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48화 (249/527)

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2)

오랫동안 잠을 잤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 하루를 보냈다.

그 뒤에는 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깨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반쯤은 여전히 잠에 걸쳐 있었다 하는 것이 맞을 터였다.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혹은 꿈에서 갓 깨어나려는 것 같기도 한 상태로 에반과의 싸움을 끝없이 되새겼다. 어느 때에는 눈 앞에 에반이 있었고 또 어느 때에는 혼자 있었다. 누가 앞에 있든 없든 상관없이 계속하여 검을 놀렸다.

아픈 것을 잊으려 가장 집중할 수 있는 것에 매달렸을까. 아니면 혹시라도 검술을 잊을까봐 걱정을 한 탓일까. 정확한 이유는 칼리안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기나긴 꿈 속을 홀로 보낸 뒤 잠에서 깼다.

검술인지 현실인지 모를 것을 깨우친 뒤에 눈을 떴다.

- 꼬르륵.

깨고 보니 배가 고파서 조금 안심이 됐다.

아팠다가 눈을 떴는데 통증보다 허기가 더 크게 느껴지는 정도가 되었으면 다 나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그래서 칼리안은 일단 일어나 앉았다.

"배고프다······."

멍하게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눈 앞에 무언가가 쑥 들이밀어졌다.

"아."

노란 것.

갑작스러운 단 내가 났다.

"바나나다."

반가운 얼굴이 된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바나나에 정신이 팔려서, 그 샛노란 것을 건네준 게 연두색의 파릇파릇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조금 늦게 떠올랐다.

"아."

완두콩이다.

라는 말을 두 번은 못하고 속으로 삼킨 칼리안이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얼마나 잤는지는 몰라도 꽤 오래 잔 것 같아서 그렇게 인사를 했다.

한동안 그런 칼리안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짧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터 근처에 앉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동생 놈이 예도 보이기 전에 바나나부터 찾은 것은 너그럽게 이해해주기로 한 것 같았다.

플란츠는 칼리안에게 괜찮은지 묻거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알려주거나 지금 상황이 어떤지 일러주지 않았다. 쓰러지기 직전의 칼리안이 일생일대의 숙원을 이루듯 막 짖었던 것도 탓하지 않았다.

"히나, 자."

"네."

단지 이렇게, 고생한 히나가 자고 있으니 깨지 않게 조용히 하라는 말만 한 뒤에 치료실 밖으로 나갔다.

생각해보니 플란츠 입에서 '베른 경' 소리가 나오면 좀 이상할 것 같아서 플란츠가 히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냥 넘겨듣기로 한 칼리안이 말 없이 바나나를 먹기 시작했다.

먹어도 괜찮은지 확인하지 않은 것을 칼리안의 곁에 둘 얀이 아니었으므로 옆에 놓여 있던 출처 모를 많은 바나나들도 더 가져다 꼭꼭 잘 씹어 먹었다. 갑자기 많이 먹으면 안 좋다고 예전에 히나가 그랬으니까 양껏 말고 적당히 먹었다.

히나 일어나면 분명히 혼낸다.

바나나도 그만 먹으라고 할 거다.

그것을 잘 아는 칼리안은 히나가 깨지 않도록 사일런트까지 발현해가며 조심조심 먹었다.

그 후 마력을 써 가며 남들 앞에 나서도 괜찮은 정도로 알아서 단장하고 비척비척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을 한 채 칼리안이 잠든 사이 있었던 일부터 알려주는 얀과 함께 체르밀 궁으로 돌아왔다.

'······ 그래서 기사단 카에라는 대부분 복직되긴 했는데 개편도 하고 기사단 이름도 새로 정하게 될 것 같아요. 전하께서는 지금 아르피아 궁에서 집무 보시는 중이고 마나실 백작은 마법사 협회에 세이렌 경 만나러 갔습니다. 란델 왕자님께서는 다른 용무 없이 체르밀 궁에 계시고 플란츠 왕자님께서는 잠시 만날 사람 있다면서 방금 전에 왕궁 감옥으로 가셨어요.'

'그래. 고마워.'

'수련장 가실거죠.'

어디서 어떻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체념한 듯 물어오는 얀에게, 칼리안은 걱정 말라는 쓸데 없는 소리는 빼고 대답을 했다.

'응. 그래야지.'

