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6)
생각보다 텐실의 화답이 늦었다.
정확히는 텐실 왕세자로부터의 답이 늦었다 해야 할 일이다. 덕분에 그레이 역시 후작위 승계에 대한 축하 파티를 며칠 미뤘다. 그래서 칼리안은 에일라를 만나기 위해 보름 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보름.
선선하던 바람에 어느덧 찬 기운이 담길 기간.
그 기간 동안 카이리스는 변화의 바람을 품었다.
앨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보름 동안 몇 차례 더 에우리아를 만난 앨런은, 폴룬 마법학원을 르메인의 공식 승인을 받은 폴룬 마법 학교로 변경하고 카이리스 각 지역에 분교를 두기 위한 준비과정에 들어갔다. 그 덕에 '마법학원의 교장'이라는 애매한 위치에 있던 에우리아가 직위의 앞 뒤가 맞는 정식 교장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마나실 백작님.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말하게.'
'저 그냥 해고해주시면 안 돼요?'
물론 황금색의 학교장 명패를 다시 한 번 받게 된 에우리아가 앨런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을지는 알 수 없을 일이다.
'그렇게까지 겸손해 할 것 없으니 자신감을 가지게. 응원하는 뜻에서 술친구 한 명 만들어 줄 터이니.'
에우리아의 감사인사를 잘 받은 앨런은 카이리스 곳곳에 계속 추가될 이동 마법진의 설치 방법 정형화를 마무리한 며느리 레이첼 그레이스를 수도로 완전히 불러들였다. 그리고 본래 발칸의 훈련을 맡기려던 계획을 조금 수정해 마법 학교의 분교 관리 및 부교장 업무를 맡겼다.
뿐만 아니라 마법사들에 대한 처우 개선, 발칸의 인원이 늘어남에 따른 왕궁 내부 및 수도 외곽의 시설 확충 등의 계획을 실현해나가기 시작했다. 발칸을 '군단'이라는 이름에 맞을 몸집으로 키워나가기 위해서였다.
그와 함께 발칸의 성장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일이 진행됐다.
- 니들렌 제이아, 페일튼 유즈, 라즈 이베카, 데미안 스콘을 발칸의 사단장으로 임명한다.
마법사단과 기사단에서 각 두 명씩 총 네 명의 사단장을 임명했다.
소대에서 중대로, 대대로, 여단과 사단을 거쳐 군단으로.
애초부터 칼리안은 발칸의 몸집을 조금씩 부풀려가며 그에 맞게 명칭을 바꾸고자 하지 않았다. 서른 명 뿐이었던 발칸을 곧바로 군단이라 불렀다.
'명칭은 중요해요. 소대라 불리던 발칸이 중대가 되고 대대가 되고 종내에는 군단이 되고. 그렇게 이름을 하나씩 올릴 때마다 귀족들은 국왕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고 매번 경계하려 들 겁니다. 그 때마다 귀족들과 눈치싸움해야 하는데 그렇게 낭비할 시간 없습니다. 처음부터 큰 규모의 이름을 가지고 하위 등급을 하나씩 만드는 게 나아요.'
발칸을 자신이 목표하는 규모에 맞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에 맞는 크기로 키워나가고자 했다. 따라서 앨런은 아르센 및 플란츠와의 상의를 통해 새로 임명한 네 명에게 부군단장의 하위 직급인 사단장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변화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에게 백작의 위를 내린다.
- 발칸의 사단장 니들렌 제이아, 페일튼 유즈, 라즈 이베카, 데미안 스콘에게 자작의 위를 내린다.
르메인은 각자의 작위가 없는 이상 수뇌부든 일반 대원이든 할 것 없이 모두 동일하게 준남작으로 대우하던 정책을 바꿨다. 그에 따라 발칸의 수뇌부 일원에게 각자의 직위에 걸맞는 작위를 내렸다.
- 발칸의 군단장 앨런 마나실에게 후작의 위를 내린다.
당연히 앨런도 군대를 총 지휘하는 위치에 걸맞는 진짜 작위를 받았다. 사라진지 오래였던 카이리스의 두 번째 후작 자리였다. 귀족들의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섣부른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더불어 또 하나.
- 최선의 조치로 3왕자를 소생시킨 발칸의 치유사 히나 베른에게 자작의 위를 내린다.
단순히 귀하다는 말만으로는 그 능력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기 힘든 히나에 대한 보상이 주어졌다.
준남작에서 자작으로 무려 두 단계의 신분 상승.
휘하의 대원 없이 단신으로 활동하는 치유사에게 발칸 사단장과 동급의 작위를 준 것이다. 그동안 왕자들을 참 많이 살려낸 것에 대한 보상이자 타국의 왕이 마음대로 넘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히나가 하프엘프인 평민 출신, 심지어 처음에는 성도 없고 신분 증명도 어려운 처지였음을 매우 잘 알고 있는 르메인으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인사조치라 할 수 있을 결정이었다.
