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38화 (239/527)

제42장. 그 심장(5)

시끌시끌.

삶은 완두콩과의 화목한 점심식사를 단칼에 거절당한 칼리안은 앨런이 내어 준 고기 파이와 쿠키로 배를 잔뜩 채우고 돌아갔다. 그 뒤에는 아르센을 만나 오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날 저녁, 누가 봐도 그레이 브리센인 이가 궁으로 몰래 들어와 란델을 만났다.

란델과 헤어진 그레이가 마차에 올랐으나 마차가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드나드는 이 없이 마차 문이 열렸다 닫혔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나 마차가 바로 출발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그레이의 비밀 방문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브리센 후작가를 발칵 뒤집어놨을 뿐, 귀족들 가득한 아스트리샤 거리를 뜨겁게 달구기에는 부족했다.

아스트리샤는 지금, 그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소식들로 들썩이고 있었으니까.

- 왕비 위계가 정말 내려졌으니 이제는······.

- 추숭식에서 '검은 고양이'께서 입으신 의복이······.

- 그리고 그 날 '그 브로치'가 2왕자에게······.

프레이야의 추숭이 정말 진행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가는 말이 많을텐데, 추숭식에서 칼리안이 벌였던 일들이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거리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검은 고양이에 대한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또 하나.

태풍이라 불러도 좋을 어마어마한 소문이 사람들 사이를 휩쓸고 다녔다.

- 그런데 요즘 고양이가 코끼리 집에 자주 간다는데.

단순한 염문설이라 하기에는 그 파장이 너무 컸다.

티아라 닮은 장신구를 내어 주고, 연회장에 함께 입장을 하고, 정혼설을 반박하지 않음으로서 인정한 것 이상의 의미.

- 동맹을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거지.

-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 그래. 아무래도.

- 검은 고양이가 황금 그리핀 날개를 꺾을 것 같지.

왕세자를 발표하지 않았음에도, 그리고 둘이 정말 정혼한 사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에도, 지그프리드는 어느새 칼리안의 확실한 지지세력, 의심의 여지 없는 우방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과연 칼리안은.

'맛 좋은 미끼 노릇'만을 위해 공작저를 계속 찾아왔는가.

"3왕자님 뵈러 왔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사유를 마친 드미레아가 왕궁을 찾았다.

- 지금, 좋은 왕자님, 마법, 알려주고 계세요.

체르밀 궁에서 만난 히나가 메를린을 대신해 이렇게 말을 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이라기보다는 마력 운용을 보아주는 것이었지만.

기다리겠노라는 대답을 하니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럼, 기다리는 동안, 저랑 같이, 산책해요. 소공작님 또, 훈련장이랑 서재만, 다녔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는 속 시끄러운 드미레아를 끌고 나와 체르밀 궁 후원의 작은 산책길로 왔다. 생각 같아선 호숫가를 거닐고 싶었지만 그곳에 가려면 칼리안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 쪽으로 발을 돌리지는 못했다.

- 여름 꽃에는, 햇빛이, 가득 담겨있었는데, 가을 꽃에는, 바람이, 맺힌 것 같아서, 좋아요.

만개한 주홍빛 들꽃이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모습에 생긋 웃던 히나가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그렇습니까."

계절이 바뀌면 바뀌나보다, 꽃이 피면 피나보다, 지면 졌나보다, 하고 살았던 드미레아는 그냥 무덤덤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엔 정말로 파혼하자 말할 생각으로 왕궁을 찾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꽃에 햇빛이 담기고 바람이 맺혔다는 평온한 말을 한 히나가 생긋 웃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 기분, 풀어요. 이렇게 좋은데, 왜 화가 났어요.

부드러운 질문에 드미레아가 속내를 보였다.

"화가 났다 하기보다는 지그프리드가 왕자님의 뜻대로 휘둘리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그 손이 원하는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서 우려됩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했으니 여기까지만 하시도록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우리 가문이 왕자님께 드린 것은 방패였지 검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 왕자는 애초부터 무엇을 들어도 무기로 삼을 사람이라서 방패 아니라 꽃 한송이 조차도 결국 검으로 쓸 것 같다고 말해주는 대신, 히나는 다른 말을 했다.

- 약속을, 일방적으로, 어긴 것이면, 자상한 왕자님이, 잘못하신 게 맞겠네요. 그런데 소공작님. 두 분의 사정과 별개로, 말씀드리고 싶던 것이, 있었어요.

히나의 까만 눈이 맑게 빛났다.

