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장.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5)
붉은 눈의 검은 고양이.
'전하 만나셨을 때 고양이 키우겠다 하셨다고 그러셨었죠.'
'네. 제가 그리 말했었지요. 빨간 눈 고양이 한 놈 잘 키워서 왕좌에 올리겠노라 하였습니다.'
'고양이라. 마음에 드네요. 지금까지는 별 의미 없는 것이었으니 이제 제가 좀 써야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 이유였다.
시스파니안을 연상시키지 않고 온전히 칼리안을 뜻할 상징이 필요할 것 같아서 고양이 모양 장신구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섀틴에게 부탁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을 플란츠에게 넘겨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조금 더 유용한 사용처가 생겼다.
그래서 에메랄드를 부쉈다.
지금까지 부순 것 중에 가장 작은 것이었지만 의미로만 본다면 헤이시아 궁보다 더 큰 것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번에도 아주 잘 부숴버렸다.
에반 브리센 후작 속을 뒤집어놓을 겸, 귀족들에게 프레이야를 상기시키는 것과 더불어 어차피 2왕자도 내 손 안에 있으니 브리센과 사이좋게 부서져 없어지기 싫으면 발 디딜 곳 신중하게 고르라는 경고 메시지도 보낼 겸.
그리고 무엇보다, 덜 익은 커피콩 같은 놈 심장에 묶어 둔 두 번째 계약 내용을 제대로 된 의미의 것으로 바꿔치기 할 겸 해서 벌인 일이었다.
자고로 큰 일을 치면 둘 이상의 이득은 취해야 하는 법이니까.
- 맹세의 인이 서로 충돌하지 않을 틈.
앨런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맹세의 인이 서로 충돌하지 않으면서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게 될 만한 틈을 찾아보라고.
'스승님. 맹세의 인은 한 번 맺으면 되돌릴 수 없는 것 맞습니까?'
'한 쪽이 죽기 전에는 그렇지요. 그래서 왕자님께서 에반 그 작자에게 칼 뽑을 날을 벼르시는 것을 제가 그냥 두고 보는 것 아닙니까.'
'그럼 한 번 맺고 나서 상황이 바뀌어도 맹세의 인은 유효하겠네요.'
'알려진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을 뿐이다.
시스파니안이 유일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모순. 그 모순을 성립시킬 별 것 아닌 방법 말이다.
모순된 상황에서 맹세의 인을 맺지 못한다면 맹세의 인을 맺은 뒤에 모순된 상황을 만들면 되는 일 아니겠나.
"어울리는 듯 보인다니 다행이군."
차라리 피망이 맛있다고 해라.
너 정말 이 말도 안 되는 고양이 브로치가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이제 보는 눈까지 미쳐 돌았냐, 그나저나 힘은 왜 이렇게 세냐, 키 안 큰다고 그렇게 협박을 해댄 것 무색하게 어쩐지 잘도 주워먹으면서 계속 비슷하게 크더라니 그동안 처먹은 고기 전부 다 오러로 바꾸고 살았던거냐, 하고 묻는 눈을 한 플란츠가 낮고 작은 목소리로 평범한 말을 했다.
물론 그 눈에 담긴 갖가지 욕지거리를 야무지게 알아먹은 것은 칼리안 뿐이었고 여전히 조용한 지그프리드 관에 있던 대부분의 귀족들은 플란츠의 고운 말만 들었다.
다만 꺼내놓은 말이나 눈에 담은 욕설과는 달리 플란츠는 그리 놀라지 않은 채였다. 칼리안이 장식을 두고 귀한 것인지를 묻는 순간 무엇을 할 지는 몰라도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해 뒀으니 말이다.
그리고 칼리안이 기어코 부쉈다.
그 뒤에 건네줬다.
'붉은 눈의 검은 고양이.'
이제 당장 오늘 저녁이면 그것은 곧 모두에게 있어 칼리안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특별함 없던 무언가가 하나의 상징이 되어 거대한 의미를 담은 표현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의외로 그렇게 많은 노력이 드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검은 나비, 혹은 그리핀처럼.
