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36화 (237/527)

제42장. 그 심장(3)

- 카아앙!

날붙이의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가 훈련장을 울렸다.

후려치는 힘을 이기지 못한 검이 날아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땅에 닿은 뒤 몇 번을 튀어오르며 구르던 검이 멈추는 것을 보던 이를 향해 누군가 말을 걸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후 훈련을 마치고 지금까지.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의 대련인지 세어보기를 포기한 지그프리드의 수석 기사단장 로난시테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말을 건 목소리가 갑작스럽긴 했지만 진작부터 그의 접근을 알고 있던 탓에 놀라지는 않은 채였다.

"훈련을 시키시는 건지 스스로를 몰아붙이시는 건지 모르겠군."

로난시테에게 말을 건넸던 지그프리드의 기사 유란이 다시 앞을 쳐다봤다. 지친 기색 가득한 드미레아가 다음 기사를 불러다 앞에 세우는 것이 보였다.

유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슬슬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저 분을 누가 말리겠나. 공자님이라도 오시면 모를까."

곧 다시 한 번 날과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훈련장을 메웠다.

조만간 왕궁으로 가게 될 것이라던 기사들이 훈련장 가장자리에 마련된 별도의 장소에서 드미레아와 다른 기사의 공방을 숨죽이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그리고 여러 차례 이어지고 있는 대련이었다. 지루해하는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지만 기사들은 물론 드미레아도 이제는 좀 쉬어야 하는 시간이기에 걱정이 되었다.

"어쩔 수 없군."

로난시테가 조용히 팔을 움직였다.

조금 긴 듯한 암갈색의 머리를 다시 단단히 묶어 올린 그녀가 간단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것을 본 유란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공작님 말릴 사람 없다더니 직접 가시려는 겁니까."

로난시테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말리질 못하겠으니 쓰러뜨려 놔야지. 별 수 있겠나."

"단장님도 이제 소공작님 잘 못이기시지 않습니까."

"사정을 좀 봐 드린 것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지 말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그렇군요. 자칫 나도 오해를 할 뻔 했는데."

지금 들려온 마지막 말은 유란이나 로난시테가 한 것이 아니었다.

"······!"

둘의 대화에 끼어든 낯선 목소리에, 유란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던 로난시테의 눈이 벌어졌다.

지그프리드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수석 기사단장 로난시테. 그리고 지금은 기사단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기사 유란.

그 둘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곁으로 다가와 태연히 말을 건넬 수 있는 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반갑습니다. 아니지.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깊이 눌러 쓴 검은 후드 아래, 붉은 입술이 짙은 웃음을 그려냈다.

* * *

드미레아의 서재는 훌륭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옛 칼리안이나 체이스 덕에 서적에 대한 지식이 상당한 칼리안이 보기에도 수준 높은 책들이 가득했다.

"감사합니다."

얀 만큼이나 정중한 태도의 집사장이 두 잔의 차를 내려놓고 나간 뒤, 드미레아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칼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고마워?"

"저택 수비에 문제가 있음을 몸소 알려주셨으니까요."

아아, 하고 이해했다는 듯한 소리를 낸 칼리안이 대답했다.

"나 그래도 대문까지는 레이븐 타고 당당하게 왔어. 그러니까 바깥이랑 대문 지키는 사람들은 혼내지 마."

그러더니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금쯤 알아서 훈련장을 달리고 있을 로난시테와 유란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조금 전, 왕궁에서 또 도망을 친 칼리안은 지그프리드의 저택으로 유유자적 발을 옮겼다. 왕자의 외출을 숨기겠다는 것인지 알리겠다는 것인지, 검은 후드 하나를 뒤집어 쓴 차림으로 레이븐을 타고서 말이다.

그 후에는 저택 외부와 대문을 수비하는 기사들 앞에서 후드를 벗어 보이며 아무 충돌 없이 안까지 들어와서는, 수비 기사가 3왕자의 방문 소식을 알리러 가기도 전에 휘리릭 사라져 버리더니 로난시테와 유란의 앞에 나타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드미레아와 마주 앉아 있었다.

"소드마스터가 되면 침입하기로 마음 먹은 곳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누빌 수 있는지도 잘 배웠습니다."

"내가 숨어 다니는 걸 잘 하는거야. 소드마스터라서가 아니라 원래 잘했어. 그리고, 고맙다면서 툴툴거리지 말고 그냥 내가 쳐들어와서 휘젓고 다닌 게 마음에 안 든다고 해."

