분 신경쓰느라 편하게 씻질 못해서 그랬어. 그동안 잘 쉬었어?"

버터 향 가득한 바닷가재를 떠올려 본 에일라가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네. 오랜만에요."

"그래. 잘 했어."

가벼운 몇 마디 인사가 오가고 얼마 뒤, 이번에도 에일라가 누구인지는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을 얀이 들어와 두 잔의 차를 내려놓고 나갔다.

인사 주고 받기를 마친 에일라는 시트러스 향이 감도는 홍차를 가만히 내려다 볼 뿐 다른 말을 더 꺼내지 않았다.

'원래 그랬지.'

에일라는 본래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직업 특성 상' 사교적으로 굴었을 뿐. 그러니 지금 이렇게 조용해진 것은 칼리안에게 있어 참 기꺼운 일이었다.

"내가 좀 편해졌나보네. 조용해진 것을 보니."

대답 없이 칼리안을 응시하던 에일라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저를 잘 아시는 것에 안 놀랄 만큼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가끔 왕자님을 이상하게 쳐다봐도 이해해주세요."

"이해하고 있어. 이미 오래전부터."

이제 와 설명하자면, 칼리안은 에일라에게도 '들켰다'.

때문에 더 이상 비밀 안 들키고 살겠노라 약속했던 드미레아를 잠시 떠올리며 약속 어긴 것을 자책할 법도 했건만 칼리안은 그러지 않았다.

엄연히 따지고 보면 에일라에게 들킨 것은 이미 1년 전이 아닌가. 드미레아와 약속을 하기 한참 전, 플란츠에게 들킨 직후의 일이라 보아야 맞을 것이다.

그래서 칼리안은 드미레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닷새 전에 이미 훌훌 잘 털어낸 상태였다. 윗층 사는 누구처럼 죄책감 많은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나도 내가 바뀐 것에 안 놀랄 만큼 적응하는 데 한참 걸렸거든. 그러니까 괜찮아."

사실 적응을 다 했는지 안했는지는 칼리안도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쨌거나 이전에 비해 많이 좋아지기는 했다. 아무튼 칼리안도 적응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남들은 오죽할까. 칼리안이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을 그냥 다 그러려니 하고 넘겨가며 상대해주는 키리에가 무던한 것이겠지.

"저는 왜 부르셨어요?"

"줄 게 있어.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짧게 대답한 칼리안이 테이블 옆에 두었던 것을 가리켜 보였다.

양피지 하나와 종이 한 장.

그 중 종이를 먼저 집어든 에일라가 몇글자 적혀있지 않은 내용을 빠르게 읽어내려간 뒤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저에 대해서 정말 잘 아시네요."

- 사망자 신원 확인, 에일라 베르단디.

성이 포함된 실명이 적힌 종이를 손에 든 에일라의 짧은 감상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거짓말은 안 한다니까."

"에반에게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니 그건 조금 불쾌하지만요."

"기분 좋으라고 만든 것 아니니까 투정은 부리지 말고."

말 그대로, 사망자 신원 확인서였다.

에반과 함께 발견되었다는 여러 세작들의 시신 중 에일라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위조 서류도 잘 만드시는 것을 보니······ 정직한 왕자님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보네요."

"내 입으로 거짓말 못 한 다는 소리가 거짓말 써먹을 줄도 모른다는 말은 아닌데."

"그런 분이 저 하나를 안 봐주고 사형대에 올리려 하셨고요."

"필요없는 패 끌어안는 사람은 아니라서. 내가."

"그럼 지금은 어떻게 저를 믿고 필요있는 패로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스스로 내 사람이라 여기고 있는 패를 내칠만큼 몰인정한 사람도 아니고."

에일라가 입을 다물고 눈매를 찌푸렸다.

베로니카에게 자신을 두고 '3왕자의 사람'이라 소개한 일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칼리안이 생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 의심하지 마. 너 데리러 갔던 내 검이 귀가 좀 밝아서 이것저것 잘 주워듣고 다닐 뿐이니까."

베로니카를 향해 그 말을 한 지 한참 뒤에 찾아온 키 큰 기사를 떠올린 에일라가 다문 입에 살짝 힘을 줬다. 앞으로는 말수를 더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사람 사생활까지 침해하는 취미는 없으니 걱정말고 남은 것이나 확인해 봐."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랫사람의 사생활이라 여기는 범위가 꽤 좁은 듯한 말을 꺼낸 칼리안이 테이블 위의 양피지를 가리켰다.

잠시 마뜩찮은 얼굴을 하던 에일라가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 에일라 브리지트

성만 다른 같은 이름을 본 에일라가 입을 열었다.

