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15화 (216/527)

제37장. 없거나 한 번(6)

"······ 환장하겠네."

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싫다는 소리인지, 넘겨짚지 말라는 것이 싫다는 소리인지, 제 입으로 이름 부르는 것이 싫다는 소리인지, 그것들 전부 다 싫다는 소리인지 고민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그냥 내가 환장하겠다.

돌다 돌다 처돌아도 나 하나만 돌겠다는데, 눈 떠보니 삶은 완두콩 한 알이 내 옆에서 같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을 또 보게 된 이런 기분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 마땅한 말이 없다.

"제가 이런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도대체 득이 될 것이 뭐 있다고 옆에서 자꾸 같이 돌겠다고 하는지도 모르겠고 저 놈이 자꾸 같이 도는 바람에 내가 못내 환장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카이리스에서 제일 비싼 실크로 곱게 포장한 루시 응가를 선물받은 기분인 것 같기도 하고.

"형님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우리 언제 만난 적 있었니.

혹시 내가 언제 너 때렸니.

피망 준 게 그렇게 싫었니.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니.

"정말······ 왜 이러십니까."

플란츠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감싼 채 이야기하는 칼리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또 참는다.

주변에 보는 눈도 없고 제 눈에 뵈는 것도 없으니 잘됐다 원수같은 빗자루 이 참에 그냥 죽여버리자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또 참는다. 화를 억누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낙엽 지듯 바스락거리는 목소리로 얌전히 묻기만 했다. 왜 이러느냐고.

그런 칼리안의 머리 꼭지를 말 없이 쳐다보던 플란츠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궁금해서."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이름."

"칼리안입니다."

"말고."

"칼리안, 입니다."

속사포처럼 오고 간 문답 끝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그걸 아는 새끼가."

그걸 아는 새끼가 제 이름 확인시켜달라 했느냐고.

혼자 다 납득하고 이해하고 다 떠안겠다고 신 귤 냄새를 그렇게 풀풀 풍기면서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소리를 하는데 내가 네 놈 말을 듣게 생겼냐고. 나이도 이름도 몰랐는데 이제 알고 싶지도 않아진 눈 빨간 놈을 앞에 놓고 꽤 오랜만에 욕을 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플란츠를 쳐다봤다.

내일은 날이 흐리려는지, 가느다란 달빛이 붉었다.

마음이 흐려졌는지, 칼리안의 눈도 붉었다.

"······ 하."

그 짧은 한숨 한 번에 세상의 모든 욕지거리가 들어있음을 알아들은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얘기 좀 하시죠."

일방적으로 말을 전한 칼리안이 타박타박 앞서 걸어갔다. 할 말이 너무 많은 탓에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진작부터 저 놈과 얘기중이었음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나누기 더 나은 곳으로 갔다.

멀지 않은 작은 개울 근처로 간 칼리안이 작고 낮은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마뜩찮은 얼굴로 서 있던 플란츠도 결국은 아무 바위 하나를 골라 앉았다. 그것을 보았으면서도 칼리안은 말 없이 물 소리만 들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잘 도는 동생 둔 덕에 같이 돌게 된 형을 앞에 둔 채로, 잘 참는 형 둔 덕에 같이 참게 된 동생이 입을 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칼을 잘 씁니다."

멀쩡한 목덜미가 욱신거리는 느낌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차갑게 가라앉은 숲의 공기 속으로 여전히 바스락거리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많았다는 말로 셈을 해내기 어려울 만큼 많이 베어 봤습니다."

세크리티아와 카이리스 사이에 전쟁이 나기 전부터 베른의 생은 이미 그 자체로 전쟁이었으니, 전쟁을 겪었든 겪지 않았든 그 수가 많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 물론. 뺏은 적도 많지만 지킨 적도 많기는 합니다."

가장 많이 지켜낸 것은 체이스의 목숨이었고 체이스가 아니더라도 꽤 많은 목숨을 지켜봤다. 칼리안이 된 이후에도 키리에와 히나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앨런과 얀의 목숨까지 지켰다. 앨런과 얀은, 일반적으로 '지킨다'는 말과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칼리안이 살아있기 때문에 제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들의 목숨도 지킨 것이 맞기는 맞을 터였다.

