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3)
르메인을 만났다.
급히 수도에 도착한 그레이 브리센도 만났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눈 떠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앨런에게 좀 보여주고 히나와 아르센을 포함해 이번에 고생한 이들을 며칠씩 쉬게 해 주면 어떨지도 말하고 싶었는데, 에우리아를 만나러 갔다던 앨런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둘 다 하지 못한 채 메시지만 남겼다.
그렇게 내일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뽈뽈거린 칼리안이 체르밀에 돌아왔다.
상처는 당연히 아프고 여전히 배는 고팠지만 기분은 그럭저럭 괜찮아서, 칼리안은 얀 몰래 테라스에 나와 서있는 중이었다.
가을 밤. 바람이 조금 짙어진 기분이 든다.
바람이 부니 언제 들려와도 좋을 목소리가 함께 실려왔다.
- 미리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칼리안 왕자.
플란츠가 알아낸 내용.
세크리티아, 정확히는 데블란의 새를 어떻게 찾았는지. 그리고 바로 내일 카이리스에서 그 새를 어떻게 이용하게 될지에 대해 체이스에게 미리 알리고자 연락을 취했다.
세작과 관련된 문제였으니 양국의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가 없는 일 아닌가. 그것에 혹시라도 체이스가 신경을 쓰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연락을 보냈다.
- 혹시 그럼 발칸에 잠입한 새도 이번에 함께 얽혔을까요.
- 아닙니다. 전서구 역할만 해왔던 자라서, 스승님께 그냥 남겨두도록 이야기를 전한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정신을 놓쳤던 동안, 플란츠가 체이스의 전서구에 대해 앨런에게 따로 말을 해둔 모양이었다. 덕분에 진짜로 전서구 역할만 했던 그 세작은 여전히 무사했다.
- 그렇군요. 사실 이제는 이렇게 연락을 취할 수가 있으니 이만 본국으로 돌아오게 할까 생각을 했는데, 혹시 몰라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대신 그쪽에서 열심히 훈련 받으면서 잘 지내고 있으라 전해 놓았습니다.
- 혹시 부르시게 되거든 돌아가는 길에 꼭 인사하고 가라고 해주세요. 어쩐지 정이 들어서요. 송별 선물이라도 들려 보내겠습니다.
데블란의 세작에 대한 내용을 전해주고, 진짜 새 노릇을 하고 있는 무해한 세작에 대한 농담도 주고 받은 칼리안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시오나 힐.
또 한 명의 소드마스터.
'지금 이야기를 할까.'
행방을 알 수 있을지 도움을 받을까 하던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칼리안에 대한 정보가 어디에서 새어 나가 데블란에게 전해졌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칼리안이 지금 시오나를 찾고 있음을 섣불리 알리기가 힘들었다.
물론.
체이스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테일란 카스트린에 대한 의심이다.
절친한 사이였으며 존경하는 스승이자 검사이기도 했고 지금은 체이스의 기사인 이였으나 한때는 데블란의 호위였던 이다. 체이스로부터 칼리안에 대한 내용을 모두 전해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믿을 수 있다는 것이 확인 되면. 그 때 여쭤보는 것이 낫겠군.'
때문에 칼리안은 시오나에 대한 내용 말고 다른 말, 체이스에게 꺼내놓기 조금 어려운 말을 하나 꺼냈다.
- 그리고 다른 소식을 하나 더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을 했습니다.
- 네. 얘기하세요.
- 이번 일로 브리센 후작을 상대하면서 제가 조금 다쳤습니다.
- ······ 다치다니.
체이스의 목소리가 일변했다.
소리가 전해지지 않게 웃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 혹시라도 새들을 통해 아시게 되면 많이 놀라실 것 같아서, 잘 낫고 있다는 것 먼저 알려드리려고요.
- 어느 정도로 다쳤습니까. 심합니까.
심하다.
밥을 못 먹고 있다.
- 아닙니다. 살짝 스친 정도였습니다. 히나의 치유도 있고 축복의 힘도 있어서 빠르게 회복중입니다.
