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장. 멈추지 마시고(7)
왕궁에서 나서면 안 된다는 말 이해 못한 것이 아니다.
플란츠가 제대로 일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 플란츠가 왜 쓰러졌는지 모르는 상황. 뒤늦게 독 주머니에 대한 내용을 전해들었다 하더라도 정보가 한정적인 상황. 그런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음을 안다.
그런데 플란츠가 눈을 떴고, 상황이 바뀌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독 주머니를 손에 쥔 레넌이 앞에 서 있던 플란츠를 향해 물었다.
"처음 보는 물건인가."
"네.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생각을 안하네."
"그······ 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레넌은 여전히 전혀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의사소통에 있어 답답함을 느낄 필요도 없는 놈이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아주 친절해진 마음으로 긴 말을 꺼냈다.
"어차피 브리센이 곧 증거 아닌가. 그 브리센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숨기는지, 어디를 뒤지면 증거가 나오는지.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앞에서 왜 발뺌을 하는지 모르겠군."
브리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
그것이 바로 플란츠 아니던가.
"플란츠 왕자님. 서운합니다."
플란츠가 발칸의 제복을 입고 온 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떤 생각으로 왕자 말고 발칸 부군단장으로 왔는지를 알아볼 수 없는 레넌이 어색한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제 아무리 날뛰어 봐야 우리 없이는 세자위를 넘볼 재간도 없는 놈이.'
당연하겠지만 여전히 이런 착각을 하고 있는 레넌이라.
분명 그런 말을 꺼내지 않을까 예상했으나 그래도 꺼내지 말았으면 했던 뻔한 것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왕비께서 그런 일을 당하셨다 하나 그래도 브리센은 엄연히 왕자님의 외가이자 같은 핏줄 아닙니까. 그러니,"
"아."
플란츠가 작은 소리로 그 입을 막았다. 그리고 한동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버린 탓에 해맑은 웃음이 함께 떠올랐다.
"그 말은 좀······."
플란츠의 손이 검을 향했다.
곁에 서 있다 순간적인 살기를 느낀 드미레아가 급히 플란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죽은 에반은 이 일에 명백히 연관이 있었으나 레넌의 죄까지 밝힐 수 있는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섣부르게 이 자리에서 레넌을 죽여버리면 곤란해 질 수 있었다. 때문에 말리려 했다.
"······ 짜증나는데."
하지만 플란츠의 손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플란츠가 묵빛의 검을 제 손에 꽉 쥐었다.
그 뒤에는.
- ······ 뻐억!
검집 채로 들어올린 그 검으로 레넌의 턱을 후려쳤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레넌의 턱이 바스라지는 소리를 냈다. 가늘다 할 수 없을 몸이 살짝 떴다가 떨어지며 나뒹굴 만큼, 플란츠는 정말 온 힘을 다해 갈겼다.
겸사겸사.
칼리안에게 배운 '참지 않기'도 복습하고 여기 있는 기사 중 특정 다섯 명의 머릿속에서 연두색의 동그란 무언가도 깨끗하게 지워버린 플란츠가 바로 그 다섯 명의 기사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거품 물고 기절한 '내 핏줄' 치우라는 뜻이었다.
플란츠의 과묵함에 이미 적당히 익숙해져 있던 기사들이 빠르게 다가와 레넌을 질질 끌고 갔다.
"괜찮으신 겁니까."
곁에 있던 드미레아가 물었다.
드미레아는 방금 전 플란츠가 누구에게 뭘 휘둘렀는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평온한 얼굴을 한 채 어느새 인원이 불어나 있는 발칸의 기사들에게 줄줄이 붙잡힌 레넌의 사병들과 그 옆에 널브러진 레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가."
창백한 낯빛이나 방금 전의 일로 생겼을지 모를 마음의 상처나 예상치 못한 이 상황. 그 중 어떤 것에 대한 질문인지 몰라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
"굳이 오셔서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들으셨습니다."
"굳이 온 게 아니라 책임지러 왔으니 상관 없어. 말은 예상했고. 익숙하기도 하고."
칼리안이 잘 가르쳐줬다.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이렇게 해석할 줄은 놈도 몰랐겠지만 아무튼 플란츠는 잘 배웠다.
"칼리안 왕자님을 대신해 책임을 지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내 아우님은 이걸 책임 질 필요가 없으니까. 그리고 전하나 마나실 백작보다 내가 오는 것이 책임지기 좋지 않나."
"칼리안 왕자님도 그렇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에반이 플란츠에게 독 주머니를 건넸다.
그것을 알았다 해도, 르메인이나 앨런은 공식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독 주머니의 출처를 파악하고 관련자를 찾아내는 과정을 거친 뒤에야 처벌하겠노라 나설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플란츠는 아니었다.
