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20화 (221/527)

제39장. 내가 많이 참았지(1)

칼리안은 있지만 곁에 얀이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얀이 없는 이유야 여러가지였으나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칼리안을 앞에 둔 주변인들이 곤란한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그 곤란함의 이유가 될 법한 것은 딱 한 가지다.

바로, 칼리안이 웃어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웃음의 진위를 알 수가 없어서다.

얀이 없는 상태에서 칼리안이 웃으면 도무지 저것이 좋아서 웃는 것인지 화가 나서 웃는 것인지 기분이 나쁘거나 혹은 아파서 웃는 것인지, 정말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만은 아니었다.

히나는 몰라도 일단 플란츠는 칼리안의 웃음이 터진 이유를 제대로 알아봤다.

지금 칼리안은, 어딘가 크게 한 대를 맞은 기분이라서 웃고 있었다.

"아······ 히나. 그렇구나. 네가 당사자구나. 네 일이었어."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웃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내 멋대로 약한 사람으로 만들고, 멋대로 지켜주려고 하고, 내가 곁에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할 것처럼 멋대로 단정해버려서 미안해. 진짜 미안. 앞으로는 안 그럴게."

그리고 이렇게, 제일 먼저 반성한 것에 대해 사과의 말을 했다.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플란츠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의 사과에 한 손을 얹었다. 그 행동을 말로 해석해본다면 아마 '나도'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히나를 저보다 어린 사람으로 취급한 적은 없었지만, 은연중에 아무것도 못할 약한 사람으로 여겼던 것은 맞았으니까.

히나의 말마따나 싸움을 못한다는 것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만큼 약하다는 뜻이 아니었음에도.

"그리고······ 내가 오해를 했었어. 그것도 미안해, 히나."

두 번째 사과를 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보다 다시 웃었다.

지금 저 웃음은 아까와 다른 의미임을 알아 본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칼리안이 웃는 두 번째 이유를 눈치채버린 까닭이었다.

'우리 히나가 형님 너더러 어린애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봄볕에 말린 이불처럼 포근하고 책 읽는 겨울 밤처럼 평화로워서 언제나 사랑스럽기만 한 우리 히나한테는 너도 그냥 집 지키는 애송이다, 플란츠' 였지만 맥락만 같으면 되는 일이니까.

그 누가 마음 가는 상대를 보면서 어린애라고 말하겠는가. 그것도 플란츠와는 고작 한 살 차이인데. 태초부터 생을 이어 온 시스파니안조차 말 그대로 까마득하게 어린 하츠아라에게 어린애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플란츠는 생각했다.

- 오해, 한 게 있어요?

"응. 그런 일이 있었어. 아무튼 미안해."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또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애초부터 아무도, 심지어 플란츠 본인조차도 그 단어의 의미를 오해한 적 없었다. 물론 친오빠인 키리에는 논외로 둔다. 키리에는 이 상황을 보고 나서도 온갖 것을 골라 보며 오해해야 할 놈이 맞으니까 그냥 빼고 생각해야 한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 칼리안은 히나의 '좋은 왕자님'에 들어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됐기 때문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똑같은 말을 자신도 들었다는 것은 싹 잊어버린 채로.

"그만."

아무튼 저 혼자 오해하고 화가 나서는 지금껏 몇 번이나 화풀이를 했는지 저 놈은 모를 거다. 그러니 지금 사과를 히나에게 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그리고 흐린 날 그레이 허리 아프듯이 욱신거리는 듯한 목덜미 생각 때문에 짜증스러운 얼굴이 된 플란츠가 칼리안을 향해 말한 뒤 히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 돌렸다기보다는 혹시 또 다른 말을 할까 싶어서였다.

플란츠의 말에 간신히 웃음을 멈춘 칼리안이 히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알아들었다는 말이었지 그것이 알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히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러다가는 왕자들 앞에서 허리에 손이라도 얹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로 둘을 쳐다보던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 안, 가시겠다고, 약속, 해요.

그러자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히나의 얼굴이 엄하게 변하자, 칼리안이 달래듯 입을 열었다.

"히나. 그것 말고 다른 것 약속하면 안될까?"

그리고는 누구보다 자상한 얼굴이 되어 부탁을 건네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가려고 했는데. 어떻게든 내가 가려고 했는데 형님도 너도 이렇게 말리려고 해서. 다른 것 약속할게, 히나."

이야기 해보라는 듯, 끄덕끄덕.

"우리도, 너도, 세크리티아에 아무도 안 가도 될 만한 방법을 생각해볼게. 그런 방법이 없으면 그 때 네 말 들을게. 꼭 들을게."

