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16화 (217/527)

제 38장. 그 검(1)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근래 들어 보기 힘들었던 활짝 핀 얼굴로 어여쁘게 웃고 있는 3왕자의 손에 그레이의 허리가 부서졌다는 것을 말이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검의 길에 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그레이가 기사 가문 출신이었고 때문에 검술의 수련에 있어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는 하나, 그 역시 소드마스터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상당한 고생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나 힘들게 얻은 힘을 일순간에 모두 잃었음에도 복수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3왕자 칼리안이었다.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곁에 서 있던 것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칼리안을 본 그레이가 아주 잠시동안 후회를 했다.

'실리케가 경고했을 때 말을 들을 걸. 아니면 아예 카이리시스에 가지 말 걸.'

이렇게 머리로는 후회를 하면서도, 몸으로는 재빨리 반응을 했다. 간신히 붙여 놓은 허리를 또 한 번 부서뜨릴 수는 없었으니까.

달궈진 검 위에 멋모르고 올라선 개구리처럼 펄쩍 튀어오른 그레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인사였다.

"칼리안 왕자님을 뵙습니다."

"그래. 그래도 허리는 잘 붙었나보구나. 삐걱거리지는 않는 듯 보이니."

브리센을 대면한 이래 가장 빠르고 가장 격식 있는 인사를 받은 칼리안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이제 잘 숙여지기도 하고. 요즘 치유술이 참 많이 좋아졌구나."

그리고는 이렇게, 그레이 속 박박 긁어놓는 소리를 했다.

그레이가 지난 밤에 술을 입에 대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약 술에 취한 채 잠에 들었다면 저 말에 저도 모르게 살기를 내밀었을테고, 그랬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목이 떨어져나갔을 테니 말이다.

"텐실 신관을 만난 것이냐."

"네, 왕자님. 말콤 체티쉬라는 인물을 만나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름까지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귀한 정보가 술술 나온다.

"말콤 체티쉬라."

지금은 앨런에게 하사된 라트란 영지에 갔을 당시 칼리안이 도움을 주었던 바로 그 신관이 아니던가. 그레이의 단전은 완전히 조각난 채 부러진 허리만 말끔히 고쳐지게 된 숨은 사연을 이제야 알게 된 칼리안이 마음속으로 잠시 놀랐다.

칼리안은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부드러운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허나······ 괜한 짓을 하였구나."

당장 봄바람이라도 불 것 같던 얼굴에 짙고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다시 부러질 것을."

이렇게, 참으로 어여쁘기만 한 그 입을 다시 움직여서는 그레이 인생에 회색 구름 잔뜩 몰려오는 심란한 말을 했다.

- 내 사람 하나 불러내서는 귀여운 짓을 꾸미려 했더구나.

실로 다행스럽게도 에반이나 레넌보다는 아주 조금 더 머리가 좋아서, 칼리안이 찾아온 뒤 꺼냈던 말을 빠르게 상기하는 것에 성공한 그레이가 매우 억울한 얼굴을 했다. 두려움에 완전히 굳었던 몸이나 떨리던 목소리가 진정되었을 만큼 엄청 많이 억울했다.

"제가 불러낸 것이 아니라······."

"변명은 되었다. 상황을 이미 다 알고 왔으니."

"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그 마법사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였기에 이제껏 마법 수련하는 것 말고는 아는 것 없이 살아온 그 순한 마법사를 꼬여냈는지, 그것이 궁금하기는 하구나."

순해요?

아니, 그래. 왕자님 앞에서야 순하디 순한 강아지겠지. 왕자님 눈에 안 순해보이면서 살아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순하겠지. 순하니까 멀쩡한 허리로 살아 숨쉬겠지.

마차 한 대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둔 그 순한 마법사의 퀭한 눈을 잠시 생각해보던 그레이가 질색한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며 말했다.

"왕자님. 얼마 전에 그 마법사가 저를 먼저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는."

"헌데. 먼 길을 왔더니 다소 피곤하구나. 간밤에 내가 다른 일을 좀 하기도 해서."

······ 다른 일 뭐 하셨는데요.

누구 하나 땅에 묻어 놓고 오신 것은 아니리라고, 그렇게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해가며 표정을 관리하는 그레이를 보며 슬쩍 웃은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귀빈 맞이가 이렇게나 무례해서야. 앉을 자리조차 마련하지 않는 것이냐. 아무리 브리센이라지만 예절이 엉망이구나."