멋대로 집 한 채를 태워도 좋고 심증만 가지고 군사를 부려봐도 되는 사람. 문제가 없으면 좋고 문제가 있으면 르메인이나 앨런이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칼리안의 가르침에 대해 플란츠가 이해한 '책임'의 활용법이었다.
그런 배움의 결과로 브리센 후작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덤으로 레넌도 체포했다. 한 대 때려놓기도 했다.
드미레아가 여전히 아주 잘 타고 있는 저택을 다시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마력탄이라도 가져오셨습니까. 발칸의 마법사들은 데려오지 않으셨을 텐데 불이 잘 붙었네요."
"말고. 깎일 급여 없어서 드러내놓고 사고 못 치는 미친 마법사 가져왔는데."
왕궁에서 나가게 되면 살아야 할 집에서 피비린내 날 일 없도록, 플란츠 취향에 딱 맞을 새 집 잘 짓고 살게끔 원래 있던 칙칙한 저택 꼼꼼히 잘 태우고 있는 누군가를 생각한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왕자님의 형님이신 부군단장님 돕는 것이 아니라 왕자님의 형님이신 부군단장님 도우려는 왕자님을 돕는 겁니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인원 열 다섯 명만 데리고 먼저 달려간 플란츠를 대신해 추가로 서른 다섯 명의 기사를 이끌고 오겠다 하면서, 도무지 뭔 소린지 플란츠도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든 이상한 말을 지껄이며 흥얼거리던 마법사. 진짜 미친 그 마법사 생각이 난 까닭이다.
"아. 네."
누가 왔는지는 뻔했으나 적당히 모르는 척 해달라는 말임을 잘 알아들은 드미레아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완전히 태우기 전에는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 분명할 얼음 마법사의 화염을 바라보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플란츠가 대답 없이 드미레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하라는 의미로 알아들은 드미레아가 말을 이었다.
"후작의 저택에서 레넌 브리센 자작의 딸을 찾았습니다."
"······ 후작이 후계로 키운 아이인가."
"네. 추측으로는 그렇습니다. 브리센 상단과 자작위를 대가로 후작저에서 맡아 키우던 아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레넌이 탐내던 브리센 후작의 자리.
하지만 그레이에게 잠시 넘겼다가 플란츠가 다시 가져오려 했던 자리. 그래서 레넌에게는 안 넘기려고 플란츠가 이렇게 직접 찾으러 온 자리.
"후계로 정해둔 아이가 이미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저도 의외라 생각중입니다. 다만 아직 어린 아이라서 자작에게는 알리지 않고 지그프리드 저택에 일단 옮겨두었습니다. 알려지면 자작과 함께 처형될지 어찌될지 알 수가 없어서 제 임의로 숨겼습니다. 저희 남매가 어린 아이들에게 좀 많이 약해서요."
"그런 얘기를 나에게 잘도 하는군. 소공작."
"지금 왕자님 아니고 발칸 부군단장이지 않습니까. 상관 없는 일인 척 흘려 들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플란츠의 의복을 살짝 쳐다본 뒤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해오는 말에 실소한 플란츠가,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다른 곳에는 비밀로 해두고 브리센과 관련되지 않도록 제가 알아서 잘 보호할 예정이니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혹시라도 브리센 자작이나 변경백에게 갑작스레 듣기보다는 내용을 미리 알고 계시는 것이 나을 듯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플란츠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에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참고하지."
그리고 이렇게만 대답했다.
* * *
둘째 아들이 갑자기 쓰러졌다.
셋째 아들이 집을 나갔다.
셋째 아들이 다쳐서 돌아왔다.
둘째 아들이 대신 나갔다.
아들은 분명 셋인데 결과적으로 왕궁 안에는 계속 둘 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한 탓에, 빌헬름 관 치료실 안에 누운 칼리안을 보던 르메인이 걱정과 근심 가득한 긴 한숨을 쉬었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래."
칼리안은 왕궁에 오자마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곳에 오는 사이 상태가 호전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조금 다른 이유일 것이다. 통증 때문이기도, 신경쓰이는 일이 많아서이기도 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쉬고 있던 히나가 도착하기 전에 칼리안을 찾아온 르메인은, 그래서 한 마디 제대로 된 말도 채 건네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칼리안을 함께 들여다보지 않고 밖에 서 있던 앨런이 이제 막 나온 르메인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시만 만나 보고 올 터이니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알겠네."
무려 국왕을 기다리게 만든 앨런이 고개를 숙여보인 뒤 칼리안이 있는 곳에 들어갔다.
화를 내야지 생각했고 혼을 내야지 생각했다.