그것을 보고 있던 플란츠가 한 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고양이 상자고 뭐고, 신 귤이고 뭐고, 악몽이고 뭐고 다 필요 없던 거다. 다 필요 없이 그냥 히나만 있으면 이렇게나 쉽고 빠르게 저 놈 고집이 꺾인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러니까 이제 답 없는 일 생기면 저 놈 아빠 말고 히나한테 일러바치면 된다는 거지.

맞은편에 앉은 똘똘한 형님이 새로운 것을 또 잘 배웠음을 모르는 채로, 칼리안이 곁에 서 있던 히나를 올려다 봤다.

"응? 히나."

제 얼굴 써먹는 법을 칼리안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카이리스에 또 있을까. 칼리안을 앞에 둔 레이븐처럼 동글동글 순진해진 눈으로 올려다보며 말을 하는 것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드미레아와 플란츠 뿐일 거다. 제일 약한 것은 당연히 앨런이고.

- 거짓말, 아니죠?

"나 거짓말 못해. 얼마나 못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아마 세렌티께서도 하루하루 깜짝깜짝 놀라고 계실걸.

이렇게 잘 들키고 다니는 사람인 줄 미리 아셨으면 이런 일을 나한테 시키지도 않으셨을텐데 그건 좀 아쉽네.

- 알겠어요. 믿어 볼게요.

그래도 칼리안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원하는 답을 들은 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못해도 연기는 잘 하는 칼리안 아니던가.

그러니, 고맙다는 듯 생글생글 웃어보이는 칼리안 머릿속에 또 무슨 계획이 설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불안해지는 것은 오로지 플란츠 뿐이었다.

* * *

이번에도 칼리안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 궁금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그러니 이렇게 체이스가 먼저 연락하여 상황을 물어볼 수 밖에.

칼리안에 대한 걱정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또 웃음이 나왔다.

미안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여서 웃음이 나왔다.

-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할수록 주변에서 보내는 걱정만 더 늘어나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네요.

받아서 기분 좋아지는 걱정은 얀의 것 뿐, 체이스의 걱정은 그저 미안할 뿐인 칼리안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 히나의 말마따나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안에 있으면 누구도 걱정하지 않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히나도 체이스도, 그리고 이제 툭하면 같이 도는 삶은 완두콩이 걱정하지 않을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던 중에 들려온 체이스의 목소리가 또 어찌나 반갑던지.

카이리스의 비는 사납고, 피하지 못하고, 늘 옷을 적시고 마는데. 체이스의 목소리는 그저 단비같았다. 반갑고, 기다려지고, 늘 그리웠다.

- 아리안느는 이제 내가 괜찮다 하는 말은 절대 안 믿겠다고 합니다. 내 생각에는 칼리안 왕자의 말도 반 쯤은 걸러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떨까요.

- 이번에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괜찮아졌어요. 멈춰세우고 두들겨 잡아주는 손들이 있어서요.

저는 괜찮아졌는데, 저 때문에 다른 한 놈이 생각지도 못한 비를 맞아서. 그것이 미안하네요.

플란츠에게는 전하지 못할 미안함. 잊고 지냈을 것을 떠올리게 해서, 알지 않아도 될 것을 눈치채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것을 체이스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어서 속으로만 그리 생각을 했다.

그 검이 그런 의미였을 줄, 몰랐어서.

- 저만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오로지 저만.

몰라도 될 것을 알게 되는 바람에 안 그래도 삶아져 있던 완두콩이 또 물에 빠졌고, 체이스 역시 꿈같은 꿈과 악몽같은 현실 속을 거닐고 있으니.

- 상관 없습니다. 괜찮아요.

숨겨진 말에서 적어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알아들은 체이스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리듯 곧바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 어제 이야기를 다 마치지 못한 탓에. 혹시 궁금한 것이 더 있을까 물어보려 연락을 했습니다. 조금 애매한 시간이기는 한데 나 역시 오늘은 일정이 있어서.

먼저 연락해서는 혹시 나한테 궁금한 것이 있느냐 물어보는 이상한 말이었지만 칼리안은 웃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체이스에게 먼저 무언가를 묻지 못한다는 것을 칼리안도 알고 있던 탓이다.

- 혹시 남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요. 칼리안 왕자.

전날, 숲에서 대화를 하다 플란츠가 도착하는 바람에 대화를 급히 마무리 했었다. 그 후로 그레이를 만나고 플란츠와 또 한바탕 일을 치르고 히나를 만나고, 시간을 쪼개어 쓰느라 이제껏 대화를 잇지 못했었다.