무례요?

예절이요?

여기 제 침실인데요. 남의 침대 머리맡에 대뜸 찾아오셔서 제 허리 또 동강 낼 요량이라고 말씀하시는 귀빈께서 예절이라니요. 말이 좀 이상한데요.

아 그래, 피곤은 하시겠죠. 여기가 6층인데 여기까지 올라오시느라 더 피곤하시겠죠.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만들어 둔 성 외벽을 대체 어떻게 타고 올라오셨는지 몰라도 아무튼 피곤은 하시겠죠.

그래서 간밤에 누굴 묻어놓고 오셨는데요.

하고 싶은 말도 참 많았고 궁금한 것은 더 많았지만 그 중 어느 하나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그레이가 비척비척 움직였다. 허리도 시리고 마음도 시렸지만 말 안 들으면 이번에는 정말 사지를 잘근잘근 밟아버릴 것 같은 저 새빨갛고 형형한 눈빛 때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말 못하고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를 빼 주었다.

변경백이 제 시종이라도 된다는 듯, 당연한 접대를 받는다는 듯한 태도로 그 자리에 가 앉은 칼리안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린 뒤 입을 열었다.

"앉거라."

결국 그레이는, 잠자리에 들었던 터라 바지 위에 셔츠 한 장만 껴입고 있던 자신의 가벼운 차림새에도 신경쓰지 못하고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 그레이의 얌전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꾸미려던 짓이 괘씸하여 만나자마자 밖으로 던져버릴까 다시 밟아버릴까 고민을 하며 이리 찾아왔는데."

그레이 앞날에 먹구름 끼는 소리가 또 나왔다.

그러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오해를 어떻게 풀어낼 틈도 주지 않은 채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요즘 인내심이 좀 자랐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마. 다만 또 그런 짓을 벌이면 그땐 나도 내가 어찌 할 지 모르겠구나."

이렇게, 혼도 내고 용서도 해 주고 경고도 했다.

아.

이 얼마나 어른스러운 아량인지.

"감사합니다, 왕자님."

스스로 뭔가를 되게 뿌듯해하는 얼굴이라서, 그레이는 칼리안이 오해한 것에 대해 해명하는 것도 못한 채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어차피 용서도 받은 김에 그냥 잠깐 억울한 것이 허리 또 부러지는 것보다는 백만 배 쯤 나을 것 같아서였다.

"후작위에 오르고 싶더냐."

덕분에, 곧바로 튀어나온 칼리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만약 집사가 그레이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당장에 멍청하다는 둥 쓸모가 없다는 둥 지능이 모자라다는 둥 온갖 소리를 쏟아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험한 말은 잘 할 줄 모르는 칼리안은 그냥 그레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도록 조금을 기다렸다.

"그것을 왜 물어보십니까."

"가지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이는구나."

아르센과도 이미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레이는 그 자리에서 아르센에게 후작위에 욕심이 있음을 알려 준 뒤 수도에 갈 준비를 착착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플란츠의 손을 잡은 에반이 레넌을 찾아다 놓고는 그레이가 설 자리를 싹 없애버렸지 않았나.

"네, 왕자님. 저는 텐실의 국경을 막은 채로 평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 이 자리를 지키고는 있습니다만."

"특별히 잘 막고 있는 것 같지도 않던데. 텐실의 기사들이 국경 넘는 것도 묵과하지 않았더냐."

"묵과라니, 아닙니다. 그 일은 텐실의 국왕과 란델 왕자님께서 그들의 신분을 감추고······."

"묵과. 하지 않았더냐. 알면서도."

그레이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란델 형님을 지지하던 너는 실리케가 내 어머니를 독살한 것을 묵과하였고, 레넌 브리센 자작이 나를 위한 독을 구해 실리케에게 전했던 것에 대해서도 묵과하였고, 브리센 자작이 신물을 빼돌려 란델 형님께 전달하려 한 정황도 전부 파악했으나 묵과하였고, 텐실의 기사들이 신관으로 위장해 국경을 넘는것도 묵과하였으며, 또한."

잠시 말을 끊은 칼리안이 그레이의 눈을 응시했다.

