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장. 내가 많이 참았지(3)
다행인 점은 죽지 않았다는 것.
불행인 점은 기절도 못했다는 것.
어쩌면 플란츠에게는 둘 다 불행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아르센은 죽지도 않고 기절도 못한 채 여전히 일에 치이고 있었다.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는 당장 이주일 내로 발칸 마법사들이 또 늘어난다는 것을 혹시 아십니까?"
"알아."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는 샤워 하셨습니까?"
"했어."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는 아침 식사 하셨습니까?"
"했어."
"부군단장이신 왕자님께서는······."
"나가."
집무실 밖으로든 이 세상 밖으로든 좀 꺼졌으면 좋겠다는 눈을 한 채 대꾸한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옅은 색의 블루 토파즈로 장식된 셔츠 칼라 핀과 커프스를 툭툭 풀어 레릭에게 건네는 것을 본 아르센이 또 입을 열려 했다.
"닫아."
플란츠는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한 입을 막은 뒤 곧장 소매를 걷어 올리고 서류로 눈을 돌렸다.
덕분에 '바쁜 와중에 샤워도 하시고 식사도 하시고 주렁주렁 잘도 달고 오셨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아르센이 늑대의 동공을 연상케 하는 암흑색의 커피를 쭉 들이켰다. 칼리안과 함께 있느라 늦은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멀끔하고 여유로운데다 호화롭기까지 한 저 모양새를 보니 괜한 울화가 치미는 것이다.
살겠다고 마시는지 죽겠다고 마시는지 모를 카페인을 섭취하는 아르센을 슬쩍 쳐다본 레릭이 플란츠를 향해 말했다.
"무슨 차를 가져다 드릴까요, 왕자님?"
빠른 속도로 인명부를 넘겨가던 플란츠가 지나치듯 대답했다.
"커피, 말고."
"네. 바로 준비해오겠습니다."
이렇게 답한 레릭이 아이스 블루 색의 재킷을 걸어두고 비슷한 색상의 얇은 가디건을 플란츠에게 건네준 뒤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잠시동안 플란츠의 얼굴을 쳐다보던 아르센은 조용히 서류로 눈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번에 앨런을 만나게 되면 어리고 똑똑한데 말이 짧고 돈은 많은데 사회성 부족한 부군단장 말고 평범하게 삶에 찌든 사람을 한 명만 더 붙여달라는 말을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물론 부군단장이 더 늘어나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일 좀 편하게 도와 줄 수 있을 만한 그런 사람으로.
- 똑똑
오래지않아 다시 들어온 레릭은 오렌지와 바닐라 향이 나는 홍차를 플란츠와 아르센의 자리에 각각 하나씩 내려놓은 뒤 말했다.
"그럼, 필요하실 때 다시 불러주세요."
이렇게 언제나와 같은 인사를 건넨 레릭이 밖으로 나간 뒤, 차 향에 감탄한 아르센은 잠시 쉬는 기분이 되어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무슨 말씀을 그렇게 나누셨습니까?"
"이것저것."
귀찮아하면서도 대답은 꼬박꼬박 해준다.
물론 그것을 제대로 된 대답이라 할 수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지만.
"표정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어디까지나 플란츠와 함께 있었을 칼리안을 걱정해서 묻는 중이었다. 새로 자란 이끼 같은 2왕자 말고 곱디고운 얼굴로 어떤 지옥을 보여줄 수 있는지 알려주시는 것에 결코 몸을 사리지 않는 3왕자님 말이다.
저 플란츠를 걱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절대로.
"부군단장, 너."
"네."
"뱀 사냥 해 볼 생각 있나."
어쩐 일로 마법사가 아니라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를 찾나 했더니.
"큰 뱀."
플란츠는 별 것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벌써 두 번째 서류 뭉치를 펼쳐들며 이렇게 덧붙였다.
"저 이제 급여 없습니다. 더 깎을 급여가 없어서 당분간 사고 못 칩니다, 왕자님이신 부군단장님."
서로의 부모와 연을 끊어주는 방식으로 우애를 다지려 드는 처돌다 미친 형제 관계에서 '처돈 형'을 담당하고 있는 플란츠에게 아르센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쪽 술 창고에서 바질리카 한 병 꺼내오는 일과는 조금 다르지 않겠습니까."
바질리카가 뭔지는 몰랐지만 헛소리라는 것은 알아들은 플란츠가 아르센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내 아우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해 볼 생각 있나."
"플란츠 왕자님."
