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18화 (219/527)

제38장. 그 검(3)

앨런이 언젠가 그리 말하였다.

"제가 언젠가 전하께, 데블란이 아무리 손이 과했어도 제 자식에게 관심은 가졌으니 전하보다는 낫다고 하였었는데."

데블란이 아무리 뱀 같은 자라 하나 그래도 제 자식 아까운 줄은 알았다 여겼다. 그렇게 생각했으니 그리 말을 했다.

르메인의 철저한 무관심에 속을 앓다 못해 헤지고 닳아 없어진 가슴팍 안고 사는 왕자들이 딱하고 애처로워서, 끝내 떠나버린 막내의 짧은 생을 차마 슬퍼하는 것조차 해주지 못하고 모질게 구는 것이 끔찍하게 미안하여서, 그래도 너보단 차라리 데블란이 낫다 했던 적이 있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최소한 데블란은 자신의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욕심을 가지게 될 지에 대해 경계를 했으니까. 그 역시 관심이라면 관심일 테니 그래도 르메인보다는 낫지 않겠나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사실 앨런은 데블란이 베른에게 정확히 어떤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칼리안이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고 체이스가 그것을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었으니 앨런이 상세한 내용을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아마 앨런이 그 많은 일들을 다 알고 있었다면 지그프리드령이 보이는 그 언덕에서 결코 발걸음을 망설이지 않았을 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앨런은 베른이 데블란으로 인해 갖은 고생을 했다는 정도의 내용과 데블란 때문에 기사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몇몇 이야기들을 대충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런은 이렇게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말하고 있었다.

"데블란이 낫다니, 제가 말 실수를 크게 했습니다. 꿈에서도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전하께 해드렸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나."

사실 그 이야기에 다소 언짢았었지.

내가 잘못했다는 걸 나도 알고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뱀 같은 그 놈보다 더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거든.

하고 말하면 분명히 또 한 소리가 들려올 것이기 때문에, 르메인은 얌전히 고개만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앨런의 것과 달리 생크림이 올라가지 않은 커피에서 진한 향이 풍겨나왔다.

"이런 되먹지 못한 작자가 제 자식을 어찌 취급할지는 들여다보지 않아도 훤한 일이지요. 그런 자인 줄을 모르고 제가 전하보다 낫다 말했으니 이를 어쩝니까."

어쩐지 오늘따라 조금 더 펴진 것 같은 르메인의 어깨를 향해 이렇게 얘기한 앨런이 한탄하듯 말을 이었다.

"전하나 그 놈이나 똑같은 것을 말입니다. 누가 나은 것을 가늠할 수 없던 것임을 모르고 함부로 위 아래를 비교하려 들었으니, 세상 천지에 이만큼 어리석은 일이 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 언짢았다고 안 하길 잘 했다.

국왕 전하 네 놈이 데블란 그 놈보다 못한게 아니라 그냥 둘이 똑같다고 정정하는 말을 들은 르메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 후에는 데블란보다 못한 놈에서 데블란같은 놈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여러 감정을 담은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 앨런을 쳐다봤다. 앨런은 그 표정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깊은 자기반성을 이어나갔다.

"그래요. 덜 나쁜 부모, 더 나쁜 부모를 구분하는 법이 있을 리 없지요. 나쁜 부모와 괜찮은 부모는 있을지언정, 아이에게 있어 덜 나쁘고 더 나쁜 것은 하등의 차이가 없으니. 그것을 함부로 비교하려 들었다니 제가 아직 배움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과거의 데블란이 부모로서 어떤 자였는지 르메인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으나 지금의 데블란도 체이스를 혹독하게 대해왔을 것만은 분명하지 않던가. 그러니 그냥 르메인이랑 같은 취급을 해 주면 딱 맞겠다 싶어서 하는 소리였다.

"······ 그래. 잘 알아들었네."

