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47화 (248/527)

제44장. 잊어버리지 않게(1)

비로소.

날이 밝았다.

세상이 뒤집혔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하루 아침에, 아니 하룻밤에 에반 브리센이 사망하고 브리센 후작저는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 레넌 브리센과 사병들은 알려지지 않은 죄목으로 체포되어 왕궁의 감옥에 갇혔고 그들과 대치했던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공작저로 돌아갔다.

날이 밝기 직전 지그프리드에서 나온 정예 기사단이 왕궁에 들어갔고 아침이 되자 몇몇 기사들, 시종들과 시녀들이 감옥에 갇혔다.

'에반 브리센이 죽고 레넌 브리센은 다 죽어가는 몰골로 왕궁 기사단에 체포됐다던데.'

'지그프리드 공작저는 대문을 닫았다더군.'

'텔른 남작 일가는 오늘 아침에 바로 카이리시스에서 나갔다며.'

'후작 쪽에 줄 대고 있다가 나간 사람 많다 들었네. 눈치 좀 보다 브리센 변경백 도착하면 다시 들어오겠지. 달라질 것 있겠나.'

귀족들이 술렁이는 사이, 왕궁은 침묵했다.

밤 사이 일어난 일에 대해 철저한 조사 후 내용을 알리겠다는 이유로 당장은 그 어떤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밤새 일어난 일에 대해 확인해보려 왕궁을 찾았던 이들은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채 모두 아스트리샤 거리의 카페에 모여 온갖 추측을 내놓고 소식을 교환했다.

'그런데 혹시 브리센 변경백이 꾸민 것은 아닐까? 요즘 계속 수도에 들락날락 했잖아.'

'브리센 변경백이 저지른 일이면 1왕자님이 연관됐을 것 아닌가. 그런데 간밤에 3왕자님의 말을 본 사람들이 많네. 하얀 망토 덮은 사람 한 명 태우고 왕궁에 급하게 들어갔다는데 혹시 3왕자님 아니었을까 하는 말이 나오더군.'

'2왕자님도 후작저에 가셨다 했지. 2왕자님께서 도착하시고 나서 후작저에 불이 났다고. 그것 참,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으니.'

이렇게 모두의 이목을 받게 된 그 왕궁은 마치 외부의 소란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듯 굴었다.

그리고 이틀이 더 지나도록 말을 아꼈다.

조사가 완료되는대로 알려줄 테니 심히 동요할 필요는 없다는 르메인의 말이 한 번 전해진 뒤로 왕궁은 다시 굳게 입을 다물었다.

물론 겉으로만 그랬다는 소리다.

밖에서 본다면 물안개가 내려앉은 이른 아침의 호수 같았으나 그 속까지 고요하지는 않았으니까.

왕궁에서는 모든 기사와 마법사들을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도록 경계하던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 수도 밖에 모여드는 군사가 없는지, 수도 안의 수상쩍은 움직임은 없는지를 민감하게 주시했다. 그리고 브리센의 세력의 움직임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그런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빌헬름 관 입구에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왜 또."

"전하께서, 왕궁 밖으로는 절대 못 나가시게 하고, 같이 나가지도 말고, 왕궁 안에서 이동하실 때에는 계속 따라다녀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틀 만에 치료실에서 나와 레릭으로부터 은백색 말의 고삐를 넘겨받은 플란츠의 질문에, 빌헬름 관의 다른 시종을 불러다 자신의 말을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한 아르센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부군단장들이 참 한가하다 생각하겠군."

"원래 일 터지면 제일 바쁜 건 제일 높으신 분 아닙니까. 저희는 잠깐 좀 한가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을 겁니다."

플란츠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말에 훌쩍 올랐다.

그러면서도 멋대로 앞서 출발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모습에 아르센이 슬쩍 웃었다.

물론 그 배려심은 말이 오길 기다려주는 것까지만 발휘되었으므로, 플란츠는 아르센의 말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움직였다. 미리 언질을 해두었는지 몰라도 레릭은 따라오지 않았다.

여유롭게 말에 올라 뒤따라온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플란츠가 대답 없이 고개만 돌려 아르센을 쳐다봤다. 레넌을 만났던 날에 너무 많은 말을 해서 당분간은 입을 열기가 싫었던 탓이다.

덕분에 저 먼 곳 어딘가에 거주하시는 듯한 그런 모습으로 인세에 찌든 놈 내려다보는 눈빛을 또 마주하게 된 파란 머리 마법사가 심기 불편한 얼굴이 됐고, 그제야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북문."

"북문 쪽에는 숲 밖에 없는데요. 숲에는 왜 가십니까?"

"옆."

북문, 옆.

그 곳에 뭐가 있는지는 잘 알았다. 때문에 아르센이 마뜩치 않다는 얼굴을 하며 물었다.

