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41화 (242/527)

제43장. 멈추지 마시고(2)

고요한 밤.

빌헬름 관과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각각 예상치 못한 손님들이 방문했다.

빌헬름 관에 있던 아르센은, 본래대로라면 플란츠와 절대로 함께 있지 못할 르메인을 마주하게 된 탓에 상당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래도 이제는 르메인을 처음 봤던 날처럼 긴장하지 않았으므로 당황하지 않고 정중한 단어들을 잘 골라 르메인에게 건넸다.

"죄송합니다만, 전하. 치유사에게 방해가 됩니다."

급여에 반비례한 능력을 지닌데다 단어 그대로 칼리안의 무시무시한 총애를 받고 있는 마법사의 직언을 잘 들은 르메인은 눈으로만 잠시 플란츠를 살핀 뒤 아르피아 궁에 돌아갔다.

그리고 드미레아는, 르메인조차 발길을 돌리게 만든 그 치유사에게 들은 이야기로 인해 생각이 아주 많아진 상태였다. 덕분에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느라 놓친 식사를 홍차와 팬케이크로 대신하고 있던 중 손님 한 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왕자님의 일로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칼리안의 유일한 기사.

그가 전해온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 소공작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먼저.

히나가 건넨 소리 없는 말이 귓가를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 * *

에반의 나이는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후계를 두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에반이라면 그럴 수 있지. 아니면 후계를 이미 두었으나 완벽히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고.'

이런 생각을 하니 궁금한 것이 생겼다.

'무슨 이유였든, 대체 그 검술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카이리스의 양대 기사가문이라는 그 브리센의 가주가 사용하는 진짜 검술은 왜 알려지지 않았는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검술이기에 후계를 두거나 공개하는 것마저 경계하는가.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치열한 공방 속에서도 에반의 움직임을 하나도 흘려 보지 않고 모조리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던 탓에 느끼게 된 찰나의 불균형.

"눈썰미가 좋구나."

"내가 아직 젊어서."

그 미세한 의구심을 키워보니 답이 나왔다.

"자랑하는 것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용케 숨겼네."

"특별한 전쟁도 내전도 없던 나라인데 가주들이 밖에서 직접 검을 쓸 일이 있었겠나. 게다가 코끼리들이 언제 마음을 바꿀지도 모르는데 우리 것을 다 보여주고 살 수는 없지."

"나한테 보여주고 있잖아. 내 정혼자님 엄청 무서운데."

"걱정말거라. 내 검을 본 다른 놈들처럼 너도 여기서 나가지 못할 테니까."

"아, 그래."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후작. 반으로 나눈 건 칼인데 왜 말까지 반토막으로 뱉고 그래."

툭툭, 검 끝으로 바닥을 두어 번 두드리던 칼리안이 고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버릇없어 보이잖아."

여전한 비아냥에 살기가 뭉클 피어올랐다.

푸른 오러에 휩싸인 두 자루의 검이 득달같이 달려든다.

기대감 가득한 웃음을 보인 칼리안이 양쪽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카가강!

아이고, 삶은 완두콩 고생길 열렸네.

검 한 자루도 제대로 못다루는데 이제 두 개나 쥐게 생겼으니 이를 어떡하나.

- 카앙! 캉!

이제 일어나시면 정말로 고기 많이 드셔야겠네.

- 카앙!

- 캉! 카강!

검술도 다시 배우시고,

엄청 짖는 고양이도,

- 카아앙!

······ 제대로 키우시려면!

- 카가가강!

* * *

시간이 계속 흘렀다.

히나의 손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온 따스한 빛이 플란츠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마법과 달리 자연에 머무는 마나를 그대로 끌어다 치유력으로 바꾸면 되는 터라 마나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일이나, 그 뿐.

마나가 부족하지 않다 해도 정신력과 기력까지 무한한 것은 아니지 않나.

'큰일이군. 인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플란츠의 새하얀 셔츠 위에 고양이 털 대신 올려진 히나의 손 끝이 결국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센이 침음을 냈다.

"······ 왕실 치유사를 불러오라 하겠네."

- 안 돼요.

아르센으로서는 처음 듣는 히나의 단호한 목소리가 곧바로 울렸다.

"마법 수련 때문이라면 걱정 말게. 우리 왕자님과는 달리 아직 서클을 만드신 것이 아니니 신력을 받아도 다른 문제는 없을걸세."