"그런데 누군가를 살린 적은 딱 한 번이었습니다."

이성이고 계산이고 다 때려치고 그냥 살린 사람.

"살려야 할 이런저런 이유가 나중에 생각나서 붙여놓긴 했지만 그 때는 그냥 살렸습니다. 살려 놔야 할 것 같아서요."

그것이 하필 플란츠였다.

그래.

하필, 플란츠였다.

하필 그 플란츠를 앞에 둔 칼리안이 세뉴 강으로 향하는 물소리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제 평생을 통틀어 없거나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그런 일을 벌인 그 날부터 제 일이 전부 다 꼬인 것 아십니까. 도무지 한 가닥으로 풀어낼 수 없을 만큼 전부 다 엉키고 뒤얽혔습니다. 지금까지도요."

언제나 고요한 세뉴강으로 흘러가는 물같은 목소리인데, 그 안에 담긴 말은 결코 고요하지 않았다. 바람 가득한 날의 소나기보다 거셌다.

착실하게 잘 키워가던 발칸이며, 얻어낼 것 확실히 정해가며 차근차근 상대하려던 브리센과의 관계며, 때가 될 때까지 숨기려 잘 감춰뒀던 오러까지, 전부 다. 플란츠를 살려낸 그 때부터 꼬였다. 싹 다 꼬였다.

"오러도 들키고 힘도 들키고, 형님 죽지 마시라고 제가 가지려던 발칸 드렸더니 저한테 기사단 주시겠다면서 심장 묶어놓고 오셨죠. 저는 저대로 그 문제 해결하려고 형님한테 기사단 도로 내어 드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좀 살아보겠다고 그레이 툭툭 건드렸다가 에반 때문에 일이 더 꼬였다. 그래도 일단 살려놓은 수박 테두리같은 저 놈부터 신경을 써야 해서 체이스에게 못할 짓까지 했는데, 저 놈이 제멋대로 팔찌를 손봐서 체이스에게 보내버렸다.

"덕분에 이제는 피망 냄새도 못 맡겠습니다."

피망 싫어하게 됐을 뿐 아니라, 세크리티아의 일에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되었다.

기어코.

기어코 세크리티아를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어놨다.

아무튼 플란츠가 끼어들어서 제대로 해결 된 일이 하나라도 있으면 말을 안 한다. 놈이 끼어들어서 일파만파 퍼진 일들 때문에 결국 목숨 걸고 에반 잡으러 가게 생겼다. 그러니 하늘 아래 얘만큼 원수같은 놈이 어디 또 있겠나 싶다. 그런 놈을 내 손으로 직접 살려놨으니 오늘도 속이 썩는 것이다.

"개구리 먹으라고 가져다주는 루시 보는 기분입니다, 요즘."

귀엽고 깜찍한 루시가 요즘 들어 뭔가를 자꾸 가져와서 너도 빨리 먹으라고 애옹거리지 않던가. 그게 뭔지 그리 궁금하지 않은 여섯 다리 달린 검은 것이라거나,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지 않은 들쥐 반마리라거나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지금 칼리안이, 루시의 보은을 받은 딱 그 기분이었다. 단어는 같은데 키리에의 가슴 아린 보은과는 영 딴판인 그런 보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그것도 엄청 팔딱거리는 싱싱한 개구리요.' 하는 말을 굳이 덧붙인 칼리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제 말은······ 그 동안 제가 세렌티 말고 사람을 원망해 본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원망이 좀 든다는 겁니다. 형님께요."

누굴 살린 적 없었지만 이제 한 번.

사람을 원망한 적 없었지만 그것도 이제 한 번.

"사는 게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분이 살고 싶다 하시기에, 한 번 살아 보시라고 살려드린 내 형님께서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으시는지."

왜 그러는지 묻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아서 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이 된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아직 어리셔서 그러십니까."