- 저는, 정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해요. 그런데 저는, 휘둘리는 것은, 좋지 않지만, 흔들리는 것까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히나가 꽃송이 하나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 이 꽃은, 바람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만들기 위해서,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거예요. 열매를 맺는 것이, 이 꽃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꽃가루를 날려보내고, 그렇게 열매를 만든다. 보다 멀리까지 꽃가루를 보내기 위해 바람에 마주 서지 않고 흔들거린다. 꽃을 피운 목적이 열매이기 때문에 그렇다.

- 열매를 맺는 것 말고, 다른 중요한 뜻이 있다면, 이 꽃은, 흔들리지 않아도, 괜찮을 거예요. 그런데, 열매를 맺는 것도 잊어버리고, 다른 원하는 것을 모르는 채로, 무작정 흔들리지 않으려고만 버티면, 이 꽃은, 아무 의미 없이, 사라져 갈 뿐이에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히나가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 이유가 있어 흔들리는 것도, 이유가 있어 흔들리지 않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흔들리는 것 자체를, 경계하기만 하는 것은, 그리고, 왜 흔들리면 안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냥, 습관일 뿐이니까요.

고인 물은 썩는다.

달리기를 멈춘 말의 편자는 녹슨다.

- 소공작님은 왜,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500년을 이어온 굳건한 신념은 위대하지만 정체되었다.

그 굳건함의 이유가 무엇인지, 단지 굳건하기 위해 계속 굳건해왔던 것은 아닌지. 그것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되었을 만큼.

- 계속 움직이지 않아도 좋고, 가 보지 않았던, 곳으로, 걸어도 좋겠지만, 소공작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지그프리드는 왜 움직이면 안 되는지.

무엇 때문에 흔들리지 않으려 하는지.

그것을 생각해보아야 할 때인 것 같다고, 히나가 말했다.

* * *

- 세상 모든 것이 뜻대로 돌아갈 줄 알았느냐.

칼리안의 웃음이 짙게 변했다.

플란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잊지 말거라. 변수가 있으리라는 것을.

증오해야 할 이유만큼이나 기억해야 할 것들을 참 많이 전해준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칼리안이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내리떴다.

"뭐야."

수련을 마치자마자 생각에 잠겨든 칼리안을 보며 플란츠가 물었다. 말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칼리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를 떠올리고 있을 때의 칼리안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칼리안의 표정을 그냥 통째로 외우게 되어버린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 내 아우님께서는 왜 또 뱀을 깨우셨는지."

무슨 생각을 했기에.

플란츠에게 머릿 속을 들킨 것을 안 칼리안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적당히 숨기려고 해 보아야 괜한 상상만 더해질테니, 칼리안은 그냥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필요해서요."

"뭐가 필요한데."

"경우의 수."

"반말."

"경우의 수요."

아무렇지 않게 은근슬쩍 말을 내리고, 굳이 그것을 지적하는 말에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은근슬쩍 정정한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앞으로 생길 만한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따져보려니 함께 떠올랐습니다. 뱀에게 배운 것들로 이제껏 살아왔는데 잊어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플란츠의 생각은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고, 칼리안의 생각은 어디까지 퍼져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세운 계획들에 생길 하나하나의 경우의 수를 따져보려다 언젠가의 데블란이 변수를 주의주었던 일을 떠올려버린 칼리안이 괜찮다는 듯 말했다.

"신경쓰실 일 아닙니다. 피하고 싶은 기억이 아니라 필요한 기억이니까."

"반말."

"기억이니까요."

그 왕제의 지식을 가져올 때면 유난히 버릇없어지는 동생놈을 보며 한 번 더 한숨을 쉰 플란츠가 걸음을 옮겼다.

"고양이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아직."

"일주일 지났는데요."

"루시는 더했어."

루시는 이름 없이 더 오래 있었지 않느냐고.

"편애하지 말라며."

새끼 고양이 이름을 호들갑 떨듯 곧바로 지어주면 루시가 서운해할까봐 천천히 고민하기로 했다는 듯한 대답에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렇네요. 루시 핑계를 대신다지만 처음으로 얻게 된 '형님의' 소중한 무언가이니 고민이 크시기는 하겠습니다."

"고양이 노릇 한다기에 안 짖을 줄 알았는데."

"고양이 이름도 허투루 정하지 않으시니······ 내 형님께서는 어찌나 세심하신지."

"······ 아니라고."

"정 어려우시면 제가 지어드릴까요. 나비라거나."

"싫어."

서슴없이 칼리안의 말을 잘라낸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칼리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 주의 돌리려고 쓸데없이 짖지 마."

"제가 그랬습니까."

"안 그래도 돼."

"네."

