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장. 그 심장(6)
자괴감, 죄책감, 분노.
그 어느것 하나 마음껏 누리면 안 될 이가 들어올렸던 팔을 힘없이 내렸다.
설득되었다.
아니, 현실로 돌아왔다.
그것을 본 마법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르메인이 현실로 돌아옴에 따라, 예리한 것에 힘줄을 잘린 뒤 키리에에게 제압된 기사에 대한 처형이 유예되었다. 조사를 진행해야 하니 잠시 살려두어야 한다는 앨런의 말을 듣고 이성을 다시 찾은 덕분이었다.
기사를 데려온 두 명의 마법사에게 앨런이 말했다.
"데리고 나가게."
마법사 중 한 명이 대충 감싸 둔 기사의 상처에 시선을 두다 앨런을 쳐다보며 물었다.
"출혈이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칼리안이 내어 놓은 상처였다.
그러니 저 기사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죽을 만큼의 상처를 내었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앨런은 기사의 상처는 볼 것도 없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
"치료는 필요 없네."
치료가 필요 없게 된 자.
광장의 레니시타 잎 위에 서게 될 자.
말 뜻을 알아들은 마법사들이 고개숙여 인사를 보인 뒤 기사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 후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 카에라."
아르피아 궁이나 카밀론 궁 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안전해야 할 곳에서 문제가 발생되었음에 대한 깊디 깊은 한숨이 뒤이었다.
그래. 체르밀 궁은 충분히 안전한 곳이다.
밤이 되면 그곳은 시스파니안의 보호 아래로 들어간다. 호수와 후원을 포함한 체르밀 궁 전체를 둘러싼 회랑에 결계와도 같은 보호 마법이 가동된다. 그러니 앨런 정도의 능력을 지니지 않은 이상 외부에서 침입할 수 없다.
그것이 그 동안 왕자들에게 개인 호위기사를 허락하지 않아도 되었던 이유이자 근거였으나 르메인은 이를 무시하고 란델과 플란츠에게 카에라의 기사를 호위로 보냈다. 그리고 오늘, 그렇게 보내진 호위기사가 연루되어 사고가 생겼다.
"카에라의 호위기사가."
곧 고개를 내려 손에 들린 검은색의 작은 주머니를 보던 르메인은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그리고는 위험하니 건드리지 말라 하였던 주머니 속을 기어코 제 손으로 열어 보았다.
"2왕자에게 이것을 맡기면서 1왕자의 방에 숨겨놓으라 했다."
국왕의 친위대에 브리센의 사람이 섞여 있었다는 것. 그런 사실도 모르는 채 그들을 왕자의 처소에 둔 것.
모두 르메인 자신의 잘못임을 알았다.
"에반."
웃음이 터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호위기사의 손과 입을 빌린 에반이 플란츠를 이용하려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가 내 아들에게 또, 독을 주었다.
내가 내 아들을 또, 지키지 못했다.
"상황은 어떠한가."
눈을 감고 한숨을 쉬고 자신을 향한 욕지거리를 뱉는 것을 일단 전부 다 미룬 르메인이 곁에 선 니들렌을 향해 물었다.
침착한 얼굴의 니들렌이 또박또박 보고를 시작했다.
"카에라의 기사들은 모두 무장 해제 하였으며 발칸의 기사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도록 해 두었습니다. 발칸의 마법사 전원이 기사들을 대신하여 경계중입니다. 1왕자님은 체르밀 궁에 모신 상태고 안위에 이상 없습니다. 2왕자님은 빌헬름 관에서 헤르츠 부군단장이 보호 중으로 상황 변화 없습니다."
유사시 국왕은 왕자와 한 자리에 있지 못한다.
르메인이 당장 아르피아 궁에서 빠져나가 란델의 불안을 살피거나 쓰러진 플란츠의 곁에 있지 못한다는 소리다. 자칫 함께 있다 몰살되면 안되니까.
계속하여 지금까지 확인된 내용들에 대해 가능한 상세히 보고한 니들렌이 밖으로 나간 뒤, 앨런과 둘이 남게 된 르메인이 비로소 속내를 꺼냈다.