"이미 잘 알아들으셨는데 굳이 제가 말씀을 드릴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그러네. 하고 칼리안이 또 웃었다.

상식적인 일이 아닌 것은 맞다.

일국의 왕자가 정혼자 혼자 머무는 공작가에, 그것도 한밤중에 몰래 발을 들인 셈이니 말이다. 긴히 전할 말이 있다면 얀을 통해 서신을 보내도 되는 것을 굳이 이런 방법으로 왔으니 그 의도가 의심 될 수 밖에.

"왕자님 혼삿길을 아예 막고 싶으시다면 다른 방법을 쓰십시오. 제 길까지 막히겠습니다."

"그래서 온 것 아니야. 그런데 나랑 결혼 안 할거야?"

또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야밤에 찾아와서 왜 멍멍이 오라버니를 따라하느냐는 눈으로 칼리안을 보던 드미레아가 대답했다.

"왕위 놓고 오시면 수락하겠습니다."

"그건 어려운데. 내가 누구 고양이 노릇을 좀 해야 해서."

"아쉽네요."

"그래도 파혼은 나중에 해줘."

"하시는 것 보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 우리 정혼자님 말 잘 들어야겠네. 내가."

비밀 숨긴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겠다더니.

그 날의 일은 아예 없던 것처럼, 의문을 가진 것조차 없다는 듯 구는 드미레아를 보며 씩 웃은 칼리안이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녹빛의 차에서 은은한 난꽃 향이 올라온다.

"아. 혹시, 이거."

익숙한 향을 알아 본 칼리안이 놀란 눈을 했다.

- 자상한 왕자님께서, 주셨던, 차. 친구가, 마음에 들어 해서, 친구 줬어요. 죄송해요.

죄송할 것이 있겠나.

우리 히나가 친구에게 주겠다는데, 녹차 아니라 아예 그냥 차 밭을 통째로 사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을.

"네. 베른 경에게 선물 받은 차입니다."

"친구 줬다더니······."

곧 드미레아는 '우리 히나 친구 생겼다더니 그게 너였구나' 하고 감격에 차 있는 칼리안의 얼굴에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지내온 세월에 대한 연륜이 풀풀 묻어나는 저 꼴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려가며 귀족들 앞에서 행패같은 쇼를 할 때는 언제고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지은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내가 비밀 하나를 숨기고 있는데, 그게 좀 샜어."

그리고 칼리안은 이렇게, 조금 나아진 드미레아 기분에 찬물을 확 끼얹는 소리를 했다.

드미레아는 비밀 숨긴 것을 '모르는' 사람이지 않나. 그런데 그 비밀에 대한 일로 찾아온 터라 비밀 숨긴 것 서로 모르고 넘기자는 말이 무색하게 그 일을 입에 올리게 됐다.

결국 덮어두기로 한 것을 상기하고 날카롭게 변한 눈이 된 드미레아를 본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너랑 약속하기 훨씬 전에 샌 거니까 나 잡으려고 들지는 말고."

"······ 네. 계속 말씀하십시오."

"응. 아무튼 내 비밀이 세크리티아와도 연관이 있어서 이번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래서 지그프리드 공에게 부탁해서 알아봤거든. 그런데 지그프리드령에는 수상한 사람이 없었다 하더라고."

이렇게 이어지는 칼리안의 얘기를 듣는 동안 드미레아는 나름대로 칼리안의 말을 정리했다.

칼리안의 비밀은 세크리티아와 연관이 있다. 그 비밀이 노출되어 곤란한 처지다. 아마도 로젤리타 기간 중에 비밀이 샌 것 같다.

그리고. 슬레이만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알고 계셨군요."

"응. 지그프리드령에 갔을 때 바로 들켰어."

걱정 마 이젠 안 들킬게.

하면서 헤실헤실 웃는 얼굴에 두통이 밀려온다.

그나저나.

이, 아버지가. 다 알면서 나한테는.

그 이상의 험한 말을 하지는 못할 드미레아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근데 내 로젤리타에 동행한 사람이 지그프리드령 말고 여기에도 한 명 있다는 게 생각나서. 나름대로 좀 가깝게 지냈거든. 물론 지그프리드 공이 같이 조사를 했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한 번 만나보려고 왔어."

유란.

유란의 정체가 의심되어 와봤다는 소리였다.