그 밖에도 이것저것.
'마치 브리센이 휘청이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움직이는군.'
귀족들이 이렇게 평가할 만큼,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 자리를 잡기 전에 다 바꾸어야 한다는 듯 왕실에는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곧 르메인의 힘이었으며 되돌려 받아야 할 카이리스의 왕권이었다. 그 모든 것이 고작 보름 안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모든 변화의 시작점에 바로 칼리안이 있었다.
그 어디에도 여전히 칼리안의 이름은 없었으나, 그것은 분명 칼리안의 손에서 만들어져 태풍을 불러온 나비의 날갯짓이었다.
"저건 나비인가?"
"나비 날개가 저렇게 생겼겠나. 딱 봐도 새 아닌가."
경쾌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는 곳.
불타버린 에반의 저택 대신 레넌의 저택을 임시로 사용하게 된 그레이 브리센의 후작저.
에반의 죽음 이후 브리센이 잠시 휘청이는 상황, 그리고 브리센과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엮인 엄청난 일로 인해 쉬이 걸음하지 않으려던 귀족들은, 발칸의 부군단장이 칼리안의 선물을 들고 참석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 3왕자님과 새로운 브리센 후작 사이가 썩 나쁘지는 않다는 뜻이 되나?
- 그러니 선물을 건네주시겠지. 그것도 헤르츠 백작까지 보내신다 하지 않나.
- 그럼 아무래도 참석을 해야 되겠군.
이렇게, 칼리안의 선물에 왕자와 후작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의미를 잘 부여한 귀족들이 파티에 참여했다. 그 뒤에는 넓은 정원 입구에 세워진 한 조각상 앞에 몇몇씩 모여 이야기를 주고 받는 중이었다.
"아, 그렇군. 새 두 마리로군. 그런데 왜 '고양이'도 아닌 새를 보내셨을까?"
칼리안이 보낸 선물.
그 의미를 열심히 가늠해보고 있었다.
"내 생각에 이 붉은 새는 그리핀이 아닐까 싶은데."
"그리핀이라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나?"
불과 얼음, 그리고 물을 이용해 만든 조각상.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장식대 위에 한뼘 정도 되는 높이의 물이 고여 있었다. 물을 막기 위한 장치가 하나도 없음에도, 찰랑이는 물은 서로 뭉친 채 아래로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양 날개를 하늘로 뻗으며 물에서 이제 막 몸을 띄우려는 듯한 모습을 한 불꽃의 새가 있었다. 다리가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 새의 긴 날개가 새빨간 불길에 싸여 타오르는 듯한 빛을 냈다.
"그리핀이라 하기 보다는 차라리······."
새의 길다란 목을 보던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화염으로 만들어진 백조 같은데."
"그렇군. 다시 보니 나도 그렇게 보이네. 그런데 저 백조 입에 대체 뭘 물고 있는 거지?"
얼음.
새의 부리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조각이 물려있었다. 사람의 주먹만한 동글동글한 것. 하지만 명백한 형태를 가진 무언가.
"······ 참새?"
비슷하지만 참새는 아닌, 푸른 빛의 솔새였다.
그러니까 칼리안은 이제 막 물에서 비상하는 붉은 고니가 푸른 솔새를 물어 죽이는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그레이에게 보낸 것이다.
그레이와 아무 관련 없는 붉은 고니와 솔새의 조각상을 보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이 참새같은 것은 아마 에반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나. 성도 잃고 작위도 잃었으니 어찌 그것을 그리핀이라 하겠는가. 그냥 참새일 뿐이지. 그리고 저 백조는, 과거 덩치만 큰 그리핀과 같이 교만하지 말고 달라진 모습을 보이라는 뜻 같네. 새로워지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해서 이전 날의 오점을 다 태워 없애버리라는 그런 뜻이 아니겠나."
"아. 과연 그런 의미로군."
어차피 뭘 보내든 거창하고 좋은 뜻을 알아서 잘 찾아다 붙여 줄 테니까.
"귀족으로 살기 참 힘들어 보입니다."
"너도 이제 진짜 귀족이야, 백작 꼬맹이."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파란 머리 마법사의 말에 보라 머리 마법사가 가볍게 대꾸했다.
"저 위에 번개도 하나 올려둘까? 정신차리고 살라는 뜻도 하나 더 붙여주게."
"그거 보기 좋겠네요."
그와 동시에 붉은 고니 조각상 위에 보라색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감탄하며 이내 무언가를 많이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머리 좋은 멍청이들 같아."