"레넌 브리센 저택에서 이미 독초며 거미 독이며 싹 나왔는데 레넌을 굳이 또 만나실 필요 있겠습니까."

"말고. 기사."

"카에라에 숨어 있던 기사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매일매일 같은 집무실에서 지지고 볶고 지내 온 시간이 있는 터라 이런 식으로라도 대화가 이어지기는 했다. 길어진 것이 플란츠의 말이 아니라 아르센의 독해력이라는 다소의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플란츠에게 처음으로 독 주머니를 넘겼던 기사를 보러 가겠다는 말이었으니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플란츠를 계속 따라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했다.

"귀족들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데, 에반 브리센을 누가 없앴다고 알릴 생각이십니까."

"아직."

르메인에게 조금만 시간을 벌어달라 한 뒤 아직 그것을 결정하지 못한 플란츠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고 아르센이 말을 이었다.

"레넌 브리센이 벌인 일이라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처음에 독 주머니 보낸 것도 레넌이고, 에반 죽이고 저택 태운 것도 레넌이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요."

"놈이 무슨 수로 소드마스터를 죽였다고 할 건데."

"독······?"

"브리센 생각을 하더니 브리센처럼 생각하네."

"고생해가며 저택 태워드린 사람한테 무슨 그런 욕을 하십니까. 그냥 멍청한 소리 말라고 하십시오."

플란츠가 아르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두면 정말로 멍청하다는 소리를 할 것 같아서,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본래는 에반이 왕자님을 먼저 습격하도록 만들려 했습니다. 에반이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수를 만들었었고 저는 왕자님의 검은 조약돌을 그레이에게 전했었는데 일이 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진 겁니다."

"알아."

그레이가 란델을 만나기 위해 왕궁에 찾아왔던 날, 그레이의 마차 문이 드나드는 사람 없이 고요히 열렸다 닫혔던 그 때. 투명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아르센이 그레이를 만나 칼리안의 계획을 전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말인데, 제온에서 에반 브리센을 죽인 것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다각거리는 하얀 말 위에 내리쬐는 가을 햇살 받으면서, 참 고고하게 앉은 채 아르센을 보던 플란츠가 대답을 전했다.

"소드마스터도 죽일 수 있을 이들이 포함된 미상의 조직이 주변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면 사람들이 참 좋아하겠군."

"아니면 그냥 왕자님께서 하신 일이라 말하면 안됩니까?"

"내 아우님께서 카밀론 대신 체르밀에서 마법사 한 마리 잘 키우다 탑에 가고 싶다 하시면 그렇게 하지."

마법사의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말.

후작저 없애러 갈 건데 같이 가겠느냐는 소리에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따라와 준 것에 대한 보답인 셈 치기로 한 플란츠가 설명을 더했다.

"후작이 내 아우님을 먼저 건드려서 싸우다 후작을 죽였다면 모를까, 내 아우님이 먼저 후작저에 쳐들어가서 죽여버린 것을 알면 귀족들은 내 아우님 절대 안 따를 테니까."

"안 따를 이유는 또 뭡니까. 어차피 왕자님 강했던 것은 이미 다들 아는 사실인데요."

"존경하는 마음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건 한 순간이고. 강한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을 사람이라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면 강한 왕이 아니라 폭군으로 보여질 뿐 아닌가. 그런 왕자를 세자위에 올리고 왕으로 삼고 싶어 하는 귀족이 어딨는데."

"여기요. 저요. 저는 좋은데요."

"······ 하."

보답 끝.

"레이븐 돌아다닌 것 다 소문났다던데 그건 아십니까. 어차피 왕자님 거기 가신 것 다들 아는 분위기라 하던데요."

"나간 적 없었다 할 건데."

"검은 말은 레이븐이고 옆에 있던 기사 말은 레이븐 형제 말이고 후드 속에 보인 기사 머리카락은 물색이었다는데 왕자님이 아니었다 하신다고요. 왕자님이 덮고 계셨던 새하얀 망토에는 제 얼굴만한 발칸 문장이 박혀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 밤에 눈들이 어찌나 밝은지.

예상이야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잠시 왔다 갔다 했을 뿐인데 그 사이 참 많이도 봤단다. 물론 거기까지 플란츠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니었다.

"본인이 아니라는데 어쩔거냐고."

결국 이렇게,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와 생각이 맞는 부분이라고는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좋아하는 플란츠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의 작은 솜주먹 만큼도 없다는 사실만 다시 깨닫게 된 셈이다.

그래도 때마침 감옥 입구에 도착한 탓에, 플란츠는 더 이상의 짜증을 내지 않은 채 말에서 내렸다.

짙은 피비린내가 났다.