유란은 슬레이만이 결혼을 했을 무렵 지그프리드의 기사가 되었고, 얀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충성스러움으로 남매의 곁을 지킨 기사였다. 그러니 드미레아에게 있어서는 어찌보면 슬레이만보다 더 가까운 가족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이를 의심하고 있다는 말에 불쾌함을 드러내는 대신, 드미레아는 담담하게 물었다.

"무엇을 확인해보면 되겠습니까."

유란이 드미레아에게 있어 어떤 이인지를 칼리안이 감안해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니야. 아까 만나서 내가 이미 살펴봤어. 괜찮은 것 같네."

"잠시 보셨을 뿐인데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런 게 있어."

우리 도련님 데려다 고생시키는 것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했더니 이제는 우리 소공작님까지 꼬여낸 거냐.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이 참에 나랑 다시 한 번만 붙어보자.

이런 눈이 되어서는 부글부글거리는 투기를 숨기지도 못하던 유란을 생각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절대 못 숨기는 거."

칼리안에 대한 그 가시 돋힌 감정들이 누구를 위하고 걱정하는 마음에서 기인했을지 잘 안다.

그 근원이 될 이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던 칼리안의 눈이 드미레아를 향했다. 언제나 활활 타오르는 듯한 기분이 드는 붉은 빛으로 그 누구보다 차분한 청회색 눈을 마주했다.

"드미레아."

"네."

"나는 역사상 가장 빠른 나이에 검의 길에 올랐어."

"압니다."

"본래에도."

드미레아의 눈이 한 번 더 가라앉았다.

"지금처럼 어리지는 않았지만 본래에도 나는, 가장 빨랐어. 그렇게 되어야 했고 그렇게 되길 바랐어. 그래서 가장 빠르게 그 길에 올랐어."

칼리안의 눈이 이제 다시 드미레아의 상처 투성이 손에 가 닿았다.

"당연하겠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포기한 것도 많았어. 아주, 많았어."

작은 바닷가에서 체이스가 베른에게 부탁했던 말들. 언제든지 와서 쉬라 하던 그 말들을 기억하면서,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드미레아가 칼리안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손을 보다가 다시 칼리안의 눈을 봤다. 칼리안도 드미레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검을 드는 것이 가문을 위해서일지, 얀을 위해서일지, 나를 넘어서고 싶다는 이유일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 길이 우리같은 사람들한테 얼마나 중요한지는 나도 잘 알아. 그러니 다 덮어두고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하라는 그런 소리는 더 안할게. 다만 나는 그냥 조금 궁금해, 드미레아."

"······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포기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 알지만 정말 괜찮아서 그렇게 검을 드는지. 걱정이라기보다는 그냥. 궁금해."

지금의 드미레아와 그때의 베른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많이 달랐는지. 그 때의 베른이 얼마나 처절하게 검을 잡았는지, 억지로 놓을 수 밖에 없던 것들을 얼마나 많이 포기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무리해가며 검의 길에 오를 수밖에 없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너에게는 그만한 절박함이 없지 않느냐는 말로 들릴까봐서.

드미레아는 베른이 아니었으니 드미레아 역시 무언가를 충분히 절박하게 여기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아서 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나를 꼭 넘어서기를 바라고 있어. 분명 그렇게 되리라 믿고 있어. 그런 날이 온다면 너만큼 나도 기쁠 거야. 진심이야."

그 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런데 드미레아. 나는 네가 뭘 포기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달리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 내가 그렇게 살아온 것을 후회했던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사는 게 괜찮았던 적도 없었거든. 안 괜찮았어, 하나도."

녹빛의 차에서 난꽃의 향이 났다.

- 나는, 너까지 나처럼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히나에게서 이 차를 받아왔던 그날.

칼리안이 무슨 말을 하며 자신을 히나에게 보냈는지 잠시 떠올린 드미레아가 웃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태평하게 잘도 말한다 싶었는데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물론 너와 나는 다르니까, 넌 아닐 수 있어. 걱정 안해도 된다 하면 더 이상 이런 말은 하지 않을게. 다만 네가 포기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을지. 그건 알고 싶어."

한동안 말 없이 찻잔을 내려다보던 드미레아가 말했다.

"섣부르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네요. 말이 무겁습니다."

"무거울 것 까지야. 그냥 내 오지랖이지."

