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없거나 한 번(4)
수영을 배웠었다.
일국의 왕자가 넘실거리는 바닷속을 유영할 일이 뭐가 있어 그런 것을 배우느냐 하겠지만, 믿을 수 없게도 그럴 일이 정말 있었기 때문에 배웠다.
'무슨 생각으로 그 바다에 뛰어드셨습니까. 무섭지도 않으셨습니까.'
'무서웠어.'
'그것 보십시오. 바다는 정말 무서운 곳입니다. 큰 왕자님께서 그냥 계셨어도 작은 왕자님은 제가 안전하게 구해내어······.'
'바다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 카스트린 경.'
감기를 떨치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테일란을 찾아가 수영을 가르쳐달라 졸랐다. 여전히 차디찬 바다에 다시 들어가서 눈을 뜨는 법과 떠오르는 법, 움직이고 숨을 쉬는 법을 알려달라고 매일 매일 부탁을 했다.
'그럼 무엇이 무서우셨습니까.'
감기가 심해진 탓에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고는 했지만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감기에 다시 걸리는 것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끝을 모를 깊은 물도, 무엇이든 집어삼킬 것처럼 몰아치는 파도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손을 놓칠까봐. 내가 내 동생을 놓쳐버려서 영영 잃어버릴까봐. 나는 그게 무서웠어.'
정말 무서운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배웠으니까.
절대로, 같은 일을 또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 저벅, 저벅.
아리안느를 돌려보내고 이 왕궁에서 가장 거대한 이가 있을 곳으로 향하는 길에 문득 오한이 들었다. 날은 이렇게나 맑고 더운데 그날의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길을 잃고 잠겨드는 기분이 들어서 소름이 돋았다.
물론 그 날의 일은 지금의 체이스가 겪은 기억이 아니었다. 하지만 체이스에게 있어 그것이 언제 겪은 일이었는지에 대한 사실은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그 때의 체이스는 베른의 형이었고, 지금의 체이스는.
'하지 마. 평생.'
어쩌다보니 그에게 이런 말까지 들어버렸지 않나.
체이스는 분명 베른의, 그리고 칼리안의 형이었다. 그것 하나가 제일 중요했다.
- 달칵.
데블란의 거대한 집무실은 냉엄하고 차가웠다.
체이스의 기억 속에서는 항상 시끄러웠고 웃음소리가 났으며 키리에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던 소소하고 따뜻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감기가 잘 낫지 않나 봅니다."
특별한 용건 없이 데블란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데블란의 건강을 입에 올린 것도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블란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왔는지를 묻거나 웬일로 이렇게 찾아왔는지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감기에 좋다는 약을 보냈는데,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약을 쓸 필요가 없어 돌려보냈다. 이러다 나을 테니 그리 신경 쓰지 말거라."
데블란은 하나 뿐인 아들이 건네는 약에 무엇이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확신을 했기 때문에 체이스의 약을 거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회복을 위한 약이 아니라 그 반대를 위한 것이리라는 의심 가득한 확신.
'아들이 보내는 약은 믿고 삼키지도 못하십니까.'
아들은 믿지 못하면서.
언제 돌변하여 심장에 칼을 꽂을지 모를 반역자의 핏줄, 텐실의 치유사들에게는 목숨을 맡겨도 좋다 여기다니.
이런 생각을 한 체이스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우스워도 웃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힘든 것을 참는 얼굴로 소리 없이 웃었다.
"네가 유난히 이렇게 나에게 신경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
쇠 긁히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체이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그런 것을 두고 유난히 신경을 쓴다 말하기보다는 자식이 아버지를 걱정한다 이야기합니다. 제가 약을 보낸 것에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있겠지."
그렇게 말한 데블란이 체이스를 향해 살짝 웃었다.
"내가 너를 믿는지, 불신하는지. 그것을 확인하려 보낸 것을 두고 어찌 걱정이라 하겠느냐."
"들켰군요, 제가."
체이스가 마주 웃었다.
이 얼마나 사이 좋은 부자 관계란 말인가.
"너를 가르친 것이 나인데, 알아보지 못할 리 없지."
밭은기침을 한 데블란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체이스 역시 별 것 아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감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거라.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을 터인데 괜한 걱정거리까지 생길까 우려되는구나."