무엇에 대한 경우의 수를 보려다 데블란을 떠올렸는지 생각 안하게 하려는 심산임을 알고 있으니 일부러 짖지 말라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한 칼리안은, 갑자기 드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입에 담았다.

"그럼 쓸모있게 짖는 건 어떠십니까."

"하."

플란츠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냥 수련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파릇파릇한 뒷통수를 보며 다시 웃은 칼리안은 내가 쓸모 있게 짖은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머릿속을 채우던 데블란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흘러내려가듯 사라져갔다.

* * *

꿀 많이 많이 넣은 레몬 차를 받은 칼리안이 웃었다.

"나 아직도 생각 많아?"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얀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아 보이세요."

"반성해야겠네."

"레아도 그랬는데 왕자님까지 복잡해 보이시니 걱정이 되네요."

"드미레아 만났어?"

"네. 그런데 왕자님 뵈러 온 것이 아니었는지 치유사 베른 경만 만나고 돌아갔어요."

조금 늦은 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맞이하는 여유를 가져보려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칼리안이 말했다.

"그래. 히나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드미레아도 생각을 좀 정리할 때가 되긴 했지."

드미레아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그리고 왜 다시 돌아갔는지 얼추 눈치 챈 칼리안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 끝나면 내가······!"

하지만 말이 맺어지지 않았다.

변수.

예측할 수 없는 일.

무엇이 발생할지, 언제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생겼다.

- 두근!

심장이 요동쳤다.

칼리안이 말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붉은 눈에 서늘한 날이 섰다.

칼리안을 향해 얀의 고개가 휙 들어올려졌을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흘렀을 때.

- 와장창!

부서져 깨어지는 소리.

"왕자님!"

레릭의 고함 소리.

- 타다닥!

그리고 무언가가 달리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들려오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테라스 난간 위에 올라 선 칼리안의 손 끝에서 검붉은 빛이 쏘아져 나갔다. 검의 한 면을 뭉텅 잘라낸 듯한 예리한 날이 누군가의 다리를 정확히 베어냈다.

단발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키리에. 밖에 떨어진 것 주워놔."

차디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살기를 느꼈을, 그리하여 그 어느때보다 집중하여 칼리안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키리에를 향해서였다.

얀이 자리에서 튀어오르듯 일어났으나 칼리안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어디보다 고요하고 안전해야 할 곳에 찾아든 갑작스러운 소란함. 호위기사들은 물론 칼리안도 눈치채지 못했던 소란함. 그 소란이 발생한 시작점이자 늘 버릇처럼 숨 쉬러 올라갔던 곳에 발을 디디고 있었으니까.

- 두근!

심장이 움직인다.

시선이 움직인다.

"호위 기사. 카에라의 그 기사가 들어왔습니다. 왕자님께 어떤 말을 전했는데, 왕자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변수.

카에라.

어떤 말.

'상황 파악은 나중에.'

놈이 누구인지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 알 필요 없다.

다만 화가 치민다.

저 새끼가 또 자빠져 있는 걸 볼 줄은 몰랐어서.

- 두근!

심장이 움직인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서 화가 치민다.

테라스에 선 채로, 방 안에 쓰러진 형제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손을 덜덜 떠는 레릭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신 차리고 내 말 제대로 들어."

레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지 말고 빌헬름 관으로 모셔 가. 키리에와 얀만 데려 가. 내 스승님과 발칸 말고는 믿지 마. 아무도 믿지 마."

브리센을 배신하지 않는다.

왕궁에서 나가면 고양이 키우면서 산다.

칼리안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우면서 산다.

- 두근!

두 개의 인은 상쇄되지 않았다.

"더 생각하시면 안돼. 그러니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깨어나시지 못하게 해. 히나를 불러와서 계속 지켜보라고 말해."

"네, 네."

"헤르츠 경을 불러서 곁을 지키라고 해. 스승님께 얀을 보내서 카에라 떼놓고 전하 곁에 계시라고 해."

레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울듯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 왕자님 왜 이러시는거예요. 갑자기 왜 이러시는건데요."

브리센을 배신하지 않는다.

브리센의 후작이 되어 칼리안을 돕는다.

고양이 키우면서, 칼리안 도우면서.

"살고 싶어서."

산다.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

- 두근!

칼리안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변수가 생겼다.

덕분에 그렇게 열심히 짜 놓은 덫이고 미끼고 다 소용 없어져서 화가 치미는 게 아니라.

"그 심장 잘 붙들고 계십시오."

계약 지키려고, 미친 새끼가 지금 살고 싶어서 안 죽고 쓰러졌다는 걸 알아서 화가 치민다.

"······ 검술 하나만 배워 오겠습니다."

칼리안의 발이 어둠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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