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장. 멈추지 마시고(1)
멈춰 서지 않는다.
어둠 속을 살핀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살아 숨쉬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소년의 발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순서를 잘못 정했었네. 내가."
핏물 그득한 복도 끝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작은 울림을 만들다 곧 사라졌다. 후회같기도 하고 자조같기도 한 말이었으나 기실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일방적이어야 할 검 앞에 감정을 두면 휘두르는 쪽도 함께 다친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였다.
"결국 다 잡게 될 줄 알았으면 왕궁에서 싸우지 말고 그냥 여길 먼저 올 걸 그랬지."
브리센의 병력을 가능한 남겨두려 했다.
가능한 많은 병력을 남겨두어 나중에 일어날 미지의 일에 대비하고자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실리케를 몰아낼 때에도 브리센의 몸뚱이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었는데.
일이 커지게 되면 카이리시스의 브리센 후작저 뿐 아니라 브리센 후작령에 있는 병력까지 다 죽이게 생겼다.
그러니,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실리케 말고 그냥 에반부터 먼저 칠 걸 그랬지.
- 타박, 타박.
완벽한 어둠에 잠긴 그 곳에는 달빛조차 스미지 않았으나 소년의 발은 머뭇거림 없이 계단을 밟는다.
"아······ 그랬으면 완두콩이 르니에리 냄새 맡고 돌았겠구나."
그때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지.
르니에리 향기는 절대 옅어지지 않았을 테니 그냥 두었다면 그 놈도 결국 돌았겠구나.
"이 새끼 쪽을 미뤄두길 잘 한거네, 그럼."
다행인거네.
덕분에 이런 짓을 또 하고는 있지만.
"······ 뭐, 사람 살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피식 웃으며 침묵에 잠긴 계단 위에 목소리를 내려놓는다.
혼잣말 역시 버릇이었다.
곧 죽을 이들에게 말을 건네고, 이미 죽은 이들 옆에서 생각을 내뱉고. 더는 소리내지 않는 이들로 가득찬 곳을 계속 지나다니다 보니 어느새 그런 버릇이 생겨 있었다.
- 타다닥!
십 수 명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앞을 가로막는다. 아까부터 계속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플란츠와 맺은 맹세의 인이 움직였음을 에반도 느꼈을 테니 이렇게 나름대로 대비를 한 것이리라.
꼭, 지치기를 바라는듯이.
- 쉬이익!
놈들이 기사인지 병사인지, 싸울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할 새도 없이 검붉은 칼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날았다. 놈들이 소년을 향해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했으나 하지 못했다. 앞에 선 소년이 그들의 말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 마음을 먹었으므로.
- 투욱.
사람 목소리 말고, 사람 비명소리 말고, 사람의 묵직한 몸이 바닥에 널브러지는 소리들이 복도를 메운다.
그들의 곁을 지나쳐가며 가라앉은 붉은 눈으로 숨이 끊어졌는지를 살핀 소년이 시선을 돌렸다.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여유롭지도 않은 걸음이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긴 복도를 두 번 더 지나고 계단을 한 번 더 올라 아직 불빛이 남은 곳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빠르십니다."
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드디어 들렸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검을 아래로 내린 채 걸음을 옮겼다. 타박 타박 하는 발소리와 검 끝이 대리석 바닥을 가르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저택을 지키던 기사 대부분이 죽었다.
도망친 놈들은 내버려뒀지만 덤벼든 놈은 실수 없이 싹 죽였다. 빠뜨리지 않고 전부 다 죽였다. 저택 외벽을 넘어 본관에 들어와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올라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발을 놀렸다.
"2왕자는 어떻게 살려두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 한 번을 몰아쉬지 않는 모습을 잠시 보던 에반이 물었다.
"2왕자와의 일에 3왕자가 왜 이렇게 나서는지도 참 궁금하고. 이 돌은 어떻게 쓰는 것인지도 궁금하고. 제가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그레이로부터 건네 받았을 검은 조약돌.
에반을 향해 걸어가던 칼리안이 그 손에 들린 돌을 무시하며 생글 웃었다.
"나도 궁금한 것 있는데."
당신 상대하다 방해받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다른 놈들 먼저 잡으며 올라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그러니 딱 하나만 물어볼게.
"혹시 내 형님께 브리센 검술을 가르치라 부탁하면 들어줄거야?"
"브리센의 검술을 어째서 외부인에게 알리겠습니까."
"······ 그래."
타박, 타박.
