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32화 (233/527)

제41장.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4)

세크리티아는 따뜻했다.

카이리스, 아니. 카이리시스는 추웠다.

세크리티아를 전부 돌아다녀 봤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어딜 가든 대체로 수도 세크레타처럼 따뜻하거나 더웠고 겨울 역시 그리 춥지 않았다. 그에 비해 카이리시스는 겨울 내내 불어드는 칼바람에 도무지 고개를 들고 걷기 힘들만큼 추웠다.

이게 다 이성 없음의 시초이신 하츠아라 때문이다.

아무튼. 같은 시기에 대한 두 개의 기억을 잘 갈무리하며 하츠아라를 탓하는 것으로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펄럭이는 붉은 빛의 망토가 눈에 들어온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붙어있는 보석가루가 점점 많아져 그 끄트머리에는 밑바탕이 되는 두터운 천이 아예 보여지지 않을 정도가 되는 그것은 그 언젠가 보았던 만화경 속의 모습 같기도 했고, 또······.

"이제는 진짜 가을이네요. 바람이 달라졌어요."

"그러게. 어느새 가을이네."

대기중이던 마차에 오르기 쉽도록 돕던 얀이 꺼낸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전히 더울 세크리티아와 서둘러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카이리스. 생소하지만 낯설지 않은 시기의 가을이 됐다.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것 같아."

"아쉬우세요?"

"응."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은 얀이 동그란 눈을 했다. 지난 여름 내내 속앓이를 하는 듯 보였고 이제야 많이 떨쳐낸 것 같았는데 무엇이 아쉽다는 것일까.

"네가 민트차에 얼음을 안 넣어 주잖아."

엉뚱한 이유였지만 칼리안은 진심이었다. 바람이 달라진 것을 안 얀은 더 이상 얼음 가득한 민트차 마시는 일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어젯밤 유난히 늦게 잠에 들어 잘 열리지 않는 눈을 뜨기 위해 차가운 민트차를 가져다 달라 말했다가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그 뒤 건네진 따뜻한 차를 마법으로 몰래 차갑게 만들다 그걸 또 들켜서 한참동안 혼이 났다. 서러웠다.

- 다각, 다각.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마차가 움직이는 동안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당장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래. 아직 안 춥다는데 넌 도무지 내 말을 듣질 않으니."

아마도 장래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가게 될 이가 자신의 시종에게 뒤끝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민트차 이야기나 하는 것이 재밌었던 얀이 결국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드릴 거예요."

단호한 대답에 칼리안의 입에서 또 몇 마디 툴툴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 아쉬움을 빼면 벌써 가을이 되는 것이 영 싫지만은 않았다. 얀의 생각대로 여름 내내 속을 앓던 것도 대부분 정리를 했다. 굳이 '대부분'이라 하는 것은, 칼리안도 사람인지라 제 속을 완전히 가늠하기는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래도 어찌됐건 이제 속이 많이 시원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래도 아쉬운 것보단 좋은 게 더 많은 것 같아."

"다행이네요. 좋은 것이 더 많아서요."

"맞아. 다행이야."

다가오는 가을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더위 가득했던 여름의 기억을 잊으라는 듯 부는 바람의 냄새가 퍽 평온하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칼리안의 발을 묶으려는 것처럼 기를 쓰고 내리는 비를 볼 일이 조금 줄어들었다는 것.

······ 이었는데.

"이런."

이런은 무슨.

어느새 지그프리드 관에 도착한 마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칼리안을 기다렸다는 듯한 낮은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발을 묶던 것이 비단 비 뿐이 아니었음을 새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어서, 이 좋은 날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꽤 설레던 기분이 싹 가라앉았다.

"감기, 앓았어야 했나."

가능한 늦게 보고 싶던 놈과 지그프리드 관 앞에서 딱 마주치고 만 탓이다.

- 오빠한테는 말 안했지만 사실은 플란츠 왕자님께서 말하기 연습하는 것을 많이 도와주셨어요. 바쁘셨을 텐데도 아무 말 없이 잘 들어주셔서 금방 익숙해졌어요. 플란츠 왕자님 그만큼 좋은 분이니까, 칼리안 왕자님도 플란츠 왕자님 그만 괴롭히세요. 아무리 그래도 형님이잖아요.

