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장.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2)
모순.
사람이라는 게 대체 얼마나 이기적으로 모순된 존재인지 시스파니안은 알고 계실까. 세렌티는.
세렌티는 그것을 알까.
"저와 달리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아이라서 함께 있었으면 한다고,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을 하며 왕궁으로 갔습니다. 그 뒤로 왕궁에서 오는 편지에는 온통 왕자님 걱정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자님께서 한 순간에 사람이 바뀐 것 같다는 소문이 지그프리드령까지 닿았습니다. 검의 길에 올랐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재능인 줄로 알았습니다."
"드미레아."
"왕실의 일이니까, 아무리 오라버니가 곁에 있었다 해도 어떻게든 눈을 속이고 검을 다루고 숨겨왔겠지. 왕실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살아남아야 하니까, 하고. 저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넘겼습니다."
그래. 숨겼다. 숨기려 했다.
지금의 나는 옛 칼리안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다들 알아주었으면 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았으면 했다. 제발 좀, 알아주었으면 했다.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더 이상 데블란의 아들이 아니며 이제는 르메인의 아들일 수도 없는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음을 왜 굳이 일부러 깨우쳐가며 깨달아야 하는지. 그것이 왜 당연한 일이 아니고, 나는 앨런 마나실의 아들임이 당연한 사실이기에 그저 평소에는 잊고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내가 당신의 아들임을 입에 담아 확인하고 서로 상기시켜가며 기뻐해야 하는지.
나는 왜 누군가로부터 확인 받듯 혹은 허락 받듯 굳이 그렇게 이름이 불리고 누군가의 혈육임을 증명해 줄 우습지도 않을 호칭으로 순간 순간을 확인받지 않으면 어느새 숨이 막히는지.
"1년 뒤에 검의 길에 오를 정도로 계속해서 검을 써왔다면 아무리 독에 당해도 검 한 자루 못 들 만큼 근육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로 망가지기 전에 심장이 멎을 겁니다."
마음을 다잡다가도 치밀어 오르고, 덮었다가도 고개를 들고, 감추었다가도 폭발하는 그런 것들을 차마 다스리지 못해서. 시스파니안의 관심과 이해와 위로를 받아 다시 한 번 걸음을 옮기는 끔찍하게 감사한 기분을 차마 다스리지 못해서.
나는 사실 그 아이가 아니고, 그러나 더 이상은 베른도 아닌, 둘 모두가 될 수 없는 나는. 하지만.
아들을 두 번 잃지는 않도록 하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아프면 이야기하고 치료를 받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다시는 기억에서 없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을 받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울적한 어느 날에 반성 가득한 편지 한 장을 읽어 보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언젠가 그 작은 바닷가에 찾아가서 함께 술 한잔을 하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이제는 나도 좋은 꿈을 꾸어 보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시간이 흘러 누구의 키가 더 큰지 재어 보자 약속을 하여서.
그렇게 너 대신 내가 감히 잘 살겠노라 약속을 하여서.
그래서 차마 포기하지도 못하는 나는.
흘리듯 버리듯 건네진 빨간 만화경을 보며 똑같이 반짝거리던 그 아이이면서 은색의 달빛이 내리던 바다에서 들은 고래 울음 소리에 똑같이 울던 베른이기도 한 나는.
"말도 안 되지만, 정신 나간 소리 같지만. 정말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였기도 했고 베른이었기도 한 나는.
결국 그 아이도 아니고 베른도 아닌 나는.
그냥, 칼리안.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제발 좀,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아무도 몰라주었으면 했다.
세렌티는.
세렌티께서는.
그 모순을 알까. 아실까.
"내가."
비밀을 지켜야 함을 알면서도 굳이 다 까발리듯 꺼내놓으면서 그래도 몰라주기를 바라는 말도 안되게 이기적인 모순을, 차라리 비밀 말하는 내 입을 틀어막지 왜 지워진 이름을 틀어막는지, 그 높은 뜻을 차마 가늠도 못할 빌어먹을 세렌티께서는 알고 계실까.
"설명······ 해줄게. 전부 다."
"네. 말씀해주십시오."
포기하듯 체념하듯 대답을 했다.
