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54화 (255/527)

제45장. 바다 보러(1)

버터 향이 가득했다.

마늘 향이 났고 후추 향도 조금 났다.

빨갛게 익은 껍질에서 새하얀 속살을 떼어내니 버터 향이 더 짙게 올라왔다. 함께 구워진 브로콜리, 아삭할 정도로 익은 양파와 노란 파프리카에서도 버터 향이 났다.

"버터는 이렇게 많이 안 써도 괜찮아요."

벗겨낸 껍질을 옆으로 치우며 하는 말을 들은 베로니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할 줄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에일라가 잘 구워진 랍스터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긴 머리를 틀어올려 고정시킨 비녀의 하얀 구슬 장식이 흔들거리며 반짝였다.

"사흘만에 처음으로 하는 말이 버터 많다는 소리면 듣는 사람이 기운 빠지잖아. 적어도 만나서 반갑다거나, 자기소개라거나, 그런 말이어야지."

"사흘만에 처음으로 하는 말이 너 버릇없다는 소리인 것보다는 낫잖아요."

앨런의 집에 온지 닷새, 베로니카를 만난지는 사흘.

그러니 정확히 따지자면 닷새만에 처음으로 입을 연 에일라를 향해 베로니카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미안. 혹시 기분 나빴어요?"

"버릇이 없다는 소리지 기분이 나쁘다는 건 아니니까 편한대로 해요."

아무리 후작의 손녀라 해도 자신보다 나이 많은, 신분이나 작위를 모르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반말하는 것이 버릇없는 일이라는 걸 베로니카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에일라에게도 말 트는 것에 대해 허락을 구했다. 에일라가 대답하지 않았고 베로니카는 그것을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였을 뿐.

"할아버지 보고 자라서 그래. 미안."

정작 그 앨런은 말이 매운 것이지 뒤가 짧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튼 베로니카는 항상 이렇게 이유를 붙였다.

결국 다시 반말이었지만 어쨌거나 편한대로 하라 말한 것은 맞았던 탓에 에일라는 고개만 한 번 더 끄덕였다. 그 뒤 완전히 익지 않아 하얀 빛이 도는 양파를 슥 밀어내고는 옆에 있던 브로콜리를 집어 먹었다.

그런 에일라를 지켜보던 베로니카가 입을 열었다.

"여기 왜 숨어 있는 거야?"

칼리안은 세심하질 못했고 앨런은 바빴다.

덕분에 빈 집에 에일라만 보내놓고 앨런의 집에 누가 왜 와 있는지에 대해 베로니카에게 설명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베로니카가 레이첼과 사는 집을 두고 앨런의 저택에 들를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야 맞을 터였다.

에일라 혼자 알아서 잘 지내던 둘째날 저녁, 앨런의 집에 놀러 온 베로니카가 얼마나 놀랐는지는 둘 모두 모를 것이다. 물론 그런 베로니카를 마주친 에일라가 등 뒤로 숨겼던 단도를 소리 없이 집어넣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둘 뿐만 아니라 베로니카도 모르는 일이지만.

"사정이 있어서요."

자신이 옆 나라에서 도망친 새라고는 말할 수 없을 에일라가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결코 친절하지 않은 말이었으나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물었다.

"칼 쓰는 사람이야?"

"왜 그렇게 생각해요?"

"마법사는 아닌 것 같아서."

"마나실 후작 애인이냐고 먼저 물어볼 줄 알았는데, 특이한 걸 묻네요."

"할아버지는 자기가 몇 살인지 까먹고 사는 사람 아니야."

"마법사가 아니라 해서 무조건 칼 쓰는 사람인 것도 아니고요."

"알아. 그런데 할아버지 집에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둘 중 한 두 개는 쓰더라."

물론 둘 다 쓰는 사람은 칼리안 왕자님 뿐이었지만.

이렇게 대답하는 베로니카를 잠시 쳐다본 에일라가 새하얀 랍스터 속살을 한 점 더 집어 올리며 말했다.