플란츠 왕자님 그만큼 좋은 분이니까······.

플란츠 왕자님 그만 괴롭히세요······.

데운 우유 마시고 긴 낮잠을 잤던 그 날 저녁에 찾아온 히나의 감사인사 끝에 붙어 나온 청천벽력같은 말이 다시 생각나버렸다.

이럴수가.

살아생전 우리 히나가 저 풀대가리 편을 드는 것을 듣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그런 날이 너무 빨리 찾아온 허탈함과 실망감, 슬픔, 애환이 한꺼번에 싹 몰려왔다.

게다가, 왜.

키리에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지금 당장 저 하늘에 푸르른 꽃을 한가득 피워낼 것 같은 우리 히나의 천사같은 목소리를 감히 형님 네 놈이 제일 먼저 들었다는 것이 이게 진짜 사실이냐고. 호수 위에 반짝이는 햇살같은 어여쁜 목소리로 호수 위를 부유하는 개구리풀같은 형님 네 놈의 이름을 내 이름보다 먼저 부르는 것을, 그것도 훨씬 더 많이 부르는 것을 듣고 내가 얼마나 시름시름 앓았는지 형님 네 놈이 아시기는 하느냐고.

내 마음의 상처가 깊디 깊어 형님 네 놈 보면 이해심이고 나발이고 다 잊어버릴 것 같았는데 그래도 우리 히나 말 잘 들으려고 내가 나이 세 살은 더 먹을 것 같은 기분으로 참으면서 그날부터 지금까지 형님 네 놈 얼굴도 안 보고 피한 것을 알기는 하시느냐고.

하긴. 저 풀대가리가 이런 섬세한 마음을 알 리가 없지.

뭉클, 하고 살기가 피어오르려는 것을 필사의 인내심으로 집어넣었다. 아무튼 오늘은 좋은 날이었고 이제 칼리안은 분명한 어른이니까.

"······ 플란츠 형님을 뵙습니다."

"생각이 긴데."

"아닙니다."

인사를 건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을 지적하는 말에 짧게 답한 칼리안이, 플란츠의 첫 말을 상기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감기 안걸리셔도 됩니다. 그것을 확인하려 안 들어가고 기다리셨던 겁니까."

"내 아우님께서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가 없으니."

"서운하네요. 누가 들으면 제가 항상 사고만 치고 다니는 줄로 오해하겠습니다."

"잘 짖네. 오늘도."

이젠 짖는다고 해도 안 멈춘다. 안 멈추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보는 눈이 어디 있을지 모르는 자리였으니 자제는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않는다. 귓구멍은 고사하고 귓등 아니라 아예 콧구멍으로도 안 듣는 것 같다.

플란츠가 체념 섞인 짧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칼리안의 멍멍거림이 이어졌다.

"오늘 행사가 저를 위한 자리라고는 해도 저는 개 키우고 형님께서는 왕궁 밖에 나가 고양이 키우시겠다는 소박한 꿈에 한발자국 다가서는 그런 날인데 연약하고 귀하신 몸 아프기까지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잘 참석하셔서 자리 빛내주셔야죠. 꼭."

"큰일이군. 잘 차려입고도 사람 말은 잘 안하시니."

금색 자수 장식이 된 새하얀 망토. 긴 길이의 짙은 청록색 재킷과 하얀 바지. 그 차림에 참 잘 어울릴 장신구까지, 레릭의 손이 아주 많이 간 듯한 차림새의 플란츠가 자신보다 더한 차림새를 한 칼리안을 보며 속마음 가득 담긴 대답을 했다.

칼리안이 씩 웃었다.

"옷 입은 루시도 계속 야옹거리는데 저라고 다르겠습니까. 겉모습이 어떻든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시스파니안께서도 말씀하셨으니 무엇을 입었든지 한결같이 짖을 수밖에요."

루시에 시스파니안까지 팔아가며 계속되는 동생놈의 멍멍거림에 더 대꾸할 생각 없다는 듯, 확인할 것에 대한 답을 들은 플란츠가 발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칼리안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혹시 그거, 귀한 겁니까."

이렇게 묻는 칼리안의 손가락이 플란츠의 망토 여밈 장식을 가리켜보이고 있었다. 금색의 커다란 깃털 두 개와 꽤 큼지막한 에메랄드 조각이 달린 것.