좋은 향이 감도는 찻잔을 내려다보던 아르센이 플란츠를 불렀다. 청량한 새벽 하늘 빛 눈에 이제 막 피어나는 숲이 담긴 듯한 연두색 눈을 바라봤다.
"왕자님께서는 그 일 절대 안 시키실 겁니다. 자칫 잘못되면 세크리티아와 전쟁납니다. 전쟁 날 걱정 없다 하더라도, 왕자님께서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발칸만은 그 땅에 들이려 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칼리안이, 그 누구도 아닌 아르센을, 그 어떤 군대도 아닌 발칸을, 세크리티아에 들이려 하겠는가.
아르센의 말대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플란츠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가지 않고 뱀을 잡을 방법.
미친 동생이 그것을 고민하다 대체 무슨 엉뚱한 결론을 내릴지 여전히 알 수가 없어서.
"그 일 때문에 아침에 이야기가 그렇게 길어지신 겁니까."
"아니."
파란 머리 마법사와 서로 으르렁거리지 않고 대화하는 것이 아마 처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탓에 아주 조금 너그러워진 마음이 된 플란츠가 설명을 하나 덧붙였다.
"누구 속 도려내는 일."
이 말에 아르센이 눈살을 찌푸리며 플란츠를 쳐다봤다. 또 무슨 말을 해서 칼리안 속을 긁어놨느냐는 뜻인 듯 보여서,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아니야."
내가 아니라.
어디 사는 왕세자가 직접 칼을 잡았는데.
"······ 내가 시킨 셈인가."
그 왕제의 형 노릇은 포기하지 말라 하는 바람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던 플란츠가 한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결백한 죄인들은 일이나 하지."
무슨 일인지 더 캐묻기를 포기한 아르센이 킥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백한 죄인이라.
그 말 참 마음에 든다 싶어서였다.
* * *
특별히 싫어하는 과일은 아니지만 즐기지도 않았다.
물론 칼리안만 그랬다.
"좋아하시는 과일인가 봅니다."
시고, 쓰고, 떫고.
자몽이란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맛을 지닌 과일이 아니던가. 지난 번에는 자몽 케이크를 내어 주더니 이번엔 자몽을 고스란히 담아 만든 소르베다. 그 묘한 맛을 한 번 본 뒤 스푼을 내려놓는 칼리안을 향한 란델의 목소리가 텅 빈 방을 울렸다.
"표정이 안 좋구나."
"과일 얘기하는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언제 꺼내든 상관이 있을까."
"걱정하시는 것도 아니면서 말씀을 꺼내시니 그럽니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한들 내가 너를 걱정할 필요가 있겠느냐."
"너무 믿으시네요, 저를. 그래도 사람인데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장담하건대 그럴 일은 없으리라는 듯한 얼굴로 살짝 웃은 란델이 소르베를 입에 넣었다. 그 웃음의 온도가 딱 지금 저 소르베 쯤 되는 것 같다 생각하는데, 입 안에 퍼지는 자몽의 향을 삼킨 란델이 다시 말했다.
"브리센일까, 다른 곳일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소르베를 장식한 말린 자몽 조각에 눈을 둔 칼리안은, 섣불리 란델의 의중을 가늠하여 답을 내놓는 대신 정확한 뜻을 물었다.
"너를 건드리고 있는 곳 말이다. 네 표정이 보기에 좋지 않으니, 무엇이 너를 그리 만들었을까 궁금하구나."
"정원 손질하실 일이 없으니 생각이 많아지셨습니까. 궁금하신 것이 늘어나셨네요."
여름의 끝자락, 정원의 장미는 대부분 시들어 떨어졌다.
로젤리타에서 돌아왔을 때 남아있던 한 송이의 장미를 떠올려보던 칼리안의 말에 란델은 대답 없이 다시 한 번 소르베를 입에 넣었다.
- 아무래도 그 이야기는 내가 직접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연락을 했습니다.
하지 못했던 그 말을 직접 전해주려 칼리안을 찾은 체이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다시 맴도는 기분이 든다. 끝을 모르는 심연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그 심연조차 꿰뚫어 볼 통찰을 지닌 이가 함께 떠올랐던 탓이다.
"네. 별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다행이라는 듯 혹은 아쉽다는 듯 건네진 대답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행동과는 별개로 키리에의 앞에 털어놓았던 조금 전의 기억이 꼬리를 물고 계속 떠올랐다.
- 그 이름을 내가 플란츠 왕자에게 전했던 적 있습니다. 카이리스를 떠나오기 전 날, 플란츠 왕자와 대화를 하다 그 이름을 입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기억하는 것,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알려달라고.'