"내가 또 일을 그르쳤군."
"당연한 말은 접어두시지요."
이 순간 절대로 그를 위로해주지 않을 마법사의 입이 열렸다.
국왕 직속이니만큼 앨런 역시 손대지 못할 영역. 르메인이 온전히 다스리던 기사단의 문제였으니까.
"또 잘못하셨다. 전하 일생에 가장 유능한 날은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일 터이니, 그냥 어디 구석에 처박혀 계셔라. 차라리 그런 말을 올려드리면 속이 좀 시원하시겠습니까."
말이 곱지 않았다.
"제가 국왕 친위대 소속 기사가 왕자에게 해를 입힌 기막힌 사건을 목도하려고 이 나라에 찾아온 줄 아십니까. 어딜 보나 어여쁘고 안쓰럽기만 한 생때같은 제 제자가, 전하께서 파놓은 시궁창 메꾸겠다며 발버둥치다 속이 죄 말라가는 꼴을 보려고 이 날까지 살아온 줄 아십니까. 미안하다 잘못했다 생각 짧았다, 매일같이 그딴 소리나 지껄이는 쓸모 없는 모가지가 어디 한 군데라도 소중해서 이렇게 붙여 놓고 있는 줄 아십니까."
사실 언제나 고운 적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그 어느 날보다도 매서운 말이었다.
지금까지 르메인으로 인해 벌어졌던 수많은 문제들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 뿐더러, 이 시간 칼리안이 무엇을 위해 어디에 갔을지도 모르지 않는 앨런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이 정도면 참 고운 말일지도 몰랐다.
마법도 주먹도 아니고 입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앨런에게 있어서는 고운 것이었다.
"국왕 친위대 기사가 다른 이의 손을 타다니. 실로 재밌는 일이라며 시스파니안께서 대소하시겠습니다. 그렇게 매일을 일에 치여 산다면서 그간 무엇을 하셨는지 도무지 제 머리로는 가늠이 안 될 정도니 말입니다."
칼리안이 온 뒤로 고작 1년.
많은 것이 바뀌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임을 모르지 않아서 그나마 마법 말고 주먹 말고 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국왕 노릇이며 아비 노릇이며 두루두루 부족하기 짝이 없는 놈 그래도 좀 고쳐 써보겠다고.
에라 모르겠다 손 놓기에는 이 나라도 남은 두 왕자도 가엽기만 할 뿐이라.
"알아 들었네. 내가 저질러온 일이 누구를 삼키고 있는지도 계속 보아왔고."
이렇게 대답한 르메인이 침음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래. 후작이 무슨 짓을 했는지, 3왕자가 무엇을 하러 나갔는지, 전부 다 '모르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알아 들었네. 후작저로 섣부르게 손을 쓰진 않을 테니 걱정 말게. 대신."
그리고 다시 떴다.
습관처럼 눈 감는 일을 더 하지는 않아야 했으므로.
"1왕자가 지금 티는 내지 않아도 신경을 쓰고 있을 것이라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잠시 만나 살펴보고 2왕자의 곁을 지켜보고 싶네. 그것은 괜찮겠나."
앨런이 대답 없이 쳐다보자 르메인이 말을 이었다.
"이런 때 왕자와 함께 자리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내 생각에 어차피 내 모가지는 백작이 직접 떼어 놓기 전까지 잘 붙어있을 것 같은데."
그것 참.
칼리안이 어련히 알아서 살려주겠지 하고 퍼질러져 누워있는 푸성귀 같은 그 놈이 이 소 같은 놈의 새끼가 맞기는 한가보다.
"······ 그리하시지요."
짧은 한숨 한 번, 그리고 실소 한 번.
복잡한 마음을 드러낸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가지 다른 놈 손에 달아날 일은 없도록 잘 보아드릴 터이니."
* * *
잠깐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속삭이는 듯한 말에 레이븐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큰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평소 이런 말에 '푸르륵' 하던 대답 대신 보여준 행동이었다.
사실 레이븐 말고 다른 말을 데려올까 했지만 에반을 만나고 다시 궁으로 돌아갈 때를 대비해 그냥 레이븐을 타고 왔다.
- 다각, 다각.
