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장. 감당 못 할 텐데(3)
예측이 틀렸다.
칼리안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잘못 읽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순간 망연하여 갈피를 놓쳤을 것이다.
물론 드미레아의 대처는 달랐다.
반대 방향에서 날아드는 검을 향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실수 정도는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다는 듯, 오른쪽으로 검을 보냈던 드미레아가 몸을 틀었다. 바닥을 지지한 발 끝에 온 힘을 주어가며 정 반대에 선 칼리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칼리안은 육중한 힘이 담긴 드미레아의 공격을 받아내는 대신 바닥을 디딘 발을 미끄러뜨리듯 빠르게 이동하며 검을 움직였다. 힘이 몰린 검 끝이 아닌 검 날을 쳐냈다.
- 카아앙!
긴 타격음과 함께 방향을 잃은 드미레아의 검이 크게 흔들렸다. 때를 놓치지 않은 검붉은 검 끝이 수많은 갈래로 갈라지는 듯한 형상을 보이며 다시 한 번 목과 심장을 노린다.
- 카아앙! 카강! 카앙! 캉!
동시에 서로를 노리고 다시 한순간에 멀어지는 움직임이 연이었다. 절대로 쉽게 져 주지 않겠다는 의지 가득한 검과, 틈이 비는 곳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알려주려는 욕심 많은 검이 끊임없이 서로의 약점을 노렸다.
- 캉! 카앙!
뻗어나간 검을 있는 힘껏 끌어당긴 드미레아가 허리를 숙여 날아드는 공격을 피했다. 단단히 묶어 두었으나 풀려나온 짧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날 선 기운에 잘려 바닥으로 흩어졌다.
드미레아의 눈동자가 재빨리 움직인다. 검 끝이 아닌 칼리안의 어깨를, 발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칼리안이 향하는 방향을 제대로 읽어낸 드미레아가 이번에는 그 속도에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칼리안 쪽으로 달려들며 허리를 지지하던 힘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담아 칼리안에게 일격을 보냈다. 힘에 더해진 무게가 속도를 내고 그것이 다시 무게가 되었다.
- 부웅!
빠르면서 무겁다. 발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어깨로, 그리고 손으로 이어진 힘이 칼리안의 가슴을 양분할 것처럼 날아들었다.
칼리안의 발이 가볍게 바닥을 찼다.
그 손에 들린 검붉은 검 끝이 날아드는 은빛 검의 검등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검등을 스치듯 위로 움직였다. 힘을 받아내지 않고 고스란히 흘려버리며, 드미레아의 검 끝에서 손잡이까지 이어지는 검등을 긁어낼 것처럼 타고 올라갔다.
- 카가가가각!
강하고 빠른 마찰이 길게 이어지자 불똥이 튀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불꽃을 만들어낸 검붉은 검에서 소름끼치는 마찰음이 울렸다. 칼리안이 드미레아의 지척에 다다른 이후에야 힘이 실린 은빛의 검 끝에서 공기 찢기는 소리가 났다.
은색의 검에 달린 가드에 막히기 직전, 검붉은 검이 찰나보다 빠르게 방향을 바꿨다.
드미레아가 만들어낸 빠르고 강한 일격을 무력화시킨 칼리안이 자신의 검 끝으로 툭, 검을 쥐고 있던 드미레아의 손등을 찔렀다. 처음으로 급소 아닌 곳을 노린 가벼운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손등에 얕은 상처가 났다.
- 카아아앙!
방금 입은 상처로 인해 검을 쥐고 있던 드미레아의 손 힘이 일순간 흐트러졌다. 온 힘을 담고 있던 한쪽 손이 느슨해진 틈을 놓치지 않은 칼리안의 검이 드미레아의 검을 그대로 후려쳤다.
아.
하는 작은 탄식과 함께 드미레아의 목에 긴 혈선이 생겨났다.
"함부로 예측하지 마."
- 터엉!
손을 벗어나 멀리 날아가지도 못한 무거운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죽기 싫으면."
그리고 칼리안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 * *
멀리 떨어진 곳에 선 채 칼리안과 드미레아를 지켜보던 키리에가 고개를 돌렸다. 서로 다른 색을 지닌 키리에의 눈이, 대련을 마친 뒤 드미레아의 검을 살피는 칼리안에게서 아직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플란츠를 향했다.
키리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플란츠가 왜 눈을 돌리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되새기고 계십니까."
그제야 시선을 돌린 플란츠가 키리에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두 분의 공방이 길었는데 모두 기억 나십니까."
"기억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려던 플란츠가 입을 열어 답을 전했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상대로, 혹은 키리에를 상대로 검을 맞댄 적은 많았으나 지금처럼 길게 검을 주고 받은 적 없었다. 싸움과 대련과 교육을 한꺼번에 건네주려니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던 탓이다.