"말씀드렸지만, 사실 저는 왕자님께서 재능을 가지신 줄 알았습니다. 그 정도 재능이야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다 생각했고 그래서 조급해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숨기셨던 것을 알고 나니 오라버니의 일과 별개로 또 조금 화가 났습니다. 대가 없이 얻은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사람에게 더더욱 지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무리를 했습니다."

안그래도 오늘 훈련장에서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랬던 것 같아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전에도 가장 빨랐다 말씀을 해주시니······ 조금 재수없지만."

왕자를 앞에 둔 소공작의 언행에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나쁘지는 않네요. 재능도 있었고 노력도 하셨던 분이라 하니 화는 그만 내겠습니다."

"다행이네."

"제가 워낙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말씀하신 것 잊지는 않겠습니다."

"그래. 드미레아."

"감사합니다."

마치 대련을 마친 것 같은 기분이 된 드미레아가 이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별다른 말 없이 히나의 손을 거쳐간 소중한 차를 끝까지 다 마신 칼리안이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인 할 것도 확인했고 할 말도 했으니 나는 이만 가 볼게. 차 잘 마셨어."

칼리안의 말에, 잠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느라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드미레아가 눈을 빛냈다.

"그것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

"왕자님 이 곳에 오신 이유 말입니다. 또 있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 보여?"

"네. 굳이 제 아랫사람을 확인하려 직접 이 곳까지 오실 수 있는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유란을 보러 오겠다는 핑계로 왔고 온 김에 생각난 이야기를 드미레아에게 전한 것이니 '할 말'은 애초에 이 곳에 오려던 이유가 아니었을 터였다. 게다가 이미 슬레이만이 한 번 확인을 했다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나겠다며 칼리안이 직접 이 곳까지 올 이유라 하기에, 유란은 너무 작은 파이 조각이었다.

"그럼 내 멋진 정혼자 보고 싶어 왔다고 하면 되겠네."

"이상한 소리 마시고요. 또 무슨 꿍꿍이십니까."

또 안 통하네, 하고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뭐, 아무튼 나는 사냥도 좋아하지만 낚시도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말을 꺼낸 칼리안은 손을 올려 검은 후드를 다시 눌러쓰며 말을 이었다.

"적당히 머리쓰는 물고기는 누가 봐도 미끼인 것이 분명한 게 앞에 있으면 절대 안 물거든. 근데 먹을 게 앞에 있으니 다른 데로 가지도 못하고 눈치만 봐. 그렇게 애타게 미끼 눈치를 보다가 그 옆에 제대로 된 것 같은 먹이가 보이면."

쥐 한 마리를 공들여 잡으려는 고양이의 붉은 눈이 검은 천 아래로 숨어들었다.

"두 번 생각 안 하고, 콱. 물어."

그것도 미끼인 줄을 모르고.

신이 나서 떠드는 칼리안을 한참 보던 드미레아가 조용히 대꾸했다.

"저는 2왕자님 아닙니다."

못알아 들었다는 소리다.

"브리센 후작을 사냥인지 낚시인지로 잡으실 생각인 건 압니다만. 설명해주신 것과 이 밤중에 혼자 오신 것이 무슨 관련인지 모르겠습니다."

"차차 이해하게 될 테니까 우선은 구경만 해."

"왕자님."

"응?"

"저에게는 무리하지 말라 하셨지 않습니까. 지난 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브리센 후작은 위험한 자입니다. 지략 없이 무력만으로 브리센을 지켜왔을 만큼 강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를 직접 사냥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무리를 하십니까."

"아까 말했지만."

얼굴을 온전히 다 가린 칼리안의 입술에 예쁜 웃음이 한 번 더 맺혔다.

"누구 고양이 노릇을 해야 하거든. 내가. 야옹야옹, 하고."

심란하다.

오라버니는 저 사람이 저런 위인인 걸 알고는 있을까.

연회장에서 플란츠에게 넘어간 검은 고양이를 떠올리던 드미레아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갈 준비를 마친 칼리안이 인사를 건넸다.

"또 올게, 정혼자님. 잘 자."

알쏭달쏭한 인사를 마친 칼리안이 가벼운 걸음으로 나갔다.

드미레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얀이 걱정하며 달려오는 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일주일 쯤 지난 뒤, 그 깊은 한숨이 짜증 가득한 분노의 숨소리로 바뀌리라는 것은 모르는 채였다. '멋진 내 정혼자 보고 싶은' 칼리안이 이삼일에 한 번씩 불쑥불쑥 찾아오리라는 것 역시.

그날까지만 해도 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