'알겠습니다. 플란츠 왕자님 오시면 알려드릴게요.'

'아니야. 아마 알아서 오실 거야.'

그렇게, 당장 나서야 할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한 뒤 수련장에 섰다. 그리고 얼마 후에 플란츠가 알아서 찾아왔다.

칼리안이 검을 잡았다.

- 우우웅!

- 우웅!

두 자루의 검.

한 자루로 사용하는 검술은 보다 덜 중요했으므로 두 자루의 검을 든 것을 바로 보여주었다.

머릿속으로 정리해 두고 꿈 속에서 그렇게 휘둘러 보았던 에반의 검술을 하나하나 천천히 따라했다. 검을 쥐는 법, 베고, 찌르고, 막는 법. 어깨와 팔을 어떻게 쓰는지, 다리는 어떻게 놀리는지, 발은 언제 어디를 밟는지.

플란츠는 섣부르게 팔을 뻗거나 제 검을 들어 따라해보려 하지 않고 일단 칼리안이 시킨대로 전부 다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자신의 서툰 솜씨가 기억에 함께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 하나의 동작을 전부 보여 준 칼리안이 잠시 멈춰 서서 플란츠를 쳐다봤다. 연두색의 눈이 검붉은 검 끝을 한참 보다 붉은 눈을 향했다.

"한 번 더 보여드릴까요."

"아니."

아무튼 우리 형님은 어찌나 똑똑하신지.

입매를 올려 웃어 보인 칼리안이 다음 말을 꺼냈다.

"이제 주고 받은 순서 보여드릴게요."

주고 받은 순서.

에반과의 공방을 그대로 보이겠다는 말에 이번에는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혹 키리에가 플란츠에게 칼리안이 대련에서 보여 준 동작을 따라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이번에는 칼리안이 에반의 검술을 보여줄 뿐. 다를 것은 없을 터였다.

"그래."

에반의 시선이 되어 가상의 칼리안을 상상했다.

그 후에는 에반이 칼리안의 앞에서 보여준 검술을 똑같이, 다만 훨씬 느린 속도로 재현했다. 밀어올리고 베고 찌르고 막으며 공격하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휘둘러가며, 똑같이.

'푸욱!'

칼리안에게 상처를 낸 것, 살을 뚫고 들어간 검을 비틀어 빼내던 것까지 전부 다.

평소 칼리안의 검술을 많이 겪어 보았으니 지금 상상하는 또 하나의 칼리안이 플란츠의 머릿속에도 떠올라 있을 터였다. 덕분에 방금 전의 공격을 본 플란츠가 잠시 눈꼬리를 찌푸렸으나 칼리안의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에반이 칼리안의 공격을 하나만 막아낸 그 순간까지 플란츠의 눈 앞에서 고스란히 펼쳐 보인 칼리안이 자세를 바로 했다.

싸움이 끝난 것을 안 플란츠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너. 싸우다 말고,"

뭔가에 한눈을 팔았는데.

"아직이요."

외운 것은 더 확인할 필요 없이, 다만 플란츠의 의문은 일단 막은 칼리안이 다시 검을 들었다.

"이제 보여드릴 것이 바로 브리센의 검입니다. 제일 중요하니 잘 보고 잊지 마세요. 부족한 부분은 제가 차차 채우며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 알았어."

짧은 대답이 돌아오고 잠시 뒤.

칼리안의 검이 궤적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에반보다 가볍게, 에반보다 무겁게, 에반보다 빠르게, 에반보다 느리게.

한 동작 한 동작 떨어진 것 말고, 싸울 때 활용하는 것 말고. 비록 중간 중간 부족한 부분은 있지만 칼리안이 보고 배운, 칼리안이 파악한, 브리센의 검술.

그것을 펼쳐 보였다.

- 타앗!

두 자루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두 손에 들린 검이 떨어졌다 모여들고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하나의 검으로, 다시 두 개의 칼날로. 서로 떨어진 두 자루의 검이었다가 손잡이를 가운데 둔 하나의 긴 날붙이로. 끊임 없이 모습을 바꾸어갔다.

어느 때에는 지금의 칼리안이 쓰는 검보다 더 힘있게 휘둘러졌고, 또 어느 때에는 드미레아가 쓰는 검보다 더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빈 곳을 채우고 허점을 노려가며 두 자루의 검이 서로를 보완해나갔다.