한 마디로, 황금색 몸에 녹색 눈을 가진 브리센의 그리핀을 떠올리기 아주 좋을 그런 장식이다.

이왕이면 오늘 하고 왔으면 좋겠다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에반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는 말을 해줄까 하던 플란츠는 심장 곱게 쓰라던 동생놈의 얘기가 생각나 그냥 고개만 가로젓고 말았다. 칼리안이 그 정도를 모를 리 없을 테니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아직까지도 욕심 없는 플란츠에게 귀한 것이 있을 리 없지 않겠나. 제일 귀하게 생각하는 루시는 칼리안의 고양이였으니 무엇을 더 말할까.

"네. 마침 잘 됐네요."

알 수 없는 질문을 하곤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인 칼리안이 팔을 내밀어 지그프리드 관을 가리켜 보였다. 먼저 들어가시라는 뜻이었으므로 플란츠는 더 이상의 말을 나누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놈의 꿍꿍이가 무엇일지 떠올리지 않기 위해, 이른 새벽 우다다다 들어와서는 가슴팍 위에 훌쩍 뛰어올라 죽일듯이 잠을 깨우던 예쁜 루시를 열심히 생각하면서.

그렇게 플란츠가 들어가고 조금 뒤 모든 귀족과 두 왕자가 모두 들어간 것을 확인한 칼리안이 느릿한 발걸음으로 지그프리드 관 안에 들어섰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 드십니다."

익숙한 소개. 그리고 익숙한 침묵.

약속한 것처럼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장 시끄러운 소문을 몰고 다니는 이가 있는 곳은 늘 이렇게나 조용하니 이 역시 참으로 모순된 일이 아닌가 싶던 칼리안의 손가락이 오늘도 작은 호선 하나를 그렸다.

"반갑습니다."

반갑기 그지없는 이 침묵을 이끌어내기 위해 오늘을 그렇게나 기다려왔으니 말이다.

* * *

생각이 많았다.

칼리안이 안다면 비웃을 것이 뻔했지만 아무튼 생각이 많았다.

일단 지그프리드는 더 건드리지 않겠다 결정했다. 에반의 반대편에 마련된 귀족들의 상석에 앉아있는 저 도도한 소공작에게 르메인이 정말 작위를 주어버리면 골치아플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일단 귀족들을 좀 흔들어놔야겠어.'

평민 출신 후궁, 그것도 이미 죽은 지 오래인 후궁을 왕비로 올리는 자리가 아닌가.

'분명 브리센의 편이 아니라 하더라도 불만 있는 이가 많을 터······. 우선 잘 끌어들여 둔 새끼 늑대를 이번에 좀 써먹어야겠는데.'

이런 생각을 한 에반이 플란츠에게 선물 하나를 보냈다.

플란츠와 브리센의 관계가 여전할 뿐 아니라 플란츠가 브리센의 앞에 설 왕자라는 사실, 그리고 브리센은 플란츠를 반드시 왕위에 올리겠노라는 뜻을 담은 장신구였다.

- 새끼 늑대가 아니라 그럴싸한 날개까지 얻게 될 사자, 새끼 그리핀이 될 왕자로 다시 여겨질 수 있도록.

에반의 뜻을 알면서도 브리센의 요구를 어길 수 없는 플란츠는 약속대로 장식을 잘 하고 왔다. 귀족들이 플란츠와 에반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눈에 보이니 이보다 흡족할 일이 또 있을까.

아무 말 없이 저벅 저벅 걸어간 플란츠는 에반을 보지도 않고 자리로 들어섰다.

'제 놈을 잘 써먹는 것에 대한 항의라도 하는건가.'

하지만 어떠하랴.

귀족들은 이미 그따위 것에는 시선조차 두고 있지 않으니.

그런 플란츠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앉아 있는 란델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왕궁에 그레이 브리센으로 추정되는 이가 란델을 만나고 갔다는 말을 간단히 전해들었던 것이 조금 신경쓰였으나 저택에 돌아가 자세한 일을 파악해보면 될 터였다.

그런저런 생각의 결과로 일단은 흡족한 마음을 접지 않고 있을 때.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 드십니다."

드디어 놈이 왔다.

