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19화 (220/527)

제38장. 그 검(4)

무뎌졌다.

무뎌진다는 것은 결국 날 서 있던 것이 마모되어 날카로움을 잃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과거의 언젠가에는 지금보다 더 날이 서 있던 때가 있다는 소리다.

- 내 동생이 많이 무뎌졌기에.

때문에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단순한 궁금함이라 하기보다는 조금 어처구니 없는 기분이 되어 의문을 가졌었다. 굳이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본다면 바닥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은 채 끝도 없이 주욱 늘어나는 루시의 허리를 처음 보았던 날에 느낀 정도의 어처구니 없음이라 해야 할까.

그러니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접한 탓에 생겨난 자연스러운 의문인 것이다. 루시 허리가 도대체 얼마나 긴 것인지, 루시가 칼리안에게는 정말 개구리를 잡아다 주는지, 루시를 쓰다듬으면 왜 갑자기 그릉그릉 소리를 내는지, 등등. 그런 의문과 같은 종류의 궁금함 말이다.

'대체 과거에는 어땠길래.'

그렇게 생긴 의문이었다.

체이스의 말마따나 지금의 칼리안이 무뎌진 것이라면 본래에는 대체 어땠는지를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다. 과거 언젠가에는 지금보다 더 날카롭고, 지금보다 더 인내심이 없었는지.

어쩌면 지금보다 더······.

그런 의문들이 하나 둘 쌓여 도저히 더 담아 둘 곳이 없게 되었을 때, 놈이 닫아 걸었던 창문을 열게 했다. 그렇게 비가 오던 그 날, 시간의 축의 앞에 선 놈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왕제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놨었다.

그리고 다시 닫았다.

그것이 두 번 다시는 열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칼리안도 알았고 플란츠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더 생겼다. 놈이 지난 밤에 어디에서 뭘 하고 왔는지 알려주지 않겠다 하여 그 곳이 어디일지 생각하지 않기 위해 잡생각을 늘리다가 궁금한 것을 늘려버렸다.

'그 검은 비밀 값으로 치면 맞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검을 선물했던 날.

본래에도 썼던 것임을 알면서, 굳이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으면서 검을 선물했던 그 날.

체이스를 처음으로 다시 마주쳤던 그 날.

과거의 플란츠가 무슨 검을 썼는지를 저 놈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원수같은 놈에게 같은 검을 쥐여주겠노라 마음을 먹었던 그 속내가 어떻게 뒤집어져 있었을지. 그래서 그 날의 놈은 칼리안이었는지, 아니면 그 왕제였는지. 그것이 다시 궁금해졌다.

생각의 고리를 이어나가던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지나치게 좋은 검을 받아서, 좋은 꿈을 못 꾸겠군."

과연 그 에반이 플란츠를 검의 길에 오르도록 만들었을까. 플란츠가 아무리 자신들의 핏줄이라 하나 플란츠가 정말 그렇게까지 강한 능력을 가지게 그냥 두었을까. 실리케는, 자신의 도구가 그런 힘을 가지길 원했을까.

아니.

그랬을 리 없지.

저리 좋은 검을 플란츠가 어떻게 가졌을까. 브리센의 선물이었을까. 그들의 선물을 그 때의 플란츠가 얌전히 받기는 했을까. 아무 이유 없이 그 좋은 검을 그냥 받아서, 타국의 왕제가 카이리스 국왕의 검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 만큼 소중히 지니고 다녔을까.

아니.

그랬을 리 없지.

그렇다면. 절대로 결단코 검의 길에 오르지 못했을 텐데도 굳이 저렇게나 좋은 검을 지니고 살았다는 것이 과거의 플란츠에게 있어 어떤 의미였을지, 지금의 똑똑한 플란츠가 가늠하게 되리라는 것을 앞에 앉은 저 놈은 알았을까.

아니.

그럴 리 없지.