그리고 플란츠는 칼리안이 의도한 또 하나의 뜻을 제대로 알아봤다.
맹세의 인이 새겨진 서약서에는 나중에 브리센 후작저에 가서 루시 같은 고양이 좀 키우면 고양이 먹이나 사주겠다는 말처럼 써놓지 않았던가.
'그 고양이가 그 고양이일 줄은 몰랐는데.'
브리센의 힘으로 칼리안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우라는 의미인 줄, 그리고 칼리안은 그런 플란츠에게 열심히 부응하겠다는 소리인 줄 누가 알았겠나.
이래서 마법사들 말은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는 거다. 마법사들과 함부로 계약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 역시 이번에 아주 잘 배웠다.
'어쩔 수 없나.'
그렇다고 이미 맺은 계약을 물릴 수도 없으니.
별 수 있나, 약속은 지켜야지.
······ 그것이 '그 집안'의 뜻에 반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나중에 사과는 받도록 하지."
플란츠의 한 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른 이들에게야 멋대로 에메랄드를 부순 것에 대한 사과로 들리겠지만 그까짓 것은 아무 상관 없었다. 에반과는 그 의도가 다르니 화를 내지는 않겠으나 어쨌거나 자신을 큰 그림 그려 전시하는 용도의 캔버스로 쓴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그에 대한 사과를 받겠다는 뜻이었다.
칼리안도 보일듯 말듯한 웃음을 지었다.
"네."
아무튼 내 말은 더럽게 안 듣는구나 하는 눈을 한 채였다.
맹세의 인에 적힌 진짜 의도를 파악했을텐데도 별다른 감상이 없는 얼굴이었으니까.
'플란츠 왕자님께서 왕자님을 도왔을 때, 그리하여 브리센 후작과의 계약에 반하는 행동이 되어 맹세의 인이 상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가 불확실합니다. 두 힘이 상쇄될지, 충돌의 여파를 심장에 보낼지 알 수 없습니다.'
'네.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만일의 경우에 무조건 심장을 옭죄는 것보다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것이 낫겠죠. 본래 맺은 맹세의 인에 대한 완전한 안전장치는 아니겠지만요.'
'그리 생각하신다면 시도해 보시지요.'
그렇게, 이 참에 귀족들 머릿속에 칼리안을 뜻하는 의미심장한 상징도 좀 새겨 줄 겸 완두콩 심장에 대한 대비책으로도 쓸 겸 일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또 저렇게 '유능하신 아우님께서 나 하나쯤 알아서 살려두시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는 것이 뻔히 보이도록 제 심장 꺼내놓은 표정을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지겠나 안 터지겠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입은 웃고 눈은 안 웃는 얼굴이 된 칼리안이 조용히 대답했다.
방금 보여준 칼리안의 행동을 칼리안이 의도한 뜻으로 잘 이해하고 분노한 에반이나, 상황 파악은 잠시 미루고 둘의 대화를 듣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귀족들의 쏟아지는 눈길, 정혼자의 인성이 가득 담긴 정치질을 다시 한 번 목도한 드미레아의 표정, 동생 둘이 만들어놓고 있는 훈훈한 우애 다짐의 현장에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한 란델에게는 시선을 두지 않은 채였다.
* * *
침묵 속의 혼란.
지그프리드 관을 잠식한 숨막히는 침묵 속에 온갖 종류의 혼란이 한겨울 세뉴강 위에 부는 칼바람처럼 사방 팔방으로 날을 세워가며 휘몰아치는 사이.
오늘도 언제나와 같이 그저 평화롭기만 한 빌헬름 관에서는 이제 더 이상 다크서클을 몰아내려 애쓰지 않고 평화로이 받아들이기로 한 아르센이 그 어느 곳에든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한 히나와 마주앉아 블루베리청과 레몬을 우려낸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 블루베리랑 레몬, 피로 회복에, 좋대요. 남기지 말고, 다 드세요. 피곤한 것은, 저도, 치료 못해드리니까요.