단 한 번도 얀에 대해 불안해하고 걱정한 적 없었다. 하지만 몰랐으면 했다. 모르게 하려 했다. 얀은 몰랐으면 했다.
기억을 하든 못하든, 같은 사람이든 아니든, 내 형제든 아니든. 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 하나만은 복수를 하겠노라 원망하는 마음으로 생을 앗아도 될 사람임을 알면서도, 이미 죽은 얼굴로 살겠다 말하던 놈이 언젠가 그 어느날에는 필요해질지 모르니 나도 굳이 살려두겠노라 살리겠노라 미친놈처럼 발악을 하고. 더는 있지도 않은 아이를 대신해 용서해주지 못할 미안하다는 말을 애써 못들은 척 하려 내 속을 깎아내고. 그렇게 매일을 살면서도. 결국 그렇게 꾸역꾸역 살면서도 그냥.
"자리 옮기자. 보는 눈이 많네."
데운 우유 가져다주겠다는 말에 졸음이 와서.
그래서 몰랐으면 했다.
- 저벅.
그런데.
"······ 레아."
얀이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는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대화에 끼어들더니 드미레아를 먼저 불렀다.
그러니 그는 얀이 아니라 시로이안이었다.
* * *
작은 상자였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옅은 분홍색의 실크로 감싸인 상자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아르센이 마법사와 기사들의 연계 훈련 감독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여전히 주저하다 점점 커지는 노크 소리가 지나간 뒤 히나가 들어왔다.
- 연습, 도와주실 수, 있어요?
그리고는 이틀치 업무를 하루에 처리하느라 정신 없는 플란츠를 앞에 앉혀 둔 채로, 설탕에 재운 딸기가 가득 들어간 우유 두 잔을 앞에 내려놓더니 정작 본론은 꺼내지도 않고 이렇게 물어왔다.
"있어."
그래서 플란츠도 무슨 연습을 얼마나 도와줘야 하는지 묻지 않고 대답했다.
- 고맙습니다.
입을 열어 말하는 고마움이나 미안함은 거절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손으로 만들어 보이는 것은 항상 막지를 못했다. 하지 말라 말을 하려면 늘상 손이 먼저 움직이고 있어서, 그 손에서 눈을 떼면 안 돼서 막지 못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상자의 색을 꼭 닮기도 했고 루시 발바닥이나 혹은 히나가 올려 둔 딸기우유 같기도 한 옅은 분홍색의 작은 보석이 박힌 동그란 귀걸이가 한 쌍, 그리고 같은 색 보석이 있는 것을 빼면 세크리티아의 어느 놈이 가지고 있을 것과 똑같이 생긴 얇은 은색 팔찌가 한 개 들어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면 급할 때 쓰지 못할텐데."
플란츠의 말에 히나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 어떻게, 아셨어요?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플란츠의 똑똑한 머리와 빠른 눈치를 그리 많이 겪어보지는 못했던 탓에, 내용물을 보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와 왜 그것을 받아왔는지를 이미 다 안다는 듯 입에 올리는 반응 때문이었다.
"어쩌다보니."
이렇게만 답하는 플란츠를 보며 생긋 웃은 히나가 말했다.
- 리, 베, 른, 국왕님이, 보내주신 마석을, 가공한 것이라서. 마법, 쓰지 못해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이를테면 욕조의 물 온도나 체르밀 궁의 실내 온도를 알아서 조절해주거나, 체르밀 궁에 들고 나는 물건을 각 층으로 옮겨주는 이동 마법진을 구동시키거나, 또는 창문을 잠그는 마법을 알아서 활성화하게 해주는 것과 같은 마석이라는 소리다. 아마 저 분홍빛 보석이 마석이라는 이야기일 터였다.
잘 발견되지도 않는 몬스터를 잡아 힘들게 얻어냈을 손가락 두 마디 만한 상급의 마석을, 저 귀걸이와 팔찌에 맞게 바꾸느라 굳이 깨뜨렸다는 것은 히나도 몰랐고 플란츠나 칼리안도 몰랐다. 돈을 주고도 마음껏 구하지 못할 마석을 매우 아까워하면서도 칼리안의 부탁이기에 두 번의 고민 없이 부순 앨런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 자상한, 왕자님께서, 어떤 일을, 해결하실 때까지. 엉뚱한 부군단장 님이랑, 오빠가, 저를 따라다녀 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급한 일이 생기면, 저는, 소리를 못 내니까. 그래서, 주셨어요. 팔찌는, 오빠 꺼래요.
