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장. 감당 못 할 텐데(4)
히나가 또 화났다.
그것도 조금 많이 화가 났다.
- 제가, 치료해드린 분들, 거의 다, 자상한 왕자님한테, 다쳐서 온, 사람들이에요.
물론 그들 중에 정작 제일 심하게 다쳤던 것은 칼리안과 플란츠였지만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던 상황이었으니 셈에 넣지 않았다.
하지만 불필요한 상처를 치료하느라 피곤해지지는 않을까 항상 걱정만 되는 우리 히나 귀찮게 일부러 다쳐 오는 놈 눈에 띄기만 하면 치료 받을 꿈도 못 꾸게 영영 재워 버릴 줄 알라던 칼리안이 사실 알고보면 제일 앞장서가면서 환자를 만들어내고 있지 않나.
그랬으니 화가 날 수 밖에.
- 자상한, 왕자님과, 대련만 하면, 다들, 목을 다쳐서 와요. 다른 마법사 분들도 그렇고, 엉뚱한 부군단장님도, 특히, 좋은 왕자님이요.
멀쩡한 사람들을 괜히 다치게 만드는 것이 속이 상해서, 드미레아의 상처를 깨끗이 다 치료해 놓은 히나가 이렇게 말을 했다.
- 꼭, 일부러 그러시는, 것처럼요. 제일 많이, 상대해주고 계시는, 오빠는, 안 다치니까요.
가장 열심히 나서서 가르치고 대련해주고 있는 키리에의 몸에는 스치듯 생기는 생채기 하나 안 나게 조심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일부러 그러시는 것 맞습니다."
무려 그 히나가 화를 내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된 드미레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칼리안이 며칠동안 지그프리드령에 있을 때라 해서 달랐겠는가. 그 때부터도 이미 히나에게 치료 받은 환자가 속출했으니 드미레아 역시 칼리안의 매서운 손속을 잘 알았다.
"경고하시는 겁니다. 검이니까요. 방심하면 더 큰 일을 겪게 될 테니 항상 조심하라 알려주시는 겁니다."
- 저도, 그렇게 생각,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말한 히나가 꾹 다문 입에 힘을 주며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냈다. 그러더니 까맣고 큰 눈으로 드미레아를 쳐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자상한 왕자님이 그냥 화풀이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가끔 대련하는 척 화풀이를 하는 아주 나쁜 버릇이 하나 있다고. 그런 말을 꺼내 보아야 소득 없을 일임을 알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 소공작님 정도면, 굳이 이렇게 상처까지, 만들어가며, 가르칠 필요가, 없잖아요. 이 참에, 자상한 왕자님 보면, 제가 꼭, 혼내줄 거예요.
"더 나아지려면 기억해둬야 하는 상처도 분명 있습니다, 베른 경. 지난 번의 굳은살처럼 말입니다."
레몬 향을 내는 허브와 말린 사과가 들어간 차에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줄 평화로운 맛이 났다. 저택에 가서 마시려다 잊었던 차 한 잔을 선물 받게 된 기분도 평화로웠다.
"지그프리드령에 있을 때에는 이렇게 웃을 일이 잘 없었는데 사고 잘 치시는 3왕자님 덕에 저는 여러모로 즐겁습니다. 가르쳐주시는 것도 많고 이름값도 넉넉한 분이라 저는 불만 없습니다. 상처 정도는 신경쓰지 않으니 혼내지 마세요."
그 왕자가 잘 챙겨주고 있는 오빠 덕분에 마음의 그림자가 많이 사라진데다 그 왕자 덕분에 만들게 된 생각 깊은 또래 친구를 만나면 잠시나마 제 나이의 다른 평범한 이들과 같은 사람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드미레아를 보던 히나가 생긋 웃었다.
- 소공작님은, 저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많네요.
"그렇습니까."
모르기 때문에 해 줄 수 있는 걱정 대신 알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니 말이다.
- 그래도 나쁜 것은, 나쁜 거니까. 나중에 혹시, 다른 사람한테, 이유 없는 상처를 주시면, 그 때는 정말로, 혼을, 낼 거예요.