그러게 같이 가지 왜 고집을 부렸느냐 말하려 했다. 뭘 했기에 그 엉성한 놈한테 배가 꿰여 왔느냐 물어보든, 찾으러 가겠다 한 것도 거절해두더니 이게 무슨 꼬락서니냐 타박을 하든 하려 했다.
"스승님."
그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
반겨해줘서도 아니고 예쁘게 웃어서도 아니고 그냥 아무 말을 못했다.
"저 다녀왔어요."
이런 말을 하는데 그 대단한 앨런 마나실의 입으로도 해 줄 만한 대답이 영 생각나질 않아서, 그냥 곁에 앉아 머리만 몇 번을 쓸어넘겨줬다.
"제가 재워드릴까요."
이 왕궁에 소드마스터 재울만한 마법사라고는 앨런 뿐이라. 한참이 지난 뒤에 그것만 물었다.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어코 완두콩 소리 나오게 한 그 허연 꼬락서니를 보고 만 터라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서였다.
"헤르츠 경 혹시 있습니까."
"2왕자님 호위 좀 보아드리라 하였더니 아주 세렌티 만나러 가는 길까지 호위를 해 줄 모양입니다. 같이 나가서 안 왔습니다."
"······ 그럴 것 같았어요. 형님께서 발칸 제복 입고 계셨습니다. 아마 레넌 브리센을 체포해 올 겁니다. 헤르츠 경이 갔으면 후작저에 남는 것 없이 싹 태울 테고요. 그러니 레넌 브리센의 저택을 바로 수색해서 증거자료 다 찾아내야 합니다. 그레이 브리센이 곧바로 수도에 올 수 있도록 가능한 빠르게 전달을 해야 하고. 란델 형님 쪽이나 수도 쪽······."
거기까지 듣던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막았다.
"브리센 변경백에게는 이미 전하께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새 변경백 위임도 곧바로 진행하겠다 하셨고 귀족들 사병 움직이는지 제대로 확인하겠노라 하셨으니 그 쪽은 전하께 맡겨 두십시오. 브리센 자작 저택은 바로 수색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후작령 근황 샅샅이 확인하도록 이미 잘 일러 두었고 란델 왕자나 수도 쪽 이상 없는지는 발칸에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왕궁 안에 다른 속셈 가진 놈 있나 잘 살펴보고 솎아내는 것은 제가 싹 해둘 터이니 걱정 마십시오."
"네. 그리고 곧 지그프리드에서 기사단을 보낼 겁니다. 혹시 제가 못 일어나면 스승님께서 신경을 써주세요."
"그리하지요."
"그리고 제가 오래 자더라도 하루에 한 번은 깨워주세요. 상황을······"
꿋꿋하게 입을 열던 칼리안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앨런을 쳐다보다 생글 웃었다.
"아닙니다. 그냥 쭉 자게 둬주세요. 나머지는 알아서 해주시고요. 대신 형님께 말을 좀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말을 전해드릴까요."
그 후 건네진 말에 앨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그만 자라는 듯 칼리안의 머리를 한 번 더 쓸어 넘겨줬다.
"그렇게 다른 이들이 걱정되십니까."
기어코 눈을 떠서 모든 일을 하나 하나 마무리하려 드는 것에 대한 말이었다. 칼리안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늘 혼자 하던 것이 버릇이 되어서요. 고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 그래요. 차차 나아지겠지요."
앨런이 칼리안을 다시 몇 번인가 쓰다듬듯 어루다가.
"아프지는 않으셨습니까."
부드럽게 웃으며 가장 어려웠던 말을 꺼냈다.
한참동안 앨런을 보던 칼리안이 마주 웃어보였다. 그리고 또 다시 한참이 지난 뒤에 느린 대답을 했다.
"조금 아프네요."
토닥토닥, 앨런이 고생 많이 하고 돌아온 아들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칼리안의 눈이 스르륵 감겨들었다.
앨런의 입에서 나지막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아브턴던트]
* * *
후작저는 싹 태웠다.
증거도 없이 그냥 레넌을 체포해 왕궁으로 호송했다. 칼리안이 깼으면 칼리안이 얘기했을 것이고 안 했으면 내가 찾으면 된다.
레넌 턱이 다 부서져서 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못해도 상관 없다. 결국은 묻는 말에 고개만 끄덕이다 광장의 레니시타 잎 위에 서게 될 테니까.
눈 뜨자마자 일부터 아주 잘 저지른 플란츠가 왕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내일 아침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도 당장은 잘 돌아왔다.