"······ 듣다보니 내 아우님께서 점점 짖기 시작하시는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말을 안 들으실 줄 몰랐던 것이 진짜 아쉽네요. 한참 자라나실 때라 그러나······. 게다가 무슨 고집을 그렇게 부리시는지도 모르겠고요. 사춘기가 원래 다 그렇습니까."

"이러다 체르밀에서 개 키우냐는 얘기 듣겠군."

"오늘은 말 길게 하시네요. 혹시 그새 철드셨습니까. 듣는 사람 생각도 하실 줄 알고. 그럴거면 개구리 주워오시지 말고 말이나 좀 잘 들어주시지."

"그만 좀."

서로 주고 받는 듯 보이지만 결국 제 할 말만 하며 묘하게 이어지는 대화의 끝에서 칼리안이 짧게 웃었다.

"아무튼, 살고 싶다 얘기하시기 전에 형님이 진짜 더럽게 말 안 듣는 분이라는 것부터 좀 알려주셨어야죠. 고민이나 한 번 해 보게."

결국 플란츠도 피식 웃었다.

인내심이 바닥나긴 했는데 그래도 형 취급은 해줘야 해서 칼도 못 들고 몽둥이도 못 들고 결국 그냥 멍멍거리기나 해야겠다 하는 것 같아서.

"말 잘 듣는 놈 필요하면 그냥 5층 가라고. 난 아니라고 말 했을텐데."

"무섭다니까요. 그 분이 어디 제 말 곱게 들어주실 분입니까. 올라갈 때마다 어디 숨겨둔 덫은 없나 살펴보기 바쁩니다."

동생 맞나 싶은데 동생이 맞기는 한 놈에게서 친형 험담을 들은 플란츠가 대답 같은 냉소를 보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깨끗하지 않은 곳에 딱 세 번을 앉아봤다. 그 처음이 칼리안에게 살고싶다 말했던 그 날의 잔디밭이었고, 두 번째는 체르밀 궁의 호숫가였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오늘이다.

결국 죄다 칼리안 때문이다.

"혼자 억울한 것처럼 굴지 말고."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플란츠 식 도와주기에 말려들어 인내할 일이 많아진 모양이었으나,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칼리안을 만나는 바람에 옷이 흙투성이가 되지 않았나.

그러니 칼리안 혼자 억울할 일이 아닌 것이다.

"제대로 말 해. 꿍꿍이."

숲 속.

개울인지 계곡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물줄기 근처.

고개를 숙이고 잘 보이지 않는 물 속을 들여다보려 애써보던 플란츠가 그냥 고개를 들고 하늘을 봤다. 붉은 달을 올려다보는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제가 오늘 뭘 가르쳐드리려는지는 안 궁금하십니까."

"······ 사는 법 알려주겠지."

역시나 제대로 알고는 있다.

"그걸 아시는 분께서 꿍꿍이 말해달라며 이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기가 막히다는 듯 건네진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어차피 내 아우님께서 잘 살려두실텐데."

뭘 가르쳐주든 이번에는 안 배울 거니까 그냥 네 놈이 나 살려놓으라는 소리다. 세상에 이렇게 고약한 심보가 또 어디에 있을까.

"형님 살려드려야 할 형님의 아우님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르니 일단 배워두십시오."

이 말에,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던 플란츠의 고개가 칼리안을 향해 내려왔다.

"너."

가늘게 변한 눈에 어린 의문을 본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안 죽습니다. 그냥 배워 두시라고요."

웃기는 소리다.

안 죽을 거면 나중에 알려주면 될 일을 굳이 미리 배워두라는 것이 말이 안되지 않나. 결국 꾸미고 있는 일 잘못 될 것 대비해서 미리 가르쳐주겠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다.

"넘겨짚지 마시고, 그냥 한 번만."

플란츠의 속을 훤히 들여다 본 칼리안이 생각을 막았다.

"그냥 한 번만 제 말 좀 들어주시면 안 됩니까."

