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23화 (224/527)

제39장. 내가 많이 참았지(4)

예고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일.

베른의 생이 그랬고 베른의 죽음이 그랬다. 칼리안으로서 시작된 삶이 그랬고 지금도 계속, 모든 것이 예고 없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사실 세상 그 누구의 생이라 해서 다르겠냐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은 자신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예고되지 않은 생에 갑작스레 초대되었으며 그 사이 지내온 생의 모든 것이 갑작스러웠다고 말이다.

그러니 한 번쯤은 반대로, 누군가를 갑작스레 불러내도 괜찮지 않을까. 한 번쯤은 감히 멋대로 찾아도 못 이기는 척 와주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사려 깊은 시스파니안에 대한 막연하고 이유 없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갑작스러운 결과에 실소한 것은 칼리안 쪽이었다.

"놀라는 것은 늘 제 몫이군요."

공동 문이 열리고, 이제 완연히 익숙한 내부에서 익숙하지 않은 그림자를 본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답을 기다리고 한 말도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우선 고개를 숙여 예를 보였다.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여전히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시간의 축 위에 고운 자태로 앉아 있는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를 향해서였다.

생김은 다르지만 비슷한 경험을 이미 한 번 해보았기 때문인지, 생명이 가지는 그 어떤 존재감도 없는 고양이를 향해 인사하는 기분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온 몸에서 검은 빛이 반짝이는 듯한 느낌의 고양이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루비를 세공해 넣은 것 같은 붉은 눈을 들어 칼리안을 바라봤다. 그 눈을 마주보는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려냈다.

'고양이라.'

검은 나비의 의미는 알아보았었는데 이번에는 왜 고양이일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사람만 보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발치에 몸을 부비는 루시와는 그 색도 행동도 분위기도 완벽히 다른 도도한 자태의 검은 고양이를 보며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가늠이 되질 않았다.

검은 나비는 죽음을 의미하였으나 검은 고양이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으니까.

앨런이 칼리안을 두고 종종 붉은 눈의 까만 고양이라 말하는 것은 알았다. 다만 그것은 발톱 숨긴 칼리안을 알아보았던 앨런이 붙인 애칭이지 그 외의 다른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지 않나.

"이 역시 반겨해줄까 궁금하였다."

그런 칼리안의 속내를 알아본 것 같은 시스파니안의 조용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느 쪽에서 들려오는지 그 방향조차 알기 어려운 소리였다.

"검은 고양이에 어떤 뜻이 담겼을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카이리스에만 전해지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 칼리안이 되물었다.

고양이가 큰 눈을 한 번 느리게 깜박였다.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다시 한 번 대답이 들려왔다.

"네가 아는 바와 같을진대."

칼리안이 고양이를 따라 빨간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검은 고양이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아무 의미 없는 검은 고양이의 모습을 검은 나비를 보았을 그 날과 똑같이 반겨 할지가 궁금했다는 말일 터였다.

"······ 아."

그것을 해석하기까지 잠시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칼리안이 말 없이 누군가를 찾았다.

······ 초대왕 하츠아라시여.

물론 제가 먼저 왔습니다.

여쭤 볼 것이 있어서 제가 먼저 찾아오기는 했습니다만 만나 뵙기가 무섭게 후회를 하고 있는데요.

제가 제 형님이 하시는 말씀은 적당히 알아듣고 살고 있는데 시스파니안님의 저 두루뭉술한 말투에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됩니다.

그러니 하츠아라시여.

혹시 저 분의 이야기를 다 이해해가면서 대화를 하셨던 것이 맞습니까? 아니, 그 전에 두 분께서 제대로 된 대화라는 것을 나누기는 하셨습니까?

들리시면 언제 솔직한 대답 좀 부탁드립니다. 어쩐지 제가 당신과 조금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는 것 같거든요. 축복보다 더 강력한 것 같은 짧은 말 유전자 때문에요.

"제가 찾아온 길이니 어찌 반갑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츠아라를 향한 긴 푸념을 말로 꺼낼 수는 없으니 입으로는 퍽 정상적인 대답이 나왔다.

혹시 저 고룡은, 자신이 무슨 모습을 하든 반겨 줄 수 있는 이가 그리운 것은 아닐까. 무슨 모습을 하든 반겨 줄 수 있을 단 한 명이 이제는 없어서 이렇게 엉뚱한 모습을 한 채 찾아와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닐까. 문득 든 이런 생각 역시 접어 둔 채였다.

만약 칼리안이 떠올린 생각이 혹시나 맞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잊힘을 저주하는 이가 잊히지 않음을 저주하고 있을 이를 찾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곧 칼리안은 사그라들 줄 모르고 이어지는 상념을 차곡차곡 정리해 밀어넣으며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무슨 모습을 취하셨든 본질이 같으신데, 저에게 있어 어느 모습인들 다르겠습니까."