그래도 나는 내가 나쁜 놈인 것을 알고는 있다고 말하는 대신, 르메인은 그냥 이번에도 앨런의 말에 얌전히 얻어맞았다. 아무튼 잘못을 한 것은 맞으니 어찌하겠나.

반성을 마친 마법사와 사는 날 내내 반성해야 할 왕이 잠시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생크림 올라간 앨런의 커피는 끝맛이 달았고 르메인의 것은 지나치리만치 썼다.

- 팔락

커피 반 잔 쯤을 비워낸 앨런이 다시 한 번 서신을 펼쳤다. 그리고는 불필요하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미사여구는 제외해가면서 그것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체이스 왕세자를 잘 맞이해 준 것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보답으로, 왕세자와 유난히 친분이 있었다던 카이리스의 3왕자를 초빙하여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다. 카이리스의 국왕께서 체이스 왕세자와 교류를 나누었다 하니 이번에는······."

억누르려 애를 썼으나 다시 화가 치밀어서 더 읽지도 못하겠다는 듯, 차마 구기지도 태우지도 못하는 것이 분하다는 얼굴이 된 앨런이 말했다.

"교류라니. 이런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니 뱀 같은 자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단신으로 이 곳에 다녀갔다 한들, 그런 이유만으로 칼리안을 그 곳에 보낼 이유가 없지. 보낼 생각도 없네."

앨런이야 당연했고 르메인 역시 생각이 같았다.

"······ 아니. 없었지."

이렇게 말을 더한 르메인이 입을 다물었다. 곧 앨런이 서신을 읽어내려가며 상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카이리스에 엘프들이 생활 할 수 있을 터전이 줄어들고 있어 세크리티아의 숲에 정착을 하여도 좋을지를 지속적으로 물었었다. 세크리티아에서는 세크리티아 대왕의 뜻을 이어 세렌티가 아닌 이를 숭배하는 이들에게 숲을 내어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으나······ 시스파니안께서 이 말을 들으시면 참 좋은 핑계다 하시겠군요."

잠시 사족을 단 앨런이 서신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체이스 왕세자를 통해 카이리스가 엘프들과 상호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전해들은 뒤 그러한 정책이 폐단이었음을······ 하. 세크리티아에서도 엘프들과 정식으로 교류를 해보려 한다. 그런데 마침 카이리스에서도 엘프들과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 하니, 카이리스 국왕의 환대에 대한 보답을 할 겸 양국과 엘프의 대표들이 함께 만나 공통된 규율도 만들 겸, 엘프 고유의 능력인 치유력까지 지닌 바 인간과 엘프 간 긍정적인 관계의 온당한 증거라 할 수 있을 히나 베른······ 이 말 왕자님이 보시면 당장 전쟁납니다. 왕자님께 알리지 마시지요. 아무튼. 베른 경과 칼리안 왕자가 대표로 참석했으면 한다."

누가 들으면 카이리스가 세크리티아의 종속국이 아닌가 착각할 만큼 대단한 내용이었다.

말도 되지 않는 억지였다.

들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다 전하께서 물러터진 탓에 생긴 일입니다. 대체 데블란이 카이리스를 얼마나 물렁물렁하게 보았으면 이 따위 말로 이 대국의 왕자를 오라가라 한단 말입니까. 하여튼 전하 때문에 우리 왕자님이 큰 일에 또 휘말리게 생겼으니 이를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대가 말하는 우리 왕자님이 내 아들인데.

왜 내가 또 혼나고 있지.

잠시 짧은 숨을 내쉰 르메인이 말했다.

"기실 세크리티아 왕세자는 플란츠와 더 많이 만나고 돌아갔으니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플란츠를 불러야 하는데 왜 칼리안을 부르려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군."

