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4)
재밌는 이야기.
아주 흥미진진한.
고기도 먹고, 배에 구멍난 것도 허전한데 밥까지 못먹어서 마음까지 많이 헛헛한 안쓰러운 동생 앞에서 고기 잘 처먹은 플란츠한테 복수도 하고, 하는 김에 완두콩 속알맹이 또 삶아졌나 안 삶아졌나 좀 살펴볼까 올라왔는데. 생각지도 못하던 말을 듣게 되었다.
사형된 죄인.
레넌 브리센, 아니. 이제 성이 없어졌으니 그냥 레넌. 레넌과 연관되어 있던 헤일 라트란이라는 백작에게 신물을 팔아 넘기고 카이리스의 정보를 샀던 사람. 그렇게 캐 낸 카이리스의 정보는 세크리티아에 넘기고 신물은 돈벌이로 삼았던 사람.
무엇보다, 칼리안을 공격했던 사람.
때문에 왕족을 공격했다는 죄목으로 광장의 레니시타 잎 위에 올랐던 사람.
'남자.'
플란츠가 본 이가 정말 남자였는지 되묻지 않았다.
플란츠의 기억이 잘못됐을 리 없으니까.
대신 칼리안은 그 때의 기억을 잠시 되짚었다.
칼리안과의 싸움이 끝난 뒤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헤일 라트란과 같은 감옥에 가둬두지는 않았다. 유란이 포함된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감옥을 지켰다.
그 이후.
'카에라.'
르메인은 칼리안이 왕궁 밖에서 습격을 받은 것에 대해 귀족들에게 경고를 전하는 의미로 기사단 카에라를 보냈다. 그리고 죄인들을 수도로 압송해갔다.
'카에라의 기사였던 세작.'
그래. 카에라였다.
플란츠의 앞에서 죽은 세작이 숨어 있던 카에라였다.
당시 머물렀던 라트란 영지에 찾아온 왕궁의 기사들이 영지에서 딱 하루를 머문 뒤 죄인들을 수도로 압송했다. 왕궁에서 사람들이 온 뒤로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은 더 이상 감옥을 감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칼리안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죄인에 대한 신상을 왕궁에 알리지 않았다.
왕궁에는 신원 미상의 암살자라 말했다.
그때 칼리안은 헤일 라트란의 거래 정보가 필요했다. 때문에 그것을 넘겨주면 세작이라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겠노라 했다. 심문도, 조사도, 아무것도 거치지 않고 바로 형 집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노라 했다. 때문에 그 정체와 이름을 왕궁에 알리지 않았다. 사실 그 정체를 칼리안이 어떻게 아는지를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해야 맞는 말이다.
'변장술에 능했지.'
세크리티아에서 극소수의 세작들에게 지급되는 변장용 마법 물품을 즐겨 썼다. 남장을 했다.
함께 잡혀들었던 헤일 라트란도 남장한 모습만 봤다. 감옥에서는 서로 마주친 적 없었으며 압송 중에도 함께 있지 않았을 것이다. 수도에서 작위를 박탈당하기 전까지 헤일 라트란은 귀족이었으니까.
다만 수도에 온 이후에도 남장을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소지품을 다 압수하니까. 그러니 광장에서 죽은 것은 남장을 한 것이 아니라 진짜 남자였다는 소리다.
그렇다는 것은.
'······ 바꿔치기.'
라트란 영지에서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카에라의 기사들에게 죄인들을 넘기던 그 순간에 남장을 한 뒤 다른 누군가와 바꿔치기했을 수 있다. 아니. 싸움이 끝난 뒤 칼리안은 곧바로 자리를 떴고 그 직후 유란과 기사들이 들어와 체포를 했으니 그 찰나에 이미 남장을 했을 수도 있다.
워낙 외모가 출중했으니, 도중에 바꿔치기를 원했다면 다시 남자로 변장을 하는 편이 나았으리라.
그 결과 광장에 서게 된 죄인이 진짜 남자였다면.
그렇다면.
그랬다면.
'그렇다면. 그랬다면.'
칼리안의 무릎에 잠시 올라와 있던 루시가 폴짝 하고 플란츠의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좋아하는 플란츠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함께 달려갔다.
고양이 두 마리를 눈으로 좇으며 시선을 옮기던 칼리안이 조용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 아래로 보여지는 입술이 꽤 즐거운 듯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
푸른 솔새.
에일라.
"······ 너구나."
찾았다.
* * *
발칸의 기사단 인원이 줄어들었다.
기존의 기사들 중 플란츠의 손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지 못한 이들을 전부 골라 빠짐없이 다 내보낸 탓이다.
그 직후 발칸의 기사단 인원이 폭증했다.
지그프리드에 있던, 에이프린 백작이 모아 보낸 기사단이 발칸에 정식 합류했기 때문이다.
인원을 감축한 뒤 다시 늘어났으나 새로 들어온 기사들의 수가 월등히 많은 탓에, 결과적으로 발칸의 기사단은 몸집이 많이 불어났다.