히나가 폭신폭신한 파이 속에 몽실몽실한 슈크림을 가득 채운 간식을 맛있게 먹는 동안, 시거나 단 것 보다는 짠 것을 더 좋아하지만 히나의 말은 반드시 잘 들어야 하는 새파란 머리의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건네받은 것을 봤다.
"언제 구경해볼까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보게 되었군."
- 연회장에는, 무기랑 마법 도구, 못 가지고 들어간다고, 하니까요. 그래도 오빠는, 자상한 왕자님, 기사라서, 검은, 가지고 들어갔대요.
칼리안의 호위로 함께 지그프리드 관에 들어간 키리에가 히나에게 팔찌를 잠시 맡겼고, 외부인이 많이 드는 날이니만큼 안전을 위해 히나가 아르센의 집무실에 찾아와 있던 참이었다.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한 아르센이 잠시 팔찌를 살폈다.
단순한 선물이라 할 수 없을 귀한 것이었다.
평생동안 매일같이 말을 주고 받아도 마력이 모자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값어치 높은 마석이었을지 마법사인 아르센조차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그런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히나나 키리에 모두 이미 충분히 고맙게 여기고 있을텐데 굳이 부담까지 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왕자님께서 호신용으로 선물하신 것이라 해도 기사 베른 경은 많이 좋아했을 것 같네."
마석 살피기를 마친 아르센이 팔찌를 손목에 착용하자 히나가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보내왔다.
- 오빠는 좋아하는 티 많이 안 냈어요. 칼리안 왕자님도 그냥 당연하게만 생각하셨고 많이 좋아하지는 않으셨어요.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히나의 목소리에 잠시 기분이 좋아져 저도 모르게 웃은 아르센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의외로군. 나는 베른 경이 자네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엄청 좋아할 줄 알았는데."
- 너무 좋아하면 제가 신경쓸까봐 티 안냈을거예요. 말하는 걸 보고 너무 많이 좋아하면 그 동안 말을 못했던 걸 그만큼 안쓰러워했다는 거니까. 제가 그런걸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무덤덤하게 굴었을 거예요. 우리 오빠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그래도 분명히 저보다 더 많이 좋아했을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칼리안 왕자님도요.
칼리안이 많이 좋아하지 않은 이유가 히나의 말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키리에와 같은 이유였을지는 당장 4층에 안 쳐들어가려고 끙끙 앓았던 본인만 알 일이다.
"아······ 미안하네. 내가 생각 짧은 말을 했어."
- 아니에요. 부군단장님처럼 생각하시는 게 당연하다는 것도 알고 오빠랑 칼리안 왕자님이 유난스럽다는 것도 잘 알아요. 부군단장님께서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의외로 히나는 대답을 길게 하는 편이었다.
아르센은 그런 히나가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생각하다가 혹시라도 그것이 히나에게 들릴까봐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방금 전 사과를 해놓고서는 또 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 그리고 이게 있어서, 만약 세크리티아에 정말 가게 되더라도 조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을 잘 해야 할 지도 모르는데 하나하나 써서 보여주려면 서로 불편하니까요.
"세크리티아? 왕자님께서 아마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겠다 하셨던 것 같은데 아니던가?"
- 혹시 모르니까요. 그래도 오빠랑 부군단장님이랑, 괜찮다면 세이렌 협회장님도 가주신다 했으니 걱정은 안하려고요.
"그래. 걱정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네."
그렇게 대답하던 아르센이 순간 좀 맹한 얼굴을 했다.
방금 이야기에서 뭔가 중요한 이름이 나왔고 중요한 것을 하나 까먹은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게 뭔지 영 떠오르질 않아서였다.
"······ 가게 되든 아니든 어쨌거나 유용한 물건이 생겼으니 좋은 일이지. 그래도 우려한 일로 쓰일 상황은 없어야 하니 빌헬름 관이나 체르밀 궁 밖에 나갈 때에는 절대 혼자 다니지 말게."
