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장.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3)
모순.
하나의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스파니안이, 때문에 칼리안의 아픈 속은 온전히 이해해주었던 시스파니안이, 잊히지 않는 것을 서러워하는 자신은 잊힌 것을 서러워하는 일을 이해하기 어려우니 조금만 억울하다 여기라 말했던 이유.
모순. 시스파니안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그러나 칼리안은 이해하고 있는 것.
"괜찮으세요?"
제 동생이 무엇을 확인하러 나를 찾았을지, 얀은 알까.
왕자와 소공작의 말을 끊어내기 위해 공작의 첫째 아들로 찾아와 제 동생을 끌고가선 무슨 말을 더 나눴을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왜 여전히 나에 대해 모르고 있을까.
"아니."
복잡한 생각을 다시 이어나가는 대신,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 안 괜찮아."
드미레아가 돌아간 뒤 칼리안을 찾아와 안색을 살피던 얀의 얼굴이 꼭 데운 우유마냥 하얗게 질렸다.
괜찮다 말하면 안 믿더니 안 괜찮다는 말은 단박에 믿는 것이 재밌어서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조금 커졌다.
"레아가 무슨 말 했어요? 무례하게 굴었어요?"
"그건 아니야. 걱정하지 마."
이렇게 일축한 칼리안이 잠시 얀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또, 시로이안이 됐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을 혼낼 수 있을 사람'이 필요해서 시로이안이 됐다.
"그럼 아까는 왜······."
하마터면 아까는 왜 시로이안이 되었었느냐 물어볼 뻔한 칼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드미레아와 나의 말을 끊어내기 위해 시로이안이 된 것은 맞을까. 아니면 시로이안이 된 김에 말을 끊으러 왔을까. 다시 드는 의문을 접은 채 그냥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른 말을 꺼냈다.
"안 괜찮은 건 다른 이유니까 드미레아 탓하지 마."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안 괜찮으세요."
여전히 시로이안이라서, 칼리안이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은 먼저 묻지 않는 얀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을 느꼈으나 칼리안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괜히 피곤해져서 그래. 잠을 못 자서 그런가봐."
"그것 보세요. 쉬시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오후 일정 비울테니 들어가면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쉬세요."
다시, 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 얀.
얀의 일을 묻지 않던 칼리안이 자신의 일을 의심치 않는 얀을 보다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 진짜 재밌는 것 같아."
"제가요? 저 재밌어요?"
"응. 재밌어."
"다행이네요."
뭐가 재밌다는 것인지는 궁금해하지도 않고 좋아하는 얀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재밌다는 말에 너처럼 무턱대고 좋아하는 사람 없을걸."
"왕자님 힘드신데 저라도 재밌다 생각해주시면 좋은거지, 이유가 필요한가요."
슬레이만이 지그프리드령에 있는 멍멍이에게 왜 얀이라는 이름을 지어놨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개한테 자식 애칭을 이름으로 붙인 건 너무했다 싶지만, 새로 지은 궁에 그 궁에서 살아야 할 날이 창창한 아들 이름을 떡하니 붙인 하츠아라를 떠올리니 묘하게 이해가 된다.
하츠아라와 초대 지그프리드 공작인 퀴트로스는 절친한 사이라 하였으니 말이다. 자고로 친구는 서로 닮는다 하지 않던가.
'카밀론에 가면 개 이름을 슬레이만이라 지어 버릴까.'
얀의 일을 되갚아 줄 요량으로 시스파니안이 들으면 쟤 또 이성 없는 소리 한다 혀를 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이 민트차에 든 얼음 같은 웃음 소리를 냈다.
"그래, 오늘은 쉴래. 생각이 너무 많네. 나 우유 한 잔만 데워다 줘."
자칫 영원히 하지 못할 뻔 했던 말을 건넨 칼리안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꿀 넣어 드릴까요?"
"아니. 단 것 말고 그냥 우유면 돼."