"칼 써요. 3왕자님 사람이고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생각이 맞았다는 사실에 기분 좋은 표정을 한 베로니카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나는 베로니카야. 나는 칼이나 마법 말고 약 쓰는 사람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야. 머리카락이랑 말버릇은 할아버지 닮고 생긴건 엄마 닮아서 나머지는 아빠 닮으려고."

그런 베로니카를 잠깐 보던 에일라가 포크를 내려놓고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이름은 나중에 알려줄게요. 나도 반가워요."

버터 많다는 얘기로 시작해서 자기 소개와 악수로 끝난 이상한 순서의 대화를 마친 베로니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 올 때 돼서 가 봐야 해. 내일도 올게. 혹시 먹고 싶은 것 있어? 해줄게."

"······ 생굴."

해산물 먹는 것이 퍽 자연스러워 보이더니 먹고 싶은 것은 생굴이란다.

"카이리시스 사람들이 해산물을 그렇게 좋아하질 않아서 파는 곳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내일 한번 찾아볼게."

해산물을 좋아하고 칼리안과 관계가 있다면 지그프리드 공작가 사람인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런 대답을 했을 때 쯤, 멀리 문 밖에서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문 밖의 깜찍한 석상과의 대면이 퍽 인상깊었던 탓에 하마터면 남의 집 문지기를 부술 뻔했던 일이 떠오른 에일라가 고운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곧 달칵 하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보이는 베로니카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에일라의 눈과 비슷하지만 더 옅은 물색의 머리.

키리에였다.

"일어나십시오."

의미를 알기 어려운 얼굴로 에일라를 잠시 바라보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굴 먹을 일 당분간 없으리라는 말을 전해왔다.

* * *

에반이 죽은 뒤의 후폭풍이 어느정도 가라앉았다.

벌을 받아야 할 이들에 대한 조치와 그에 따른 급한 건이 마무리 되었고 대대적인 인사 이동도 있었다.

그러니 이제 상을 주어야 할 차례가 아니던가.

왕궁의 안전을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근 한 달 가까이를 긴장 속에 보냈던 발칸 마법사들에 대한 휴가가 주어졌다. 물론 전원을 한꺼번에 쉬게 할 수는 없었으니 돌아가면서 보름 씩을 쉬도록 했다.

그것이 발단이 됐다.

"협회장니임."

할 일이 없으면 잠이나 자면 될 텐데 쉬는 법을 다 까먹은 마법사들이 집에서 나와 꾸물꾸물 모였다. 탄산수를 홀짝이면서 아르센이 어떻게 검을 부수는지를 토론하며 놀고 있으려니, 아직 휴가 날짜가 되지 않아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아르센이 보였다.

아르센은 며칠 못 볼 줄 알았던 부하 마법사들을 만난 것이 반가운 마음에 합석을 했고, 다들 마시는 탄산수 굳이 거절하고 혼자 맥주를 시켰다. 그리고 맥주를 딱 두 잔 마시는 동안 자신이 검을 어떻게 부수는지를 설명해준 뒤 깔끔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다시 집을 향해 걸어가다가, 반가운 보라색 머리를 봤다.

- 꼬맹이. 잘 됐다.

- 무슨 일 있으십니까?

- 어. 리베른에서 보낸 선물 때문에 마나실 후작님을 좀 뵈려고 했는데 바쁘신 것 같더라고. 칼리안 왕자님 일로 할 말도 있고 하니까 잠깐 시간 되면 얘기 좀 하고 가.

- 네. 알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둘은 대화하기 딱 좋은 술집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사람이 훔쳐 듣지 않도록 사일런트를 발현하고, 아르센이 취하지 않도록 맥주를 딱 두 잔까지만 마시게 했다.

"칼리안 왕자님이 조만간 정보조직 보스 안 해도 되게 해주시겠다 하셨어. 괜히 낭비되던 협회 마법사들 이제 다른 일 해도 될 것 같은데."

"네에."