칼리안은 이것을 위해 전날 아르피아 궁에 들렀었다.
덕분에 에우리아의 조사 결과를 전해듣고 머리 아파 하기는 했으나 본래 앨런에게 부탁하려던 것이었다.
마력을 쓰지 못해도 통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없을지, 있다면 혹시 구해 볼 수 있을지, 그것을 물으려고.
왕궁 안에서 체이스의 연락도 받고 있으니 히나의 것 하나를 더 늘린다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리베른에서 그것이 가능하도록 도와 줄 물건이 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선물이었다.
"······ 아."
마석을 생각 못했다.
혹시 사람의 사고방식을 벗어난지 이미 오래되신 것 같은 동생놈이 마석으로 고양이 털 떼는 것을 만들어주면서 마법 안 가르쳐 주겠다 멍멍거리면 뭐라고 하면서 싫다고 하지.
이런 쓸데 없는 생각으로 좋은 머리 잘 낭비하고 있는 플란츠를 향해 히나가 다시 말했다.
- 오빠한테, 제일 먼저, 그리고 좋은, 왕자님한테도,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해 본 적이, 없어서. 혹시 제가, 말을, 잘 못하면, 오빠가, 속상해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오늘은, 어른스러운, 동생도 안 와서, 생각나는 사람이, 좋은, 왕자님 밖에, 없었어요.
"그래."
처음으로 '말'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시라도 데블란이 또 다른 정신 나간 짓을 벌일까 걱정되어 준 것이지만 어쨌거나 히나에게는 태어나 처음으로 소리를 내게 해 줄 물건이었다.
연습 상대로 제격일지 최악일지 모를 과묵한 왕자를 찾아온 히나가 상자 안에서 팔찌를 꺼내 건넨 뒤 귀걸이를 했다.
동생놈의 미련한 옛 형제 덕에 대충이나마 반지 쓰는 법을 익혔던 플란츠가 익숙한 듯 팔찌를 받아 손목에 끼웠다. 그리고 귀걸이를 차는 동안 앞에 놓인 딸기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곤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뒤, 플란츠는 히나를 보며 가볍게 고갯짓을 해보이려다 입을 열었다.
"말해. 들을테니까."
보겠다는 말이 아닌 듣겠다는 말에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인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한동안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생소할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할 것 같기도 한 목소리 대신 품에 안겨온 루시의 고롱고롱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햇살 내리쬐는 창가에서, 따뜻한 고양이를 무릎 위에 올려 둔 플란츠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바빠도 여유는 가질 수 있었고 손을 보고 있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또 한동안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플란츠는 말 없이 기다렸다.
- 안녕하세요.
한참이 다시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 저는, 히나입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지 않아서 띄엄띄엄. 마치 노크 소리같이 아직까지도 많은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그리고 작고 작은.
히나 목소리.
아주 작은 그 목소리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 필요가 없던 플란츠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살짝 웃었다.
- ······ 듣기 좋네.
몸을 둥글게 만 루시가 다시 한 번 고롱고롱 소리를 냈다. 햇살 내리쬐는 창가에서 조용한 시간이 한동안 흘러갔다.
* * *
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노을 빛으로 물들 준비를 하는 덤불이 심겨진 호수에 부는 바람이 선선해졌음을 느낀다.
얀이 찾아왔고 드미레아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듣지 못한 채로 칼리안은 호숫가 바위 위에 앉아 부는 바람에 물결이 이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슷한 날씨였던 것 같은데. 그 때는 봄이었나.'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이었으니 아마 그랬을 것이다. 르메인을 처음으로 독대하고 나왔을 그 날에도 호숫가에 바람이 불었다. 그것이 문득 기억났다.
그날 얀은, 르메인을 만나 속이 시끄러울 테니 바람을 쐬고 오라고 말했었다. 그 말을 듣고 산책에 나섰다가 속을 앓은 란델이 장미 손질하는 것을 봤다. 그리고 그 날, 술에 절인 완두콩도 봤다. 아니. 술은 마시지 않았다 했으니 술 냄새에 절은 완두콩이라 해야 하나.