얌전히 쑥쑥 커서 고양이 키우라는 말이나 하는 저 놈이 아주 오래 전의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면, 저 검을 본래에도 썼다는 그런 말을 해줬을 리 없지. 내가 무엇을 눈치챌지 알았을 테니.

그러니 결국.

"어차피 너도, 그리고 나도. 결국 악몽 속을 살고 있는데."

저 풀대가리 또 뭔 소리 하냐는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리고 다른 말 없이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내리는 하늘은 어둡다. 창 밖은 보이지 않고 창문에 붉은 눈이 비춰진다.

그러니 이건 결국 또 저 망해버릴 비 때문이다.

- 신기하지 않으세요, 형님?

새로이 드는 기억을 본 칼리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악몽에서 깨어났으나 또 다른 악몽 속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탓에.

그렇구나.

어차피 나도, 그리고 너도.

* * *

그 사이 잔뜩 늘어난 자잘한 물집이 아물어갔다.

레몬과 딸기가 들어간 세 잔의 탄산수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은 베로니카가 여전히 신기하다는 얼굴로 상처가 아물어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드미레아의 손을 놓은 히나가 이야기했다.

- 무리하지, 말아요.

지난 번에 드미레아를 만났을 때에도 같은 말을 했었다. 물집 투성이인 손이 아프다면서도 절대 검을 내려놓지 않을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래도 조금은 쉬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손을 보아하니 그 날 건네주었던 차를 과연 마시기는 했을까 싶을 만큼 여전히 엉망이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습니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소개시켜 준 대장장이 솜씨가 좋아서 이제 불필요하게 상처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과거에 드미레아가 썼어야 할 묵빛의 검을 키리에에게 주는 대신이라 하기에는 맞지 않겠지만 충분히 좋은 검을 만들어 줄 수 있을 사람을 소개시켜 준 셈이었다.

"보통 새로운 검은 손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법인데 그 자가 만들어 준 것이 생각 외로 손에 꼭 맞아서 놀랐을 정도니까요."

"왜 갑자기 치료해달라고 온 거야? 지난 번에는 안 받았다면서."

히나 먹으라고 가져온 딸기 초콜릿 쿠키를 먹던 베로니카가 이렇게 물었다. 베로니카가 생각하는 친목에는 상호 평등이라는 전제가 있었고, 그것은 나이와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았으니까.

즉, 드미레아가 소공작이건 아니건 여러 번을 보았으니 서로 편하게 말을 해도 된다고 여긴 것이다.

"내일 칼리안 왕자님과 대련을 하기로 했습니다. 배우기 위한 자리라서 이런 것으로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아서요."

드미레아에게 있어 편한 말이란 곧 경어였다.

덕분에 공작의 후계자가 백작의 손녀에게 존대를 하고 하대를 받는 이상한 광경이 되었으나, 공적인 자리가 아니었으니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양쪽 모두 편하면 된 것 아니겠는가.

- 원래, 다른 날에 하기로, 했다고, 오빠에게 들었는데, 날짜를 바꿨나봐요.

"네, 아무래도······."

이렇게 말한 드미레아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칼리안 왕자님이 사고를 낼 것 같다는 말을 이 자리에서 하기에는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히나는 몰라도 베로니카까지 있는 자리였으니까.

"3왕자님 또 사고치실 것 같다고 할아버지가 그랬어."

그런데 그 말이 베로니카에게서 튀어나왔다.

어머니가 또 다른 지역으로 일을 나선 탓에 아침부터 마법 학원이 아니라 빌헬름 관에 오고 있는 베로니카의 말에 드미레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래서 할아버지 요즘 안절부절 못해. 엄마 말로는 꼭 아빠 어렸을 때 대해주듯이 왕자님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 같대."

말을 마친 베로니카가 웃었다.

저보다 한 살 많은 작은 아빠가 생긴 셈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웃지 않을 수가 있나.

- 그만큼, 많이, 아낀다는 것이니까, 보기 좋아요.