한껏 가늘어진 눈으로 칼리안을 노려보다시피 하던 플란츠가 눈을 감았다. 오늘 칼리안이 했던 이야기 중 넘겨짚지 말라 했던 일 말고 다른 것들에 대해 잠시 생각을 했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로, 플란츠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 알았어."

드디어 원망 한 번 들은 김에 고집도 한 번 접고 가르쳐주는 것을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신. 개구리 말고 뱀."

대신, 개구리 물어다 주는 루시 말고 뱀 잡는 빗자루 역할 하겠다는 조건을 붙였다.

"네. 그 일은 도와주세요. 형님."

레릭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어김없이 잘 알아들은 대답에 플란츠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하도 동글동글해서 꺾일 곳 없어 보였던 완두콩의 고집을 드디어 한 번 꺾어 놓은 스스로가 대견하게 생각된 탓이다.

"아, 힘들었다."

완두콩도 이제 잘 다루니까 나 정말 어른 된 것 맞나보다.

이번 일 끝나고 나면 아버지랑 술 마셔야지.

카이리스 히몰리카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 * *

내일 날이 흐리려는지 하루종일 허리가 아팠다.

제대로 치료를 받아 완전히 나았는데도 이런 날이면 어김없이 허리가 쑤셨다. 잠을 자려고 누운지 한참이 되었으나 도무지 잠은 안 오고 허리가 아파서 결국 집사를 불렀다.

생각 같아서는 슈린츠 지방에 가서 그 따스한 온천물에 몸을 누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이 촌구석에서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어 화가 치민다.

"변경백님 괜찮으십니까?"

부서진 것이 허리 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쓸모가 워낙 많아서 죽이지 않고 살려 두게 된 집사가, 보온 마법이 걸린 찜질용 수건을 허리 위에 덮어주며 말했다.

"이것이라도 대고 계십시오. 혹시 다른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됐으니까 나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걱정이든 급여에서 우러나온 걱정이든 어찌됐건 걱정을 해서 건네오는 말이었으나, 그레이는 짜증스러운 대답만 했다. 아프다고 불러낸 것이 자신임을 잊은 것처럼.

집사 덕에 그나마 두 발로 온전히 걸어다니고 있는데다 소드마스터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도 무사히 숨길 수 있게 되었으니 그만한 은인이 어디있겠냐만은 브리센의 핏줄에는 애초에 그런 도움을 기억할 만한 머리도 없었다.

개구리 잡아다 주는 완두콩이 유난히 이상한 것이지, 브리센은 원래 다 그랬으니 말이다.

"네. 그럼 쉬십시오, 변경백님."

그래서 집사는 다른 말을 하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곱게 인사만 하고 밖으로 나갔다.

작게 문 닫히는 소리를 듣던 그레이가 엎드려 누운 채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빌어먹을 치유사 같으니."

이게 다 말콤인지 뭔지 하는 그 거지같은 치유사 때문이 아닌가. 애초부터 놈이 제대로 치료만 했어도 먹구름 낄 때마다 허리 사이에 습기가 들어차는 그런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끙, 하고 한 번 더 앓는 소리를 낸 그레이가 상스러운 욕설을 더하며 몸을 돌렸다.

"왜 엉뚱한 치유사 탓을 하나. 내 탓인데."

그러다, 어정쩡하게 몸을 돌리려던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이런 날을 대비해 베개 밑에 넣어 둔 칼을 꺼낼 생각도 못하고 소리 내어 누군가를 부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눈을 홉떴다.

"조용히 죽은 듯이 살라 하였더니. 내 사람 하나 불러내서는 귀여운 짓을 꾸미려 했더구나, 변경백."

그래.

마치 뱀의 눈을 마주한 개구리가 된 듯 뼛속 깊이 박힌 공포감에 온 몸이 굳었다.

"감히."

살짝 허리를 숙여 그레이와 눈을 마주친 칼리안이 만개한 꽃처럼 웃었다.

[외전] 시나스타

세크리티아에서도 꽃으로 장례를 치른대요.

