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53화 (254/527)

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7)

바다 비린내.

꽃처럼 향기롭지도 않고 케이크처럼 달지도 않고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텁텁한 소금 냄새.

베른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세크리티아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프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정말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바다가 보고 싶은 날이 있다.

사무치게 보고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뼛속 깊이 그 소금내를 꽉꽉 채워야 속이 좀 시원할 것 같은 그런 때가 있다.

오늘, 지금처럼.

이곳에 없는 그 바다가 그렇게나 그리운 순간이 있다.

"진짜 주인이라는 말, 무슨 뜻이에요?"

"내가 진짜 누구인지 알려달라며."

"나는 왕자님을 오늘로 세 번 봤어요."

비 오던 밤 술집에서, 서로 검을 겨눴을 때, 그리고 오늘.

잠시 그 수를 세어 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나'도 널 세 번째로 봤어."

칼리안의 것보다도 긴 듯한 에일라의 속눈썹이 살짝 내려앉았다 다시 올라왔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킬 때면 꼭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왕자님에 대해 확인해 볼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나네요. 변장하지 않은 내 모습,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왕자님이 새 판매점을 어떻게 찾아왔는지, 우리가 쓰는 암호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붉은 고니라는 이름은 왜 쓰셨던 건지, 세자 저하께서 왜 그렇게 왕자님에 대해 알고 싶어 하셨는지, 세자 저하께서 이 곳에 온 뒤에 왜 왕자님을 돕고 하얀 수리를 내치셨는지. 그리고 왕자님이 그 검술을 어디에서 배웠는지. 왕자님의 정체가 뭔지. 진짜 주인······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날.

- 내 앞에서 죽을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왜, 어떻게.

그런 눈을 하고 있었는지.

"······ 이해가 안돼요."

"이해가 안 되는 거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깍지를 낀 채 다리 위에 올려두었던 하얀 손가락이 반대편 손등에 둥근 호선을 그렸다.

조금 전까지 숨김 없이 웃음을 보였고 지금 당장 얼굴 가득 웃어보여도 아무 문제도 없을 테지만, 칼리안은 얼굴의 웃음기를 다 지워버렸다.

"내가 널 부른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너에게 도움을 주리라 생각하고 온 거잖아. 너를 쫓는 세크리티아의 다른 새들로부터, 세크리티아의 국왕으로부터, 내가 너를 보호해 줄 것이라 믿고 찾아온 거잖아. 내가 이미 너를 사형대에 올렸던 것을 잘 알면서."

오늘이 되기 전까지 고작 두 번 봤다.

싸움을 했고 에일라의 잘못을 눈감아주지 않은 채 체포했다. 사형대에 올렸다.

"그런 나를 이번에는 어떻게 믿고 이 왕궁까지 찾아왔는지 묻고 싶은데, 에일라. 결코 눈감아주지 않고 곧바로 다시 체포할 것이 뻔한 사람을 왜 찾아왔는지."

"그건."

"나였으면 여기 절대로 안 올 것 같거든. 나에 대해 확신하는 바가 있지 않고서는."

이 곳에 찾아올지 찾아오지 않을지, 절반의 확률이었다.

"네가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짐작하고 있다면 찾아 올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 여겼어. 찾아오지 않는다면 또 다른 방법을 짜내서 널 잡아들이려고 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잡아서 필요한 정보를 얻고 이번에는 제대로 사형대에 올리겠노라고."

제대로 된 사고 방식을 가졌다면 카이리스 왕궁 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왔어. 그것도,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왔어. 아무리 네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몰린 상황이라 해도 레니시타 잎 위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왔다면, 넌 이미 내가 누구인지를 얼추 알고 있다는 소리 밖에 안 돼."

에일라가 테라스에 나타났던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 에일라는 칼리안이 누구인지 몰라서 온 것이 아니라 이미 확신을 했기 때문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에일라. 나에 대해 정말 모르는 채로 온 게 맞아?"

에일라의 눈이 칼리안을 바라봤다.

칼리안이 그 눈을 마주 봤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록 눈을 떼지 않던 에일라가 입을 열었다.

"당신······ 정말 누구에요?"

칼리안이 웃었다.

푸른 머리카락이, 물빛 눈이. 혼자 기억한 그 모습이 꼭 바다같아서 웃었다.

"그만 좀 잊어버려."

다들 어찌나 잘 잊어버렸는지.

매번 설명하기도 귀찮아 죽겠네.

"네 주인이라니까. 내가."

에일라.

* * *

니들렌이 고개를 숙였다.

아디니아 꽃잎 닮은 머리카락이 함께 쏟아지듯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런 니들렌의 뒷통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왜."

"이 시간에 들어가시지도 못하게 하고, 또······ 왕자님께 이런 부탁 드려서요."

"됐어."