"그리고 리베른에서 좀 두꺼운 수정판으로 된 마법 용품을 보내왔는데 이게 아무래도 통신용인 듯 하거든. 나도 처음 봐서 정확하진 않은데 설명이 그래. 그러니까 마나실 후작님 시간 괜찮으시면 한 번 찾아뵌다고 얘기 좀 전해줘."

"아······."

그런데 아무래도 아르센 반응이 영 이상한 것이다.

설마 술이 더 약해졌나 싶어서 쳐다보니 아르센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요, 협회장님. 사실 아까 두 잔 마시고 오던 길이었거든요. 마신 지 조금 지났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요, 협회장님."

"······ 젠장."

대화고 말 전달이고 나발이고 맥주 네 잔 마신 아르센으로부터 감자튀김을 지키느라 바빠진 에우리아의 입에서 조금 험한 말이 나왔다.

"그런데 병아리는요? 제이아 사령관 말로는 병아리 깨는데 20일 정도면 된다고 했는데요, 협회장님."

"어. 죽었나봐. 안 깨. 내일 후라이 해먹으려고, 그냥."

"우리 협회장님 너무하시네에. 병아리 만드신다더니 먹어버린다고 하시면 서운하잖아요, 협회장님."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테이블을 톡 건드렸다.

쩌저적, 하고 얼음 줄기 하나가 뻗어나가더니 멀찍이 떨어뜨려 둔 감자튀김 접시에 닿았다.

기어코 얼려버렸다.

"······ 아니다."

언 감자를 손에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은 에우리아가, 썩 괜찮은 품질의 바질리카 한 잔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보온 마법에 충격 완화 마법까지 싹 다 걸어놓은 계란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그냥 지금 먹어야겠다. 그게 낫겠어."

이 말은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아르센이 얼른 계란을 뺏어가며 말했다.

"안돼요, 협회장님. 계란 불쌍해요."

"난 저 감자튀김이랑 네 뱃속에 든 맥주 네 잔이 더 불쌍해."

그렇게 옥신각신, 지금 먹겠다 안된다 이리저리 계란을 서로 빼앗아가며 투닥이고 있는데.

- 뽀직!

하고 새하얀 계란에 실금이 갔다.

순간 두 마법사의 움직임이 멎었다.

- 뽀직, 뽀직!

그러거나 말거나 또 한 번 금이 생겼다.

아르센이 눈을 치켜뜨며 에우리아를 쳐다봤다.

"설마."

설마 진짜 깨는 건가, 하는 말이 에우리아의 입에서 맴돌 때 쯤.

- 뽀지직!

조금 더 큰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오래지 않아, 작은 것이 뿅 하고 알 껍질 밖으로 튀어나왔다.

새까만 눈, 아직 젖었지만 보송보송할 것 같은 노란색 털.

그리고 뭉툭한 부리.

"음."

······ 뭉툭한 부리?

"오리?"

"삐약!"

귀엽고 작은 새끼 오리가 아르센을 보고 있었다.

오리알과 계란 구분 못하는 파란 머리 마법사가 오리알과 계란 구분 못하는 보라 머리 마법사를 향해 싱긋 웃으며 멋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리는 오리입니다, 협회장님."

그리고는 쿵, 하고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은 뒤 잠들어 버렸다.

* * *

완두콩은 아니라고 했다.

아니라니 다행이긴 한데 놈이 웃었다.

'그런 뜻은 아니니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게다가 말까지 흐렸다.

놈은 거짓말을 못한다.

'더 크시면 말씀 드린다니까요. 그만 궁금해 하십시오.'

그러니까 내 이름 대체 무슨 뜻이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계속 같은 말만 하고 있다. 얼마나 더 나이를 먹으면 알려주겠다는건지 몰라도 도무지 말을 안하는 것이다.

그러다 내가 쟤 형이라는 게 생각났다.

그래서 짜증이 났다.

"생각."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 타다당! 카앙!

플란츠가 빠르게 몸을 돌려 목소리 끝에 치고 들어오는 두 자루의 검을 받아냈다.

"검에 생각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 알아."

저도 모르게 잡생각을 하고 있던 플란츠가 다시 검을 다잡았다.