체이스가 기분을 가늠하기 어려운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 그 정도면 내가 놀랄 것이라 생각하지는 못할 텐데. 여전히 그렇게 거짓말이 서툴러서 어찌하나.
- 아,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군요. 사실 살짝이라 하기보다는 좀 더 심하게 다쳤었지만 지금 회복 중인 것은 맞습니다.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님에도 체이스가 긴 한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하는 것이 분명해서 칼리안도 짤막한 숨을 내쉬었다.
체이스가 조심스러워진 말투로 말을 건네왔다.
- 카스트린 경으로부터 에반 브리센 후작보다 칼리안 왕자의 실력이 나으리라는 말을 들었었는데, 어쩌다 다치기까지 했습니까.
- 후작과 싸움 도중에 어린 아이 한 명이 튀어나왔습니다. 언뜻 보았는데 예전 기억이 갑자기 섞여들었습니다. 준비 없이 튀어 나온 기억이 현실과 겹쳐지는 바람에,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잠시 잊어버렸습니다.
칼리안은 베른의 과거를 떠올렸던 것은 빼고 다른 이유만 전했다.
눈앞에서 실리케에게 검을 휘둘렀었는데 에반까지.
플란츠가 에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진짜 내면까지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혹시 또 한번 제 혈육을 향해 비슷한 일을 보여주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싸움 중에 결국 생각을 하게 되어서.
- 그러다 저도 모르게 손이 멈춰서요.
칼리안이 굳이 입에 올리지 않고 설명하는 사람.
방금 말한 어린 아이가 누구를 닮았다는 소리인지 쉬이 짐작한 체이스가 대답했다.
-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습니다. 나 역시 종종 겪었던 일이니.
완전히 자신의 것이라 하기 어려운 기억이 툭 튀어나와서 머릿속을 흔들어대는 경험은 아마 체이스가 가장 많이 겪고 있을 터였다.
- 제가 이 곳에서 다시 눈을 뜨기 전의 기억은 되도록 열어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보니, 순간적으로 떠오르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놀라게 되네요.
- 나의 기억이야 언제 떠오를지 모른다지만 칼리안 왕자는 그렇지 않을텐데. 차라리 예전 기억을 다 열어보면 놀랄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무슨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전부 알게 될 테니 동요할 일도 없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다 열어 볼 수가 없네요.
- 왜 열어보지 않으려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딸기 가득한 식사 중에 손을 멈추고, 대화 중에 말을 잇지 못하고, 싸움 중에 검을 잊고. 그런 일들로 손해를 보느니 옛 칼리안의 기억을 다 열어 전부 확인하면 될 것을 알면서 왜 그대로 두는지.
칼리안이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기억이 툭 튀어나오는 것이 반가워서요. 그 아이가 이미 떠난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아직 곁에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반가운 착각이 들어서.
처음 이 곳에서 눈을 떴을 때 궁금해하던 기억을 열어 보여주었던 그 때가 떠올라서, 이렇게 기억이 툭 튀어 나올 때면 여전히 그 때처럼 그 아이가 함께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그 반가움을 차마 버리지 못해서 기억을 다 열어보질 못했다.
- 그리고 기억을 전부 열어보고 살아가다가 혹여 작은 것 하나라도 제가 잊어버릴까 걱정돼서······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기억들을 그 아이의 것으로 온전히 남겨두고 사는 것도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게 잘 간직하고 싶은 그런 욕심에 그대로 지내고 있습니다.
옛 칼리안의 기억을 다 열어 칼리안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결국 이 자리에는 베른과 지금의 칼리안만 남게 될 테니 옛 칼리안의 것이었던 기억을 그냥 빈 공간으로 두고 살기로 했다.
- 소중한 것이니까요. 아픈 일이 많았더라도.
체이스가 베른에 대한 기억을 놓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마음.
상황도 방법도 다르지만 그래도 같은 마음일 터였다.
- 똑똑하게 구는 것은 아닌데 이해할 수 없을 말도 아니네요. 칼리안 왕자.
- 그렇습니까.