히나가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베로니카가 배시시 웃던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할아버지 요즘 보기 좋아. 나랑 엄마도 많이 챙겨주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빠 생각 많이 했었는데, 요즘에는 예전같은 얼굴 잘 안해서 좋아."

이 말에는 드미레아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같은 사람으로 인해 같은 변화를 겪고 있는 한 사람, 얀이 떠올라서였다. 얀 역시 이제는 떠난 이를 생각하는 일이 줄었으니까.

- 서운하지는, 않아요?

하고, 아플 만한 곳을 항상 잘 알아보는 히나가 물었다. 앨런이 로닐에 대한 생각을 덜 하게 된 것이 서운하지 않느냐고. 그리고 드미레아에게는 그 말이 얀에 대한 내용으로 조금 바뀌어 들렸다. 얀이 2층의 오른쪽 끝 방을 가슴에 묻어가는 것이 서운하지 않은지.

"안 서운해. 가끔씩은 잊어버려야 산다고 엄마가 그랬어. 엄마도 그래서 가끔씩 잊어버리고 산다고 했어. 가끔 잊어버려야 또 가끔 생각나고, 그래야 산대."

서운하지 않습니다, 라고 드미레아도 같은 말을 떠올렸다.

너무 어려서 잘 기억나지 않는 아빠, 혹은 오빠. 그 자리를 대신해주고 있는 한 사람을 잠시 생각해보던 드미레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언젠가 얀으로부터 칼리안이 히나를 어떻게 여기는지를 들은 적이 있었지 않았나.

그러니까 지금 드미레아는, 저보다 두 살 많은 딸 혹은 손녀를 두고 저보다 한 살 어린 조카딸을 가졌으며 저보다 두 살 많은 남동생을 만든 어떤 사람을 자신의 정혼자로 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탓이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관계인가.

이게 말로만 듣던 멍멍이 오라버니같은 족보라는 바로 그것인가.

- 그렇게 중요한, 왕자님이니까, 사고 못 치시게, 해야, 되겠네요.

고민이 깊어진 탓에, 드미레아는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히나의 말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았다.

- 치료 받은, 소공작님은, 돌아가서 다시 연습하시고, 학원 안 간 동생은, 빨리 공부해요. 저는, 잠깐, 나갔다 올게요.

이렇게 말한 히나가 새하얀 로브를 벗고 하얀 블라우스와 남청색의 긴 치마 차림을 한 채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저 긴 소매를 당장 걷어붙일 것 같은 기세라는 생각을 한 드미레아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한 얼굴로 맛 좋은 탄산수를 한 입 마신 뒤 내려놓았다.

"비도 오고 조용하고. 참 좋은 날입니다."

그리고는 베로니카를 향해 이렇게 말하며 살짝 웃다가, 빨리 공부하라는 눈을 해 보였다.

* * *

한동안 말이 오고 가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지 않은 한 아이를 함께 떠올렸으나 그 누구도 그 아이를 감히 추억한다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둘 모두 그 아이를 잊어야 살 수 있는 이들이었으나 그 이유가 완벽히 달랐기 때문에.

"애오옹."

히나가 보낸 선물이 담겨있던 상자 속에 들어간 루시가 가는 소리로 울었다. 플란츠에게도 없는, 온도 조절 기능이 들어간 예쁘고 작은 루시 옷이 담겨 있던 빨간 상자였다.

재밌게도 루시는 더위를 피하게 할 옷만큼 그 옷이 담겨있던 상자까지 좋아했다. 옷을 입은 채 상자 안에 들어가서는, 기분이 좋다는 듯 냐옹거렸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결국 상자를 버리지 못하게 된 플란츠가 햇살 잘 드는 창가에 그것을 놓아 두었었다. 그렇게 해 두면 루시는 그 상자가 마치 플란츠의 무릎이라도 되는 양 그 안에 들어가 몸을 말고 고롱고롱 하고 소리를 냈다.