낮에는 하얗고 동그란 꽃이었다가, 밤이 되면 별이 되어 날아가는 꽃이래요.

신기하지 않으세요, 형님?

* * *

무결한 것이 독에 졌고

순수한 것이 독에 졌다.

잔혹하고 가혹하여 혹독한 일이다.

악독하고 지독하여 혹독한 일이다.

적막하다. 삭막하고 막막하다. 그리하여 결국 고독하다. 무엇 하나 지키지 못한 나는 지옥보다 고독한 사유에 잠겨 그저 홀로 고독하다.

"플란츠."

고독보다 지독한 향에 잠긴 나는.

이제야 홀로 남아 비로소 온전히 고독하다.

"플란츠. 대답해야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일국의 왕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지 고작 일주일.

입에 담기에도 어려울 3왕자의 악랄한 계획으로부터 무사히 살아남은 왕비의 안녕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 하마터면 늦을 뻔했잖니. 그 아이가 마법을 배우는 것을 알았으면, 나에게도 말을 해줬어야지.

축하하는 것이 정녕 왕비의 안녕일지.

- 네가 그 아이 눈을 가린다 해도 마법사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않았니.

혹은, 하마터면 시스파니안을 닮은 왕자가 마법사 연합을 등에 업을 뻔한 것을 잘 막아낸 일일지.

-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단다. 플란츠.

그 누구의 발 밑에도 있지 못하여.

그러나 당신이 스스로 올라서기에는 가는 길이 번잡하고 험할 뿐이라.

나를 대신 앞세워 가고자 애쓰는 그 걸음의 끝.

그 곳에 과연 내가 있는지.

묻는다면.

그 끝에는 너 역시 없으리라는 솔직한 답을 해 줄까.

- 그러니 늘 정신을 차리거라. 멈추어 서면 안된단다.

지독한 르니에리 향기 사이사이에 스민 피 냄새가 짙고도 짙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빼앗은 생명은 단 하나도 없을진대 어찌하면 이토록 역겨운 향이 나는지.

당신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그래서 이렇게, 날이 갈수록 짙어지는 향에 묻혀 사는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도려낸 피부에 소금을 얹어 둔 듯한 향기 때문에 손 끝이 아려와서,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한 플란츠가 말을 뱉었다.

"······ 악취가 나서."

차르륵, 하고 부채를 펼치는 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플란츠의 말을 가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표정을 가리려는 것인지에 대해 플란츠는 고민하지 않고 일어섰다.

에반의 얼굴이 실리케의 것만큼 굳어 있었고 상황 모르는 레넌은 자신의 옷에서 냄새가 나는지 조용히 킁킁거렸다.

* * *

그 꽃, 시나스타라는 이름이래요.

저는 강물 따라서 바다로 가는 꽃 말고, 별이 되어서 하늘로 가는 그 꽃이 더 좋아요.

시나스타라는 그 꽃이 더 좋아요.

* * *

어둠을 집어삼킬 듯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무엇 하나 비춰내지 않는 그 어두움이 플란츠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거절을 했다.

- 하지만 왕자님.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면 놀라실 겁니다.

- 나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레넌이 만약 그것이 무엇인지부터 이야기를 했다면, 플란츠는 그 대단한 선물을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묵빛의 금속이 어째서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지를 먼저 설명했다면.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별의 조각이었음을, 별을 태우고 남은 재와 같아서 그 무엇도 비춰내지 않는 돌이었음을 먼저 이야기했다면.

그랬다면 오히려 반겨하며 받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와 달리 정말로 돌아있던 또 다른 한 놈을 만나지도 못했을 테지만.

"경매에 직접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사실 3왕자의 죽음에는 의혹이 많았다.

그 누구도 그것이 타살이라 하지 않았으나 그 누구도 그것을 자살이라 여기지 않았다.

지그프리드.

그들을 제외하고.

3왕자와 아무런 관련 없는 코끼리들이 왜 나서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저 플란츠가 그 이유에 대해 막연한 추측을 했을 뿐이지만 플란츠도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지는 못했다.