그래서 체이스는 그 어리석음을 이해했다.
- 다만······. 기억 말고 몸도 좀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 네. 조심하겠습니다. 지금은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흔들리는 물 위에 달이 떠 있고, 달빛에 바스라진 물결이 별처럼 반짝이는 모습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그 곳에서 불어오는 듯한 바람에 잠시 눈을 감았다.
-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군요.
한동안 말이 없던 체이스가 이렇게 운을 뗐다.
무엇이 나쁘지 않다는 소리인지 가늠해보려 하던 칼리안에게 체이스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 기억이 날지 모르겠지만 '내가' 오래 전에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형이니, 내가 걱정을 해야 한다고.
'내가 네 형이니라. 네가 아니라. 내가 너를 걱정해야지.'
한 글자도 잊지 않은 말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말을 들은 칼리안이 눈을 꾹 감았다.
- ······ 네. 그런 말씀을 하셨던 적 있습니다.
- 그 때에는 그렇게나 걱정할 자리를 내어주지 않더니 이제야 틈이 나는군요.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에 해도 좋을 말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이 생경하고, 또 반가워서.
굳이 예전의 일을 꺼낸 이유를 들은 칼리안이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저 말마따나 베른은 생애 단 한 번도 다쳤다는 소리를 해본 적 없었으니까.
누군가의 걱정까지 받으며 살기에는. 그래.
홀로 버티며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버거운 생이었던 탓에.
- 보기 좋습니다. 계속 그렇게 주변에 한 자리씩 양보를 해줬으면 좋겠고. 다쳤다는 말도 하고 아프다는 말도 하고, 때로는 도와달라는 말도 해 가면서. 칼리안 왕자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잘 알고 무엇이든 잘 해결하리라는 것도 알지만. 강한 사람도, 그 사람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도 결국은 다 같은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다쳤다는 말 못하던 사람이 다쳤다는 말을 먼저 하게 되었다는 것이 반가운 마음에, 체이스가 이렇게 부탁을 전했다.
- 네. 잊지 않고 지내겠습니다.
- 물론 그렇다고 또 다쳐오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치지 말아요.
칼리안이 웃었다.
- 그 말씀도 꼭 기억하겠습니다.
* * *
바람 가득 담긴 대화가 오가던 밤이 지나갔다.
날이 밝자 르메인은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들을 긴급히 불러들였다. 갑작스러운 부름이었으나 진작부터 브리센에 대한 일의 귀추를 지켜보던 귀족들은 불만 없는 얼굴로 빠짐 없이 잘 찾아왔다.
흥미와 걱정 근심이 다 섞인 표정의 귀족들을 앞에 세워 둔 르메인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그간의 조사 결과 에반 브리센 후작을 통해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왕궁에 잠입했던 것을 확인했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
다른 곳도 아닌 왕궁에 타국의 정보원이 버젓이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앨런의 말마따나 왕실의 문제는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고 한 두 개도 아니었다. 과거에 비해서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하나 그래도 어차피 다 알려진 무능함이다. 그리고 르메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입을 통해 직접 과실을 인정해가며 확인된 내용을 알렸다.
"또한 세크리티아의 세작과 에반 브리센 후작, 레넌 브리센 자작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증거와 증언을 모두 확인했다."
에반 브리센이 왕자를 공격하려 했다는 증거, 그리고 에반과 레넌이 세크리티아의 세작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그럴싸한 증거들은 그레이 브리센이 알아서 잘 준비할 것이다.
혹시라도 증거가 부실해도 괜찮다.
브리센이 저물게 된 마당이 아닌가. 브리센의 편에 섰던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 증거가 대체 어디 있는지 보여달라며 국왕에게 요구할 넋빠진 이들은 없을 것이다.
똑같은 것이다.
이제까지는 브리센이 곧 증거였다면, 앞으로는 카이리스 왕실이 곧 증거가 될 테니까.
뒤이은 긴 내용은 르메인이 아닌 시종장 라울을 통해 귀족들에게 전해졌다.