- 알아요. 오빠도 그렇고 부군단장님까지 귀찮게 해드리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혼자 다니진 않을거예요.
루시가 체르밀 궁에 갓 왔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사라진 루시를 찾으려 혼자 장미 정원에 들어갔다가 위험할 뻔 했었던 일. 그 때 가까이서 처음 본 플란츠의 뒷모습을 잠시 떠올리다 웃은 히나가 말을 이었다.
- 그런데 유용하고 좋지만 사실 저는 조금 죄송했어요. 하피의 알 화석에서 꺼낸 마석이라 하셨는데, 하피는 이제 없잖아요. 아주 귀할텐데 이렇게 저한테 주셔서······.
"그렇게 생각할 것 없네. 왕자님이나 마나실 군단장님은 자네한테 필요한 것이라면 당장 나가서 해룡이라도 잡아 올 분들이니. 그리고 하피의 알이라면 귀하기는 해도······ 귀하기는······ 해도······ 아!"
알!
맞다. 알.
알을 까먹고 있었다!
아르센의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바뀌었다.
-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픈 것이 아니네."
애써 침착하게 웃어보이던 아르센이 설명을 해주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 아픈게 몸이 아니라 목숨줄이라는 사실을 어린 히나에게 어떻게 잘 설명해 줄 방법이 없어서 그냥 때려치고 입을 도로 다물었다가 잠깐 뒤에 질문 하나를 했다.
"베른 경. 혹시 자네 왕궁 밖에 괜찮은 식재료 상점이 어디 있는지 아나? 자네 호위 끝나면 나가서 계란을 좀 사야겠는데."
- 계란이요? 저 요리도 안 해봤고 밖을 돌아다닐 일도 적어서, 아마 베로니카는 알고 있을 거예요. 시장 구경하는 것도 그렇고 요리하는 것도 좋아한댔어요.
히나는 갑자기 그게 또 무슨 마법사같은 소리냐는 눈이 되면서도 일단 대답을 했고, 아르센은 곧 죽을 날 잡은 사람의 눈으로 힘없이 웃어보였다.
계란도 사 주고 술도 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물론 그 전에 위대하신 한낮의 사신께서 약속 잊어버린 꼬맹이를 튀겨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좋은 계란 파는 곳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 좀 전해주게."
진짜 좋은 계란.
카이리스 왕궁에 있는 것 다음으로 맛 좋은 그런 좋은 계란으로.
* * *
식을 시작하기도 전에 칼리안이 뿌린 것이 너무 많은 탓인지 몰라도, 르메인이 입장한 뒤 곧바로 진행된 추숭식은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르메인의 왕관 옆에 프레이야를 위한 왕비의 관을 올려두고 프레이야에게 왕비의 칭호를 내리겠노라는 선언을 했다. 그리고 몇 가지의 의례를 치른 뒤, 사망한 국왕 일가의 보물이 보관된 곳에 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새 왕비의 관을 가져다 두는 것으로 식을 마쳤다.
그 후 모두 다시 지그프리드 관에 돌아온 뒤, 오늘을 기념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더 이상 의무적으로 자리할 이유가 없을 란델과 검은 고양이 브로치가 영 짜증스러울 완두콩은 연회 시작 후 오래지 않아 각자 돌아갔다.
- 왕비 프레이야.
그를 기억하는 자리.
그리고 그의 아들 칼리안을 위한 자리.
계속 이어지는 귀족들의 인사와 형식적인 대화 나누기에 치인 칼리안은 연회가 끝나도록 쉬이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덕분에 멀리서 앨런과 대화를 주고 받는 르메인, 그리고 종일 칼리안만 신경썼을 앨런에게는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국왕에게는 먼저 다가가지 못하지만 왕자는 아니었으니 이 참에 칼리안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으려는 이들이 의외로 많았던 탓이다.
"왕자님."
"아, 키리에."