그리고 플란츠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기억을 했다. 다만 그것이 '모든 공방을 기억에 담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왕자님 움직임을 다 따라가지는 못하셨을 것 같은데 혹시 맞습니까."
거창한 서약도 서임 의식도 없이 르메인의 임명서 한 장을 받고 칼리안의 기사가 된 이를 올려다 본 플란츠가 숨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빨라서."
"괜찮으시면 오늘 왕자님께서 다루신 검술 제가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둘의 공방을 모두 보았으나 애석하게도 플란츠는 칼리안의 움직임을 눈에 모두 담지는 못했다. 하지만 키리에는 아니었다.
벽 하나를 뛰어넘은 덕에, 물론 아직 칼리안의 속도를 따라잡아가며 막고 쳐낼 수는 없지만 눈으로 쫓아가는 것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생각지 못한 친절을 마주한 플란츠가 고요히 잠겨든 눈으로 키리에를 쳐다봤다. 체르밀 궁 후원의 자작나무처럼 큰 키의 키리에를 보고 있자니, 오빠에게 키를 다 뺏긴 듯 조그만 히나가 떠올랐다. 닮은 구석 하나도 없다고 여겼던 둘이 가진 딱 하나의 공통점을 생각한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이상한 남매로군."
"저희가 왜 이상하십니까."
"닮아서."
그렇게 말하는 연두색 눈이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플란츠에게는 들리지 않는 몇 마디 말을 드미레아에게 건네는 칼리안을 향해서였다. 너 또 뭔소리 하는지 난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이 되어 버린 키리에가 입을 꾹 다문 것을 보지 못한 채로.
"이유도 없이 그렇게. 계속."
"······ 제가 검술 보여드리겠다 한 것이나 히나가 플란츠 왕자님께 신경을 써드리는 것이 과한 친절로 여겨지셨습니까."
간신히, 정말 힘겹게 플란츠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먹은 키리에가 물었다.
"과한건지. 과분한 건지."
둘 중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삼킨 플란츠가 키리에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칼리안의 검술을 복기해주겠다는 말에 대한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가. 빌헬름."
"지금 가셔도 되겠습니까. 헤르츠 부군단장이 또 찾을텐데요. 잊지 않고 있을 테니 일정 마치신 뒤에 만나도 괜찮습니다."
"상관 없어."
파란 머리 마법사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상관 없다 여기는 플란츠가 자신의 검을 챙겨들며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드미레아의 검이 더 무거울지, 자신의 검이 더 무거울지 따져보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숨이 가쁘다는 것을 검을 놓친 뒤에야 깨달았다.
짧은 숨을 몇 차례 뱉어낸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련에서 진 것에 의아하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칼리안이 검을 다루는 실력을 다시 겪었고, 검의 길에 오르는 것에는 요행이 없음을 스스로도 잘 알았다.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드미레아보다 칼리안이 더 나은 실력을 지녔다. 가진 재능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보여서 그것은 조금 부러워해볼까 하다가 그냥 말았다.
- 무리하지, 말아요.
좇는 것과 부러워하는 것은 다르지 않나. 부러워하면 무리하게 될 테니 오늘은 그냥 마음 편히 차나 한 잔 마시면서 쉴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의 실력 차이인지 제대로 알았으니 다시 검을 휘두르면 될 일이다.
"뒤따르다 보면 따라잡고, 따라잡으면 앞서는 날도 오겠죠."
그런 생각의 끝에서 드미레아가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은 갑자기 그것이 무슨 말인지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검술 스승이었던 테일란을 앞에 둔 베른 역시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칼리안이 발을 옮겨 떨어진 검을 직접 집어올렸다. 지그프리드령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무거워진 검의 무게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뒤에는 날이 다소 무뎌진 것을 보고 미안한 얼굴을 했다. 대련에서 이긴 것은 미안할 일이 아니었으나 검을 상하게 한 것은 미안해 할 일이 맞았다.
"아."
그러다가 지금 미안해 할 것이 그것 뿐임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재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미안. 드미레아."
검을 맞대고 있을 때에는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살기 가득한 소리를 내더니 금새 평소의 자상한 얼굴로 되돌아와서는 사과를 했다.
어쩌다보니 한 손에는 손수건을, 다른 한 손에는 자신의 검을 든 채 말하는 칼리안을 본 드미레아가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검을 먼저 받았다. 칼을 다루는 만큼 자잘한 상처 정도는 그리 신경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곧바로 치료해 줄 사람도 있었으니까.
"빌헬름 관에 가면 되니 신경은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방금 전 정혼자 목에 빨간 줄 하나 그어 놓았다는 것에 정말로 신경쓰지 않기로 한 모양인지, 칼리안은 드미레아가 괜찮다 했으니 됐다는 듯 웃었다.