"왕궁에서 나가게 된 기사들이 그레이 브리센 후작저나 브리센 후작령에 돌아가게 될 텐데, 그들이 그렇게 전력을 보충해도 괜찮겠습니까."
새로 늘어난 기사들이 왕궁에 오기 직전까지의 훈련 과정 및 성과가 기록된 서류를 받아 든 아르센이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왕자님께서 줄여놓은 후작가 기사들의 수가 워낙 많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새로운 브리센 후작은 왕자님이 어떤 분인지 가장 뼈아프게 알고 있는 이라서 인원이 좀 늘어난다 하더라도 섣부른 행동을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 성품이나 행실이 에반에 못지 않은 이가 아닙니까. 앞으로의 행보 역시 결코 투명하지 않을 자이니, 자칫 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르센이 히비스커스 꽃잎을 우린 찻잔을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 차의 붉은 색과 썩 비슷한 빛의 눈이 생각난 탓이다.
"왕자님 뒤에 발칸 있습니다. 소공작님."
찻물과는 정 반대되는 빛깔의 눈을 들어올린 아르센이 마주 앉은 드미레아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왕자님께서는, 브리센 후작이 영원히 숨죽이기를 바라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전하와 마나실 군단장님께서 기사들을 내보낼 때 기사 작위를 전부 유지시키신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그대로 몸집을 다시 잘 불려서, 적당한 때 왕자님 자리를 한 번 넘봐줘야······."
검지를 들어올려 보이며 말하던 아르센이, 반대편 손을 올려 들어올린 손가락을 확 꺾어보이는 시늉을 한 뒤 말을 이었다.
"그 허리 다시 잘 꺾어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칼리안의 계획 속에서 그레이는 어디까지나 임시 후작이다. 앨런을 통해 칼리안이 왜 그레이를 살려뒀는지를 들은 아르센이 찻잔을 들어 한 입을 마셨다.
- 똑똑똑.
그때,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늦은 저녁 시간.
더 이상 찾아올 손님이 없었고 집사장은 여러 귀족가문에서 보내오는 갑작스러운 선물들을 직접 되돌려주기 위해 나간 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 노크 소리가 조금 아래에서 들려왔음에, 드미레아가 살짝 웃는 얼굴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서 있는 이를 본 아르센이 다소 복잡한 얼굴을 했다.
청록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지닌 어린 아이.
"리리에."
"나, 잠이 안와."
드미레아를 본 아이가 이렇게 말하며 양 팔을 뻗었다.
"그래. 이리 와."
하인들을 불러 아이를 데려가 재우라 말하는 대신, 드미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품에 안아올린 뒤 아르센을 향해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드미레아가 밖으로 나간 뒤 아르센이 잠시 닫힌 문을 쳐다보며 작은 침음을 냈다. 아이가 누구인지 물어 볼 필요도 없었던 탓이다.
아이는 에반을 닮았다. 그레이를, 레넌을, 실리케를 닮았다. 플란츠를 닮았다.
찻잔의 붉은 물이 반쯤 사라졌을 때 드미레아가 돌아왔다.
"저 아이입니까. 에반의 시신 뒤에 있었다던."
"네. 맞습니다."
"어떻습니까, 성격은."
작고 귀여운 것을 참 아끼는 아르센이지만, 작고 귀여운 브리센의 핏줄을 편견 없이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사실은 '똑똑하냐'고 묻고 싶었으나 어린 애를 두고 할 말이 아니라서 그냥 성격만 물어봤다.
"영특합니다."
그리고 드미레아는 숨겨진 질문에 대한 대답을 건넨 뒤 말을 이었다.
"잠에서 깼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서 나갔다고 합니다. 칼리안 왕자님이 손을 멈췄고, 에반은 찔렀고, 칼리안 왕자님이 꿈을 꾸는 것이라 거짓말을 했고, 다시 잠들었다고 합니다."
"에반이 죽은 이유에 대해 왕실에서 공개한 것과 다른 진짜 상황을 알고 있다면 지그프리드 공작령으로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조부가 죽은 것이 '정당한 결과'라 하더군요."
리리에라는 아이가 에반의 죽음에 대해 원한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 아이의 입을 통해 에반이 사망한 전말이 밖으로 나갈 일은 없으리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소공작님. 수도 안에서 지내도록 하기에는 너무 많이 닮았습니다. 왕자님과 플란츠 왕자님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 겁니다."
"여섯 살입니다."
드미레아가 아르센을 쳐다봤다.
"그런데 자신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그 집에 보내졌는지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척하며 지내왔다 합니다. 헤르츠 부군단장은,"
그리고 작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물었다.
"그런 아이를 다른 곳에 보낼 수 있는 사람입니까. 그곳이 비록 내 본가라 하지만 아이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낯선 곳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르센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 알겠습니다. 더 이상 그에 대해 걱정하거나 다른 말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드미레아를 향해 내뻗어지던 아이의 팔이 생각나버린 탓에, 칼리안도 플란츠도 그냥 두는 일에 대해 더 참견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아르센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아이를 생각하니 플란츠가 떠올랐다.