그 모습을 본 보라 머리 마법사가 솔직한 감상을 남겼다.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하고는 있었으나, 아마 이 자리에 둘 말고 다른 마법사가 있었다면 퍽 놀랐을 것이다. 서로 다른 속성의 마법을 특정 형태로 만들어 유지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참에 그냥 화염 속성도 마스터하는 건 어때? 나처럼 이중 속성으로. 꼬맹이 너 불 좋아하잖아."
"전 이중 속성 안 합니다."
"왜?"
"진짜 좋아하는 건 취미로 해야 재밌는 거라고 스승님께서 그러셨거든요. 그리고 사람 잡는데는 얼음만한 게 없습니다."
물 뿌리고 번개 불러와서 대학살을 내려주는 한낮의 사신에게, 한 명 한 명 심혈을 기울여 심장을 꿰뚫어주는 얼음 꼬맹이가 말했다.
"그리고 저는 빨리 6서클 될 겁니다."
"6서클 왜. 술 마시게?"
"네. 협회장님 안주 안 얼리려면 술 잘 마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 그래. 잘 해봐."
발칸의 부군단장이며 천재 마법사이자 백작인 이가 6서클 달성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는 이유를 들은 에우리아가 대강대강 대답을 했다.
"그러고보니 폴룬 남작님이 안 보이는데."
"아내분과 근처에 있습니다. 저랑 계속 가깝게 있으면 괜한 의심 살 것 같아서요. 그런데 폴룬 남작은 남작님이고 저는 백작 꼬맹이입니까?"
"꼬맹이가 꼬맹이지, 그럼."
그렇게 간단한 대화가 오고 갈 무렵, 흘러나오던 음악이 바뀌었다.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네가 찾는다던 짹짹이는 저걸 봤으려나."
"봤을 겁니다. 멀찍이서 조각상만 보다가 슬그머니 사라진 남자 한 명 있었습니다."
그래, 하고 답한 에우리아가 틀어올린 머리를 잠시 매만졌다.
보석이 잔뜩 붙은 하늘색 실크 드레스나 짙은 보라색의 하이힐도 그렇지만, 늘 대충 땋아 내리거나 하나로 묶기만 하던 긴 머리를 틀어 올리니 무겁기도 하고 목 뒤가 영 허전했던 것이다.
"불편하십니까?"
그것을 어떻게 눈치채고는 물어오는 아르센을 향해 에우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요즘 좀 바빠서 파티에 참석을 잘 안했더니."
"그래도 로브만큼 잘 어울리십니다."
"그렇겠지."
당연하다는 듯한 에우리아의 대답에, 셔츠부터 재킷과 바지 모두 검은 색으로 갖춰 입고 보라색의 타이를 맨 아르센이 씩 웃었다. 그러더니 딱 제 머리색을 닮은 얼음꽃 하나를 만들어서는 다른 장식 없이 고정만 해둔 보라색 머리카락에 살짝 꽂았다.
"뭔데?"
"이것도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요. 안 식상하고."
새로 생긴 장식 핀을 살짝 만져 본 에우리아는 안그래도 긴 머리가 무거워서 장식핀을 다 빼버리고 왔다 말하는 대신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식상하게 돈 주고 사는 보라색 꽃 말고 훨씬 보기 좋은 파란 꽃 만드는 법 알려준 칼리안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 인사를 남긴 아르센이 손을 내밀었다.
"오신 김에 한 곡 추고 가시죠, 협회장님."
"어. 한 곡만 추고 술 마실 거니까 꼬맹이 넌 구경만 해. 남의 집 얼리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 일 끝난 두 마법사가 사이 좋은 모습으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 팔락
서류를 넘기는 소리에, 잠들었던 루시가 분홍색 발바닥을 쭉 펼쳐보이며 잠꼬대같은 소리를 냈다.
에우리아의 머리카락보다 훨씬 짙은 보라색의 발바닥을 위로 향하고 잠들어 있던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좋아하는 플란츠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루시의 잠버릇에 설핏 눈을 뜨고 꼬물거렸다.
깊은 밤.
"깨워서 미안. 계속 자."
잿빛의 새끼 고양이를 깨운 원인을 제공한 칼리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새끼 고양이 턱 밑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완두콩이 하도 바빠서 네 이름 짓는 것도 까먹었나보다. 그치, 나비야."
"니아옹."
대답인 듯 얇은 소리를 낸 새끼 고양이가 살살 눈을 감더니 다시 잠에 빠졌다. 그 작은 모습이 너무 소중해서, 칼리안이 조심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멋들어지게 차려 입고 '외근'을 나간 아르센의 일까지 처리하느라, 플란츠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칼리안은 플란츠 대신 자신을 찾아온 두 고양이를 얌전히 재우며 이번에 바뀐 여러 일들에 대한 보고서를 살펴보던 중이었다.