그 란델과 그 플란츠와 이렇게 지내게 될 줄을 그날에는 몰랐었다. 그랬으니 그 얀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게 될 줄도 그날에는 몰랐었다.
바람이 부니 호숫가 물이 일렁거려서, 그 속에 빠질 듯이 기억에 잠겨들었다.
내가 그날 얀에게 가족들에 대해 물었었지. 아직 그 때의 얀이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몰랐던 터라 얀도 얼버무리듯이 대답을 했었고.
'궁금해 해 볼 걸.'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궁금해 해 볼 걸 그랬다.
과거의 전쟁 때 공작 슬레이만이 직접 참전했으나 소공작 드미레아는 참전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궁금해 해 볼 걸 그랬다. 지그프리드의 장자 시로이안 역시, 참전하지 않았다. 지금의 얀을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 이유를 궁금해 해 볼 걸 그랬다.
3왕자가 짧은 생을 마감한 뒤 전쟁이 났던 그 날까지 10년이 지나는 동안 3왕자의 시종이었던 이가 무엇을 했을지. 괜찮았는지. 살아는 있었는지. 궁금해 해 볼 걸 그랬다. 알아볼 걸 그랬다.
"어찌 그 하나를 몰랐을까."
그 많은 새들을 부렸으면서.
그것이 문득 후회가 되어 말 없이 호수 위의 잔물결을 보고 있었다.
- 그런 일을 또 겪지는 않게 해주세요.
죽었다는 얀의 형에 대해 제대로 물어볼 걸 그랬다. 제대로 물어보고 이야기를 다 들어줄 걸 그랬다.
"어찌 이렇게 세심하질 못할까."
과거의 잘못과 지금의 잘못이 다 섞인 혼돈의 가운데에 빠져있을 때 쯤.
자박 자박, 하고 드미레아의 발소리가 들렸다. 습관처럼 뒷꿈치를 들고 걷는 얀의 소리와는 차이가 났다.
"드미레아."
무슨 말을 그리 했는지 묻는 대신 또 한 번 드미레아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얘기를 다 전해주고 그래도 비밀을 지켜달라 부탁할 참이었다. 죽은 형 대신 나를 보고 있는 새끼 코끼리 생각해서, 때가 되면 직접 이야기를 하겠으니 비밀을 지켜달라 부탁를 하려 했다.
"왕자님 피곤하시니 그냥 가라고 성화입니다."
그런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시로이안으로 찾아와 드미레아를 억지로 데려가서는 다시 얀이 되어 이야기를 했단다.
"······ 아."
웃음이 났다.
"많이 피곤한지 쉬고 싶어 하시는 것 같으니, 곤란하고 어려워 하시는 것 같으니, 무슨 말을 하러 왔든 오늘은 얘기하지 말고 그냥 가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저는."
앉아있는 칼리안 곁에 그냥 선 채로, 칼리안의 입에 시선을 두지 않고 붉은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는 채로, 드미레아가 말을 이었다.
"저는, 지그프리드의 드미레아입니다. 제 자신 하나보다 가문의 신념이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문의 신념보다 제 오라버니 한 명이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지그프리드의 드미레아.
그런 드미레아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너무나 잘 안다고 대답하는 대신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묻지 않고 돌아가겠습니다. 무엇을 숨기셨는지 모르는 척 완전히 잊을테니, 왕자님께서는 묻어두십시오. 죽을 때까지 묻어두십시오. 오라버니께 빚진 듯이 평생 묻어두십시오."
하.
"들키면 내 손으로 당신 정말 죽여버릴 거니까."
그렇게 말한 드미레아가 묵묵한 시선으로 칼리안을 여전히 내려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정혼자님."
웃음이 났다.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지운 동갑내기 정혼자가 정말 무서워서.
"그래. 약속할게."
오늘은 괜스레 피곤하여 아무래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으니 데운 우유 한 잔만 가져다 달라 말해야 되겠다는 생각, 할 수 있어서.
"고마워. 정혼자님."
그것이 너무 고마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