"그냥 푸른 솔새라고 써 놓으셔도 됐을 것 같네요."

칼리안이 작은 소리로 재밌다는 듯 웃었다.

칼리안의 소유인 휘트린 영지에서 나고 자란 21세의 영지민임을 증명한다는 신분 증명서로 진짜 신분을 어떻게 가리겠느냐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네가 죽었다 해도 세크리티아의 국왕은 안 믿어. 네 시신을 눈앞에 가져다 놓지 않는 이상은 절대 안 믿어. 그럴 바에는 그냥 대놓고 내 사람이라 해 두는 게 나아. 함부로 못 건드리게."

"그런 생각이셨으면 성은 왜······ 아니에요."

질문을 하던 에일라가 말을 도로 집어넣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만들어 준 성까지 계속 쓸 필요는 없잖아."

"네. 이해했어요."

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는 3왕자를 보며 짧은 한숨을 쉰 에일라가 물었다.

"이제 무슨 일을 할까요?"

"당분간 내가 자리에 없을 거야. 스승님께 내용은 전해놨으니 왕궁에서 지내. 그리고 지내는 동안 네가 잠시 호위를 해 줄 사람이 있어. 원래 호위하던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요즘 너무 바쁜 것 같아서."

언젠가 에일라의 새하얀 전서구를 좋아하며 구경하던 얼굴을 떠올리며 둥글둥글한 웃음을 지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나 돌아오고 나면 호위 대신 본래 하던 일 계속 하게 할 거니까 불러와야 될 사람, 필요한 것들도 생각해놓고 있어."

"세작 말씀이세요?"

"세작이라기보다는, 정보. 소문 주워듣는 것 말고 고급인력 낭비하는 것 말고 좀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모아오는 제대로 된 정보가 필요해."

칼리안이 자리 비우는 동안 누군가의 호위를 맡기고 돌아온 뒤에는 정보 활동을 하게 할 생각이라는 뜻임을 이해한 에일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크리티아에서 있었던 일, 세크리티아 국왕이 무슨 일을 시켜왔는지, 제가 아는 다른 정보는 없는지 하나도 안 물어보셨어요. 왜 묻지 않는지 궁금해서요."

"세크리티아 국왕의 새는 이미 죽었고. 너한테 내가 뭘 물어야 하나. 모르겠네."

"······ 저를 믿어서, 아무것도 안 묻고 이렇게 대해주신다는 말인가요?"

"안 믿었으면 내 테라스에 발 디디는 순간 죽었을 텐데. 거기 아무나 밟는 곳 아니거든."

그리고는 창 밖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켜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세크리티아에 있는 누구와 달라서 다른 사람 의심하는 취미 없어."

의심 많은 사람에게 이제껏 시달려왔을 에일라가 실소했다. 지금까지 들은 소리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좋아요. 누굴 호위하면 되죠?"

고개를 끄덕이며 물어오는 말에, 칼리안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보인 적 없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한동안 그렇게 웃는 얼굴로 찻잔을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대답했다.

"내 생의 이유인 사람."

생을 이어가야 함을 잊지 않도록 밝혀진 등불같은.

히나를 떠올리면서.

* * *

대화는 끝났고 에일라가 밖으로 나갔다.

달이 기울고, 해가 떠올랐다.

아침이 되었다.

"왕자님! 또 밤을 새셨어요? 창문은 왜 안 닫으셨어요?"

완연히 소슬해진 바람이 방 안에 가득하도록 창문을 열어 두고 소파에 앉아 밤을 새운 것을 안 얀이 또 한참동안 잔소리를 했다.

칼리안은 대사막의 겨울 바람이 불어도 하나도 안 추우니까 걱정 말라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닷바람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미안. 창문 닫는 걸 까먹고 있었어."

"정말 한 시도 눈을 못 떼게 하시는 것 아세요?"

그냥 얌전히, 서둘러 담요를 가져와 온 몸을 꽁꽁 싸매주면서 도무지 혼자 두질 못하겠다고 잔소리하는 얀을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얀이 오전 일정을 전부 취소시켰다.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 있던 변경백령에 새로 부임한 이가 점심 식사 이후에 인사하러 올 텐데, 그 때까지 좀 주무세요. 어떻게 이렇게 속을 썩이시는지 모르겠네요."

따뜻이라 하기보다는 뜨겁다 해야 할 레몬 꿀차를 가져다주며 이런 말을 하기에, 칼리안이 다시 웃음소리를 냈다.

"하나도 안 예쁘니까 웃지 마세요."