알려진 것은 지그프리드가 한 명의 대마법사를 불러들였고, 그를 통해 마법사 연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일까. 다만 애석하게도 그 대마법사가 있던 나라가 카이리스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심점 없이 모여들었던 마법사 연합의 진상 조사는 오래지 않아 별다른 소득 없이 마무리되고 말았다.

"일부러 어려운 길을 골라 가시는 그런 취미는 언제부터 가지셨던 겁니까."

"입 닫아."

겉으로 보기에만, 소득이 없었다.

르메인이 지그프리드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브리센을 한 번에 집어삼킬 수 있을 마법사 세력을 준비해나갔다.

또한 르메인은 남은 두 왕자가 서로 동요하여 불필요한 피를 보지 않도록 하겠다는 명목으로 두 왕자의 감시와 호위를 맡아 줄 마법사들을 체르밀 궁에 보냈다. 자신의 막내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고, 남은 두 아들을 모두 지켜줄 마법사들을 보냈다.

그 모든 정황을 눈 앞에 그리듯 눈치채고 있었으나 플란츠는 입을 다물었다.

"바깥 나들이가 하고 싶으셨던 것이라면 굳이 그런 곳에 가실 필요 없습니다. 오러도 못 쓰시는 왕자님께서 운석으로 만든 검 들고 뭘 하시겠다는 겁니까."

하지만 플란츠를 감시할 겸 호위할 겸 찾아온 파란 머리 마법사는 좀처럼 입을 다물지 않았다.

"입 닫으라고 했는데. 마법사."

레넌 브리센이 가져왔던 운철이 경매장에 올랐다.

에반은 이미 그보다 나은 오래된 검을 가지고 있었고, 플란츠는 선물 받기를 거절했었다. 그리하여 레넌은 그것을 경매에 올리며 온 대륙에 소문을 냈다.

"나가시는 것은 위험하니 브리센 상단에 경매를 취소하도록 요구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그것이 별의 조각이라서.

단지 그 이유 하나로.

"내가. 하겠다는데."

자신의 손으로 얻어내겠다 고집을 부렸다.

"······ 알겠습니다. 준비해서 모시겠습니다."

그 아이에 대한 특별한 죄책감도 이제는 남은 것이 없다 여겼으나, 그냥.

별의 조각.

정말 그 이유 하나만으로.

* * *

- 왕자님 머리 색이 워낙 눈에 띄시니, 절대로 후드 벗지 마십시오. 암살자 붙으면 위험합니다.

- 알아.

파란 머리 마법사 한 명을 데리고 경매장에 갔다. 그리고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마지막까지 들러붙던 놈이 하나 있었으나 플란츠는 카이리스의 왕자였으니 경매에서 질 이유가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플란츠는 그리 무모한 짓이 그것으로 마지막이리라 여겼었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이 맞았다.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시간이 지난 이후의 그가 훨씬 더 무모한 짓을 벌이게 되리라는 것을 몰랐으니까.

"왕자님 머리 색이 워낙 눈에 띄시니, 절대로 후드 벗지 마십시오. 암살자 붙으면 위험합니다."

물론 그렇게 찾아간 곳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주워 듣게 될 줄도 몰랐지만.

"붙으면 죽이면 되지. 카이리스 새끼들 검술도 좀 볼 겸."

"왕자님. 말씀을 좀······."

"긁지 마. 안 그래도 짜증나니까."

후드 아래로 언뜻 보이는 머리색이 말 그대로 워낙 눈에 띄었다. 때문에 그것을 본 플란츠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세크리티아 2왕자.'

베른 세크리티아.

들리는 것이라고는 악명 뿐인 날 선 미친놈.

"가지고 싶었는데. 별의 조각."

그 놈을 만났다. 정확히는 플란츠 혼자 눈치챈 것이지만 그렇게 만났다.

그리고 스치듯 지나갔다.