시스파니안을 만나기 전, 시간의 축을 앞에 둔 플란츠는 분명 칼리안에게 베른의 이름을 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 전해지지 않았군요.
- ······ 나의 입으로는 전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 생각됩니다. 아리안느나 카스트린 경 역시 같았는데 키리에나 마나실 경은 기억을 하고 있었으니.
세렌티.
- 시스파니안의 입도 막으시는 분인데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 미안합니다.
미안해야 할 것은 체이스가 아니었다.
- 미안해요. 칼리안 왕자.
세렌티.
세렌티.
세렌티.
-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 사과의 끝에서도 차마 옛 동생의 이름을 말하지 못한 체이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플란츠와도 남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 형님 탓 아닙니다.
- 그래.
- 세렌티. 만나게 된다면 화풀이는 꼭 해야겠습니다.
- 그래.
플란츠는 그 이상의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왕제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 뒤 칼리안은 별 일 아니었다는 듯 행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있을 테지만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제 막 제 앞가림 하겠다며 이리저리 굴러다니기 시작한 완두콩한테 사실 하나도 안 괜찮다 말할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일어날 수 밖에.
그렇게 키리에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란델을 만나러 왔다.
"마음이 복잡하거든 다음에 다시 오거라."
어느새 깊은 물이 짙은 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체이스와의 대화마저 모두 읽어낸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하게 되는 눈빛에,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란델 형님 뵈니까 복잡한 마음이 싹 가라앉네요."
"다행이구나. 그리 생각해주니."
칭찬 아닌 말임을 알면서도 란델은 차분히 답을 했다.
칼리안의 삼켰던 고운 얼음 결정보다 더 차가운 기운의 말이 이어졌다.
"도움이 된다면 종종 올라오거라."
"도움이 될 것 같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상대방을 향한 진심이라고는 방금 녹아 사라진 소르베만큼도 없는, 배려심 가득한 경계의 말들이 잠시 오갔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을 한 번만 만나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랜 시간에 걸친 안부 인사 나누기가 끝나기 무섭게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란델은,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소르베를 한 입 더 먹은 뒤 느린 대답을 했다.
"부탁인지 지시인지. 그것을 먼저 말해주려무나."
"부탁이라 하면 싫으십니까."
"내키지 않는구나."
칼리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브리센 변경백을 만나세요. 특별한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적당히 시간은 끌어 주시고요."
"너의 이득인지 나의 이득인지도 함께 일러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
그놈 참 따지는 것도 많다.
"저는 속이 편해지고, 란델 형님은 심장이 편해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니 둘 모두의 이득이라 하면 되겠네요."
그레이 브리센을 잘 써먹어서 에반을 속인 뒤에 에반을 없애고 나면 그놈의 완두콩이 이상한 협박을 더는 못할 테니 칼리안은 속이 편해질 테고, 완두콩이 제대로 나서서 도와주면 란델의 심장에 묶인 맹세의 인도 해결이 될 테니 란델 심장도 편해질 일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란델이 눈을 내리뜨며 말했다.
"가능한 날짜를 확인해서 내려보내마."
칼리안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 뒤 다음 질문을 했다.
"레넌 브리센은 언제부터 만나셨던 겁니까."
"만나지 못했다."
"한 번도 못 만나신 겁니까."
"로젤리타 중에 네가 치워갔지 않았더냐."
세작 푸른 솔새가 헤일 라트란 백작과 결탁해 모은 신물을 란델에게 건네주려 한 것이, 바로 당시의 브리센 상단 상단주였던 레넌 브리센이었다. 레넌이 자꾸 앞길을 막는 것을 더 참지 못했던 칼리안이 브리센 상단도 사들이고 레넌을 정리하지 않았던가.
그 일을 상기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때문입니까."
"그렇지."
세상 모든 일을 대체로 자기 탓으로 돌리는 어떤 놈이랑은 참 많이 다르다.
두 형님을 적당히 반반 섞어놓으면 안되나 싶은 마음을 애써 접은 칼리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을 전했다.
"죄송하다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편한대로 하거라. 어차피 주고 받는 관계이니."
드미레아가 할 법한 이야기를 란델이 하니 복잡한 심정이 되어버린다.
"그런 말씀은 좀 서운한데요. 형제 사이에."
이 말에, 시선을 올린 란델이 칼리안을 직시했다. 차갑고, 깊고, 막막한 물이 꺼지지 않을 불을 직관했다.