경고.
린 후작이 최근들어 갑작스럽게 텐실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것과 체이스가 데블란의 감기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의 상관관계를 직접 언급하는 대신 건네는 경고. 그렇게 나서다 괜한 '걱정거리' 만들지 말고 신경 끄라는 의미의 경고였다.
체이스에게 걱정거리가 될 이가 체이스 스스로일지, 린 후작일지, 아리안느일지, 혹은 먼 곳에 있을 어떤 막내왕자와 그의 치유사일지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이렇게나 평화로운 경고를 전했다.
"사실 감기라는 것이 그렇지 않느냐. 때에 따라서는 독해지다가 어느 순간 씻은 듯이 낫기도 하니. 네가 그리 염려할 필요 없다."
"그렇습니까."
독한 감기가 어떤 식으로 번져가는지 직접 겪었던 이는 지금의 체이스가 아니었다. 때문에 체이스는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정도의 표정을 한 채로 간단히 대답한 뒤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때에 따라 독해지기도 하는 병은 맞는 듯 합니다. 카이리스의 3왕자도 감기 때문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일주일을 앓았던 적이 있다 하였으니."
데블란은 체이스의 소매 속에 감추어진 팔찌에 대해 아직 몰랐다. 그것을 확신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데블란이 팔찌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체이스의 필체를 흉내내어 칼리안에게 보내는 수고로운 헛짓거리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편지를 보내자마자 들킬 것이 분명한데 무엇하러 그런 일을 벌이겠는가.
"카이리스의 3왕자라."
그러니 데블란은 체이스가 갑작스럽게 그 이름을 들고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겠으나,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네가 만나러 갔던 그 아이 말이더냐."
체이스의 카이리스 방문 사유는 분명 '앨런 마나실'이었다. 왕궁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이 독대한 것은 앨런이었고 그 다음은 르메인이었으며 그 뒤에는 플란츠였다.
정작 그 아이는.
단 두 번을 따로 만났을 뿐이었다.
오로지 그 아이 하나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찾아가 단 두 번을 만났다. 마음껏 어르고 달래주지도 못한 채 단 두 번을 만났다.
그리하였음에도 데블란은 체이스가 굳이 만나려 한 것이 칼리안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네, 전하."
체이스는 부정하지 않은 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데블란이 생각이 맞다 대답했다.
"제가 굳이 만나러 갔던 그 아이 말입니다. '베른'이라는 이름의."
기억나십니까.
돌아가신 왕비님과 함께 지으셨다던 이름 말입니다. 왕비님의 기원을 담은 선물이었으나 결국은 전하께서 건넨 저주가 되어버린 바로 그 이름 말입니다.
채 내뱉지 못할 말을 담아 데블란을 쳐다보던 체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해드린 약을 의심하실 필요는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 왔던 것이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안그래도 피곤했다는 듯 데블란이 이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체이스는 간단한 예를 보이며 인사를 전했다.
"그럼, 쉬십시오. 아버지."
탁해졌던 갈색의 눈빛이 본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온 몸에 새겨넣듯 바라보면서.
* * *
- 미안합니다. 연락이 온 것을 보았는데 곁에 아리안느도 없고 카스트린 경도 없었어서.
늦은 시간에 연락을 보냈던 것은 칼리안인데, 연락을 받지 못한 사람이 사과를 전해왔다.
테일란이 린 후작과 아리안느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분명 전해듣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리 늦은 시간에 연락을 보내면 확인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깜빡 놓치고 말았다.
- 시간을 확인하지 못한 제 탓입니다.
팔찌의 빛이 줄어들고, 전해져오는 연락을 쉽게 눈치채도록 약한 전기를 내고, 왕궁에 있는 칼리안에게 언제든지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바뀐 대신, 팔찌에 담아놓을 수 있는 마력의 양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때문에 사용을 할 때마다 매번 테일란이나 아리안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을 가늠하지 못한 것은 분명 칼리안의 잘못이었다.
칼리안은 그것을 깨달은 즉시 통신을 끊었었다. 칼리안의 연락을 곧바로 알아차렸을 체이스가 계속 빛이 나는 팔찌를 보며 안절부절 못할까봐서.