지금도 그런 어느 날의 한가한 어느 때처럼.

말 없는 형제를 보던 루시는 상자 안에 몸을 말고 누워 살금살금 졸기 시작했다.

루시에게 더 중요한 것이 상자였을지 아니면 그 안에 들었던 옷이었을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던 플란츠가 중얼거렸다.

"······ 나도 똑같군."

딸기 향도 나고 민트 향도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플란츠가 잠깐잠깐 잊고 지내던 붉은 눈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마주보면서 말했다.

"내 아우님께서 자꾸 잊으시는데."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 호칭 참 잘도 바꿔 붙인다 싶어서.

"잊지 마. 잿더미에서 구르는 법은 나도 이미 알아."

"네. 아시는 것 같네요."

칼리안은 순순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뱀의 독니에만 온 신경이 가서, 딱 그 시기의 베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데블란의 유령에 쫓기느라 또 잊고 있었던 것을 다시 떠올리면서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크리티아에 가지 않고 그 날이 올 때까지 미룬다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를 손 놓고 기다릴 사람이 아니니, 가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데블란의 눈에서 히나를 가린 채 버틴다면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되겠으나 데블란은 결코 그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이런저런 출구가 있음을 알 테니까.

"엘프를 한 번 구슬렸는데 두 번 못하리라는 법은 없겠죠."

인간들에게 절대로 치유술을 써주지 않는다는 엘프의 규율이 과연 얼마나 탄탄한 것일지, 데블란이 내어놓을 맛좋은 먹이 앞에서도 참을 만큼일지 알 수 없지 않나.

"그냥 두었다가 엘프들에게 치료를 받고, 혹시 낫게 되면 머리만 더 아플 것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같은 빛을 띠었으나 조금 전 보였던 누군가의 잔재는 다시 완전히 지워낸 붉은 눈으로 돌아온 칼리안이 찻잔을 잡으려다 잠시 멈췄다.

톡, 톡, 톡.

버릇같은 소리가 몇 번인가를 울리고 난 뒤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 똑똑똑

주저하는 듯한 여러 번의 소리 뒤에 점점 커지는 노크 소리가 울리고, 잠에 들려던 루시가 눈을 번쩍 뜨며 도도도도 문 앞으로 달려갔다.

"들어와."

플란츠의 허락에 문이 열리며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방문자가 두 형제가 있던 방에 들어왔다.

하려던 말을 멈춘 칼리안이 찻잔에 두었던 시선을 떼었고 플란츠는 찻잔을 잡고 있던 손을 뗐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히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착하고 얌전하게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를 마친 왕자들을 본 히나가 일단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러더니 대뜸 소매를 걷어붙였다.

"히나?"

칼리안이 당황한 소리를 냈고 플란츠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나가 자신의 말을 시작했다.

- 엉뚱한, 부군단장님이랑, 오빠랑, 셋이 갈 거예요. 그래도 위험하면, 협회장님도 같이, 가주실 수 있다고, 했대요. 그리고, 저는, 싸움을 못해도, 말은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왕자님들, 제 일에, 마음대로 끼어들지 말아요.

정말로, 진심으로, 이번에는 봐주지 않고 맴매라도 할 생각을 한 히나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 어린, 애들은, 집에 있어요.

칼리안 상자 속에 누가 들어있든 말든.

플란츠 머리 속에 누가 떠올랐든 말든.

둘이 어떤 악몽을 걷고 있든 말든.

히나는 모르니까.

그런 건 히나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사실도 아니니까.

- 얌전히요.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카이리스의 치유사를 불렀다.

왕자와의 친분, 그리고 엘프와의 자리를 구실로 삼았다.

그 일의 당사자인 히나는 자신이 가겠다고 했다. 대신, 왕자님들은 아무도 안 데려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뱀의 아들로 태어나 소의 아들로 살고 있는 한 놈이랑 애초부터 소의 아들이었던 한 놈이 서로를 쳐다봤다.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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