플란츠는, 그것 역시 처음이자 마지막이리라 여겼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별빛을 닮은 그 머리 색이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져갔다. 그리하여 더 이상 그 별빛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게 되었을 때 쯤.

"이름 정하셨습니까."

파란 머리 마법사가 이렇게 물어왔다.

사실 카이리스의 검사들은 자신의 검에 이름을 붙이길 좋아했다.

자신이 사용했던, 별자리가 세공된 그 아름답고 강인한 검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나의 파니' 따위의 한심한 이름을 붙였던 하츠아라의 영향이 컸다.

"검의 이름을 알려주시면 새겨드리겠다 합니다."

물론 1년에 걸쳐 힘들게 조련한 자신의 검은 말에도 아직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플란츠는 검 같은 것에 이름을 붙일 생각을 한 적 없었다.

"······ 시나스타."

그러니 그것은 결코 플란츠답지 않은,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시나스타.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검 한 자루를 더 만들 수 있다고 하는데, 나머지 한 자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그프리드에."

어차피 두어 보아야 쓸 일 없던 나머지 한 자루의 검은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에게 보냈다. 왕가를 향한 복수를 원한다면 직접 오라는 의미를 담아서.

공작과는 다르다던 소공작 드미레아라면 복수를 위해 찾아올 것 같아서. 찾아온다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노라는 그런 의미를 담아서 보냈다.

그렇게 여러 날의 시간이 다시 흘러 여러 해가 지나갔다.

묵빛의 검에 이름을 붙이던 그때까지만 해도 미약한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었던 연두색의 눈은 그 사이 하루하루 메말라갔다.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나 결국 그 모든 것을 막지 못하여서.

* * *

밤이 되면 그 꽃은 하얀 별이 될까요?

파란 별이 될까요?

아니면 빨간 별일까요?

* * *

사방으로 금이 간 연두색의 유리 구슬.

스러져 간 이들의 피 냄새보다 더한 악취가 자신의 손에서 묻어나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눈.

빛을 내지 않는 제 검과 그리 잘 어울리게 변해버린 두 눈을 지닌 이가, 기어코 제 손으로 저지르고야 만 참상의 앞에 섰다.

- 누구 하나를 위해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 하여도 이것은 일방적인 침략입니다. 전하께서 그것을 잊지 않으신다면, 함께 가겠습니다.

그 어떤 이유를 들어 멋들어지게 포장하여도 비극은 단지 비극일 뿐이니.

천고를 보내도 용서 받지 못할 죄에 파묻혀 나락 속에 빠져든 연두색의 두 눈이 왕성 안에 세워진 첨탑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그 위에 서 있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을지.

그것을 잠시 상상해보던 빛 없는 눈이 조용히 감겨들었다 다시 열렸다.

멀리 선 파란 머리 마법사의 손이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 명의 기사에게 진정으로 마지막을 고했다.

별빛을 닮은 긴 머리가 피웅덩이 속에 잠겨드는 것을 말 없이 지켜보던 미친 왕이 발을 옮겼다.

- 저벅, 저벅.

거대한 하나의 무덤이 되어버린 세크레타의 땅을 밟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이미 숨을 멈춘 이의 앞에 섰다.

그 날의 짧은 기억을 되새기지는 않았으나, 그저.

'가지고 싶었는데.'

잊는 것을 잘 모르는 머릿속에 문득 그 날의 생각이 떠오른 탓에.

거대한 하나의 무덤 속에서 눈을 감은 기사의 시신 위에 자신의 묵빛 검을 올려놓았다.

이제는 너도.

이제는 나도.

필요치 않게 되었으니.

늦었지만 이제라도 양보를 해주겠노라고.

마지막까지 기사였던 왕제에게, 검을 잃어버린 기사에게, 검을 선물했다.

시나스타.

그래.

그런 이름의 검을.

* * *

빨간색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를 닮은 빨간 별이 하늘로 날아가면 저는 정말 기쁠 것 같아요.

형님께서는

빨간색 싫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저는 저를 위한 꽃이 빨간 별이 되어 날아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저는.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행복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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