"불편한 말을 올리는구나."
"그러십니까."
"새삼스럽고."
칼리안이 웃었다.
란델의 눈을 볼 때마다 늘 생각나는 그날의 깊은 바다. 그렇게나 깊었던 추운 바다에 체이스는 대체 어떻게 뛰어들었던 걸까 싶어서. 겁도 없이 무슨 정신으로 뛰어들었을까 해서.
란델이었다면, 물론 플란츠가 다쳤던 날에 이미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지만 어쨌든 란델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분명 앞 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을 체이스, 그리고 생각이 앞섰을 란델이 서로 너무 다른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물어보거라."
"왜 그냥 가셨습니까. 그 날. 도와주시지 않고."
이런 칼리안의 질문에 란델은 주저함 없이 입을 열었다. 칼리안이 언급하는 그 날이 언제를 의미하는지는 묻지도 않은 채였다.
"서로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나는 비밀을 지키고, 둘째는 자리를 지켰으니."
출혈이 과해 실리케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는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덕에 반 브리센 귀족들의 시야에서 자연스레 벗어날 수 있었던 실리케의 아들을 떠올린 란델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
지독하리만치 이성적인 이의 대답을 들은 칼리안의 손 끝이 테이블 위에 호선을 그린다.
란델과 체이스는 달랐다.
란델과 플란츠도 달랐다.
"만약 죽어가던 것이 저였다면 그 때는 나서주셨겠군요."
"그 편이 서로 좋은 일이고, 보기에도 좋지 않겠느냐."
칼리안은 목숨을 구하고 란델은 숨기는 것을 들키는 대신 발칸을 등에 업은 칼리안과 손을 잡고. 두 형제의 우애를 알려 브리센에 대응하기 딱 좋을 테니, 그런 상황이었다면 란델이 나서서 치유를 해주었으리라.
칼리안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잘못되고 이기적이라 말할 수 없었다. 우습기는 해도 오히려 왕자로서 가장 올바른 생각을 지녔다 해야 할 일이니 그것을 탓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종 보내주세요. 일정 전달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질문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칼리안을 란델이 한 번 더 쳐다봤다.
"나도 묻고 싶은 것이 있구나."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일어나지도 않았다.
"카밀론 말고, 아르피아 궁으로 갈 생각은 여전한 것이냐."
카밀론에서 개를 키우겠다고는 했는데 아르피아 궁에 가서 무언가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지 않았던가. 그러니 칼리안이 정말 왕위에 오를 생각인지가 궁금했었다.
"형님은 안 가신다 하고. 란델 형님께는 양보 못하겠고. 그러니 제가 가야지 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탐나고 쓰임새 많은 것은 아닌데 그래도 너한테는 왕관 양보 안 할거라는 말에, 란델이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혹시 이제는 목적으로서 그 자리가 필요해진 것은 아니더냐."
다른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왕좌 말고, 왕좌 그 자체를 원하게 되었는지 묻는 말.
"아뇨. 제 꿈은 오히려 조금 더 커져서요."
칼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작은 나라의 왕관은 이제 수단으로 쓰기에도 부족하네요. 나중에는 누굴 좀 만나러 갈 생각이라서."
잠든 세렌티 뒤집어놓고 뒷통수 후려치러 가겠노라고.
그렇게 하면 아르센이 진짜로 동상 세우려 들 테지만 그 때 쯤이면 그 정도는 봐줘야지.
그리고 나서 왕궁 정문에 짧은 이름 하나 대문짝만하게 새겨놓고야 말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정한 막냇동생을 보며, 란델은 마지막 소르베 한 스푼을 입에 넣었다.
여전히 읽어내기 어려운 얼굴을 한 채 가만히 앉아있는 란델을 보던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플란츠와 대화를 했고 히나에게 혼이 났다. 체이스에게 사실을 전해들은 뒤 키리에에게 마음을 털어냈다. 그 후에는 란델을 만나 필요한 것을 요청했다. 해서 이제는 궁금한 것을 물어보러 갈 참이었다.
비에 막혀 걸음을 멈추기에는 지나온 길이 너무 짧으니까. 정신 흐트리지 않고 곧게 걷기에도 아직 먼 길이 남았으니까. 그러니 정신 차리고, 멈추지 않으려 노력하며 헤이시아 궁 터로 가 볼 생각이었다.
지극히 위대한 이를 한 번 더 만나기 위해서.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소르베 맛이 오래도록 입 속에 머물렀다.
시고, 쓰고,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