그러다 플란츠가 몸져 누웠던 날이 생각났다. 자연스럽게 그런 플란츠를 치료했던 히나도 생각났고 갑자기 찾아와 플란츠를 고쳐주고 무심하게 나간 란델이 떠올랐다.
'란델 왕자님의 말씀은 내가 왕자님께 전해드리겠네.'
그리고 이렇게 말하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
덕분에 아르센은 아이에 대한 고민을 일단 내려놓고 자신의 미래를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왕자인 란델의 말을 전하는 것을 잊어버려서가 아니었다.
칼리안에게 란델의 말을 전하려면 란델을 어디에서 만났는지 설명해야 하고 그러려면 란델이 플란츠에게 뭘 하도록 그냥 뒀는지도 말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깨달은 탓이었다.
* * *
새 좋아하는 것도 유전인지 모르겠지만.
아빠도 새를 키우고 아들도 새를 키운다.
그 새들 공동육성 한다 해놓고 알고보니 서로 몰래 키우던 새가 몇 마리씩 있어서 새들끼리 싸움도 하고 부자지간에 자기 새들 데리고 경쟁도 하는 뭐 그런 좀 이상한 집안이 있는데 그 집안을 욕하기에는 우리 집안도 어디 하나 빠질 곳이 없어서 차마 저 집안 이상하다 욕을 못하겠는 그런 집안의 새가 우리 집에 숨어있었던 걸 내가 찾았다. 그런데.
"······ 에일라."
이전 생에서 도대체 뭘 하다 오셨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많이 위험한 일 하다 오신 것은 분명한 그런 분이 하필 새 좋아하는 그 집안 둘째 아들이었던 탓에 보는 사람 속을 곧잘 심란하게 만드는 내 동생 쟤가 지금 누구 이름을 부르며 참 좋아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 고양이 보고 나비야 사과야 해 가며 정신 빠진 것처럼 굴던 동생 놈이 고기 먹다 말고 갑자기 음습해지는 것을 보던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칼리안."
칼리안의 시선이 플란츠 쪽으로 돌아왔다.
다른 말 없이 자신을 보는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안 잊어버렸습니다."
그 뒤에는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사람 죽은 얘기 꺼내서 입맛 떨궈놓고는 옛 추억에 빠져 지금 이름 잊어버린 얼굴이 되더니 다시 야무지게 식사를 이어나가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을 했다.
"또 뭔데."
"형님 똑똑하셔서 다행이라는 생각 중입니다."
접시에 있던 것 중 가장 큰 돼지고기 조각을 집어먹은 칼리안이 대답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제 일을 어떻게 아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짧은 한숨을 내뱉은 칼리안의 입에서 로젤리타 기간 중 있던 일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 앞에서 제가 새들의 거점을 안다는 것도 밝혔고 실명을 알고 있다는 것도 말했고 제가 소드마스터인 것도 알렸으니, 살아서 나갔다면 문제가 크네요."
"내 아우님께서 참 친절하게도 알려주셨군."
"도망칠 줄 몰랐습니다. 아무튼 살아있는 듯 하니 세크리티아 국왕 말고 또 누구에게 그 말을 전했는지 걱정이 좀 되네요."
그걸 걱정하는 놈 입에 소고기가 들어가는 것을 묵묵히 쳐다보던 플란츠가, 욕 대신 말을 꺼내느라 꽤 애를 쓰며 입을 열었다.
"어쩔건데."
"어딨는지 찾아봐야죠."
"어떻게."
에일라가 찾으려 했던 신물.
검은 조약돌.
또, 제온이다.
칼리안이 조용히 손을 들어 윗층을 가리켜보였다.
"자몽 먹으러 다녀와야 되겠습니다."
"언제."
"지금요."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이 이미 자신을 찾아오라 이야기했으나, 내용을 아직 전달받지 못한 칼리안이 씩 웃었다.
"······ 내려가. 내가 올라갈 테니까."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칼리안이 대답 없이 플란츠를 응시했다.
"쉬라고. 좀."
그 표정을 해석하자면 또 짜증이 날 것 같아서 플란츠가 다시 말했다.
"뱀은 내가 잡아 줄 테니까."
"아."
칼리안이 웃었다.
웃는 것 말고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었다.
그 꼴을 보던 플란츠가 다른 말을 하나 꺼냈다.
"그러고보니. 란델 형님께서 내 심장을 치료해주고 가셨다더군."
그리고.
"그런데 마법을 처음 발현할 때는 원래 시동어를 외치나. 파란 머리 마법사가 책을 좀 뒤적이더니 시동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아브턴던트, 라고."
이렇게.
뱀 사냥하는 것 잊어버리고 파란 머리 마법사 생각이나 하라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