대련 끝나고 저 놈 씻을 때 몰래 내려가서 저 반지를 훔칠까. 그래서 새 좋아하는 보라색 눈 가진 놈한테 이름 뜻이 뭔지 물어볼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안 되는 걸 안다는 말이 생각 안하겠다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 카가강!

곧 두 개의 검이 다시 한 번 플란츠의 눈 앞으로 쇄도했다. 플란츠가 양 손에 든 검을 들어올려 공격을 막은 뒤,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빼내어 내찔렀다.

- 카앙!

당연하겠지만 여지 없이 막힌 검에서 강한 타격음이 울렸다. 잔뜩 날이 선 소리를 듣던 플란츠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보니 뭐였을까.

그렇게나 생각하지 말라는 놈을 한달 가까이 요양하게 만든 것은.

- 카아앙!

휘둘러지는 검을 막은 왼손이 저릿했다.

그것을 느낄 새도 없이 오른손에 들린 검을 다시 뻗어 위에서 내리꽂히는 공격을 막았다.

곧 플란츠의 왼손에 들린 검이 칼리안의 목을 노렸다. 그것을 쳐낸 칼리안의 또 다른 검이 빛과 같은 속도로 플란츠를 향했다.

- 카가강!

"······ 형님."

코앞까지 당도한 검을 쳐낸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다.

"생각이 많으면 죽는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러는 넌."

"안 죽었습니다. 저는."

에반과의 싸움 중 한눈 판 일을 또 궁금해하는 플란츠에게 대충 대답한 칼리안이 한 발을 물렸다.

"세크리티아 국왕으로부터 아직 의견이 안 나왔습니다. 속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 모르는데 체이스 왕세자님도 다른 움직임을 못 찾고 계십니다. 어차피 다른 생각을 하실 거라면 그 쪽으로 해주십시오. 비단 제 일만은 아니니까요. 궁금한 게 있으면 저 말고 형님 일에 대해서 궁금해하시고요."

칼리안의 양 손에 들린 검붉은 검이 스르륵 사라졌다.

"아, 이름 뜻은 말고요. 더 크시기 전에는 안 알려드릴 거니까."

"짖지."

플란츠의 말에 생글생글 웃은 칼리안이 잠시 수련장 창 밖을 봤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에 어스름한 달빛이 비췄다.

"며칠 전에 찾은 새가 곧 올 겁니다. 당분간은 신물 찾아서 보내는 일을 담당할 거고, 제온에 대한 실마리 잡히면 협회장 대신 제 눈과 귀 노릇을 맡길까 합니다. 브리센 후작 쪽은 당분간 조용하겠지만 아마 란델 형님과 접촉하려 들 테니 주시하고 있어야 하고요. 형님이 있는 한 자신의 자리가 단단하지 않을 것을 알 사람이라서요."

말을 듣던 플란츠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안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알려드린 검술은 키리에 통해서 연습하시면 되고 마법은 스승님께 부탁을 드려놨는데 혹시 바쁘시거든 헤르츠 경 통해 연습하십시오."

"너."

"네."

칼리안의 눈을 잠깐 쳐다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저렇게 뒷일 부탁하는 말을 하는지 눈치를 챈 까닭이었다.

"언제 갈건데."

"내일 쯤이요."

"언제 오는데."

"열흘 정도, 길게 보면 보름 쯤 걸릴 겁니다.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가서 사나흘은 더 가야 엘프 마을이 나오는 것 같고 어머니 나무도 만나고 협박도 좀 하고 하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적당히 몸이 나았으니 엘프들이 있는 곳으로 가 담판을 지을 생각에서 하는 말이었다. 데블란과 잡은 손도 놓게 하고, 제온과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다면 찾아보기 위해서.

"전하께는 말씀 안 드렸으니 적당히 둘러대주세요. 란델 형님이야 어차피 관심 없으시겠지만 혹시 물어보시면 란델 형님 쪽도요."

그런 칼리안을 다시 한참 보던 플란츠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보름치 외출을 하려면 무슨 짐을 싸야 하는지, 루시랑 안네는 두고 가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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