"네.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그리고 말씀 나누시는 동안 기사 베른 경이 찾아왔어요. 왕자님 방에서 기다리라고 전해뒀는데 나중에 다시 오라고 얘기할게요."
"이 시간에 키리에가 왔어?"
좀처럼 이런 시간에 찾아올 일 없는 키리에가 아니던가. 때문에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먼저 가서 얘기하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
"알겠습니다."
키리에와의 대화가 칼리안에게 또 다른 피로가 될 리 없음을 알아서, 얀은 얌전히 대답한 뒤 칼리안과 헤어졌다.
짧은 시간에 휘몰아치듯 머릿속을 헤집은 생각들이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괜스레 열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에 잠시 이마를 짚은 칼리안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소파 앞에 서 있는 물색 머리 큰 키의 키리에가 예를 올린 뒤 곧장 말을 걸어왔다.
"소공작에게 왜 다른 말씀 없이 고맙다 하셨습니까."
"무슨 일로 왔는지를 먼저 말해야지. 키리에."
대련 중 키리에의 목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과 결례를 눈감아주는 것은 달랐다. 때문에 칼리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키리에를 혼냈다.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는 칼리안의 지적에, 키리에가 고개 숙여 사과의 뜻을 보였다.
"죄송합니다. 이것 때문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렇게 말한 키리에가 손목의 팔찌를 꺼내보였다. 자신이 직접 앨런에게 부탁한 일이었던 탓에, 그것을 몰라보지 않은 칼리안이 반겨하며 물었다.
"선물, 마음에 든대?"
"네. 좋아합니다. 히나에게는 업무가 끝나면 찾아뵙고 왕자님께 직접 인사드리도록 말해 두었습니다. 그보다······."
생소한 방법이었지만 히나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안 키리에는 히나를 보내고 눈가를 슥슥 닦은 뒤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칼리안을 찾았다.
그리고 들었다.
"차라리 소공작에게 설명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래서 물었다.
차라리 설명을 하지 드미레아의 다그침을 왜 듣고만 있었는지, 라고.
"무엇을?"
정말 몰라서 묻는다는 듯한 칼리안을 보며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그것을 설명했다면 소공작은 이해를 했을 겁니다. 굳이 그렇게 묻어두겠다는 말로 왕자님께······."
"왜 내가 이해를 받아야 해?"
키리에가 말문 막힌 표정을 지었다. 칼리안이 웃는 얼굴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설명하고 이해받아야 할 잘못을 드미레아에게 저지른 기억이 나는 없는데. 키리에."
얀이 그랬다.
미안하다는 말 줄이라고.
싫다고 답했지만 쓸데 없이 미안하단 말 남발하고 다니겠다 대답하지도 않았다.
"드미레아는 얀이 더 중요해서 그런 말을 했고. 나는 내가 더 중요해서 그런 말을 들었어."
무슨 말인지 이해 못했다는 눈이 된 키리에를 보며 칼리안이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드미레아는 내가 가진 이유보다 얀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고 나는 내가 가진 이유가 더 중요한 사람이야. 이유가 뭐가 됐든 얀에게 있어 전부였던 사람 몸을 꿰찬 것은 나고 그 사실을 숨기고 있던 건 나야. 얀이 그런 사실을 알고 제대로 이겨낼 기회도 없이 내 멋대로. 나에 대해 보고 싶은 것만 봐도 된다는 말로 눈을 가려가면서."
"하지만 그건 공자님을 위해 하신 선택이지 않습니까."
"알다시피 얀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야. 좋게 포장하면 얀을 위한다 하겠지만 그것도 결국 나를 위해서야. 드미레아는 그걸 알아서 드미레아 자신이 아니라 얀에게 빚진 마음을 가지라 상기시켜 줬을 뿐이야. 서로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른데 드미레아가 왜 나를 제대로 알아주고 이해해줘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어."
"협박 당하신 건 기억 안나십니까."
"아······ 그랬지. 그러니 내 정혼자께서는 얼마나 생각이 깊으신건지."