"그래서 3왕자께선,"
- 타앗!
칼리안이 바닥을 차며 달려들었다.
온 저택을 잠식할 듯한 살기가 함께 터져나왔다.
검은 로브의 끝자락이 나비의 날개처럼 바람을 품었다.
* * *
들고 있던 마법서를 내려놓은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 효과가 있어요.
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원활하게 상황을 전달할 수 있도록 키리에로부터 팔찌를 전해 받은 채였다. 플란츠의 상태가 바뀌는 즉시 대응을 해주어야 했지만,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 볼 수 있는 히나는 치유술을 쓰고 있어 손을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제대로 구현은 되었네."
히나가 말한 효과라는 것이 차도가 있음을 뜻하지 않음을 안다. 굳이 히나를 통해 전해듣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새하얗게 질려있는 낯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더이상 아픈 것을 느끼지 않을 뿐이다.
"이런 게 처음이라 좀 낯설기는 하군."
누구 생명 끊어놓는 마법은 참 많이 부려 봤는데 누구 안 아프게 하는 마법은 처음 부렸다.
싸우다 죽으면 죽은 놈이 약한 놈이다.
싸움에서 졌는데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았으면 약하기는 해도 운은 좋은 놈이다. 만약 약한 놈이 운도 그럭저럭이라 죽지는 않았는데 다치기만 했다면 아파도 싸다.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는 미친 마법사가 통증 줄이는 마법을 알고 있을 리 없지 않나. 그런 마법을 알고 있었다면 숲에서 다쳤을 때 스스로에게 직접 썼을 것이다. 그때 좀 많이 아팠다.
아르센 자신은 약한 놈이 아니라서 아파도 싼 놈 측에 속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 덕분에 많이 편안해지신 것 같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텐실의 치유사로부터 교육을 받을 때 앨런이 칼리안에게 치유술과 유사한 마법을 써 주었던 적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것을 떠올린 히나가 아르센에게 말을 전했고, 이런저런 책을 뒤져보다 마법식을 찾아내 슥 읽어본 아르센이 대뜸 플란츠에게로 마력을 쏟았다.
다행히 잘 작동했다.
많이 아파 보여서 서둘러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별 수 없으니 그냥 될대로 되라 하고 대충 해 본 것이지, 알고보면 순하다던 저 왕자가 심하게 앓는 모습이 걱정되는 마음에 급히 찾아 발현했던 것은 정말 아니다.
"나도 마법사라네."
아마 지금 아르센이 얼마나 대담한 짓을 했는지 히나가 제대로 알았다면 당장 쫓아냈을 테고, 니들렌이 알았다면 생전 처음 접한 마법을 실수 없이 완벽히 계산해서 곧바로 구현한 천재 마법사의 동상을 꼭 세우겠다고 난리를 쳤을 터였다.
물론 아르센은 히나에게 사실을 알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무모한 짓을 혹시라도 칼리안이 알게되는 날에는 금고 속의 반성문을 뜯어보거나 아르센을 부숴놓거나 둘 중 하나를 하려고 들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으니 말이다.
"책에 나온 마법 하나 구현 못해서야 마법사라 할 수가 없지. 다만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니 모르는 척 해주게."
머쓱하게도 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법이 발현된 결과를 잠시 알려준 뒤에는 다시 온 신경을 집중해 플란츠를 살폈다.
사실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플란츠의 심장에 치유의 힘을 불어넣으며 버티느라 아르센의 헛소리를 제대로 듣고 대답해 줄 정신이 없다 해야 맞을 일이다.
그런 히나의 얼굴도 꽤나 창백해지고 있어서, 아르센은 시간이 지체되면 히나의 치유력이 다해 플란츠가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애써 치워냈다. 그리고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파악해보려 머릿속을 정리해나갔다.
최근에 아르센도 직접 느꼈던 마력의 기운.
그리고 집중해서 살피니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 많이 옅어진 또 하나의 기운.
토막 숨을 내쉰 아르센의 머릿속에 조금 전 키리에로부터 전해들은 말이 떠올랐다.
- 두 분이 맹세의 인을 나누셨습니다.
플란츠에게 두 개의 인이 생겼고 그것과 축복의 힘이 싹 다 엉키는 바람에 저 난리가 났다는 것은 조금 전 앨런으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무슨 소리를 해서 맹세의 인이 발동됐는지는 몰라도 참 묘한 상황이 되었군.'