거기까지는 막을 이유 없는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언제나 차 향이 참 평화롭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히나의 말에 영 맞지 않는 대답을 한 뒤 조용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 * *
비가 그친 하늘이 맑았다.
드미레아의 생각처럼 평화로운 날이었다.
히나와 드미레아가 칼리안의 화풀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키리에는 플란츠에게 칼리안의 검술을 느리게 펼쳐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일찍 집으로 간 에우리아는 앨런이 보낸 보라색 케이크와 함께 마쥬리니를 마시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프레이야의 추숭 행사일에 입기 위해 칼리안이 특별히 주문한 의상을 완성한 의상담당자 섀틴은 옷과 장신구에 흠이 있는지를 꼼꼼히 살핀 뒤 별 탈이 없음을 확인하곤 늘어지듯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플란츠와 아르센이 함께 쓰는 집무실을 찾아간 레릭이 '우리 왕자님 오늘 못 오십니다' 하고 재빨리 나가버린 탓에, 동종업자의 갑작스런 휴가 소식을 통보받은 후 쌓이는 것이 과로인지 분노인지를 두고 아르센과 니들렌이 토론을 벌였다.
그렇게 모두들 평화롭기 그지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재밌네요."
그래서일까.
진한 민트 향이 올라오는 차가운 차를 한 모금 마신 칼리안이 웃었다. 빠짐 없이 싹 확인한 에우리아의 조사 결과를 다른 손에 든 채였다.
"부탁이나 하나 드리려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보여주시니."
톡, 톡, 톡.
손에 들린 유리잔을 몇 번 두드리던 칼리안을 향해 앨런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요즘 안그래도 신경 쓰이는 일이 많으실 터라 그 조사 결과를 곧바로 전해드리지 않으려 했지요. 그런데 엘프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가겠다 하시니 그 자료 먼저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전해드리는 겁니다."
"그렇게까지 막아주지는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확인되는 것들을 제가 다 알고 있어야 해야 할 일을 정하기에도 좋고, 또 머리 아픈 것은 전부 다 떠넘겨도 될 똑똑하신 분도 계셔서요."
"다행입니다. 신 귤을 잘 나눠가지려 하시는 것 같으니."
"네, 뭐. 그 똑똑하신 분 덕에 가끔 환장할 일이 생기는 것 빼고는 도움이 되기는 하니까요."
과연 가끔일지는 모르겠지만.
짤그랑 하는 얼음 소리가 듣기 좋았던 탓에 유리잔을 몇 번 흔들어가며 부러 소리를 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정작 조사를 했던 것은 텐실의 왕세자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세크리티아의 국왕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는 기분이 듭니다."
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는지.
내가 지내온 과거를 전부 알지도 못하고 죽었던 사람이 이제 와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눈에 거슬리는 일들을 벌이고 있는지.
"제가 '붉은 고니'임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은 하얀 수리가 제온의 일원이었죠. 세크리티아의 새들이 제가 들렀던 지그프리드령에서 저를 봤을 것도 같고. 체이스 왕세자께서 저를 도와주신 과정을 새들이 봤을 테고. 그 외에도 많은 새들이 제온에 속해 있었고."
"그러했지요. 다 죽어가던 카이리스 3왕자가 어느 날 갑자기 카스트린 경과 비슷한 검술을 쓰면서 새들의 암호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도 데블란이 알았을 겁니다."
"정작 전하께서는 모르시는 사실을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우습네요."
농담을 섞어가며 우스운 이야기라 말하고 있었으나 칼리안은 전혀 웃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물론 앨런의 얼굴에서도 웃음기를 찾기는 어려웠다.
톡, 톡, 톡.
유리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이번에는 서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으며 잠시 눈을 내리떴다.
"이번에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엘프들을 회유한 뒤에 그것을 빌미로 저를 불렀고. 엘프들은 시간의 축에 적힌 제온, 인간의 왕이라는 말로 저를 칭했고. 시간의 축에 적힌 문자는 제온의 일원들이 가진 조약돌에도 새겨져 있고, 조약돌과 연관 있을 것 같던 학자는 그 문자들을 벽에 붙여놓은 채 죽어 사라진 지 오래고······. 그렇다는 것은 시간의 축과 제온과 엘프들, 그리고 세크리티아의 국왕까지 서로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 보아야 한다는 말이 맞겠죠."