이미 그보다 더한 피냄새에 익숙해져버린 플란츠는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저벅저벅 걸어 안으로 들어섰다. 방문을 미리 알려두었던 탓에, 이미 나와 있던 두 명의 기사가 예를 올리며 플란츠를 건물 윗층으로 안내했다.

- 달칵

조금 낮은 듯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플란츠가, 밧줄에 몸이 묶여있던 기사의 맞은편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참 오랜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도망갈 길 알려줬더니 여기있었군."

알려준대로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가 그대로 잡혀들었던 카에라의 기사가 대답했다.

"알고 있는 것은 다 알려드렸습니다. 또 무엇이 궁금하신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인데."

기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플란츠를 보고 있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텐실. 데블란. 어느쪽인지 묻는 거잖아."

낮은 목소리로 건네진 묵직한 질문.

기사의 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 * *

히나가 팔을 올려 쭉쭉쭉 기지개를 켰다.

목숨 아낄 줄 모르는 형제 곁에 있느라, 알려져 있는 유일한 하프엘프 자연치유사인 까닭에 사실상 칼리안 아니라 르메인이나 앨런보다도 더 귀한 신분이어야 할 히나만 갖은 고생을 했다.

그래도 참 튼튼한 칼리안인지라, 이제는 좀 마음 놓고 눈을 붙여도 될 정도는 되었다. 여전히 눈을 뜨지는 못했지만 상처는 많이 회복이 된 것이다.

"애옹!"

"니아옹!"

칼리안이 누워있을 커튼 안쪽에서 고양이 두 마리의 울음소리가 났다.

아직 일어나지 못한 칼리안의 상처를 루시가 밟기라도 했으면 큰일이다. 깜짝 놀란 히나가 얼른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걱정한대로, 침대 위에서 마음껏 뛰어 노는 고양이 두 마리가 보였다. 대체 언제 들어왔는지 몰라도 그보다 더 신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 오빠. 어디 있어?

- 빌헬름 관 수련장이야. 기사들 대련하는 것 봐주고 있어.

- 칼리안 왕자님 도망가셨어.

칼리안이 없었다.

정신 못 차리고 계속 잠들어 있던 칼리안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그것을 굳이 '납치'가 아니라 '도망'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 바나나를 세 송이는 드신 것 같아.

납치 될 사람이 바나나를 저렇게 많이 까먹지는 못 할 테니까.

얀은, 아프다 일어난 칼리안이 바나나를 찾으리라 주방에 말했다. 어쩌다 그 말을 함께 들어버린 발칸의 마법사들 덕분에 소문이 났고 칼리안이 누워있던 치료실에 바나나 선물이 계속 들어왔다.

그렇게 쌓여만 가던 바나나가 꽤 많이 없어져 있었다.

"애옹!"

협탁 위에 대체 몇 개인지 모를 만큼 쌓여 있는 바나나껍질을 보던 히나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온 루시와 새끼 고양이를 양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 빈 바나나 껍질이 괜스레 웃겨서 한참을 웃었다.

* * *

갇혀 있던 기사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빌헬름 관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아르센을 먼저 보내고 체르밀 궁에 잠시 들렀다. 방으로 가는 대신 곧장 수련장으로 향했다.

있으면, 검술을 배우고.

없으면 그냥 혼자 검을 좀 휘둘러 볼 생각이었던 플란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련장 한 가운데 서 있던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기사는 만나보고 오셨습니까."

"그래."

마치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건네온 말.

그에 대해 짧게 대답한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내 아우님께서는 생에 미련이 별로 없으신 것 같은데."

"그럴리가요. 미련 많습니다."

지난 번에도 눈 뜨자마자 키리에에게 검술을 알려준다 하다 다시 한 번 크게 앓은 적 있던 놈이 또 이러고 있다.

그 꼬락서니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다녀오신 이야기는 이따 해주세요. 다른 말 들으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가만히 손을 내리고 오러를 움직였다.

- 우우웅!

두 자루의 검.

검붉은 빛을 내는 가늘고 긴 두 자루의 검이 칼리안의 양손에 들렸다.

아직 에반의 검술에 대해 듣지 못했던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형님만큼 머리가 좋질 않아서. 우선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연습은 차차.

일단은 그 좋은 머리에 싹 집어넣는 것 먼저 하라 말한 칼리안이 씩 웃었다.

곧 칼리안이 살짝 살짝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처가 벌써 벌어졌는지 피 냄새가 조금 짙어졌으나 플란츠는 별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천천히 보여드릴테니. 전부 다, 외우세요."

저것을 알아내기 위해 그 고생을 했는데 더 잊기 전에 싹 다 알려주겠노라 하는 말이었으니 싫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서였다.

"알았어."

칼리안이 검을 들어올렸다.

하얀 손에 들린 두 자루의 검이 붉은 꽃잎이 되어 허공을 노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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