맹세의 인은 시스파니안이 만들어낸 '똑똑한' 마법이다. 스스로 약속 이행 여부를 판단하여 심장을 옭죄는 힘이다.
그 맹세의 인에 칼리안이 장난을 쳤다.
플란츠가 브리센을 배반했으니 심장을 멎게 할 마법이 발동되어야 한다. 그런데 플란츠가 기사에게 한 말이 두 번째 계약을 지키겠다는 소리인지라, 맹세의 인은 플란츠가 두 번째 약속을 이행 중인 것으로 보고 심장을 그냥 두어야 하는지 첫 번째 약속을 어긴 것으로 보고 심장을 멎게 해야 하는지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플란츠의 심장을 옭죄려는 마법이 발동과 해제를 반복하게 되어서······.
'죽었다가 살아났다가 하는건가.'
아르센이 적당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묘한 상황이 되었다.
만약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없었다면 심장이 멎었다 다시 뛰기를 반복하는 상태를 오래 버티지 못했겠지만 축복은 축복대로 또 열심히 일을 하고 히나도 힘을 내고 있던 터라, 결과적으로 플란츠는 어떻게든 숨은 쉬고 있었다.
"확실히 내가 사람은 잘 봤어."
아르센이 혼잣말을 했다.
세상 천지에 어떤 미친놈이 고양이 운운해가며 맹세의 인을 만들고 심장을 걸겠나. 그러니 내가 확실히 사람은 잘 봤지.
그렇게 생각하며 헛웃음을 흘리던 아르센의 시선이 다시 플란츠의 얼굴로 향했다.
두 개의 인을 스스로 충돌시켜 그대로 드러누운 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르센이 실소했다.
"그러고 보니 세상 천지에 또 하나가 여기 있었지."
한 놈은 살리려고 심장을 걸고 또 한 놈은 살릴 걸 믿고 심장을 내놓았으니.
······ 똑같이 미친 형제로군.
* * *
맹세의 인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은 괜찮다.
'완두콩이 계속 파릇파릇하다는 걸 시시때때로 확인하려고 맺은 계약은 아니었는데.'
의외의 효과에 피식 웃은 칼리안이, 지금껏 본 에반의 검술을 잠시 머릿속에 정리하며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검을 뻗었다.
- 카아앙! 카앙!
서로에 대한 탐색을 위한 짧은 공방이 계속됐다.
플란츠의 검술과 달랐고 왕궁의 기사들이 쓰는 검과도 달랐다. 그레이와는 애초에 검을 겨눈 적도 없었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면 그레이와도 다르다.
테일란보다 무겁다. 슬레이만보다 가볍다.
테일란보다 느리다. 슬레이만보다 빠르다.
들어본 적 없는 브리센의 진짜 검술은 확실히 달랐다.
나쁘게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닌 검술. 좋게 말한다면 양쪽 모두를 다 상대할 수 있을 검술.
"좋네."
칼리안이 웃었다.
오로지 가주만 사용하는 검술.
테일란 역시 브리센의 검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해준 적 없었다. 아니, 브리센의 검이 지그프리드만큼 강하다는 것 말고 알려진 내용이 있기는 했던가.
'어딘가에 기록을 해 두었거나 다른 후계자가 있나.'
후계. 레넌 브리센?
'레넌은 검을 쓰지 못한다 알려져 있는데. 게다가 에반은 스승님과 맹세의 인을 나누며 레넌을 감금시키지 않았던가.'
물론 감금 사실을 다른 곳에 알리지 않겠다는 정도의 계약이었으니 거짓으로 감금했다 꾸몄을 수는 있지만, 칼리안은 레넌에게 오러를 느껴본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레넌은 검을 쓰는 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몸이 둔했다.
'레넌 쪽을 의심하는 것은 섣부르다. 만약 후계를 숨긴 것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이라면 대체 언제까지 혼자 가지고 있을 셈이었을까. 정말로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고 살다 죽을 생각이었나.'
아니면 또 다른 뭔가를 숨기고 있나.
- 카아앙!
생각이 많아진다.
싸움 중에 생각이 많으면 죽는다.
칼리안은 자연스레 이어지는 의문들을 우선 접으며 다시 한 번 검을 움직였다. 에반의 뒤에서 뻗어내던 공격이 막히기가 무섭게 그의 앞에 나타나 목젖을 노렸다.
- 카앙! 캉!
후드 속의 붉은 눈이 빛났다.