가벼우나 약하지 않고 무거우나 둔하지 않다.

빠른만큼 더 명쾌하고 느린만큼 더 신중하다.

거리낄 것 없다는 듯 허공을 누비다 어느새 내리꽂힌다. 머뭇거림 없이 휘둘러지다 어느새 숨을 노린다.

검 끝이 남기는 잔상이 바람결에 흩어지는 꽃잎 같았다. 비에 젖어 떨어지는 꽃송이 같았다.

검붉은 빛이 피어올랐다.

피 비린내가 났고, 꽃은 흐드러졌다.

* * *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

밖에서는 귀족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안에서는 르메인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냥 잠시 딴 생각을 했습니다. 별 일 아니었는데 집중이 흩어져서요."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안은 소 안심 스테이크를 눈에 가득 담으며 말했다.

바로 그 스테이크를 여유롭게 자르고 입에 넣은 뒤 잘 씹어 삼킨 플란츠가 천천히 대답했다.

"네가, 집중을."

"네. 제가."

"그래."

에반과 싸우던 중 왜 다쳤는지를 알게 된 플란츠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판 이유를 기어코 물어왔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그 집안이 워낙 파릇한 풀밭이라 잠깐 나도 모르게 나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며 명상을 좀 했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답하기 싫다는 뜻 잘 알아들은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말을 돌렸다.

"그래서, 카에라의 기사는 왜 다시 만나셨습니까."

"안 맞아서."

"그 자에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또 있었습니까."

칼리안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거위 가슴살 바베큐를 바라보며 다시 물어봤고, 이번에도 딱 그것을 집어들어 잘 먹은 플란츠가 답을 전했다.

"휴가 기간."

곧 플란츠는 딸기우유 빛을 내는 소스가 살짝 얹어진 샐러드를 먹었고, 오렌지 몇 조각이 담긴 탄산수로 목을 축인 후에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멀찍이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칼리안을 향해서였다.

"에즈론 지역 출신이 7월 초에 집에 가서 8월 중순에 돌아왔던데. 10년 사이 두 번이나."

에즈론 지역이면 얼마 동안 집에 머무는 기간을 생각하더라도 한 달 반 정도 안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었다. 때문에 그 기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잠시 생각해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7월이니 날짜가 안 맞는 거군요. 리츠 강이 범람하는 시기라 길을 돌아가야 하니까."

그러더니 '아이고 우리 형님 그걸 찾아내다니 참 기특하시네' 하는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식사 마친 플란츠가 칼리안의 이런 표정을 정확히 봤다. 그래서 플란츠는 이미 내려놨던 포크를 다시 집어들어 조금 전 한 입만 먹고 말았던 스테이크를 큼지막하게 한 점 더 썰어 먹었다.

- 내일까지, 아무것도, 드시면, 안 돼요. 큰일 나요. 특히 고기, 절대, 드시지, 말아요.

칼리안이 히나로부터 들은 말 때문이었다.

플란츠에게 브리센 검술 잘 주입시킨 뒤 히나가 찾아왔다. 빈 속에 바나나 세 송이를 먹어치운 것 때문에 혼나고, 그걸 먹고 도망간 것 때문에 더 혼나고, 애초에 다쳤던 것 때문에 또 혼났다.

지옥같은 금식이 시작됐다.

그래서 지금 당근 새싹같은 망할 완두콩이 저렇게 열심히 고기를 처먹고 있는 거다. 고기 냄새라도 맡겠다며 올라와 앉아있는 동생에게 냄새 좋은 고기 먹는것까지 잘 보여주려고.

······ 잔악한 놈이다.

뭐 아무튼.

"그럼 다른 증거나 의심점 없이 휴가 기록 하나 믿고 곧바로 기사 만나러 가셨던 겁니까."

"제일 빠르니까."

"하긴. 그건 그렇네요. 직접 만나보는 것만큼 빠른 일은 없으니 말입니다."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의심되는 구석 하나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직접 만나서 떠보면 될 일 아닌가.

"넌."

"저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 눈치챈 건 아니고······ 브리센 자작 턱을 날려버리셨다는데 또 얼굴 마주하고 싶어하지는 않으실 것 같고 나머지 사람들은 굳이 형님께서 만나 볼 필요가 없으니까요. 남는 건 독 주머니 건네 준 그 기사 뿐이라, 기사가 숨겼던 게 또 있어서 만나러 가셨나보다 하고 짐작했습니다."

