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14화 (215/527)

제37장. 없거나 한 번(5)

그날, 그 밤이 오기 조금 전.

적어도 에반 브리센 후작보다는 똑똑할 것이 분명한 레이븐이 자신만을 위해 길러낸 당근을 먹고, 히나를 찾아간 루시가 잘 손질해서 말린 닭고기를 얻어내고, 히나와 함께 있던 키리에가 루시를 쓰다듬어 보려다 긴 꼬리에 얻어맞았을 그 즈음.

민트차를 한 번 마셔보겠다던 아리안느가 인상을 찌푸리며 사람이 이딴 것을 대체 왜 먹느냐 화를 내고, 그것을 본 테일란이 웃으며 민트 향을 음미하고 있을 그 때.

체이스가 데블란의 집무실에 들어가고, 오찬을 마친 플란츠가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있었을 딱 그 무렵.

-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찻잔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주 앉아 있던 드미레아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신경쓰지 않은 채 큰 소리로 터진 웃음이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 웃어서 미안해, 드미레아."

"에반 브리센 후작의 무례한 언행을 전해드렸는데 웃음이 나오십니까."

정색한 얼굴의 드미레아가 이렇게 묻자, 간신히 진정하려던 칼리안이 또 웃었다. 방금 전에 사과를 했으면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왕자님······."

숨이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쉼없이 웃는 칼리안을 얀이 한 번 불렀다.

만약 아르센이었다면, 혹은 플란츠였다면.

재밌어서 웃느냐고 칼리안에게 직접 물어보는 대신 얀을 쳐다봤을 것이다. 그 후 얀의 얼굴에 지금처럼 걱정 가득한 기색이 가득한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을 터였다.

칼리안의 웃음을 많이 겪어보지 못한 드미레아를 향해 얀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것을 본 드미레아가 아주 살짝 눈살을 찌푸리다 입을 열었다.

"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드린 적 없습니다. 제가 겪은 불쾌한 일에 대해 말씀드렸을 뿐인데요."

이 대단한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이 왕자의 기분을 신경쓰거나 왕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져가며 눈치를 볼 사람은 아니지 않나.

"아, 미안. 내가 너무 웃었지."

"네."

게다가 칼리안의 웃음이 길어지는 만큼 자신의 마음이 언짢아지고 있다는 것을 숨길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일이 좀 틀어진 것이 재밌어서 웃었어."

드미레아가 한 번 더 미간을 찌푸렸다.

"일이 틀어져서 웃으시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이 재밌다는 이야기도 이상합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네요."

드미레아는, 살가운 것은 얀에게 전부 다 건네주고 얀에게 없는 무뚝뚝함을 다 가져온 것 같은 사람이었다.

루시가 유난히 멀리하는 키리에도 이 정도로 재미 없는 사람은 아닌데 사람이 어찌 이렇게 무뚝뚝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한 번 더 짧게 웃은 칼리안이 설명을 했다.

"브리센 후작이 머리 좋게 움직이는 것은 평생 못 보겠다 싶기도 하고."

이렇게 조각조각 흘러나오는 칼리안의 말을 잠시 모아 본 드미레아가 물었다.

"저 때문에 브리센 후작이 머리 좋게 움직일 일이 없어졌고, 그래서 왕자님께서 세워두셨던 계획이 틀어졌고. 그것이 재미가 있어서 웃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때문이라고 하면 내가 너를 탓하는 것 같잖아. 그런 말은 아니야."

기적에 가까운 짜집기로 자신의 말을 추려낸 드미레아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어 보인 칼리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회의장에서 네가 한 행동을 탓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그런 취급 받았으면 당장 검부터 뽑았을 테니 오히려 침착하게 잘 대응했다고 생각해. 내 이름 판 것도, 잘 했어. 그렇게 써먹으라고 있는 이름이니까 필요하면 얼마든지 팔아먹어. 괜찮아."

이 말에, 드미레아가 무슨 그런 당연한 말을 하느냐는 얼굴이 됐다.

"탓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한 이야기 아닙니다."

무엇 하나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 드미레아의 말에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그래."

지금 드미레아는, 에반이 칼리안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으니 그 일에 대해 칼리안이 알아야 할 것 같기도 했고 아무래도 지그프리드에서 한바탕 화풀이를 할 것 같았던 분위기를 보였던 앨런 때문에 그 뒷일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도 확인할 겸 체르밀 궁을 찾은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 날 먹은 바나나 값은 다 갚았던가."

"네. 바나나 값은 갚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두 가지 용건을 해결하기도 전에 이렇게 진지하게, 지그프리드 저택에서 칼리안을 보호해 준 값을 아직 다 치르지 못했으니 '내 정혼자인 칼리안 왕자님에 대한 불명예' 운운하며 팔아넘겼던 이름 값을 무엇으로 제하면 될지를 함께 계산해보기 시작했다.

"그럼 그 때 내 형님이 지냈던 숙식비를 제한 셈 치면 되려나."