- 그런 이유 아니에요. 불러오지 말아주세요.

확고한 거절의 의사였으나 히나는 지금 이유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할 만큼 지쳐있었다.

"이전까지 해왔던 치료와 많이 다를 걸세. 그전에야 상처가 아무는 것을 확인하는 동안 잠시 숨도 돌리고 했다지만 오늘은 다르지 않나. 그런 상태로는 오래 못 버티네. 내가 보기에 자네 이미······."

- 다른 사람 손에 맡기기 싫어요. 못 믿겠어요.

말을 멈춘 아르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왕실 치유사로부터 교육을 받는 동안 친분이 생겼을텐데도 이렇게,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 다른 이도 아닌 히나가.

"······ 하긴, 누굴 믿을 수 있겠나. 카에라조차 브리센에 물들었는데."

결국 아르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도저히 안 되겠으면 그 때는 정말로 치유사를 불러오겠노라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

- 달칵.

닫혀 있던 치료실 문이 열렸다.

카이리스의 왕자가 있는 곳.

그 곁에 발칸의 부군단장과 치유사가 있는 곳.

그런 곳에 찾아왔으나 문 앞을 지키던 다른 마법사들이 섣부르게 제지하지 못할 사람. 제 손으로 해 본 적도 없을 노크는 생략해버린 채 문을 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하지 못했던 두 번째 손님을 본 아르센이 천천히 일어났다.

'여기를 왜······?'

새벽의 청량한 기운을 가득 담은 푸른 눈동자가, 깊고 깊어 그 속에 무엇을 담았는지 모를 푸른 눈동자를 처음으로 온전히 마주했다.

그는 일어서지 않고 고개만 숙여보인 뒤 다시 치료에 집중하는 히나를 무례하다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을 열어 예를 차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아예 고개조차 숙이지 않고 있는 아르센도 탓하지 않았다.

마음이 너그러워서라 하기 보다는 둘의 반응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이다.

"비켜서지를 않는구나."

한동안 아르센을 쳐다보던 이가, 시선만 돌려 플란츠를 내려다보다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내 걸음에 그대의 허락이 필요한 자리더냐."

아르센은 숨길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대의 뒤에 있는 이가 나의 아우인데도."

"제 뒤에 계시는 플란츠 왕자님께서 바로 란델 왕자님의 아우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해를 줄까 걱정하는 것이더냐."

"······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렴 설마 제가 우리 왕자님의 형님이시자 부군단장인 왕자님을 걱정하겠습니까만.

"경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무려 왕자를 의심한다는 말이었음에도 란델은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을 전했다.

"오늘 아닌 다른 날에 그리 하거라. 지금은 해하려 찾은 것이 아니니."

란델의 고요한 눈이 아르센을 응시했다.

그 묵직한 시선을 한참동안 마주보던 아르센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을 뒤로 물렸다.

"······ 알겠습니다."

듣도 보도 못했던 마법을 플란츠에게 쓴 데 이어 란델까지 마음대로 들여놨으니, 칼리안을 만나면 아무래도 어디 하나는 반드시 부서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혹은 어딘가에 구멍이 하나 생기거나.

* * *

칼리안이 오른쪽으로 허리를 틀며 검을 위로 뻗었다.

- 카앙!

- 쉬이익!

머리 위로 내리떨어지던 검이 막혔고 왼쪽 옆구리를 노리며 치고 들어오는 검이 허공을 갈랐다.

조금 놀란 점은 양 손에 하나씩 검을 들었으나 가해지는 힘이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

덕분에 두 명의 에반과 싸우는 기분이 된 칼리안이 끔찍한 상상을 했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막았던 검을 털어냈다.

- 휘익!

가볍게 몸을 띄운 칼리안을 본 에반이 두 개의 검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쥐었다. 그 상태로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며 칼리안이 착지해야 할 곳으로 검격을 날렸다.

- 카가가강!

검날이 충돌하는 소리가 여러번 울렸다.

칼리안은 달려드는 첫 번째 검을 막아낸 직후 검을 살짝 뒤로 빼 두 번째 검의 공격을 막았다. 두 개의 검을 모두 받아낸 뒤 있는 힘껏 두 자루의 검을 올려쳤다. 그리고는 몸을 틀어 에반의 뒤로 다가섰다.

짧은 숨을 들이킬 만한 시간 동안 방어와 이동을 마친 칼리안이 검을 내찔렀다.