- 레넌은 독을 준비했고 에반은 세작의 손을 빌어 그 독을 2왕자에게 건넸다. 이를 알게 된 2왕자가 3왕자에게 내용을 알렸고, 은밀히 내막을 확인하려던 3왕자는 세작들의 공격을 받아 이미 사망한 에반 브리센을 발견했다.
적당한 진실과 적당한 거짓이 만든 눈가리개.
믿을 수 없을 완벽한 진실이나 의심의 여지 없을 완벽한 거짓보다 더 훌륭한 눈가리개가 이렇게 공개됐다.
- 3왕자 역시 위험에 처할 뻔 했으나 발칸과 지그프리드가 때맞춰 도착하여 큰 일을 벗어났다. 그 후 레넌이 증거 인멸을 위해 에반의 저택을 불태웠다.
에반과 레넌의 죄목도 알려줄 겸, 발칸이 어엿한 군대임을 알려줄 겸, 플란츠와 칼리안의 동맹 관계를 다시 드러내고 칼리안과 지그프리드의 긴밀한 관계를 과시할 겸, 칼리안도 다쳤다는 내용을 알려 3왕자가 지나친 무력을 가졌으리라는 두려움을 줄일 겸.
참 많은 목적을 가진 상황 설명이 끝났다.
르메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카이리스 왕실에서는 이번 일에 대한 증거를 파악하여 왕실에 먼저 알려 온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의 용기와 그간 카이리스의 국경을 면밀하게 지켜온 성실함을 높이 사, 그레이 브리센을 포함해 이 일과 관련 없는 브리센 일가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기로 하였다. 따라서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의 후작위 세습을 허락한다."
겸사겸사.
훗날의 완두콩이 고양이 키우러 갈 가문은 유지하고 그 가문 잠시 운영해 줄 그레이는 살려둘 겸.
"다만 세작의 잠입까지 획책하며 왕자의 안위를 감히 위협한 에반 브리센과 레넌 브리센의 죄에 대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 결정한 바, 에반 브리센과 레넌 브리센의 작위를 폐하고 성을 회수하며 레넌 브리센의 사형을 명한다."
에반과 레넌이 참 유별나게 경멸하던 평민으로 생을 마감하게 해 줄 겸.
둘의 이름에서 '브리센'을 빼앗아, 제 필요할 때에만 찾아 부르던 플란츠와의 혈연을 이제라도 영원히 끊어버릴 겸.
"아울러 이 사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세크리티아의 세작에 대해 카이리스 왕실에서는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세크리티아 국왕인 데블란의 명확한 해명과 정당한 사과가 있기 전까지는 양국의 왕래를 포함한 모든 거래를 엄금한다. 양국의 원만한 관계 유지를 원한다면, 세크리티아의 국왕 데블란은 이번 일에 대한 입장과 처리 방안을 조속히 밝혀야 할 것이다."
칼리안과 히나가 세크리티아에 가지 않을 이유도 만들 겸.
데블란이 무시하던 르메인이 어느 나라의 국왕인지를 알릴 겸.
겸사겸사.
"폴룬 남작에게 좀 미안하네요."
르메인의 입을 빌어 에반과 관련된 일을 일단락한 뒤.
갑자기 맞닥뜨린 세크리티아의 세작들 다수를 홀로 상대하다 꽤 많이 다치는 바람에 잠시 요양중인 정의로운 3왕자 역할을 맡은 칼리안이 여유롭게 웃었다.
"이번 일로 세크리티아와의 루비 거래에 차질이 생겼으니, 다른 거래처가 있을지 살펴보고 좀 도와주어야 되겠습니다."
텐실과의 다이아몬드 거래가 칼리안으로 인해 막히고, 세크리티아와의 루비 거래도 칼리안으로 인해 막혔다.
물론 거래가 흥하든 망하든 멜피르 폴룬의 인생을 구해준 것이 칼리안이었고 애초에 그런 거래를 하게 된 것도 칼리안 덕분이었으니 지나치게 미안해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세크리티아 국왕에 대해서는 일단 이렇게 막아뒀으니 저는 예정대로 엘프들부터 좀 겁주러 다녀와야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세크리티아 국왕을 치료하겠다 나서면 안되니까."