"내 어머니의 추숭에 화가 난 에반 브리센 후작이 나를 습격하려 한 정황을 알고도 묵과하였다."

먹잇감을 내려다보는 뱀의 눈으로, 겁에 질린 채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마주 바라보는 개구리의 것과 같은 두 눈을 깊숙이 쳐다봤다. 그리고.

"내 말이 틀리더냐."

그래서 넌.

내 말을 알아들을 머리를 가졌는가.

* * *

- 제가, 자상한 왕자님, 혼내드릴까요?

칼리안과 숲에 다녀온 다음 날의 이른 아침.

제발 혼 좀 내 달라는 말을 얼굴 가득 새긴 채 히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이는 레릭을 무시한 플란츠가 대답했다.

"됐어."

칼리안은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순수한 대련이라고 항상 말하지만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칼리안과 대련을 하면 아르센은 늘 목젖을 찔렸고, 플란츠는 늘 목을 베였다.

그리고 키리에는 멀쩡했다.

그랬으니 그것이 감정 없는 대련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혼을 내 달라고 하면 진짜 그렇게 해 줄 것이 분명한 히나가 생긋 웃었다.

- 상처, 치료 했어요.

지난 밤,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마력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기는 했다.

물론 그 방법을 말로 듣고 곧바로 마력을 슉슉 쌓아갈 수 있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녹록했다면 빌헬름관에 있는 파란 머리의 마법사가 왕족을 상대로 그렇게 자존심을 지키며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르센이 아니더라도 기사들을 상대로 기민하게 잘 싸우는 마법사들이 사방에 널렸을 테고, 그랬다면 아르센은 급여 대신 목숨줄이 깎였을 테니 말이다.

'하루에 한 번 씩 마력을 느끼고 다루는 것을 연습해가면서, 나중에 검의 길에 오르게 되면 쌓여 있던 마력을 오러로 전환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낯선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눈치 챈 것이 틀리지는 않았었는지, 칼리안은 플란츠에게 선물했던 묵빛의 검을 보며 짧은 말을 덧붙였다.

'그 검, 본래에도 사용하셨던 검입니다.'

검을 건넬 때에는 해주지 않았던 말.

본래에도 '형님'이 사용했던 검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 검을 가지지 못해서 얼마나 억울해 했었는지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때의 플란츠가 검의 길에 올랐었는지, 그 때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그런 것들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세요. 고양이 키우시려면.'

다만 오러를 담을 수 있을 그 검을 과거에도 사용했다는 것만은 알려주었다. 그 의미를 스스로 상상하고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 좀 더 자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이번에는, 좀 더, 깊이 베였어요. 두 분, 또 싸웠어요?

물론.

얼마나 억울했는지를 말하지 않았을 뿐. 가지고 싶던 것을 가지지 못했던 그 날의 기억 때문에 아주 조금 더 감정적이 되었을지 그렇지 않았을지는 칼리안만 알고 있는 사실일 터였다.

"안 싸웠어."

진짜 싸웠으면 살아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때문에 플란츠는 이번에도 역시 간단하게만 대답을 했다. 칼리안의 정체를 모르는 히나는 둘이 참 많이도 투닥거리는 형제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웃음을 보이며 플란츠의 맞은편에 앉았다. 히나를 빌헬름관까지 '호위'해 줄 키리에가 올 때를 기다려야 했던 탓에 시간이 조금 남아서였다.

보존 마법 덕분에 싱싱함을 잘 유지하고 있는 생딸기와 생크림이 올라간 비스킷을 한 입 먹은 히나가, 벽에 세워 두었던 묵빛의 검을 보다 손을 움직였다.

- 좋은, 왕자님하고, 잘 어울리는, 멋있는, 검이에요. 오빠도 그렇지만, 좋은, 왕자님한테도, 꼭 어울리는, 검이라고, 생각해요.

별에서 떨어져 나와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난 뒤에 단단히 남은 조각이라서.

생각한 이유가 어쩌면 다시 상처가 될지도 몰라서, 그것은 설명하지 않은 채로 히나는 이렇게만 말했다. 그런데, 히나의 말에 대체로 다 긍정하던 플란츠가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보다는 내 아우님 쪽인데."

칼리안.

현연한 별의 수호자.

그런 이름을 지닌 이에게 그보다 잘 어울리는 검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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