- 쉬익!

바람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에반이 허리를 숙였다. 재빨리 일어서 칼리안의 모습을 좇았으나 이번에도 칼리안은 자신의 공격이 막힘과 동시에 다른 방향에 서 있었다.

더.

- 캉, 카가강!

더.

더 보여줘.

전부 다 알려줘.

- 카앙! 카가강!

- 카강, 캉!

뒤를 노릴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어깨와 허리와 다리를 어떻게 움직이고 짚는지, 위에서 혹은 아래에서 달려드는 공격은 어떻게 막는지, 두 검을 반대로 쥘 때는 어떤 공격을 하는지, 두 개의 검이 어떻게 서로를 보완하며 싸우는지.

지금까지 그 누구를 상대했을 때보다 집중하여 검의 경로를 살피고 피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에반이 아닌 에반의 검술을 노렸다. 훔쳐냈다.

- 캉! 카아아앙!

다시 공방이 이어졌다.

그렇게 조금씩 에반의 움직임에 익숙해졌을 즈음, 칼리안이 아주 잠시 발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지금껏 보고 담은 것을 빠르게 정리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에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만큼 완벽히 배울 수는 없겠으나 상관없었다.

게다가 이제 한계가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완두콩이든, 히나든.

그러니 여기까지.

부족한 것은 자신의 검술로 채우면 된다 결정한 칼리안이 아주 잠시 에반과 거리를 벌린 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달려들었다.

에반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 카아앙! 카강!

두 개의 검을 교차시키며 떨어져내리는 에반의 공격을 올려치고, 시간차를 두고 회전하며 들어오는 두 개의 검을 연달아 흘려보냈다.

손에 들린 검을 비틀어 뻗으며 두 검 사이의 빈 공간을 파고들었다.

그것을 본 에반이 두 검의 손잡이를 맞붙여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날을 막았다.

어느새 빠져나간 검붉은 검이 심장을 향해 달려든다. 에반은 한쪽 어깨를 꺼뜨리듯 허리를 돌려 피한 뒤 반대편 검을 내찔렀다.

칼리안은, 그 자리에 없었다.

- 오싹!

더 짙어진 살기.

숨김 없이 드러낸 분노와 살의가 에반을 향했다.

새빨간 두 눈이 보인다.

우습게도 에반은 이 순간, 검은 고양이 브로치를 떠올렸다.

저 놈이 그 잘난 마법 스승을 두고 왜 여기 혼자 왔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마법을 쓰지 않고 검으로만 상대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내가 이 자리에서 저 놈에게 죽는다면, 빼앗기는 것은 내 목숨이 아니라······.'

브리센이다.

브리센의 검이다.

"네 놈, 지금까지······!"

- 카아아앙!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반을 비웃지도 않았다.

지치지도 않고 뻗어내던 검으로 에반의 검술을 노리던 칼리안은 이제, 에반의 생명을 노리고 있었다.

칼리안이 내지르는 검의 잔상조차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들리는 것 같던 발소리가 완전히 감춰졌다. 에반은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칼리안의 기운을 느끼고 막아냈다.

- 카강, 카강, 캉!

목을 향해 치닫는 검은 에반이 막아낼 수 있는 속도를 벗어났다. 마지막을 직감한 에반은 검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죽더라도 칼리안을 곱게 두고 죽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방어를 포기했다. 칼리안의 검이 벼락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그 순간.

- 자박.

예상하지 못한.

경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할아버지······."

잠에서 이제 막 깨어난 듯한 앳된 목소리.

- 우뚝!

그것이 검붉은 검을 붙들었다.

에반의 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의 주인을 반사적으로 바라본 칼리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복도 끝의 방 하나.

그 앞에, 플란츠의 것보다 훨씬 짙은 녹빛의 눈과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아닌 것을 알면서.

상관 없는 어린 아이인 것을 알면서.

후계. 그래, 저 아이구나.

저 아이를 후계로 삼으려고 했구나. 레넌이나 그레이의 자식이겠구나. 두 아들에게 위협받지 않으면서 가문의 검술을 알려주려면 그들의 자식을 후계로 삼는 것이 나았겠구나. 그래서 저택에 몰래 숨겨두고 가르치려 했겠구나.

이 모든 생각을 한꺼번에 잘 떠올렸으면서.

'형······ 님?'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했다.

에반의 검이 바람을 가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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