말 편자가 조심스레 바닥을 밟는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레이븐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검은 로브의 후드를 잘 눌러 쓴 칼리안이 온 힘을 다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생일 선물로 받았던 바다의 비린내를 잔뜩 맡은 이후부터 생긴 버릇. 곧 맡게 될 다른 비린내에 앞서 맑은 밤 공기를 폐에 가득 채우기 위해서였다.
- 타박.
짧은 준비를 마친 칼리안의 발이 바닥을 밟았다.
작게 한 걸음, 조금 더 크게 한 걸음, 성큼 성큼 두 걸음. 그렇게 조금씩 보폭이 커지는가 싶더니.
- 타앗!
일순간 바닥을 박차고 높이 도약한 이의 검은 로브 자락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검붉은 기운이 뚝, 하고 그 뒤를 물들이다 함께 사라졌다.
에반 브리센 후작의 저택.
작은 성벽을 연상시키듯 높이 둘러쳐진 외벽 위를 밝히던 마법 등불 하나가 팟, 꺼졌다.
멀리서 그것을 본 병사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 그 옆의 불빛이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마치 밀려드는 파도에 잠겨가듯 하나씩 하나씩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선선한 바람이 왕궁 밖을 휘감아 돌던 그 밤.
조용하고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내려가는 모래성처럼, 한 귀퉁이에서부터 그렇게 에반의 성을 밝힌 불이 꺼져가는 동안.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 * *
[아브턴던트]
파란 머리 마법사.
마법을 쓸 때 원래 시동어를 말했던가.
잘 안 쓰는 마법이라 시동어를 입에 담나.
일어나면, 칼리안에게.
[슬립]
물어봐야······.
* * *
"마법은 잘 배우고 오셨어요?"
레릭의 목소리.
소파에 앉은 채 잠시 레릭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눈을 감았다.
옆에 놓인 보드라운 쿠션 위에 새끼 고양이가 잠을 자고, 품에 안긴 루시가 언제나와 같이 예쁜 소리를 낸다.
대답이 귀찮아 그리 한 것인데 레릭이 다시 말을 걸어 왔다.
"왕자님, 많이 피곤하세요?"
익숙하지 않은 것.
걱정이 담긴 목소리.
"마법은 무리해서 배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고양이 털은 저희가 전부 다 치울 수 있어요."
"말했는데."
아랫층 사는 놈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짜증 섞인 대꾸를 했다.
"그것 때문 아니라고."
"애오옹!"
"니아옹!"
어느새 잠에서 깬 놈까지 합세해서는 플란츠 편을 들었다.
이래서야.
아니라는 소리를 믿어주도록 같이 말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절대 믿지 말라고 방해를 하는 건지.
플란츠가 천천히 눈을 뜨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목욕 준비 해 두었으니 목욕하시면서 좀 쉬세요. 그리고 내일 승마 공연도 보러 가셔야 하니까 혹시 몸 안좋으시면 얘기해주세요."
"알았어."
항상 그랬듯 짧게 대답한 플란츠가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던 레릭이 종알종알 다시 입을 열었다.
"목욕하시면서 드시게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 그래."
"네. 지금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레릭이 나간 뒤 조용해진 방에서, 플란츠가 루시를 안아 새끼 고양이 옆에 뉘였다. 그리고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치듯 올려두었다.
-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오래지 않아 레릭이 올 테니 그냥 무시해도 될 일이었으나 어쩌다 보니 시종 없이 지내는 것에 잠시 익숙해졌던 플란츠는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호위기사가 서 있었다.
"뭐야."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왕자님."
잠시 기사를 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걸음을 뒤로 물리자 기사가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문을 잠갔다면 아마 의심을 했을텐데, 그리 하지는 않았다.
곧 기사가 손에 들린 까만 주머니 하나를 플란츠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이것을, 1왕자님의 방에 두고 와 주시라는."
그것이 무엇인지 채 눈에 담기도 전에.
"브리센 후작의 전언입니다."
"······ 하."
헛웃음이 났다.