"이름 한 번에 2왕자님 숙식비를 전부 제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얼마 안 드시잖아. 제대로 주무시지도 않았다며. 그 정도면 될 것 같은데."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칼리안이 먹어치운 바나나 값과 멀쩡히 눈 뜨고 있던 플란츠가 쓴 값을 비슷하게 계산하는 태도에 드미레아가 피식 웃었다.

"네. 그 정도로 셈해 드리겠습니다."

그 날 세워 준 방패 값이며, 칼리안을 대신해 감시하고 있는 기사단이며, 그레이 브리센을 대신할 변경백 후보를 물색하는 것이나 이번에 하고 나간 티아라 값 등등, 칼리안에게서 받아내야 할 것이 아직도 수두룩하게 남았으니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주어도 좋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너그러움이었다.

드미레아가 오면 언제나 그렇듯 한 자리 떨어진 곳에 함께 앉아 아무 말 없이 있던 얀이 못말린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꽃 같은 왕자님이 필요하다 하면 전부 다 퍼줘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따박따박 계산해가며 거래를 하는 것이 영 못마땅한 듯 했으나, 그렇다 해서 둘의 대화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래, 그럼 그 계산은 끝났고."

그런 얀을 향해 한 번 씩 웃어 보인 칼리안이 다시 본론을 꺼내들었다.

"브리센 후작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할 지는 모른다는 말이지?"

"네. 만나뵙고 싶다는 말만 전해달라 했습니다."

에반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레이븐 갈기털보다 가벼운 에반의 주둥이가 회의장에서 말 실수를 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전하께서 나를 생각해주신 것이 참 고맙기는 한데······ 이것 참."

에반이 어떻게든 칼리안을 없애려 들어야 그것을 핑계로 칼을 댈 텐데, 르메인이 너무 강경하게 나와버렸지 않나.

"기껏 긁어놓은 공도 없이, 후작이 이번에도 몸을 사리려 들게 생겼네."

이리 저리 땅 위를 흘긋거리다 쏙 들어가버리는 봄날 두더지처럼 말이다.

라임 조각과 민트 잎을 넣은 탄산수를 한 입 마신 칼리안이 눈을 내리뜬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얀. 나 단 것 마시고 싶어."

얀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산딸기 청이 들어왔던데, 그것을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그냥 꿀 차 마실래. 꿀 많이 넣어 줘."

드미레아와 함께 있을 때, 칼리안은 되도록 얀을 시종으로 부리지 않으려 했다. 마시던 차를 두고 굳이 다른 것을 가져다 달라 했던 적도 없었다.

"네. 가져다 드릴게요."

얀은 그 이유를 묻지 않은 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 뒷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칼리안은, 문이 닫히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드미레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내일 쯤 대련이나 할까? 시간 괜찮으면. 오늘은 저녁에 내 형님께 뭘 좀 알려드려야 될 것 같은데 그러려면 오늘은 오러를 아껴야 하니까, 내일 쯤."

본래 약속했던 날짜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아니다. 내일은 내가 란델 형님도 좀 뵙고 변경백에게도 다녀와야 할 것 같다. 그냥 모레 쯤이면 어떨까. 드미레아. 이것저것 많이 알려줄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드미레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갑작스럽게 먼저 대련을 언급하는 칼리안의 태도가 어딘지 미심쩍었던 탓이다.

"오라버니도 일부러 나가게 하시더니 중간에 마음을 바꿔가며 일정을 급히 정하시고. 생각이 채 정리되지도 않은 상태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칼리안은 확실한 이야기 없이 생긋 웃기만 하더니 또 다른 이야기를 했다.

"아, 그리고. 브리센 변경백 자리 대신할 사람을 조금만 빨리 찾아봐 줄 수 있을까?"

"왕자님."

말에 대한 대답 대신 칼리안을 부른 드미레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려놓았다.

- 탁!

꽤 큰 소리를 낸 그것은,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고운 티아라였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이 드미레아를 '세자의 정혼자'로 보이기 위해 내어놓은 것이었다.

"음. 드미레아."

티아라를 내려다보는 칼리안이 장난스러운 말을 건넸다.

"우리 벌써 파혼하는거야?"

"무덤 파시는 분 정혼자 자리에는 관심 없습니다."

칼리안이 왜 웃었는지, 웃는 모습에 기분 나빠하는 것을 얀이 왜 말리려 했는지를 이제야 눈치 챈 드미레아가 이렇게 대답한 뒤 말을 이었다.

"변경백을 만나고 새 변경백을 정하고, 갑자기 검을 알려준다 하시는데······."

그렇게 말한 드미레아가 손가락을 들어 창 밖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에반 브리센 목을 직접 치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만. 아직 이르지 않습니까."