왕궁에 온 뒤에야 비로소 칼리안의 상태를 확인한 아르센은 딱 제 눈 같은 색으로 얼굴색을 바꿨다. 이미 같은 색 얼굴이던 얀과 키리에가 아르센을 애써 안심시켰고, 그런 색에서 간신히 벗어난 레릭이 가져온 차를 나눠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왕궁에 있는 왕자가 다시 세 명이 되었고, 당장 하루 아침에 두 명으로 줄어들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히나로부터 확인한 르메인도 일단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두 왕자가 저지른 일의 뒷처리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마법사도 같이.
"이번 일 말입니다."
히나가 칼리안을 꾸준히 치료해야 했다.
아르센과 키리에는 히나를 호위하고 있었다.
오늘 사고 한 번 크게 친 플란츠는 왕궁 안전이 확실하게 확인 될 때까지 둘의 호위를 받기로 했다.
그런 사정의 결과로 결국 치료실 양 쪽으로 멀찍이 나뉘어 드러누운 두 왕자 사이에서 호위 노릇을 하게 된 아르센이, 기절하듯 잠시 잠든 히나를 작은 침대로 옮겼다. 그리고 진짜 기절해있는 칼리안이 숨 쉬는 것을 잘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커튼을 내리며 말했다.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께서 왕자님 대신 해를 입으실 수도 있습니다. 알고 계시는 것 맞습니까."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법사, 너."
"부군단장입니다, 부군단장님."
"왕자다."
제복 벗고 다시 왕족으로 돌아온 플란츠는 이제 져 주지 않았다.
"······ 네. 일단 말씀하십시오."
"마법사. 너는 이 일이 내 아우님이 아니라 나 때문에 생겼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 아니었나. 해를 입어도 내가 입는 게 맞다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칼리안에게서 풍겨나오던 어마어마한 피 냄새를 이미 맡았다. 저택 안에 대체 얼마나 많은 시신이 있었을지 가늠이 안 된다.
아무리 브리센 쪽에서 먼저 걸어 온 싸움이라 하나 그 정도의 일은 칼리안 혼자 멀쩡히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언제부터 그런 것을 따지셨는지. 생각보다 형제 사이가······."
생각보다 형제 사이가 좋았던 걸 몰랐다 놀리려던 아르센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 때문 아니라 레넌의 턱이 왜 부서졌는지가 떠올라서, 오늘은 더 건드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런데 숨긴 말을 참 잘도 알아들은 플란츠가 대꾸했다.
"사이가 좋을 수는 없고."
잠들기 전 굳이 앨런의 입을 빌리면서까지 전해온 말.
- 저택에 누가 있었든 형님께서 잘못하신 것은 없으니, 원하시는 길이라면 멈추지 마시고 발길 돌리지도 마시고 계속 살아가시면 됩니다.
재밌는 일이다.
실리케도 늘 그 말을 했다. 그런데 다르다. 달라서 재밌었다.
- 그리고, 검술 배워 왔습니다.
후작가의 후계.
이미 누군가의 것이었던 자리. 그리고 남의 것 뺏기 싫어하는 플란츠.
칼리안은, 드미레아가 그 아이에 대한 사실을 플란츠에게 전하리라는 것도 알았고 플란츠가 신경을 쓰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 신경쓰임이 어디로 이어질지도 잘 알았다.
'브리센 후작저에서 고양이 키우면서 산다.'
기껏 꾸게 된 꿈 접어버릴까 고민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칼리안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피 묻히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면서.
피 묻히다 결국 저렇게 다쳤으면서.
그런 말을 굳이 전해주고 잠들었다.
"다만 내 아우님이 나를 왜 그렇게 살리려 드는지는 이제 알겠군."
왜 살려놨는지 칼리안도 완전히는 알지 못하겠다던 그 이유를 플란츠가 알았다.
거둔 생명이 얼만큼인지 보여주는 듯한 짙은 살기.
싸움 중에 생각을 하지 말라던 가르침. 다른 고통 없이 생을 빼앗는 것이 목적인 검술. 놈이 이제껏 지키는 것만 해왔다 했던 앨런의 이야기. 제 손 더럽힌 일이라고는 오로지 텐실의 치유사 없앤 것 뿐이었다던 체이스의 말. 그리고, 데블란.
그 왕제가 뭘 하며 살았는지 눈치채버린 플란츠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께서 참 많이 거절하며 사셨을 말."
사는 동안 가장 많이 받았을 부탁의 말.
사는 동안 가장 많이 거절해왔을 그 말.
"······ 내가 그 말을 해서."
그 말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눈 감지 않아도 되는 것이 칼리안에게 처음이었으리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루시와 잿빛 새끼 고양이가 생각났다.
그날 꺼냈던 그 말이 칼리안에게 있어서는 고양이만큼 무거운 말이었음을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두 번 다시는 심장 못 팔겠다 싶어진 사람 입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