결국 그렇게 연회가 끝나고 르메인이 먼저 다가와 고생 많았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를 벗어난 뒤. 하나 둘 연회장 밖으로 나가는 귀족들을 바라보는 칼리안에게 키리에가 다가왔다.
"어때."
"다들 말하기를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입니다. 다만 몇몇 인물들이 있었습니다만."
미안하게도 오늘 필요한 것은 키리에의 검보다는 귀였다. 검이든 귀든 칼리안을 위해 쓰는 것이라면 뭐든 좋을 키리에는 몇 안되는 귀족들의 이름을 조용히 전했다. 브리센의 편으로 생각되는 이들의 명단이었다.
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주시해 온 이가 비로소 찾아온 탓이다.
"나에게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후작."
키리에를 뒤로 물린 칼리안이 에반을 향해 물었다. 지난번처럼 하대를 할까 하다가 일단 거기까지는 참았다. 그래도 아직은 후작이니까.
"생각해보니 축하 인사를 드리지 않아 찾아뵈었습니다."
"어찌 인사가 따르겠습니까. 마음이 없으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발뺌하는 에반을 잠시 보던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소득 없을 말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피곤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몰라도 제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찌합니까. 검의 길을 걷는 분께서 말입니다."
"아."
칼리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대를 보는 것이 나는 늘 피곤하여."
에반이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 하루 있던 일을 떠올리는 듯, 플란츠와 비슷하다 여기기 여전히 미안한 빛의 눈동자가 가만히 움직였다.
"계속 그렇게 위 아래 구분 없이 지내지는 마십시오. 3왕자님."
에반이 칼리안과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하기사.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영광이니 계속 누리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리 되면 끝이 곱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칼리안이 손바닥을 펴 살짝 뒤로 돌렸다. 에반이 뭘 우려하든 말든 지금 칼리안은 혹시라도 키리에가 덤벼들까, 그것이 우려됐던 까닭이다.
"곱기만 한 끝이 과연 있기는 하겠습니까. 그 고운 실리케도 내 어머니와 같은 것에 스러졌는데 검 잘 쓰는 브리센의 우두머리라 해서 무엇인들 다를까."
유난히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독.
르메인이 실리케에게 그것을 내린 이유를 이제는 안다.
칼리안이 한 발자국 에반에게 다가섰다.
프레이야의 선혈같은 망토가 오랜 기억을 되살려주기를 바라면서.
오늘 하루 프레이야의 아들임을 온 몸으로 증명해 낸 칼리안이 말했다.
"그나저나. 나는 내가 오늘 경고를 한 줄 알았는데. 그대의 것은 그조차 못 알아듣는 머리였나. 아무래도 내 형님께서 그대의 머리를 닮지는 않은 듯 하니 그것만은 세렌티께 감사드릴 일이군."
어느새 말을 내린 칼리안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깊은 생각 하지 말고, 몸 사리지 말고, 본래 네가 하던대로 그렇게 앞 뒤 안 가리고 나서서 부디.
네 손으로 직접 만들어 낼 멋진 덫에 걸려들어 보라는 의미를 담아 말을 맺었다.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잊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를 했지. 너에게, 내가."
한동안 칼리안을 쏘아보듯 하던 에반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간신히 만들어 낸 웃음을 입에 건 에반이 대답했다.
"······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듣지 못하겠습니까."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에반의 숨막히는 살기가 오로지 칼리안만을 향해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오싹한 느낌에 반가운 웃음을 보였을 때, 칼리안을 완전히 짓이기려는 듯한 기세의 에반이 입을 열었다.
"조금도 잊지 않겠으니 기다리십시오. 곧 다시 뵙게 될 겁니다."
말을 뱉은 에반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인사하는 것은 또 멋대로 생략해버린 채였다.
그런 에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에반."
데블란의 치밀함을 안고, 르메인의 혈통을 받고, 앨런의 현명함을 배운, 그리고 프레이야의 원을 절대 잊지 않은 단 한 명.
이 순간만은 그들 모두의 아들인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그래.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