그것이 검은 나비든, 검은 고양이든, 아직 보지 못한 검은 용의 모습이든, 혹은 늘 보여주었던 한 여인의 모습이든. 그 전부가 시스파니안인데 의미가 있고 없고를 따져 반갑거나 반갑지 않고를 구분할 수가······.

······ 아.

이제야 이해를 했다.

다시 피어오르는 상념 덕에 시스파니안의 뜻을 비로소 이해한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시스파니안.

실로 사려 깊은 시스파니안.

속에 든 것을 잃어가는 이의 목소리를 오늘도 들으셨나보다.

겉모습도 중요치 않고, 사람들 입을 지나 오래도록 남겨지는 의미도 중요치 않고, 그저 속에 든 것이 중요할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저리 말씀을 하셨구나. 그것을 위해 저런 모습을 하고 오셨구나.

아무 의미 없을 모습을 하고 오셨구나.

"항상 가르침을 주시네요."

고양이의 붉은 눈이 다시 한 번 느리게 움직였다. 그것이 마치 미소처럼 느껴진 칼리안이 마주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생각이 많은 모양이구나."

"생각의 끝에 찾아오게 된 길이라, 어쩔 수 없이 이어집니다."

"그래."

탓, 하고 고양이가 가벼운 몸 놀림으로 바닥에 내려앉았다.

서로 모아지는 그 발 끝이 루시의 움직임을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뒷발이 땅에 닿은 검은 고양이가 곧바로 빛무리에 둘러싸였다.

그 언젠가의 검은 나비가 그러했듯이 이번에는 붉은 눈을 지닌 검은 고양이의 곁에 작은 우주가 모여들었다. 오래지 않아 고양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며 익숙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동글동글한 고양이의 발 끝이 가느다란 구두 끝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있을 때, 어느새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두 번째의 만남에서, 두 번째 만난 날 보다는 오늘 조금 더 친근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말투였다.

신기하게도 체이스가 떠오르는 그런 말이었다.

"잊히는 것을 너무 서럽다 여기지는 말려무나. 잊히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잊히는 것까지 서럽다 여기면 무엇을 더 서럽다 할지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그저 조금만 억울하다 여겨주려무나."

그렇게 말하는 붉은 눈이 칼리안의 것을 꼭 닮아서, 꼭 같이 서러워 보여서, 칼리안은 아무 말도 못하고 짧은 대답만 했다.

"네."

그리운 것이 서러워 서럽다 말하는 자신을 여전히 이해하려 노력중인 고룡의 말에, 나도 서럽다 할 수가 없어서였다. 떠난 이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것이 분명할 저 붉은 눈을 보면서 그 어떤 말의 위로도 꺼내놓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너 혼자 서러운 세상이 아님을 알려준 저 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위로를 받았다. 그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칼리안은 위로를 받았다. 위로를 받으려 찾은 길이 아니었건만 이번에도 위로를 받게 되었다.

비로소 웃음이 나온다.

"이야기하거라. 듣겠다."

지난 두 번은 칼리안의 속을 직접 들여다보며 굳이 말하지 않은 속을 꺼내보고 대답을 했던 시스파니안이 이번에는 칼리안에게 먼저 말을 해달라 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질문을 입에 담았다.

그 질문을 들은 시스파니안이 작은 웃음 소리를 냈다.

"참 이상하게도."

한참 뒤 이렇게 입을 연 시스파니안의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너는 그를 닮았다."

사실상 하츠아라와는 일말의 관계도 없을 칼리안에게, 시스파니안은 대답 대신 이런 감상을 먼저 전했다.

하츠아라를 닮았다고.

"무엇이 닮았습니까."

이름도 모를 조상님 대신 옆 나라 시조와 내가 닮았다는 말에 당황한 칼리안은 그것이 과연 무슨 뜻인지, 칭찬인지 아닌지를 예상하지 못할 질문을 했다.

"마치 이성이 없는 듯 하다는 점이."

칭찬 아니었다.

* * *

특별히 칼리안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 낼 생각은 없었다.

- 체르밀 궁에서 1왕자님과 대화 중이라 합니다.

그런데 레릭이 이런 말을 했다.

제딴에는 칼리안과 란델이 함께 있는 것이 플란츠에게 해가 될까 걱정하여 전해 준 모양인 것 같았으나 플란츠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 죄송합니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헤이시아에 찾아오셔서, 잠시 자리를 지키느라 늦었습니다.

게다가 한 술을 더 떠 이런 이야기도 들렸다.

당장 내일부터 두 부군단장을 도와 업무 처리를 함께 하기로 한 니들렌을 통해서였다.

어차피 칼리안이 비밀리에 방문한 것도 아니었을 테니 니들렌의 입이 가볍다 여길 일은 아니었다. 안 궁금했다는 것이 문제였지 말한 쪽은 잘못이 없었다.

그래.