"궁내의 일은 그 자가 알 수 없겠으나, 체이스 왕세자가 세작들을 이용해 칼리안 왕자의 난처한 상황을 도왔던 일을 알았다면 칼리안 왕자와 친분을 쌓았다 여겼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왕궁 안에서 체이스와 플란츠가 몇 번을 만났든 말든. 밖에서 알 수 있는 내용 상 체이스가 각종 품종과 다양한 깃털 색을 자랑하는 새들을 이용해 제일 많이 챙긴 것이 칼리안이었지 않나.

"그래······. 무슨 이유든 거절해야 한다면 거절하겠네. 그 작은 나라에서 기어이 악을 쓰고 주먹질을 한다 한들 이 카이리시스에 닿지도 않을 테니."

양국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고, 그러다보면 눈치 싸움도 좀 할 수 있고, 잠깐 냉랭한 말 좀 주고 받을 수 있고, 그러다 수 틀리면 때려 없애면 되니까.

"왕권이 약하다 하여 군사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 않나. 혹 전쟁을 치르면 브리센이 다시 힘을 가질 테고 내 권력은 다시 줄어들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무서워 세크리티아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 갈 생각은 없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있으나 마나 눈에 뵈지도 않던 왕권 다시 줄어들어 보아야 큰 차이도 안 나지 싶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놓지는 않았다. 사실 르메인에게 예쁜 구석이 없어 안 나서줘서 그렇지, 앨런이 마음 먹고 나서면 왕권 다시 올려주는 것 정도는 금방이니 거기까지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헌데 그 작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군."

"그 작자는 지금 전하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목숨줄이 간당간당합니다."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앨런이 곧장 대답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병이 깊다 하는데 텐실 치유사를 부를 수는 없고 엘프들은 인간의 병을 치유하지 않는다 하니, 어떻게든 살 방법을 생각하겠다며 이 난리를 피우는 것이지요."

엘프들은 규율이 엄격했다.

칼리안의 말에 따르자면 실로 이기적인 방향으로 엄격했다. 카이리스의 땅에 정착해 살며 카이리스의 인간들과 거래를 하고 혹자는 카이리스의 인간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절대로 인간에게 그들의 치유력을 선사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엘프의 규율이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카이리스에서 그들이 터를 잡고 살도록 눈감아주고 있는 것은, 그들이 카이리스의 인간들과 나름대로의 교역을 하며 적당히 밥값이라 할 만한 일들을 하고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들의 '어머니 나무'가 지닌 힘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이유가 더 컸다.

아무튼 그런 엘프들을 내세워가며 전해 온 이 웃기지도 않는 요구가 무엇 때문인지를 가늠한 르메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목적은 역시 베른 경이겠군."

"맞습니다. 엘프의 입장에서 보면 필요할 때는 엘프고 곤란할 때는 인간이 되는 사람이지요. 엘프들의 입장에서 베른 경의 치유력 행사를 막을 수도 없고 막을 필요도 없는 일이니 그냥 두었겠으나 자칫 참견을 하면 귀찮아질 터이니, 그것을 가지고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세크리티아에서 무엇을 내어놓든 엘프들을 제 편으로 삼았다면, 히나의 치유술에 대해 엘프들이 문제를 삼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카이리스에서도 이번 회담에 참석하라는 소리다.

굳이 칼리안이 가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왕 올 것이라면 체이스와 친하다던 그 3왕자가 직접 와서 세크리티아의 융숭한 대접을 보답으로 받아준 뒤 회담에서 히나에게 불리한 일 생기지 않도록 잘 막고 돌아가라는 그런 소리를 데블란이 한 것이다.

"혹시나 싶어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고작 치유사 한 명 때문에 왜 이런 귀찮은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마십시오. 그 치유사 한 명 잘못되면 카이리스가 조각날 터이니."

앨런의 엄포 아닌 엄포에, 르메인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 물었다.

"혹시 칼리안 그 아이가 베른 경을 마음에······."