플란츠는 짧은 대답만 한 뒤 니들렌의 손에 들린 커다란 종이 한 장을 받아 들었다. 니들렌이 잘못한 것이 없었다. 따져본다면 니들렌 뿐 아니라 누구도 잘못한 것은 없었다.

- 아무래도 너희들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혹시 조금이라도 편치 않다면 숨김 없이 말해주려무나. 곧바로 취소할 것이니.

그날 오전 르메인은 란델과 플란츠를 따로 불러 이런 말을 했다.

- 빌헬름 관을 지금의 헤이시아 궁이 있던 곳까지 증축하고 헤이시아 궁은 카밀리아 궁 옆으로 자리를 옮겨도 좋을지 묻고 싶구나.

시스파니안의 공동이 발견되어 잠시 재건을 미루고 있던 헤이시아 궁을 국왕이 거주하는 카밀리아 궁 옆에 나란히 위치하도록 옮겨 짓는 것이 어떤지에 대해서 두 왕자의 생각을 묻는 중이었다.

빌헬름 관과 가장 가까이 있던 빈 공간인 헤이시아 궁 터에서, 시스파니안의 공동으로 가는 입구를 일부 허락된 이들만 드나들 수 있도록 폐쇄하고 발칸을 위한 건물을 추가로 짓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의견이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칼리안의 의견이었다. 그런 내용을 실제로 입에 올릴 수 있을 사람은 카이리스를 통틀어 칼리안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 알겠습니다.

란델은 그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좋다 싫다를 언급하는 대신 알겠다는 말을 했다. 헤이시아가 어디에 세워지든 상관 없다는 의미였다.

사실 르메인이 가장 걱정한 것은 란델보다는 플란츠였다. 실제로 헤이시아 궁에 살았던 '어머니'를 찾아가고 만난 기억이 있는 이는 르메인과 플란츠 뿐이었으니까.

- 이견 없습니다.

플란츠 역시 그것이 좋은지 싫은지에 대한 내용은 배제한 대답을 했다.

- 그래, 알겠다.

르메인은 괜한 말 덧붙이는 대신 이렇게만 말하고 빌헬름 관 증축을 진행하도록 수락했다.

"원래 헤르츠 부군단장님께 말씀드리려 했는데 계속 안 오셔서요."

"알아."

덕분에 헤이시아 궁 터 어디에 무엇을 더 지을지 대략적인 계획을 세워야 했고, 그 일을 담당하게 된 니들렌은 아르센의 조언을 받으려 했다. 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상식이 있는데 그에 대한 의견을 어떻게 플란츠에게 묻겠는가.

"괜찮으니까 그만 사과해."

"네, 왕자님."

그래서 오매불망 아르센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다 못한 플란츠가 먼저 나서서 니들렌을 돕기 시작했다. 내일 하면 될 일을 굳이 오늘 하겠다고 저러고 있으니 그냥 빨리 돕고 퇴근이나 시켜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들 돌아간 저녁부터 늦은 밤이 되도록 함께 헤이시아 궁 터 이곳 저곳에 뭘 세울지 계획을 짜냈다. 그 뒤에는 생각한 계획대로 보고서를 써도 괜찮을지를 최종 확인하기 위해 헤이시아 궁이 있던 곳으로 함께 찾아왔다.

"그런데 왕자님. 제가 누군지는 아시는 것 맞죠?"

플란츠가 자신을 계속 '마법사'라 부르는 것을 듣던 니들렌이 이렇게 물었다. 평생을 보내도록 누구의 이름도 외울 필요 없이 사는 왕족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결례가 되는 질문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플란츠와 그래도 좀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꺼낸 말이었다.

"루시한테 닭고기 뺏기고 소금 넣은 거 먹는 마법사 사령관."

"······ 네."

그냥 이름을 아는지가 궁금했을 뿐인데 예상 외의 일을 잊지 않고 있으니 이걸 고맙게 여겨야 할지 아니면 그 기억이 남아있는 것을 씁쓸하게 여겨야 할지.

덕분에 어색한 얼굴이 된 니들렌을 슬쩍 쳐다 본 플란츠가 덧붙여 말했다.

"니들렌 제이아."

"아. 맞아요. 감사합니다, 왕자님."

니들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 나쁘고 예민하고 말 짧고 죽도록 힘든 훈련만 쏙쏙 골라 잘도 시키면서 고양이에게만 잘해주는 저 왕자가 의외로 그렇게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플란츠는 대답 없이 빈 공터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시선이 한 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에, 니들렌이 그 쪽을 가만히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화원이 있던 곳이네요."

화원이라기보다는, 온실이었다.

헤이시아 궁 화원의 한 가운데. 실리케의 온실이 있던 곳이었다.

실리케에 대한 형이 집행된 직후 해체되어 사라졌으니 그 이후에 발칸에 들어온 니들렌은 궁 밖에서라도 보지 못했을 터였다.

