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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25화 (226/527)

제40장. 감당 못 할 텐데(2)

키리에에게도, 플란츠에게도 묻지 않았다.

상대와 마주 보고 서서 인사를 나누고 검을 꺼내들고, 준비가 되었는지를 살피고 검을 겨누고, 더 약한 쪽이 준비한 것을 먼저 보일 수 있도록 몇 수를 물려주고.

칼리안은 그랬던 적 없었다.

"싸움, 대련, 교육. 뭐가 좋아."

하지만 드미레아에게는 말을 걸었다.

다른 것을 배려하지는 않았으나 셋 중 무엇을 위해서 자신과 그렇게나 칼을 맞대려 했는지 묻기 위해 잠시 자리에 선 채 드미레아를 마주보았다.

드미레아가 약해서, 공작가의 귀하신 자제라서, 혹은 여자라서 질문을 하거나 준비할 시간을 내어 준 것은 아니었다.

그딴 이유로 그 정도의 배려를 해 줄 것이었으면 키리에나 플란츠에게도 물었을 것이다. 물론 여자임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면 애초부터 이 자리 자체가 성사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고작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이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 들 드미레아가 아니었으니까.

"셋 다."

- 부웅!

짧게 답한 드미레아가 곧장 검을 내질러왔다.

은빛의 검날이 제 주인의 눈빛과도 같은 묵직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내가 이래서 드미레아를 좋아하지.'

마음에 쏙 드는 답과 행동을 내어 놓는 드미레아를 보며 어느새 버릇이 된 말을 떠올린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타앗!

여유로운 미소를 그려낸 얼굴 표정과는 정 반대로, 아직 검을 만들어내지 않은 칼리안의 발이 빠르게 바닥을 박찼다.

그와 함께 방금 전까지 칼리안이 서 있던 곳을 드미레아의 검이 날카롭게 베고 지나갔다.

- 우우웅!

드미레아의 머리 위에서 공기 울리는 소리가 났다. 굳이 머리 위를 살필 것도 없다는 듯 드미레아가 재빨리 허리를 틀며 몸을 피했다.

쉬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드미레아가 서 있던 곳으로 검붉은 그림자가 허공을 스친 뒤 사라졌다.

바뀌었다.

분명 칼리안의 검은 투명하지 않았던가.

그 사이 무슨 짓을 했는지 오러의 색이 달라져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보게 된 드미레아의 얼굴에 강한 호승심이 어렸다. 호승심은 곧 강렬한 투지로 바뀌어 묵직한 눈빛에 육중한 날을 세웠다.

- 카아앙!

은빛 검이 검붉은 잔상을 뒤따랐다. 드미레아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아래를 향해 내지른 검을 회수하던 칼리안이 재빨리 공중에서 몸을 틀며 공격을 막았다.

칼리안의 발이 바닥을 밟기가 무섭게 두 날붙이가 맞부딪혔다.

- 카강! 카가각!

거리낄 것 없다는 것처럼 맞닿은 두 검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으나 둘 모두 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칼리안의 검을 밀어붙이는 드미레아의 청회색 눈이 붉은 눈을 마주 바라봤다.

공격이 막혔다.

지금 둘의 공방을 지켜보는 키리에나 플란츠였다면 자신의 검을 물리고 한 발을 물러서거나 다시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미레아는 그러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막힌 검을 포기하지 않은 드미레아가 검붉은 검날에 막힌 자신의 검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힘 싸움!

싸움을 할 것인지 물었으니 그것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카각!

둘의 팔에 순간적으로 힘줄이 투둑 불거지며, 한 쪽은 밀어내려 다른 쪽은 밀리지 않으려 서로의 검에 온 무게를 쏟아냈다.

순간, 칼리안이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다시 주었다.

- 카아앙!

무게가 없다시피 한 검이 슬쩍 뒤로 물러나는 듯 하더니, 더 강한 힘을 담아 드미레아의 검을 밀어내듯 올려쳤다.

- 카앙! 캉! 카아앙! 카강!

살짝 위로 빗겨난 은색의 검을 밀어낸 검붉은 검의 날이 드미레아의 눈 앞에 어지러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힘 싸움을 받아 줄 생각 없으니 속도 싸움을 하자는 뜻이다.

연이은 공격이 드미레아를 노렸다. 거의 동시에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듯한 가벼운 검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낸 드미레아가 한 번 더 힘을 주어 짓쳐드는 검을 강타했다.