플란츠는 대답 없이 잠든 고양이들 위에 손을 댔다.

"그래서 그렇게 독 주머니에 대한 정보를 술술 말했던 거군요. 더 중요한 다른 비밀 안 들키려고."

"그게 이상해서."

애초부터 너무 쉽게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 이상해서 놈의 정보를 확인하다가 10년치 휴가 기록지까지 뒤져 볼 생각을 했다는 소리였다. 참 집요하고 독하다 싶지만 아무튼 덕분에 그 기사가 숨긴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다.

"세크리티아의 새였다니. 그러고보면 세크리티아 쪽 세작이 이미 한 명이 있었는데 더 없으리라는 법도 없었겠네요."

체이스의 전서구 노릇을 하는 발칸의 기사 한 명도 브리센에 숨어들었던 세작 아니던가. 그러니 데블란의 새가 똑같이 브리센으로 먼저 숨어든 뒤 에반의 공작에 휩쓸려 카에라의 기사로 보내지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크리티아 세작이라고 아우님한테 말한 적 없는데."

"그 새가 다른 말은 안 했습니까. 욕을 했다거나."

혹은 가시돋힌 말을 저주처럼 남겼다거나.

"안했어."

"다행이네요."

그 기사에게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찾아갔다는 말은 했으나 세크리티아의 세작이라고는 아직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정체를 확신하는 듯 말하더니, 그 자가 다른 말을 한 것이 없다는데 다행이라 대답을 했다.

살짝 찌푸린 얼굴로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께서 고기 냄새가 아니라 피 냄새를 맡고 올라오신 듯 한데."

밥도 못 먹는 칼리안이 굳이 4층에 올라와 밥 먹는걸 지켜본 이유를 이제 알게 된 플란츠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내 형님께서는 정말 어찌나 눈치가 빠르신지."

"짖을거면 가고. 말 할거면 있고."

"형님에게서 풍겨오는 피 비린내가 짙지 않아서, 저에게 묻어 옮은 것인가 했는데 아니더군요. 그 날 에반 브리센의 저택에서 묻은 것도 아닌 듯 했고."

대답하지 않는 플란츠를 대신해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새들은 어지간해선 자신이 세작이라 누설하지 않습니다. 입 속에 든 것을 씹어 삼키고 말지. 아닌 새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그렇더군."

"그래서 알았습니다. 감옥 찾아가서 뭘 하셨고 뭘 보셨는지."

세크리티아의 세작은 입 속에 독을 숨긴다.

플란츠는 그 기사가 데블란의 새가 맞는지 확인하러 감옥에 간 것이다. 기사의 정체를 확신한 것처럼 꽉 쥐고 흔들었을 때 놈이 독을 삼키고 죽으면 세작이 맞을 테니까.

왜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써 가며 세작의 정체를 확인하려 들었는지도 짐작한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것을 배우시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알아."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저는 카밀론에 갈 수 있습니다."

"알아. 그것도."

플란츠는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에 책임을 지고자 했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에반 브리센을 누가 살해했는지를 귀족들에게 알려야 했고, 칼리안의 개입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자 했다.

그러다 그 기사가 세크리티아의 세작임을 밝혀낸다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갔고 시간 낭비 하지 않고 정체를 확인했다.

대신 피 냄새를 묻혀왔다.

기사는 죽었을 것이다. 플란츠의 눈 앞에서 독을 삼키고 피를 토하면서.

"무리하지 마세요. 다음에는."

"무리 안했어."

정말로 잿더미를 구르고 온 플란츠에게, 칼리안이 참 복잡한 기분을 담은 말을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됐어."

"네."

레넌 브리센 턱을 부숴버렸다더니.

그래도 의외로 정말 괜찮은 듯 보여서, 어쩐지 차라리 후련해하는 듯 보여서, 칼리안은 서로 고맙다는 말 안 하기로 했음을 다시 확인하기만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비척비척 아르피아 궁으로 향했다.

칼리안이 죽여 없앤 에반 브리센.

플란츠의 앞에서 죽어간 세크리티아의 새.

둘의 죽음을 합쳐 이번 일을 해결할 열쇠로도 만들고, 데블란에게 건넬 고양이 똥으로도 만들 방법을 르메인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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