잠시 그 온실을 생각하던 플란츠가 뒤로 돌아섰다.

더 할 것이 없었으니 이만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향기가 참 좋았어요."

멈칫.

"르니에리라고 하던데 귀한 꽃이라고 들었어요. 저 자리에 심겨져 있다가 궁이 무너질 때 많이 상해서 잔해 치울 때 뽑아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한 송이가 피었더라고요."

"······ 심겨 있었다니."

"네. 저기에 꽤 많이 심겨져 있었어요. 향이 정말 좋아서 아직도 기억이 나요."

실리케의 온실이 있던 자리.

실리케는 르니에리를 온실 바닥에 심지 않았다. 수많은 화분을 두고 길렀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그 온실을 찾았을 때, 온실은 비어 있었다. 르니에리는 없었다.

멈춘 발이 한참동안 움직이질 않았다.

멈춰 선 채 바닥을 내려다 보던 플란츠가 고개만 끄덕인 뒤 발을 옮겼다.

그 때.

그 누구도 실리케를 위한 안네루시아를 띄우지 않았었다는 것은 플란츠도 알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그것을 아쉽다 여긴 적 없었다.

실리케가 안네루시아를 원치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 미친놈."

제 손으로 치워낸 목숨 제멋대로 제대로 배웅해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된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네?"

"아니야."

르니에리를 심어놓고 갔다.

아직까지도 커피에서 르니에리 향을 맡는 주제에.

* * *

검은색 자개 마차.

왕궁 밖에서 가장 안전할 그 마차에 검은옷 입은 사람을 태운 칼리안이 말했다.

"어차피 네 얼굴 아는 사람 세크리티아 국왕이나 왕세자님 아니면 나밖에 없어. 그리고 그 집에서 함부로 마법 쓰면 큰일나니까 당분간 변장하지 마. 밖으로도 나오지 말고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얌전히 그 안에 있어."

할 말 끝났다는 듯 왕궁 밖에서 누구 숨기기 가장 좋을 곳에 데려다 줄 검은 마차 문을 닫으려는 칼리안을 향해 에일라가 물었다.

"누구 집인데요?"

"가면 알아. 문 앞에서 노래하는 애가 알려줄 거야."

칼리안이 이렇게 대꾸하며 마차 문을 닫았다.

곧 다각 다각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라지는 말고."

마차가 왕궁 문을 벗어날 즈음이 되어 장난스럽게 덧붙인 칼리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 님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

참 유쾌한 꽃 모양 석상이 생각난 탓이었다.

마차가 왕궁을 벗어남과 함께 왕궁 전체를 휘감아 도는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더 이상 중단할 필요 없는 보안 마법이 다시 구동된 것이다.

에일라가 궁에서 빠져나가는 길에 왕궁의 기사들에게 붙들릴까봐 직접 배웅까지 해 준 칼리안이, 보안 마법을 막느라 꽤 고생했을 앨런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다시 타박타박 체르밀 궁으로 돌아가다가, 건물 입구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그리고 방향을 바꿔 호숫가 쪽으로 걸어갔다.

"안 들어가고 뭐 하십니까. 늦었는데요."

이 밤중에 하얀 달빛 가득한 호수 보면서 청승떨고 있는 개구리밥같은 머리꽁지가 보여서였다.

"너."

"저는 왜 기다리셨습니까."

플란츠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서서 찰랑이는 호숫물을 한참 쳐다보도록 대답이 없었다. 어차피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옆에 누가 있든 말든 신경 안쓰고 제 세상에 빠지는 놈인걸 알아서, 칼리안은 그냥 다음 말이 나오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고양이 이름."

"네."

고양이 이름을 드디어 정했나보다.

더 이상 나비야 사과야 할 수 없게 될 것 같아 조금 아쉬운 마음이 생긴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기억하겠다는 말, 뭐라고 하는데."

"세크리티아의 옛 언어 말씀이십니까."

"루시가 돌봐주고 있으니까."

루시 이름도 세크리티아의 옛 언어로 지었으니 새끼 고양이도 똑같이 짓겠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안네, 입니다."

안네루시아.

잊지 않겠노라는 약속의 말로 떠난 이를 위로하는 꽃.

그것을 잠시 떠올렸는지 플란츠가 다시 호수를 쳐다봤다.

"그걸로 해."

나비 말고, 사과 말고.

잘 살라며 가르쳐 주고 있는 것 안 잊어버리고 고양이 잘 돌보겠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 뜻은 언제 알려줄건데."

"형님 더 크시면요."

생글생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체르밀 궁을 가리켜 보였다.

날 추우니 연약하신 형님 빨리 들어가시라는 뜻이었다.

혹시 내 이름 뜻이 완두콩인 것은 아닌가 하는 끔찍한 생각을 문득 떠올린 플란츠가 깊은 고민에 빠져드는 것은 모르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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