앨런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일단 세크리티아 국왕은 시간의 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니 제온을 통해 전해진 제 소식과 시간의 축을 연관짓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데블란의 호위기사였던 카스트린 경이 자신의 검술을 가르칠 만한 사람이면서, 체이스가 그렇게 챙기려 하는 카이리스 3왕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간의 축이 사라진 일과 그런 소식들을 섞어가며 가설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터이니."
내가 당신의 아들이었음을 눈치챘든.
당신과 가까웠을 또 다른 누군가로 착각을 하고 있든.
당신은 내 비밀에 대해 확신을 가졌다.
톡, 톡, 톡.
유리잔 대신 서류 위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제온과 연관 있을 엘프들은 세크리티아의 국왕과 접촉을 했는데, 제온에는 대사막 늑대들도 속해 있죠. 텐실의 왕세자는 그런 늑대들과 손을 잡았고요. 제온을 한 가운데 두고 많은 이들이 얽혀 있네요."
이 모든 것이 연결된 제온.
제온과 연관 있을 란델의 심장. 란델과 연관이 있을 텐실의 왕세자.
그가 보인 최근 행보가 포함 된 에우리아의 조사 결과.
"다릅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내용, 그리고 체이스 왕세자께서 알려주신 그의 '과거' 행적과 많이 달라요. 제온이 텐실의 왕세자를 과거와 다르게 움직이도록 하고 있는지, 반대로 텐실의 왕세자가 과거와 달리 행동하면서 제온을 움직이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지금껏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가운데에 텐실의 왕세자를 포함시켜 둬야 하는 것은 알겠네요."
톡, 톡, 톡.
종이를 두드리던 칼리안의 손이 비로소 소리 내기를 멈췄다.
"테일란 카스트린 경,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 공, 에반 브리센 후작, 그리고 저."
그레이 브리센을 제외한 다섯 명의 소드마스터 중 넷의 이름을 언급한 칼리안이 붉은 눈을 들어 앨런을 응시했다.
"시오나 힐. 그 여자 지금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갑작스레, 행적이 묘연한 나머지 한 명의 소드마스터를 입에 올린 칼리안이 날카로워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계속 생각을 해봤어요. 대사막의 전사들이 그 조약돌을 가졌을 때 그렇게나 능력이 강해지는데 제 심장에 그것을 심으면 제가 스승님을 이길 수 있을까. 시스파니안에게 검을 겨눌 수 있을까······.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럼, 카스트린 경이나 혹은 스승님께서 그것을 가지게 되신다면 어느 정도가 될까."
모든 일의 중심에 제온이 있다.
심지어 데블란과도 연관이 있는 듯 하니 말이다.
"제온이 만약 텐실의 왕세자를 정말 뒤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제온은 그 이상의 일도 저지를 능력이 있다는 소립니다. 이를테면, 소드마스터를 괴물로 만드는 짓 같은 것 말입니다."
"상상하기는 싫지만 그렇겠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앨런을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스승님. 어려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왕자님 부탁이면 무엇인들 어렵겠습니까."
지금 당장 데블란을 죽여달라 하면 그리 할 것이고 에반의 목숨을 달라 하면 그 역시 그리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당장 왕위에 올라야되겠노라 한다면 곧바로 르메인의 집무실에 들어가리라.
뿐만 아니라 이 길로 황금빛 드래곤 실레스티안을 잡아다 달라 하면 시스파니안의 저주를 달게 받으며 그 어린 용의 심장을 꺼내려 할 것이다.
그러니 칼리안의 그 어떤 부탁인들 들어주기 어려운 것이 있을까.
"시오나의 행방은 우선 지그프리드 공이나 카스트린 경을 통해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스승님 외의 다른 두 대마법사들.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알아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리베른에 머무르고 있는 두 명의 또 다른 7서클의 대마법사들. 그들은 제온과 연관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파악해두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러려면 당연히, 엘린느를 통해야 했다.