비아냥이 아닌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소파로 가 앉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드미레아였다면 난 물어보러 와서 경고하는 대신 얀을 다시 지그프리드령에 데려다놓고 다시 찾아와 내 혈육 속여온 이상한 놈을 그냥 죽여버렸을걸. 무슨 꿍꿍이로 어떤 방법으로 이 몸을 차지한 줄도 모르고 놈이 말하는 게 진실일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굳이 설명을 듣나. 죽여버리고 말지."
"모순됩니다."
스스로가 당한 것에는 오지랖 넓은 이해심을 가졌으면서, 드미레아의 이해는 필요 없다니. 모순이 아닌가.
키리에의 얼굴에 혼란함이 나타났다. 모순을 이해하지 못한 시스파니안처럼.
"······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 억울하다 여기라는 말로 들리잖아. 너까지 그러지는 마."
칼리안이 웃었다. 그런 시스파니안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다 이해 안하고 여기저기 억울한 것만 늘어나면 내 생은 뭐가 돼. 다 끌어안고 끙끙대도 난 숨 쉬고 사는 게 더 좋아. 내가 잃었던 것들을 지킬 수 있다잖아. 히나처럼."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키리에의 팔찌를 보며 부드러운 얼굴을 했다. 동생의 목소리가 담긴 것. 키리에는 분명 많이 좋아했으리라. 물론 칼리안 역시.
"그래서 세렌티한테만, 조금만 억울해 할 거야. 그러니 좀 아프게 사는 미친 사람 취급은 하더라도 억울할 것 하나 없는 일에까지 억울해하는 불쌍한 사람으로는 만들지 마. 키리에."
섣부른 말을 해 죄송하다는 대답 대신, 키리에는 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서도 미안하게 여기길 바라지 않을 것임을 이제 알아서였다.
칼리안이 웃었다. 큰 걱정을 씻어낸 사람처럼.
"비밀은 더 이상 들키지 않을 거야.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버려서 좀 늦었나 싶긴 한데, 한 번 데이고 나니 정신이 차려지네."
다행이라는 듯, 다짐을 담아 말했다.
"너무 많이 억울해 했었나보다. 내가."
세렌티.
한 번의 생을 당신에게 통째로 빼앗겼으니.
두 번째 생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리라고.
여전히 나는 지킬 것이 많으니, 전부 다 지켜내리라고.
얀도, 히나도, 키리에도, 란델 심장도, 살라고 했더니 짜증만 내는 완두콩도, 그저 고맙고 미안한 체이스도. 옛 칼리안의 몸도, 베른의 영혼도.
그리고 그 많은 약속들도.
그렇게 나도.
"조금만 억울해하면서 살아야지. 그래야 나중에 세렌티 만나 화풀이 할 힘도 남지."
칼리안이 기지개를 켜듯 일어나 침실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서는 키리에를 보며 말했다.
"할 일 없으면 잠깐 지켜. 아무도 못 깨우게. 푹 잘래."
특히 이제 좀 많이 파릇파릇해진 삶은 완두콩이 뱅글뱅글 찾아와서 오랜만의 단잠마저 방해하지 않도록.
딱 그런 뜻이었으므로, 키리에는 아주 잘 알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은, 곧 돌아온 소중한 새끼 코끼리가 가져다 준 데운 우유를 잘 마셨다.
"푹 주무세요. 다른 고민 마시고요."
"그래. 고마워."
따뜻했고, 부드러웠고, 졸음이 왔다.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었다.
* * *
그리 성대하지는 않았다.
광장에 수정판을 세우지도 않았고 수도 치안대와 왕실 병력을 밖으로 보내 감시하지도 않았다. 광장에 단상을 설치하지도 않았다.
마치 프레이야를 궁에 들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추숭식 역시 절차를 간소화하여 왕궁 내에서 진행했다.
- 실리케의 일이 있고 아직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떠들썩하게 치뤄봐야 좋을 것이 없습니다.