기사는 더 이상의 말 없이 플란츠를 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플란츠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릿속에서 무서운 속도로 사고가 이어지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에반의 머리로 생각해 낼 것은 익숙한 방법 뿐이다. 실리케가 했던 방법을 따라할 수 밖에 없을 테니 결국 손에 들린 이 것은······.
"독이겠군."
통제를 벗어난 머릿속에 그 동안 막아온 생각이 봇물처럼 터져나와 거대한 퍼즐을 완성한다.
칼리안이 그레이를 불러냈다. 그레이를 경계한 에반이 레넌을 꺼내들었고 칼리안은 그레이와 란델이 거짓으로 손을 잡은 것처럼 꾸몄다. 추숭식에서의 일, 지그프리드 소공작과의 관계로 엉덩이가 들썩거린 에반이.
- 경우의 수.
변수를 만들었다.
"내 아우님과 형님을 위한 덫을 내 손으로 놓으라는 말일 테고."
란델이 칼리안에게 보낼 독을 준비하던 것으로 꾸민다. 그 뒤 에반이 칼리안을 죽인다.
칼리안을 위한 독을 준비했으나 칼리안이 더 이상 독에 당하지 않을 이라는 것을 뒤늦게 안 란델이 대사막의 늑대든 신성기사든 아무나를 불러낸 것처럼 꾸민다. 그렇게 칼리안을 살해한 죄를 란델과 그레이에게 덮어씌운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리고 르메인은 에반을 의심하겠지만 상관 없다. 란델과 그레이가 칼리안을 해치려 했다는 증거 하나만 란델의 방에서 나오면 되니까.
"이것만으로는 완전한 증거가 되기 어려울텐데."
생각을 계속 이어나가는 동안 플란츠가 질문했다.
"증거는 필요 없습니다. 브리센이 증거가 될 테니."
언제부터 브리센의 사람이었을까.
처음부터 브리센의 사람이었을까.
"언제나 그랬듯 브리센이 곧 증거입니다. 칼리안 왕자가 없다면 다시, 그렇게 됩니다."
기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플란츠가 웃었다.
"언제 가능하시겠습니까."
기사가 대답을 종용하는 동안 플란츠가 살짝 눈을 감았다. 날짜를 가늠해볼 짧은 시간 동안 다시 한 번 생각이 휘몰아친다.
'독 주머니를 받고 칼리안에게 알릴까.'
맹세의 인은 어기겠지만 칼리안과 란델은 무탈할 테니 그렇게 할까. 만약 두 개의 인이 충돌하여 나에게 이상이 생긴다면. 놈은 분명 그 길로 에반을 치러 갈 테고 나는 그 동안만 버티면 될 테니, 그렇게 할까.
"······ 이 정도로는 배신이 아닌가보군."
에반을 죽일 생각을 이어나가도 아직 심장에 별 탈이 없는 것을 느낀 플란츠가 혼잣말같은 소리를 하며 기사의 주의를 한 번 더 끌었다.
그렇게 시간을 조금 더 벌었다.
'칼리안이 에반을 죽여 없애면, 어떻게 되지.'
놈이라면 분명 에반을 죽이고도 처벌 받지 않을 방법을 잘 만들어두고 있을 텐데 이대로 독을 받아 에반부터 없애게 되면 놈이 짜 둔 계획이 다 망가진다.
자칫하면 그 놈은 아무 이유 없이 에반을 죽인 죄인이 된다.
그걸 알면서도 에반을 칠 것이다.
그럴 놈인 것을 안다. 너무 잘 안다.
'직접 알리면 안 된다.'
적어도 내가 이것을 에반에게, 저 기사에게 받았다는 증명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차라리. 지금 당장.'
플란츠가 숨을 들이마셨다.
기사를 쳐다보며 온 힘을 다해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도망가."
플란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기사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도망가라고. 내 아우님이 곧 올 테니 복도 말고 창 밖으로 뛰어."
창 밖으로 뛰어.
칼리안이 잡기 쉽도록.
"나는. 내 동생이."
지금 내 손에 쥔 것을 가지고 살 길을 만들도록.
널 잡고 에반을 죽이고 나 살려놓을 그 놈도 살도록.
"왕위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살기를 흘려보냈다.
"살 거니까."
- 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