차라리 시스파니안에게 피어를 보내고 이해받는 것이 앨런에게 있어서는 더 쉬운 일일 터였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앨런은 이렇게만 대답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 * *
앨런과의 대화가 길어졌다.
본래 부탁하려던 것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해야 했던 까닭이었다. 덕분에 결국 드미레아를 기다리게 만든 칼리안이 왕궁의 작은 마차를 타고 서둘러 체르밀 궁으로 향했다.
그렇게 체르밀 궁에 들어서다가, 어차피 드미레아와의 대련에 대해서는 키리에가 가르쳐 주었을 것임을 알아서 오늘은 더 볼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윗층 사람과 딱 마주쳤다.
인공 호수에 둥둥 떠있는 개구리밥같은 놈에게 인사를 건넨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는 빨리 끝나셨나 봅니다."
플란츠의 기억력이 어느정도인지는 칼리안이 제일 잘 알았다. 플란츠가 눈으로 보지 못한 것들만 알려주는 정도로도 제대로 이해했을 완두콩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때문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은 얼굴로 말을 건네는 칼리안을 향해 플란츠는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오늘 앨런으로부터 듣게 된 일들을 플란츠에게 전해야 하기는 했지만 당장은 드미레아와의 약속이 먼저였던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건넨 뒤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플란츠가 칼리안의 발을 붙들었다.
"아르피아 궁에 왜 갔는데."
사생활.
내 사생활 어디갔냐고.
플란츠 방을 제 방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은 싹 까먹은 칼리안은 내가 어디 갔다 오는지 형님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려다, 생각해보니 뻔하겠다 싶어 그냥 흘리는 듯한 웃음 소리를 냈다.
특별한 일정도 없었고 빌헬름 관에 안 간 것은 지금까지 빌헬름 관의 수련장에 있었을 저 놈이 더 잘 알 테니 남은 것은 앨런 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겠구나 싶어서였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바빠서요."
내 정혼자 기다리고 계시니 너랑 한가하게 얘기할 시간 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자리를 벗어나려다 잠시 발을 멈췄다.
드미레아와 만나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플란츠에게 확인해야 할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형님."
살짝 주변을 둘러 본 칼리안이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마력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했으나 그 반투명한 막이 무엇인지는 아는 플란츠가 칼리안을 똑바로 쳐다봤다. 굳이 체르밀 궁으로 들어서는 길 한복판에 선 채로 사일런트까지 써가며 할 말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혹시 카밀론 가실 생각 정말 없으십니까."
칼리안을 응시하던 플란츠가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더니 마력까지 낭비해가며 별 희한한 소리로 짖는 놈을 앞에 두고 뭔 소리를 하겠나 싶었던 까닭에 아예 대꾸하는 것도 포기한 채였다.
"헛소리 하는 것 아닙니다."
"······ 이젠 곱게 짖는 것이 재미없어지셨나."
"저 오늘 피곤합니다. 짖을 여유 없어요."
"뭔데, 그럼."
"사람 말."
또 반말이다.
"자리는 정해야 하고 왕궁 밖에 나갈 일은 많아질 것 같아서 그럽니다. 란델 형님 의중도 모르는데 란델 형님께 드릴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잠깐이라도 형님께서 하시면 안 됩니까."
반말은 둘째치고 이제와서 왜 갑자기 왕세자 자리 놓겠다는 것인지, 총체적인 문제를 안고 멍멍거리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난 내 아우님한테서 뭘 더 뺏을 생각이 없는데."
"제 손에 든 것 뺏는 게 아니라 원래 형님 자리인 것을 저한테 넘기신건데요. 게다가 저는······."
제가 무슨 생각을 먹든 제 알맹이가 이 나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뒷말을 간신히 삼킨 칼리안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속으로 상대할 가치도 없을 생각을 하리라는 것이 뻔하지 않나.
"싫어."
재고해 볼 일말의 가치도 없다는 듯 그 어느 때보다 완강한 답을 한 플란츠가 그대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결국 이번에도 플란츠 뜻을 다시 확인했을 뿐, 귀한 시간만 허비하게 된 칼리안이 웃었다.
전생의 원수를 만나도 쟤보단 말이 잘 통했겠다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