"애옹."

발치에 다가온 루시에게 손을 뻗으니 제가 알아서 머리를 가져다 댄다. 정말 어쩌면 이렇게나 사람을 좋아하는지.

단단한 듯 작고 동그란 그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었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불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더니 곧장 맞은 편에 있던 담백한 놈한테 가 버렸다.

- 네. 안그래도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자는건지 죽은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얼굴로 눈을 감고 앉아있던 플란츠가 무릎 위에 올라온 루시를 쓰다듬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체이스에게 대답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놈은 생각할 것이 많아 보이고, 칼리안은 대화를 나누어야 했으니 이만 내려가려는 것이었다.

"그냥 있어."

그랬더니 플란츠가 이런 말을 했다.

로젤리타를 끝내고 왔을 때 '잘 왔다' 했던 말을 들었던 그 날처럼 놀란 얼굴이 된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역시 아까 먹던 것 중에 맘에 안드는 게 있었나본데.

뭘 잘못 처먹지 않고서야 놈이 저럴 리가 없지 않나. 웬일로 안 쫓아내고 있으라 하는지.

"비."

비는 오고 할 말은 남았을 텐데, 내려가서 체이스와 대화하고 남은 말 하러 다시 올라오느라 쓸데 없이 비 맞지 말고 그냥 있으라는 뜻일 터였다.

"네."

마찬가지로 담백하게 대답한 칼리안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체이스를 향해 말을 했다.

- 참견할 일은 아닌지 모르겠으나······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를 함부로 들춰보려 하지 말아주십사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사람이니 섣부르게 건드려보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시는 척, 평소와 똑같이 움직여주셨으면 하는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말에 한참동안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정말 한참동안 대답이 없어서 불안해진 칼리안이 체이스를 부르려 할 때, 체이스로부터의 말이 들려왔다.

- 사실 이미 한 번을 들춰 보았습니다. 정말 기억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느 누구로부터 무슨 말을 전해듣고 그런 결론을 낸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대화를 했습니다.

체이스와 플란츠가 같은 것을 생각해서 데블란을 한 번 들춰봤었다. '베른'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데블란이 그이름을 기억하는지를 확인해 본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을 칼리안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지만 확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체이스는 가능한 대화의 내용은 숨긴 채 이야기를 했다.

- 기억 못하는 것을 확인했고 별 일은 없었으니 걱정 마세요. 괜찮으니까.

- 쉽게 단정짓지 마세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 쉽게 믿으시면 안 됩니다. 별 일이 없었다 해서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 칼리안이 조금 빠르게 경고를 전했고, 혼탁해지다 되돌아오던 데블란의 두 눈을 떠올린 체이스가 대답했다.

- 네. 안심하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니 그것도 걱정 말아요.

- 그런데 어떻게 확인을 하셨고 어떤 대화를 나누셨다는 말입니까. 궁금하네요.

그런데 하필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확인을 했는지, 다시 말해 무슨 질문으로 데블란의 속내를 떠보려 했는지가 그냥 궁금해서 물어 본 것이었다.

- 그것은.

그런데 체이스의 대답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칼리안에게 있어서는 별 생각 없는 그냥 궁금증이겠으나 체이스에게는 최대한 피하고 싶던 말이었으니 어떤 대답도 해 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플란츠를 쳐다봤다. 여전히 살짝 눈을 감고 있던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물었다.

"체이스 왕세자께서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기억을 찾았는지 아니면 소문으로 접해서인지를 확인하려 대화를 했고, 확인해보니 기억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하시는데."

플란츠의 눈꼬리가 찌푸려진다.

무슨 말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알고 있는데 칼리안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다.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엇입니까. 그 방법."

별 생각 없는 궁금증은 의심이 됐다.

분명 둘이 뭔가를 숨기고 있지 않나. 그 의도야 당연히 칼리안을 위해서겠으나 상대가 데블란이라면 칼리안도 알아야 했다.

- 그것은 묻지 않고 넘어가 주었으면 합니다. 칼리안 왕자.

체이스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묻지 마."

플란츠 역시 같은 말을 했다. 비밀 들키는 것 참 잘 하는 체이스에 대해 온갖 욕지거리를 삼켜내면서.

"형님."

칼리안의 붉은 눈이 플란츠를 응시했다.

"얘기, 해주세요. 괜찮으니까."

그 붉디 붉은 눈이 정말 붉은 색인지 혹은 다른 색인지 잘 모르겠다고.

플란츠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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