자리에서 어기적 일어나 적당히 예를 보이던 에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플란츠가 들어올 때는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놈이 또 무슨 짓을 했기에······?'

짧은 시간 든 의문을 버리고 고개를 들어올린 에반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보석을 뿌렸는지 끊임없이 빛나는 선홍색의 망토. 살구색의 재킷과 하얀 바지. 그리고.

손목과 목에 가득한 진주색의 프릴.

욕심껏 멋을 부렸다 비웃지 못했다.

장식이 과하다 욕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에반마저도.

"반갑습니다."

새하얀 드레스 위에 덧입은 살구색의 겹드레스.

층층이 나풀거리던 진주색의 프릴 장식. 다른 색의 섞임 없이 오로지 붉은 계열의 온갖 보석으로 만들어졌던 아름다운 티아라. 그 티아라가 감싸고 있던 선연한 선홍빛의 머리카락.

칼리안은 일부러 피해왔으나 귀족들은 그렇지 않았던,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아르피아 궁에 걸려있던 초상화 속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을 이는 지금 이 곳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프레이야······!'

하마터면 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낼 뻔했다.

제 어미와 꼭 닮은 얼굴을 한 채, 제 어미가 궁에 들었던 그 날에 그려진 초상화를 그대로 옮겨담은 듯한 의복을 입고 나타난 대담하기 짝이 없는 왕자 때문에.

플란츠의 장신구나 브리센의 위상 같은 것은 귀족들의 머릿속에서 이미 모두 잊혔으리라. 에반 역시 아연해졌으니.

무시하지 못할 발자국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선홍빛의 반짝이는 망토는 프레이야의 머리카락 같기도. 혹은 오래전의 그 언젠가에 흘러내린 프레이야의 선혈 같기도 하다.

유난히 느린 걸음으로 발을 옮기며 그렇게.

자신이 누구의 아들이었는지를 다시 알리고 있었다.

- 내 어머니를 내가 기억하는 한. 브리센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무언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천천히 걸어온 칼리안의 시선 역시 에반을 향하지 않았다. 그저 정혼자 드미레아의 앞을 지날 때에만 가벼운 눈인사를 보냈을 뿐. 그 후에는 자리에 앉아있던 란델과 아직 선 채였던 플란츠의 사이로 가서야 발을 멈췄다.

그렇게 둘의 사이에서 자연스레 몇 마디 말을 나누는가 싶던 그 때.

'······!'

사나우리만치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귀족들 중에서는 홀로 그것을 느낀 에반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 쩌엉!

곧바로 날이 잔뜩 선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침묵을 가르는 소리. 유리잔보다 강한 무언가가 조각나는 날카로운 소리.

정확히는 단단한 보석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

그러니까 꼭, 에메랄드 같은 것.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린 것이 언뜻 보인다. 플란츠와 마주보고 선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에메랄드 위에 가져갔던 가느다란 손가락 끝을 거둔 칼리안이 그제야 에반을 봤다. 핏빛 눈을 둥글려 생긋, 예쁜 웃음을 짓더니 붉은 입을 열었다.

"······ 이런."

- 툭.

조각난 에메랄드가, 황금빛 깃털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그것을 여미던 장식이 사라졌음에 스르륵 흘러내리려는 하얀 망토를 칼리안이 살짝 잡았다. 그 웃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살펴보려 하였는데 제가 그만 형님께 큰 결례를 끼쳤습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을 하고 계시기에.

몇 마디 말을 감추고 이야기한 칼리안이 자신의 재킷에 달려있던 장신구를 풀어냈다. 시종이 와서 도우려는 것을 막은 채로.

찰칵, 하고 브로치 채워지는 소리가 에반의 귓가를 울렸다.

"급한대로 제 것이라도 하고 계십시오. 나중에 따로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보는 눈을 의식한 듯 그것을 제지하지 않은 플란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플란츠의 망토 위에 자리하게 된 새로운 브로치를 본 에반은 말을 잃었다.

'고양이?'

아무 의미 없을 검은색의 고양이.

칼리안 자신을 조금 닮았다는 것 외의 다른 뜻은 아무것도 없었겠으나 이제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거대한 의미를 가지게 될, 루비 눈을 가진 검은 색 고양이를 선물했다.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에반의 앞에서.

"그래도 다행히······ 잘 어울리시네요. 형님."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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