에반의 발디딤, 팔의 움직임, 검의 휘어짐 하나 놓치지 않고 전부 다 보았다. 머릿속에 전부 다 집어넣어가며 보았다. 전부 다 외웠다.
- 카가강! 카앙!
에반의 검이 칼리안의 턱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 직후 에반은 검붉은 빛을 일렁이며 심장 앞까지 다가오는 검을 재빨리 쳐올렸다.
- 우웅!
날카로운 오러를 담아낸 에반의 검이 깊은 울음소리를 냈다.
에반의 오러는 푸른색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칼리안의 오러만 검붉다 해야 할 일이다. 마법사가 아닌 이들은 시전자의 서클에 든 고유한 마나와 오러를 순환시켜 사용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 쉬이익! 카강!
탐색을 위한 공방은 어느새 사라지고 치명적인 일격이 담긴 공격이 연이었다. 완연히 다른 두 색의 오러가 얽히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에반을 향해 내지른 검이 벽을 긁어내고, 칼리안이 서 있던 바닥의 대리석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벽에 걸려 있던 누군가의 그림은 줄기줄기 뻗어나온 두 오러의 힘에 형체를 잃었다.
칼리안이 검을 세워 횡으로 치고 들어오는 에반의 검을 막았다. 동시에 반대로 튕겨나가는 검을 다잡아 이번에는 에반의 목을 향해 비스듬히 내리그었다. 신속히 회수된 에반의 검이 다시 한 번 칼리안의 수를 막아섰다.
그리하면 칼리안은 어느새 몸을 띄워 전혀 다른 방향에서 검을 보냈다.
- 카가강!
도약하여 달려드는 칼리안을 느낀 에반이 재빨리 검을 들어 올려 힘있게 받아쳤다. 검과 검에 실린 힘이 서로를 막고 되튕겨내기 위해 맞부딪히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몇 번인지 세어보기 어려울 만큼의 힘겨루기를 이어나가던 그 순간.
- 카앙! 캉!
칼리안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설마.'
곧 칼리안의 발이 허공을 밟듯 움직였다.
분명 앞에 서 있던 이가 발을 움직였을 뿐인데 곧장 뒤에서 다음 공격이 이어진다.
조금도 느려지지 않고 오히려 계속 가속하는 듯한 빠르기에 질렸다는 얼굴을 한 에반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뒤로 틀었다. 그리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 카아아앙!
공기를 찢어내는 소리가 이어지자 복도 천장에 달려있던 샹들리에가 가늘게 떨리는지, 벽에 드리워진 두 검사의 그림자가 잠시 일렁였다.
방금 전 에반의 오른쪽에서 옆구리를 꿰뚫어내려 했던 칼리안의 그림자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동시에 에반의 앞에서 나타났다.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에반이 검을 뻗었으나, 칼리안은 막는 대신 뒤로 훌쩍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그것을 피해냈다.
- 탁!
가벼운 것이 바닥에 닿는 소리와 함께 칼리안이 착지했다. 여전히 입고 있던 검은 로브가 잠시 부풀다 내려앉았다.
깊이 눌러쓴 후드 아래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제······."
한동안 그렇게 에반을 마주보고 서 있던 칼리안의 입술이 다음 말을 담았다.
"다른 것 좀 보여줘도 될 것 같은데. 후작."
"무엇을 말입니까."
"숨겨둔 것."
칼리안의 시선이 에반의 검에 가 닿았다.
에반의 입에 긴 웃음이 걸렸다.
"그리하지."
짧아진 대답.
그와 함께 벽에 드리워졌던 에반의 길고 예리한 검 그림자가 비틀리며 움직였다. 마치 긴 막대기 하나를 세로로 가르듯 천천히 그렇게.
더 가늘고 날렵한 두 개의 그림자로 나뉘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흡족하다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긴 복도를 서늘하게 울렸다.
"그래. 그거."
어느새 검을 흩어버린 칼리안이 빈 손으로 자신의 목 근처를 한 번 쓸어내렸다.
목 앞에 고정시켜 두었던 로브 끈이 풀어졌다.
가벼운 것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났다.
- 스르륵, 툭!
그 많은 이들을 베어내며 이 곳에 왔음에도 피에 젖지 않은 로브 자락이 칼리안의 등을 스치며 바닥에 떨구어졌다.
"그게 뭔지 알아내려고 한참 고민했잖아. 내가."
시야를 가려주던 후드가 걷히고 붉은 눈이 드러났다.
다시 만들어낸 검에서 검붉은 빛이 뚝뚝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