- 카가강! 콰앙!

고막이 얼얼할 정도의 큰 소리와 함께 칼리안의 검을 내려친 드미레아가 발을 박찼다. 가볍디 가벼운 저 검의 속도에 말려들면 싸움에서 불리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바닥을 향하던 검을 빠르게 회수해 몸을 움직였다.

칼리안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쌔액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며 드미레아의 오른 쪽에서 잔뜩 날이 선 공격이 날아왔다.

검을 온전히 회수하지 못한다는 판단을 한 드미레아가, 내뻗으려던 검 손잡이를 내려잡고 날을 위로 세웠다. 검을 거꾸로 든 상태로 오른쪽 목으로 날아드는 공격을 막아낸 드미레아가 다시 한 번 검을 움직였다.

- 키잉!

두 검날이 살짝 닿는 가벼운 공명음이 멈추었을 즈음, 검붉은 검의 잔상이 흐려지듯 시야에서 사라졌다. 물론 칼리안의 모습도 함께였다.

드미레아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양 손으로 굳게 잡은 검 끝이 분명한 투기를 담은 채 칼리안의 그림자를 향해 뻗어나갔다.

- 부웅······!

휘둘러진 검에서 다시 한 번 무게감 가득한 바람이 일었다. 그것을 무력화시키듯, 칼리안이 검을 빗겨대어 그 묵직한 검에 실린 강한 힘을 바닥으로 흘려보냈다.

- 쉬이익! 카앙!

가벼운 검은 회수에 유리하다.

어둠이 뚝뚝 흘러내리는 검이 곧장 방향을 바꾸어 드미레아를 향해 날아왔다.

무거운 검은 굳이 회수할 필요가 없다.

바닥으로 미끄러지는 검에 오히려 더 힘을 주어 재빨리 몸을 회전시킨 드미레아가, 자신의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으며 상대의 어깨를 노렸다.

- 콰앙!

그 묵직한 타격에, 깊은 울림 가득한 충돌음이 울려퍼졌다.

"더 빨리."

서툰 이였다면 방금 전의 공격에 맞아 검을 놓쳤겠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는 칼리안이었다. 힘이 모자란 것을 메우기 위한 속도가 부족함을 일러준 칼리안은, 다시 한 번 힘 싸움을 걸어오는 묵직한 검을 향해 도약했다.

손에 들린 검이 죽은 피를 사방으로 흩뿌리듯 움직였다.

- 카앙! 카아아앙! 캉! 카앙!

속도의 한계점이 없다는 것처럼 몰아치듯 이어지는 검의 그림자 하나하나에 살의가 가득하다.

- 타다다당! 카아앙!

수많은 그림자 중 그 무엇 하나도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탓에, 검을 세워 든 드미레아가 팔을 짧게 뻗어가며 공격들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부딪혀 튕겨나가는 감각이 분명한데도, 반동 따위 없다는 듯 어느새 다른 방향에서 치고 들어오는 칼리안의 검을 하나하나 눈으로 쫓아가며 막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 쉬이익!

잠시 뒤 무거운 검이 만들어내는 넓은 검막의 틈을 파고든 가벼운 검 끝에서 바람을 갈라내는 소리가 났다.

- 캉!

방향을 바꾼 검붉은 검의 첨예한 끝이 다시 한 번 목으로 날아 들기 직전, 허리를 살짝 뒤로 물린 드미레아가 검 손잡이로 공격을 막았다.

어느새 말려들었다.

저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예상했던 일이 생겼음에 입술을 깨무는 대신, 손잡이를 부서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힘주어 검을 다잡은 드미레아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그대로 칼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차피 저 공격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검격의 범위 안으로 파고들어 빈 허리를 베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 정도는 누구나 생각해."

너는 달라야지, 드미레아.

질책이 이어졌다.

칼리안의 신형이 흔들리는 촛불처럼 흐려지다 다시 사라졌다.

어느새 뒤에서 날아오는 검의 예기에 몸이 먼저 반응을 했다. 드미레아가 재빨리 몸을 틀며 이번에도 여지 없이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검을 향해 검을 뻗었다.

- 카아아앙!

수련장 바닥을 일그러뜨릴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치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빗겨 선 것 같은 모양새로 발을 멈추게 된 둘의 검이 서로에게 막혀 멈췄다.

그렇게 찰나의 순간 움직임을 멈췄던 둘의 발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 타닷!