그러다가, 내 어여쁜 제자가 네 놈 같은 줄 아느냐며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쳐다보는 듯한 앨런의 눈빛에 조용히 입을 다문 뒤 본래 하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 그래. 어찌됐건 혼자 결정 할 생각 없네. 혹시 세크리티아의 의견에 응하고자 한다면 왕세자위를 정하는 것을 미뤄야 할 것이나, 그에 앞서 당사자들의 이야기도 충분히 들어 볼 테니까."

만약 칼리안이 진짜 그 곳에 갈 생각이라면 왕세자 신분이 아니라 세 왕자 중 한 명으로 가는 것이 덜 위험할 테니 세자위 결정을 미루겠다는 이야기였다. 혹은 가지 않겠다 하면 세크리티아에 당장 거절 의사를 보이고 세자위에 대한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일은 칼리안 왕자님과 이야기를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도 말씀하신대로 당사자 의견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베른 경이 비록 발칸 소속이라고는 하나 칼리안 왕자님의 사람인 것은 맞으니."

"알겠네. 의견이 정해지면 말해주게."

"그리하겠습니다."

대화를 일단락지은 앨런이 남은 초콜릿 하나를 마저 집어 입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단 것 싹 집어먹은 마법사의 빈 자리를 잠깐 보던 르메인이 쓴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 * *

칼리안이 돌아오지 않았음을 앨런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르밀에 찾아온 것은 빈 방에 들어가 칼리안을 기다렸다 말해야 할 만큼 급히 전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앨런이 칼리안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을 일이라면 한 가지 아니겠나.

- 뱀 얘기면 나한테 말해.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빌헬름에 가려다 앨런을 마주친 플란츠가 짧은 말로 앨런을 붙들어 잡아 칼리안에게 '허락'받은 오지랖을 부려가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밥 잘 먹은 칼리안에게 말을 전한 뒤 살기를 접했다.

대략적인 상황을 간단히 전한 뒤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뜬 플란츠가, 커다란 솜뭉치가 되어버린 루시를 툭툭 다독이며 결론을 말했다.

"내가 갈까 하는데."

플란츠의 설명이 이어짐에 따라 이성을 잃지 않도록 다잡아가며 조금씩 누그러뜨리던 살기가 구멍 난 공에 든 바람처럼 일순간에 사라졌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들은 탓에 강제로 이성이 돌아와버린 탓이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침착을 되찾은 칼리안이 조용히 물었다.

"결론이 이상한데요. 형님께서 왜 거길 가십니까."

"바다 보러."

뭐라는거야 이 풀대가리가.

구운 대구도 못 처먹는 놈이 지금 뭘 보러 어디에 간다고 하는거지.

곧 칼리안이 자신의 귀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더니 얀을 보며 물었다.

"방금 루시가 야옹야옹 한 거지? 되게 사람 말 같네."

"짖······."

버릇처럼 짖지 말란 말을 하려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방금 칼리안에게 야옹야옹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형님이 된 입장에서 동생한테 짖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지 않겠나.

"칼리안 왕자님, 말씀······ 읍!"

칼리안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얀은, 더 열심히 플란츠의 시종 노릇을 하겠노라 굳게 마음 먹은 레릭이 플란츠를 대신해 제 간을 배 밖으로 꺼내놓는 것을 막았다. 이 상황에 칼리안을 혼내려다가는 레릭의 혼과 육신이 분리되리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그렇게 자신보다 나이는 많아도 키는 조금 작은 레릭의 입을 콱 틀어막은 얀이 두 왕자를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레릭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시중을 드는 것도, 시중을 든다면서 두 왕자의 야옹야옹과 멍멍 소리를 듣는 것도 여기까지가 허용선이라는 사실 역시 잘 알았으니까.

방문이 닫히는 것을 본 칼리안이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혹시 식사 중에 마음에 안 드시는 음식이 또 있었습니까?"

뭘 잘못 처먹었길래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느냐는 말이다.