뭐. 귀족보다는 기사에 가까운 드미레아의 사고방식이 칼리안이라 해서 다르겠는가.
"지그프리드령에는 왕자님만큼 빠른 검을 쓰는 이들이 없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카이리스에도 없을걸."
안그래도 테일란을 떠올리고 있던 칼리안이 이렇게 대꾸했다. 앨런이 들으면 어여쁜 왕자님 등짝 때릴 마음 먹게 할 만한 말을 또 흘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많이 배웠어. 정말 많이 늘었네."
"그렇습니까."
"지그프리드 공과는 확실히 달라. 물론 그때 지그프리드 공이 많이 접어가면서 상대해 줬었겠지만 네 검술이 더 까다로운 것 같기도 하고."
"저희 가문에도 보다 가벼운 검술은 전해지니까요. 물론 두 종류를 다 배우지만 제가 다루는 검은 아버지의 것과 조금 다릅니다."
그렇구나 하는 소리를 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조금 전 오갔던 공방에 대해서는 둘 모두 입에 담지 않았다. 굳이 더 말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보여주며 가르쳤고, 드미레아 역시 방금 전의 대련에서 칼리안이 알려주려 한 것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둘 모두 그 정도의 실력은 가진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검이 좀 상했어."
"소개시켜주신 로튼이라는 자가 실력이 좋습니다. 그것 역시 염두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말한 드미레아가 로튼 대장간의 주인이었던 대장장이 긱스를 저택에 들인 일에 대해 말했다. 혹시 저택의 사람으로 손이 부족할까 싶어 일러주었던 이를 아예 고용했다는 말에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지나칠 정도로 드미레아다운 행동력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기사들의 훈련도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언제쯤 궁에 들이실 생각이십니까."
"브리센 측 인물은 안 섞여 있어?"
"네. 에이프린 백작이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눈에 띄는 이는 없습니다."
"좋네."
자신을 도와 기사 세력을 모으고 육성중인 아이즌 에이프린에 대한 칭찬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마치 자신이 칭찬 받은 것처럼 흡족한 얼굴을 했다.
"기회가 닿으면 에이프린 백작도 한 번 만나봐. 나쁘지 않을 거야. 생각 같아서는 백작을 수도로 불러오고 싶은데 나와 연결된 선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하질 못하네."
"네. 그런데 그레이 브리센은······."
"그건 나중에."
그레이 브리센을 언제 수도로 들일 생각인지, 새로운 변경백 후보로 생각해 둔 몇몇 인물들은 직접 만나 볼 생각인지 등을 물으려던 드미레아가 입을 다물었다.
드미레아는 대련을 한 둘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에 키리에가 서 있음을 상기하고는 칼리안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얀의 것과 똑같은 블론즈 색의 고불고불한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땀 한 방울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뒤에야 자신이 세심하지 못하게 군 것이 또 있었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생글 웃으며 마력을 운용했다.
"잠시만."
오러로 만들어진 검에서 느껴진 섬뜩함과는 완벽히 다른 기운의 마력이 드미레아를 스치듯 지나갔다.
땀이 마르며 열기가 식었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이 긴장하며 흘린 땀으로 푹 절어있던 상태에서 해방된 드미레아가 마음에 든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히 마법은 도움이 많이 되네요."
"도움이 되나."
하기사.
아무리 못 씻어도 깨끗하게 해주니 야근을 하기에도 좋고, 술 냄새도 안 남겨주니 술 마신 다음 날 신경 안 써도 되고. 옷에 묻은 빨간 차 얼룩도 지워주고.
고양이 털도 없애 주고.
"······ 도움이 되긴 되네."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칼리안이 드미레아를 보며 말했다.
"히나 만나 치료 받고 나서 다시 올 수 있어? 식사도 할 겸 내 정혼자님이랑 산책하면서 얘기도 좀 나눌 겸."
"네. 시간 됩니다."
마음에도 없는 정혼자 타령은 그냥 넘겨들은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금 전의 대련에서 아쉬웠던 점을 계속 생각하느라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한 탓이 컸다.
덕분에 빨리 저택에 돌아가서 차 한 잔을 마시며 쉬려 했었다는 생각도, 칼리안이 카이리스 운운하며 또 흘린 비밀 가득한 말에 대해서도, 그리고 칼리안의 검과 마법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왜 그렇게 다른지에 대해서도 모두 특별히 떠올리지 않고 넘겼다.
앨런에게 등짝 맞을 일 사라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늦지 않게 와. 맛있는 것 먹자."
오러 가리기를 그만두었는데도 여전히 밥이 좋은 것을 보니 아무래도 키가 크려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에, 칼리안이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