이번에는 칼리안이 드미레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자신의 품을 파고들려 했던 공격을 되돌려주려는 것이다.

굳이 오러를 두르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강화된 팔에서 나오는 힘은 결코 드미레아에게 뒤지지 않는다. 때문에 칼리안은 자신의 빠른 걸음을 막으려는 은빛 검을 힘주어 밀어낸 뒤 쉼 없이 검을 내리그었다.

어깨와 목 사이를 노리고 순식간에 날아드는 검붉은 날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드미레아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검을 틀었다.

- 콰앙! 캉! 카아앙! 카강!

그렇게 한 차례 이어진 공방의 끝에 한 발 씩을 뒤로 물려 본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오게 된 두 칼잡이의 발이 다시 한 번 동시에 움직였다.

- 카아앙! 카강! 카강! 캉!

자신들을 지켜보는 다른 두 명의 시선은 이미 잊은지 오래다.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듯 오로지 상대방의 눈만 주시해가며 얽혀드는 두 개의 검이 계속하여 날카로운 빛을 내뿜었다.

- 카앙! 카아앙!

어둠 속에 타오르는 화염의 잔재같은 칼리안의 검이, 신념의 깊이를 고스란히 담아 둔 듯 반짝이는 은빛의 검을 사방에서 갉아먹을 듯 짓쳐들어왔다. 속도를 놓은 대신 무게를 선택한 드미레아가 공격에 대한 욕심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온 몸의 급소를 향해 들어치는 칼리안의 검격을 막아냈다.

- 쉬익! 카가강!

몸을 뒤로 빼며 들어올린 검의 가드로 아래에서 위를 향해 치고 올라오는 칼리안의 검을 막은 드미레아가 손잡이를 비틀었다. 그렇게 바깥으로 공격을 흘려낸 후에는 뒤로 물린 발을 다시 앞으로 뻗으며 칼리안의 심장을 노렸다.

"서두르지 마."

심장으로 찔러 들어오는 검 끝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은 칼리안이 아주 살짝 뒤로 움직였다.

그 붉은 눈이 드미레아의 눈과 잠시 마주친 그 순간.

칼리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낯설지 않았으나 절대로 익숙해지지 못할 그 속도를 쫓는 대신, 뻗었던 검을 돌려세운 드미레아가 제자리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사방으로 날 선 공격을 보냈다.

- 탁!

왼쪽 어귀를 찔렀을 때 검 끝에 단단한 것이 닿는 느낌과 함께 날붙이가 맞닿는 소리가 울렸다.

찾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드미레아가 검 손잡이를 꽉 쥔 채 발을 박찼다. 가능한 높은 곳까지 몸을 띄운 드미레아의 팔이 온 몸의 무게를 담아 칼리안이 도달할 곳을 향해 검을 뻗었다.

- 콰아앙!

막은 것인지 막아 준 것인지, 단어 그대로 날아드는 무거운 공격을 받아낸 칼리안이 빠르게 움직였다.

- 카강! 카아앙! 캉! 카앙!

가장 무거운 검.

그리고 가장 빠른 검.

서로가 서로에게 상극인 검술을 익힌 둘의 공방이 끝맺음을 모르고 이어졌다. 허리를 노리고 어깨를 베려 하고 허벅지를 겨누는 무거운 검을 모조리 흘려낸 가벼운 검이 마주 선 이의 목을 베어내려다 방향을 바꾸어 심장을 관통하려 든다.

- 카가강!

- 타앗! 카아앙! 캉!

연격을 막아낸 드미레아가 곧장 검을 휘두르는 사이 칼리안의 발은 어느새 드미레아의 왼쪽 바닥을 밟으며 검을 내질렀다. 칼리안의 움직임을 예측한 드미레아의 검이 오른쪽으로 휘둘러진 직후였다.

검이 향한 곳에 칼리안은 없었다.

잘못된 방향, 섣부른 판단.

언젠가의 플란츠가 했던 실수와 같았다. 오래 전의 키리에 역시 같은 실수를 했다.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니 앞서나간 위치로 공격을 보내려다 만들어지는 치명적인 한결같음.

생각이 많으면 죽는다 말하는 대신, 정 반대 방향에서 몸을 드러낸 칼리안의 검이 바람을 갈랐다.

- 쉬익!

청회색 눈에 담긴 동공이 맞수를 뒤쫓는 야수의 그것처럼 맹렬하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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