참으로 똑똑해서 칼리안의 말을 바로 알아들은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직 형님 너랑 동갑이고 화도 좀 났고 그런데 형님 너까지 사람 말을 안 하니 에라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그냥 막 짖을 거다' 상태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대로 가져본 적 없는 내 형님께서 이제 검도 가지셨고, 궁금한 것도, 욕심도 가져보면서 살기 시작하셨는데, 가지고 싶은 마음이 과해지셨나봅니다. 제 몫의 신 귤을 아예 통째로 뺏어가려 하시네요."

왜 그러는지 알기 때문에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

"거기까지만 하십시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같이 해결하게 도와달라 하였지 나를 대신해 데블란을 만나고 일을 해결하라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귤이 많던데. 하나쯤 통째로 가져오면 안 되는 거였나."

신 귤이 한 개였으면 나눠 먹겠는데 그 귤이 너무 많지 않나. 그러니 그냥 한 개를 통째로 가져와 먹겠다는데 왜 그것이 욕심이라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갚지 않고 도와주겠노라 하시더니 도로 갚으려 하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또 무엇을 받으셨는데 뱅글뱅글 돌아가서 다시 갚아주려 하시는지 모르겠어서요. 저는 더 드린 것이 없는데요."

"그 검."

이미 모든 것이 다 타버려서 세상의 어떤 것도 비추지 않는 그 단단한 검.

별의 조각.

별의 잔재.

"값을 다 못 치른 것 같은데."

"그건 제 비밀 값이라 말씀드렸습니다."

- 본래에도 사용하셨던 검입니다.

"······ 검 값으로 부족한 것 아닌가."

"저 그렇게 계산 못하는 사람 아닙니다. 그냥 형님 쓰시면 됩니다. 저는 이미 다 받았고."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평상시의 얼굴과 비슷한 표정을 지은 채 루시보다 더 큰 소리로 멍멍거렸다.

"아우 된 도리가 있지, 몹시 약하신 내 형님을 그리 멀리 보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형님께서는 그냥 얌전히 쑥쑥 크셔서 고양이 키우십시오."

듣는 플란츠 열받아서 검의 길에 오를 법한 소리였으나 의외로 진심이었다. 어차피 칼리안은 거짓말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냥 지금처럼 이대로 계속 사시면 됩니다. 벌써부터 잿더미 굴러주실 생각까지는 하지 마세요."

제온의 일도 있었고 플란츠의 심장 문제도, 란델의 문제도, 그리고 왕세자 책봉에 대한 문제도. 참 많은 일들이 겹쳐 있지 않나. 그런 칼리안이 이 곳을 떠나면 그만큼 위험해질 일 많을 것이 분명하니 머리 좋은 완두콩이 칼리안을 대신해 세크리티아에 간 뒤 신나게 휘젓고 오겠다 생각한 일은 참 기특하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러지는 마십시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칼리안의 손에 묻은 피 냄새를 며칠이 지나도록 맡아내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니 벌써부터 제 손에 피를 묻힐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리고 창 밖에 쏟아지는 비를 잠시 보다가, 빗속에 드는지 잠에 드는지 모를 얼굴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서는 어느새 꿈이 기껍지 않게 되었고. 저는 어느새 꿈을 꾸지 않게 되었는데······."

고개를 돌려 딸기청 들어간 민트차를 한 모금 마신 칼리안의 새빨간 눈이 플란츠를 응시했다.

"한 명 쯤은 악몽 아닌 꿈을 꾸고 살아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언젠가 비슷한 생각을 홀로 삼켰던 기억이 난 까닭이었다.

아직 그리 늦지 않은 한 명은 제대로 된 꿈을 꿔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막 악몽에서 깬 한 명마저 또 다른 악몽을 꿀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이 여전함을 혼자 깨닫게 된 칼리안이 웃음소리를 냈다.

"형님은 좋은 꿈 꾸셔야죠. 좋은 검도 받으셨는데."

그래.

결국 나는 너까지 유령에 쫓기다 악몽을 꾸게 될 일을 겪게 할 생각이 아직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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