- 팔락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몇 장의 종이가 소리를 냈다.
다만 이번에는 루시도 새끼 고양이도 깨지 않았다. 작은 두 고양이가 또 깰까봐, 고양이와 테이블 사이에 사일런트를 발현한 덕분이었다.
- 팔락, 팔락
잘 한 일이다.
아니었으면 고양이들이 정말로 깰 뻔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난간에 잠시 기대어 앉아 있던 이가 사뿐하게 움직여 테라스 안으로 발을 디뎠다.
찾아온 이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그것이 꼭 너울거리는 파도 같아서 칼리안은 잠시 소금기 가득한 비린내를 떠올렸다.
"겁도 없고."
덧붙여진 말을 들은 이, 에일라가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으며 생긋 웃었다.
"생각보다 늦게 찾으셨네요."
긴 속눈썹 속 맑은 물빛의 눈동자가 칼리안을 응시했다.
"겁도 없이."
자신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대답이 기껍게 들린 탓에 칼리안의 눈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냈다.
"마력탄은 쓰지 마. 고양이들이 시끄러운 것 싫어하더라."
"안 가져왔어요."
"진짜?"
"진짜. 흉터 남는 것 싫어하거든요."
그렇게 말한 에일라가 소매를 살짝 걷어 보였다. 라트란 영지에서 싸우던 중 칼리안에게 베인 상처의 흉터가 길게 남아 있었다.
"내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니지?"
"미안해 할 일 맞다면 사과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해달라면 해야지."
"됐어요."
어둠에 잠겨들기 위함인 듯, 딱 달라붙는 검은 복장을 한 에일라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아무튼. 저는 왜 불렀어요?"
"죽이려고."
"설마. 궁금한 것 많으실텐데."
"너는 왜 왔는데?"
"죽이려고요."
"흉터 싫다더니."
"혹시 모르니까."
"나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 아니야, 에일라."
작게 웃으며 대답한 칼리안이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살짝 내려놨다. 누가 보아도 돈이 담긴 주머니였기 때문에, 에일라가 그것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나는 돈 준다고 아무거나 하는 사람 아닌데."
"대답 몇 개는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흠······ 글쎄요. 어떠려나."
잠시 칼리안을 보던 에일라가 살짝 몸을 움직여 주머니를 손에 들었다. 동전 부딪히는 소리 말고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에일라는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돈 아니네요."
"좀 더 좋은 거."
동전보다 작고 동그란 것들이 잔뜩 뭉쳐있는 것을 손 위에 올린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한 에일라가 물었다.
"루비?"
"눈치 빠르네. 여전히."
"흐음. 왜일까."
상상 이상의 금액을 미련 없이 손에서 내려놓은 에일라가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비딱하게 기울이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나는 물어보고, 왕자님은 대답하고. 그 대신 루비 안 받는 건 어때요?"
"안 받으면, 질문 끝나고 죽을텐데."
"예쁘장한 왕자님이 입은 안 예쁘시네요. 여전히."
"다 예쁘면 재미없잖아."
칼리안의 답이 재밌다는 듯 작은 소리를 내며 웃던 에일라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는 손가락을 들어 칼리안이 건넨 주머니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저것도 받고 질문도 받으면 돌려보내 주실건가요?"
"에일라."
장난스러운 말을 끊은 칼리안이 붉은 눈을 들어 에일라를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해서 왔으면 도와달라고 말을 해."
"······ 우와."
에일라의 눈에 미미한 살기가 어렸다.
"나 도망 중인 것도 아시나보네."
"네 주인이었던 사람이 입 말고 마음이 안 예쁘다는 걸 알거든, 나는."
그 살기 그냥 받아넘긴 칼리안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칼리안에게 큰 패로 쓰일 법한 비밀을 알고 있는 새 한마리를 그대로 살려 둘 데블란이 아니지 않나. 그러니 만약 에일라가 정말 도망쳤고, 칼리안의 비밀을 데블란에게 알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면.
데블란으로부터도 도망을 쳤으리라 생각을 했다.
"똑바로 말하면 저것도 주고 도와도 줄게. 대신 너도 나를 좀 도와야 해. 어때."
"왕자님이 진짜 누구인지 알려주면, 생각해볼게요."
"고작해야 생각해보는 정도야? 서운한데."
"나 쉬운 사람 아니라니까요."
"알아."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모를 리가 있나. 네 진짜 주인이 나였는데."
살기가 짙어진다.
칼리안이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에일라. 죽이기 싫으니까. 여전히."
서늘한 바람이 불고 고양이들은 새근새근 잠을 자는 시간.
평온한 밤이 잠잠하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