"자세히 알려주기는 어렵지만 일이 좀 꼬였어, 드미레아. 브리센 후작이 무덤 파주기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도 안 될 것 같고. 마냥 기다리자니 큰 뱀 사냥을 가야 할 일이 생겨서, 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도와달라 말도 했었지만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멀리 계신 어떤 분이 뱀 사냥을 하신다 하는데, 그 분은 그 뱀이 어떤 뱀인지 잘 모르시거든. 조심한다고 하면서 살짝 들춰보다 물리실 것 같아서 내가 나서야 해. 그런데 그러려면 손 많이 가는 죽순 알맹이 묶어놓은 것부터 좀 풀어놔야 하거든. 그래서 그래. 어차피 순서는 중요하지 않은데다 항상 틀어지기도 해서 이제는 좀 익숙하기도 하고."

칼리안의 애매한 말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드미레아는 그냥 자기가 할 말을 했다.

"에반 브리센은 강합니다. 그 자의 오러를 볼 수 있다 해서 검술까지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에반 브리센 건드리면 왕자님 죽습니다."

"아, 그거 내가 맨날 했던 말인데."

칼리안이 또 웃었다.

"나도 그렇게 안 약한데. 그리고 나 안 죽어."

아무리 칼리안이라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제 몸 던져넣을 생각 한 적 없었다.

"나 이렇게 만드신 분께서 이런 일로 죽으라고 보내진 않은 것 같아서, 아마 이번에도 잘 살려두실 거야. 지우면 지웠지 죽게 둘 것 같지 않기도 하고. 아무튼 그래."

아까부터 왜 자꾸 멍멍이 오라버니 같은 소리를 하는거냐 하는 얼굴로 칼리안을 보던 드미레아가 한 번 더 칼리안을 말리려 했다.

"죽지 않는다 해도 크게 다치실 겁니다. 다치지 않는다 해도, 후작을 살해한 죄에 대한 책임이 따를 겁니다."

그것은 칼리안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가늠했고 각오했고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마쳤다.

"안 다치면 뱀 잡으러 가고, 다치면 뱀한테 못 가고. 갇히면 그 핑계로 뱀한테 안 가면 되겠네. 뒷일은 형님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까 그것도 괜찮아."

대체 그 뱀이 무엇인지, 대체 뭔데 그러는지 물어보아야 돌아올 대답이 없음을 안다. 다른 말을 더 해 보아야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드미레아가 한숨을 쉬었다. 설득을 포기한 것이다.

"······ 모레 오후에 오겠습니다. 대신."

어차피 통하지 않을 만류의 말을 더 건네는 대신,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드미레아가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티아라를 집어 다시 품에 넣었다. 그리고 살기 어린 얼굴로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오라버니한테 같은 일 또 겪게 하시면 제가 왕자님 죽여버릴 겁니다."

알았으니까 무섭게 말하지 마, 하고.

꿀차 기다리는 칼리안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드미레아. 나는 잘 살아야 해. 그러니 걱정 마."

* * *

시디 신 귤.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던, 절대로 잊지 못할 그 푸릇한 귤 향이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숲에서는 녹음 짙은 풀 향이 났는데 코 끝에서는 신 귤의 향이 났다.

- 넘겨짚는 것 까지만, 하십시오. 확신하지 말고.

한 글자도 잊히지 않고 기억나는 그 말.

자신이 홀로 보냈던 시간의 일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신 귤을 건네주면서. 그렇게 건넸던 말.

- 플란츠.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으니까.

유난히 향에 민감한 플란츠였고, 또 유난히 눈치가 빠른 플란츠가 아니던가. 그래서, 무언가를 알려줄 예정이지만 이유는 절대 넘겨짚지 말라는 칼리안의 말에 곧바로 신 귤의 향이 떠올랐다.

'같은 말 때문인지, 같은 얼굴 때문인지.'

미간을 찌푸린 채 칼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플란츠가 긴 숨을 들이쉬었다.

여전히 귤 향이 난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미친놈이 또 뭔가를 짊어질 생각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넘어가달라는 말을 한다.

그것을 그냥 들어주어야 할지. 아니면 싫다고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칼리안이 다시 말을 했다.

"말 안 들으시는 형님 말고, 말 잘 들어주시는 착한 형님이 필요해서요. 지금은."

"짖지."

버릇같은 헛소리에 버릇같은 말대꾸를 한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리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평소 지어보이던 장난끼 가득한 웃음 대신, 앨런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아우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데 그러느냐고.

"이름이요, 형님."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름 불러주시면 안됩니까. 그게 더 듣기 편한데요. 지금은."

아.

쟤가 미쳤나보다.

이름 불러달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데 알 면 안 된다 하니까 그 쪽으로는 생각 안 하기로 하고, 아무튼 쟤가 오늘도 또 돌아버렸나보다. 그래서 신 귤 냄새가 이렇게 팍팍 났나보다.

미친놈이 짖다 짖다 처돌아서 나까지 처돌아버릴 것 같은 짓을 또 꾸미나본데, 그렇다면 같이 처돌아주는 것이 형님으로서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짧게 생각을 마친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싫은데."

없거나 하나 있는 저 놈 인내심이야 바닥이 나든 말든.

루시 발바닥같은 색의 입술 한쪽이 길게 말려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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