"반말."
"안되니까요. 그래도 형님께서 신경을 아주 많이 써주신 덕분에 장래 폭군 후보에 오를 일은 없어졌네요."
"안 썼어."
"네. 그렇다고 해두겠습니다. 그래서, 정하셨습니까."
"아직."
"빨리 정해주세요. 루시만 이름 있다고 서운해 하겠습니다."
"너."
"네."
"왜 왔는데."
"밥 먹으러요."
하루 지났다.
고기 먹으러 올라왔다.
"피곤해. 잘 거야. 가."
"싫은데요."
"애옹!"
"니아옹!"
피곤하다는 말 못 들은 것처럼, 칼리안은 잿빛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고 '나비야, 사과야' 해가며 빨리 이름을 지으라는 듯 성화를 부렸다. 동생 놈의 버릇 없는 시종은 주방의 시종들과 시녀들이 테이블 위에 여러 음식 차리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도 몽글몽글 잘 익은 양파, 다진 소고기를 뭉쳐 납작하게 구운 뒤 치즈를 가득 얹은 요리, 생강 향이 아주 살짝 밴 돼지고기 볶음, 레몬즙과 식초에 절인 양배추에 돌돌 말린 오리 고기, 흰 버섯과 줄콩을 함께 구운 요리, 많이 짜지 않은 치즈와 블루베리 소스가 곁들어진 샐러드.
그리고 완두콩이 들어간 스프.
크림 소스에 섞인 탓에 눈동자 말고 머리카락과 퍽 비슷한 색을 내는 그 스프를 한참 보던 플란츠가 레릭을 불렀다.
"치워."
피망도 못 드시고 덜 익은 양파도 못 드시는 우리 왕자님 완두콩도 못 드시나보다, 하는 얼굴의 레릭이 얼른 스프를 치워갔다.
"왜 못드십니까. 맛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지도 않고 그 푸르스름한 스프를 참 잘도 퍼먹고 있던 칼리안이 물어왔다.
뻔하다.
어제 먹은 고기 완두콩으로 복수하는 것이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이 됐다.
"왜 왔냐고. 또."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아니잖아."
"형님은 그럼 왜 피곤하신데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오리 고기를 삼킨 플란츠가 대답했다.
"신경쓰지 마."
"못 주무신 것 아닙니까."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포크와 나이프를 잠시 내려놓고 플란츠를 쳐다봤다.
"어제 체이스 왕세자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가 생각나서요."
직접 죽였든 아니든.
눈 앞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그 눈을 처음 봤을텐데. 괜찮을 리가 없겠구나, 하고."
죽어가던 그 눈이 계속 떠올라 며칠을 앓았던 베른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서도 왜 그러는지 묻는 체이스에게 별 일 아니라 말했던 베른처럼.
"검을 가르쳐드리고 있으니 언젠가 직접 생을 끊어낼 날도 오리라 생각합니다. 그것까지 막을 생각 없습니다만. 혹시 버거운 날에는 말씀 해주세요. 위로하는 건 해 본 적 없어도 들어는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뒤 제 앞에 놓인 고기를 다시 집어올려 먹던 칼리안을 한참 보다가, 플란츠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전날 세작의 일로 잠을 못 자기는 했다는 소리다.
"곧 죽을 사람 눈을 본 적은 있었지만. 다르긴 하더군."
"언제 또 보셨던 적이 있습니까. 유쾌할 경험은 아닌데요."
하필 먹을 것 앞에 두고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식욕이 사라져버린 플란츠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아우님이 잡았던 죄인. 그 남자를 위한 레니시타 잎이 깔렸던 날에."
- 쿵!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플란츠를 쳐다봤다.
심장이 쿵 내리찍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또 들었다.
"제 로젤리타 기간 중에 잡아왔던 사람 말씀이십니까."
"그래."
"······ 남자."
칼리안의 반응에 이상함을 느꼈던지, 플란츠가 더 말하지 않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