칼리안의 이런 의견 때문이었다.
사실은 하루라도 빨리 추숭식을 치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소리였다. 준비할 것이 많아지면 그만큼 식이 거행되는 날짜가 멀어질 테니까.
그 말을 들어주는 대신 르메인은, 귀족들의 입장은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았다. 그리고 식이 거행되는 장소를 지그프리드 관으로 정했다.
"연회가 아닌 공식 행사는 세뉴 관에서 하는데 이번에는 지그프리드 관에서 하는 게 특이하네요."
"전하께서 요즘 생각을 많이 하시나봐."
지그프리드와 칼리안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것에 있어 그만한 장소가 또 있을까.
때문에 전하께서 요즘 생각을 하긴 하시나봐, 라는 말을 애써 접은 뒤 아주 좋은 말로 포장하는 것에 간신히 성공한 칼리안이 거울을 쳐다봤다.
'······ 칼리안.'
프레이야의 추숭식을 앞둔 까닭인지.
첫 꿈을 꾸었던 날, 꿈 속에 든 뒤에야 간신히 만날 수 있던 아이가 생각났다.
잘 먹고 쑥쑥 자란 덕에 이제는 꿈 속에서 보았던 날과 많이 달라진 얼굴을 한참 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예전에는 거울을 싫어했는데."
문득 이렇게 나온 말에 얀이 놀라며 대답했다.
"어쩐 일로 그때의 일을 말씀하시네요."
"그러게. 요즘엔 가끔 하게 되네. 생각해보니 스승님께도 옛날 얘기를 해드렸었고. 내 형님 대신 내가 철이 들었나."
하고 슬쩍 웃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와 닮은 것이 싫어서 싫어했던 건지 아니면 이유가 있어 싫어했던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이제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말에 얀이 잠시 침중한 얼굴을 했다.
프레이야의 초상화는 얀 역시 봤다. 기억의 전당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르피아 궁에 복제해 둔 초상화들은 궁을 찾은 누구나가 다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얀도 칼리안이 프레이야를 얼마나 닮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나에 대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다 이해하고 있어.
"······ 뭐였든지. 이제는 걱정할 것 없으니까."
혼잣말인듯 아닌듯 작게 읊조린 칼리안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 번 더 말을 건넸다.
'축하해. 늦었지만 이제라도 핏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그리고······.'
그 아이 역시 분명히 좋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옛 칼리안을 떠올리는 칼리안을 메를린의 목소리가 불러냈다.
"준비 끝났습니다, 왕자님. 오늘도 잘 어울리십니다."
칼리안의 주문을 받은 의상담당자 섀틴이 온 힘을 다해 만든 옷과 장신구. 그렇게나 염원하던 것을 비로소 보게 되었음에, 메를린은 꽤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거울을 한 번 더 살펴보는 동안 얀이 마지막 점검을 했다.
지금쯤이면 란델이 그레이 브리센과 아무 의미 없는 만남을 마치고 지그프리드 관에 들었을 것이다. 다른 귀족들도 모두 마찬가지. 지난 번과 같이 뒤늦게 입장해 손해를 보기 싫을 에반 브리센도 서둘러 안으로 들었을 터다.
"이제 나도 가 볼까."
언제나와 같이 몸에 꼭 맞는 재킷. 하지만 평소의 자수나 단추 대신 생소한 장식이 달린 예복이, 살구 색의 재킷과 하얀 바지보다 더 어색했다.
그리고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
"다 뒤집으러."
내 상황도, 그리고 에반의 속도.
씩 웃으며 말한 칼리안이 한 번 더 거울을 살폈다.
그리고는 눈을 맞춰 오는 붉은 눈을 향해 조금 전 마치지 못한 말을 다시 전했다.
'고마워.'
칼리안이 시선을 옮겼다.
'이해. 해줘서.'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발이 움직였다.
붉은 보석가루를 가득 붙여 끊임없이 반짝이는 선홍색의 긴 망토가 너울거리며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