안 예쁠 리가 없는데, 하고 대답하려던 칼리안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얀을 올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미안."

한 시도 눈을 못 떼겠다는 얀을 떼어놓고 또 도망을 갈 생각이라서 이렇게 사과를 했다.

그렇게 오전 동안 눈을 좀 붙이고, 르메인과 오랜만에 오찬을 가지고, 새로운 변경백을 만났다. 앨런을 만나 도망가서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해줬으면 하는 일들을 다시 일러줬다. 키리에를 만나 플란츠의 검술 수련을 보아 주기를 한 번 더 부탁했다.

그렇게 하루가 다시 지나고 밤이 됐다.

일찍 자겠다며 얀을 내보내고 금고를 열어 얼만큼의 돈을 꺼낸 칼리안이 앨런에게 빌린 손바닥만한 가방 안에 그것을 담아 품에 잘 넣었다. 그 뒤에는 창 밖으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어차피 지그프리드령에 들를 예정인데다 밖에서 오랫동안 지낼 생각이 없었으니 챙겨야 할 짐이 없던 까닭이다. 피곤하다며 저녁도 안 먹고 들어가더니, 4층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래도 일이 많기는 하나보네."

피식 웃으며 이렇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마굿간으로 갔다.

- 탁, 탁!

레이븐이 인사를 건네듯 발을 굴렀다.

다친 뒤로 몇 번을 만나 달래주었으나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는지, 레이븐은 칼리안의 배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며 푸르릉 소리를 냈다.

"다 나았어. 괜찮아."

그런 레이븐을 슥슥 쓰다듬어 준 칼리안이 훌쩍 뛰어 안장에 오르자, 레이븐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익숙하게 왕궁 정문을 향해 속도를 냈다. 왕궁 밖에 나가기 까지는 빠르게 움직여야 기사들이 쫓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 레이븐도 잘 알았으니까.

- 다그닥, 다그닥!

그리하여 금세 정문을 지나 광장에 도달해 적당히 쫓아오던 기사들의 발걸음이 돌려졌을 때, 레이븐이 발을 멈췄다. 속도를 내린 것이 아니라 아예 제 자리에 멈춰 섰다.

"······ 음."

생각지도 못한 것을 마주한 칼리안이 실로 오랜만에 당황한 목소리를 낸 까닭이었다.

누구 의심하는 취미 없는 탓에 너무 믿었다.

한 치의 의심도 안 했다.

새하얀 로브를 입은 분홍 머리 마법사와 똑같은 옷을 입은 열 명의 마법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제복을 입은 서른 명의 기사들이 보였다. 그 옆에는 포도색 머리의 시종이 서 있었다.

"애옹!"

"냐오옹!"

시종의 품에 안긴 두 마리 고양이가 예쁘게 울었다.

"저는 배웅하러 온 겁니다, 칼리안 왕자님. 루시와 안네도 배웅 나온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 레릭이 멋쩍게 웃는 것이 붉은 눈에 가득 담겼다.

그리고.

"아무래도 내 아우님께서 순서를 잊으신 듯 하기에."

"무슨 순서 말씀이십니까."

"협상 먼저, 협박은 그 뒤에."

"······ 형님."

그냥 소드마스터로 찾아가서 협박하지 말고, 발칸 부군단장 데리고 다니는 3왕자 칼리안으로 찾아가서 협상부터 하라고.

달빛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듯한 새하얀 제복 잘 차려입은 플란츠가 은백색의 이름 없는 말 위에 올라 있었다.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하얀 망토가 멋지게 흩날렸다.

"하나 뿐인 아우님께서는 어디에도 이름을 안 올려 두셨는데. 나는 가진 게 있으니 같이 가 드려야지."

하고, 혈혈단신으로 엘프들 찾아가서 협박하려던 동생의 짧은 여정에 동행하러 찾아온 완두콩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낮은 목소리가 칼리안의 귀를 찔러왔다.

"그러라고 있는 발칸의 부군단장 직함 아니던가."

제 손에 권력이라고는 한 톨도 안 쥐고 사는 동생이 또 혼자 사고치러 가겠다는데 별 수 있나. 권력 쥔 형님이 알아서 따라가야지.

"아······."

그런 플란츠를 한참동안 쳐다보던 칼리안이 손을 들어올렸다.

검은 후드 아래, 손바닥 밑으로 숨겨진 빨간 입술이 열리며 속삭이는 듯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걸 배운거야."

나구나.

나였겠네. 나 말고 누구겠어. 나 밖에 더 있나. 내가 가르쳐 줬겠지. 나겠지. 그래, 내가 그랬네.

아······.

진짜 환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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