분명히 안 궁금했다.

뭔 생각하는지 모를 정신 나간 동생놈이 세렌티 뒷통수를 후려치겠노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더니 란델을 만나고 헤이시아 궁에 갔단다.

"······ 하."

도대체, 그 말을 듣고 안 궁금할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이번에는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무려 시스파니안을 만나려 든다는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보고 있던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긴 뒤 내려놓았다.

- 드르륵

플란츠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의자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니들렌을 내보낸 뒤 내일부터 그녀에게 건네 줄 만한 일거리를 따로 빼놓던 아르센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부군단장이신 왕자님은 어디 가십니까."

"할 일 없어."

그 말에 아르센이 창 밖을 봤다.

아직 해가 다 기울지도 않았다.

내 일 다했으니 갈 거다.

마법사 너는 야근을 하든지 말든지.

이런 말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을 애써 떨군 아르센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저는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 어디 가시는지를 여쭸는데요."

평소 같으면 알아서 뭐하게 묻느냐 대꾸했을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아르센을 쳐다봤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은 생명체를 대하는 그런 눈으로 아르센을 내려다보던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내 동생 잡아오러."

평생 듣지 못할 것 같은 말로 아르센의 입을 잘 막은 플란츠가 여유 가득한 걸음으로 집무실 밖을 향해 나갔다.

* * *

비가 그쳤다.

신기한 일이다.

혹시 시스파니안도 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올 때마다 내리는 비를 멈추게 하고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값어치 없는 생각을 잠시 하던 칼리안이 피식 웃으며 헤이시아 궁의 지하에서 밖으로 나왔다.

덜 익은 토마토 말려 놓은 것 같은 놈이 있었다.

왜 왔을지는 뻔하다. 때문에 여전히 파릇파릇 풋내 날 것 같은 그 머리꼭지를 말 없이 응시하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고 안 칩니다."

귀찮아 죽겠다는 음색을 굳이 가리지도 않은 말을 들은 플란츠가 다른 대답 없이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거짓말을 못하는 놈이니 정말 사고 칠 생각이 없던가, 아니면 스스로 그것이 '사고'라는 생각이 없던가. 둘 중 하나 아니겠나.

"뭔데."

"아시면 또 방해하시려고요."

"내 아우님께서 도무지 감당 못할 일만 벌이시니."

말 안한다 버텨 보아야 무슨 소리 할지 뻔하다.

심장에 묶인 것 풀지 않는 한은 말싸움에서 저 푸르딩딩한 놈을 어떻게 이기겠나.

때문에 칼리안은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원하는 것이 치유사이지 않습니까. 치유사를 부르겠다는 명목으로 저도 묶어서 부르고는 있지만 어쨌든 원하는 건 그 병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고요."

사족이 긴 것을 보니 분명 사고를 칠 생각이 맞나보다고 생각한 플란츠가 얼굴을 굳혔다. 그 표정에 드러난 것이 뻔해서, 칼리안이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세크리티아 국왕이 엘프들을 꼬셔도 다른 짓 못하게 하려면 저도 유리한 것 하나쯤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시스파니안을 찾아갔습니다.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요."

그랬더니 시스파니안께서 웃으시더라고요.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었다.

"찾아가서 뭘 하려고."

"세크리티아의 국왕께 배운대로 써먹는 겁니다. 협상은 물 건너 갔으니 그 다음 순서요."

그랬더니 시스파니안께서 욕하시던데요.

한 번 더 덧붙인 칼리안이 이번에는 생글생글 웃었다.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게 변했다.

엘프의 어머니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시스파니안으로부터 알고자 한 대답을 결국 듣게 되었으니 저렇게 신나하는 것이리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였다.

"엘프들의 수호신을 찾아가 뭘 할 생각이냐고."

불신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묻는 플란츠를 향해, 처돌다 미친 형제관계에서 '미친 동생' 몫을 제대로 수행중인 칼리안이 조곤조곤 답을 전했다.

협상이 안 되면 그 다음 것.

"나무는 대체로 불에 잘 탑니다."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칼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눈치를 챘다.

미친놈이 또 그 새파란 마법사를 써먹을 생각인 거다.

협상이 안 될 것 같으면 그 다음.

협박.

엘프들을 협박할 심산일 터였다.

어머니 나무를 인질 삼아, 세크리티아의 국왕에게 잘 포장된 루시 똥을 보내 줄 계획을 짰음이 분명했다.

"아아."

칼리안의 계획을 적당히 파악한 플란츠가 피식 웃으며 이해했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믿기지 않게도, 이번에는 막을 생각이 없다는 의미를 담은 채였다.

비 개인 하늘이 붉게 타올랐다.

그것을 슬쩍 쳐다 본 플란츠가 똑같이 붉은 칼리안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잘 타겠지."

처돌고 미친 아들들을 두게 된 르메인이야 뒷목을 잡든지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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