- 죄송합니다.
통신을 수신할 최소한의 마력도 없었을 체이스가 팔찌를 바라보며 얼마나 안타까워했을지 잘 알아서, 칼리안도 사과를 전했다.
파도 소리 말고 흘러 내려가는 물 소리 들으면서, 바다 비린내 말고 더운 여름의 풀과 흙 냄새 맡으면서. 바닷가 말고 달빛이 내리비치는 숲 속의 바위 위에 앉은 채로.
- 칼리안 왕자가 무슨 일로 연락을 했을까, 그것이 너무 궁금한 마음에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용건을 알려달라는 소리였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체이스는 일부러 늦은 시간이 되기를 다시 기다려 연락을 취했다. 칼리안을 배려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데블란을 만난 이후 연락을 취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칼리안의 목소리를 들은 뒤 데블란을 만나 이성적으로 굴기 어려울 것 같았다고 해야 맞을 일이다.
- 지그프리드의 땅에 머무는 새들을 물려달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공작이 곧 움직일 예정이라, 함께 잡혀들까 우려되어서요.
- 아. 그 일이라면, 이미 그렇게 하라 전해 두었습니다. 내 생각에 아무래도 칼리안 왕자가 새들을 좀 잡을 것 같아서. 어차피 나중에는 카이리스에 있는 새들을 다 돌아오게 할 생각이니 미리 빼 두어도 이제는 상관이 없고.
이미 조치를 끝냈다는 말이었으므로,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 제 생각을 다 읽으셨습니까.
- 플란츠 왕자에게 상황을 전해들었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칼리안 왕자가 마나실 경을 잡으러 갔다 하니, 누굴 만나 어떤 부탁을 할 지 알 것 같았습니다.
플란츠.
앨런을 붙잡으러 갔던 것까지 체이스에게 말했단다.
앨런이 남쪽에 갔으리라는 것을 똘똘한 완두콩이 예상해낸 것은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덕분에 연락이 닿지 않았음에도 빠르게 새들을 물렸다 하니 좋기는 한데, 이 파릇파릇한 놈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전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조금 당황했다.
- 아······ 네.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일에 지장이 있으신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당황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해 버린 칼리안이 실소했다.
생각해보니 웃긴 일이 아닌가.
내 나라에서 남의 나라 세작을 물렸다는데, 일에 지장이 있느냐며 걱정을 해주는 꼴이라니.
- 새들의 수가 많이 줄어서, 안 그래도 지그프리드령에서는 나와 있도록 하려던 참이었으니 괜찮습니다. 어차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대충이나마 기억을 하고 있기도 하고, 기억이 나면 나는대로, 나지 않으면 나지 않는대로 지내면 됩니다. 그러다 정 궁금한 기밀이 있으면 칼리안 왕자에게 물어보면 될 테고.
체이스는 한 술을 더 떠서 이렇게 말했다.
- 저는 안 알려 드릴 겁니다.
- 그럼 플란츠 왕자에게 물어보면 되겠군요. 비밀이 없는 사람이던데.
플란츠.
대체 무슨 소리를 했던 거야?
이쯤되니 플란츠가 체이스에게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좀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때, 마치 칼리안의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것 같은 체이스의 말이 들려왔다.
- 혹시나 싶어 말해두지만, 플란츠 왕자가 굳이 나에게 직접 말하고자 했던 일이었으니 칼리안 왕자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하.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은 칼리안이 애써 웃음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 많이 친해지셨는지 물어보았을 때 절대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했었는데. 많이 친해지신 것 같네요. 두 분.
마음이 복잡하다.
정말 복잡하다.
좋아할 수도 없고 싫어할 수도 없고, 안타깝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슬프다가 황당하고 당혹스럽다가도 당연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 생각이 깊고, 사고가 빠르고.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체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체르밀 궁에 들어갈 수 있을 위조 허가증을 만들었던 일은 이미 잊은 것처럼 플란츠를 입에 담았다.
- 무엇보다, 칼리안 왕자를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서.
- 저를 걱정한다기보다는,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는데, 저한테 그렇게 해주는 이유는 더 모르겠네요.
모르겠다는데 어쩌겠나 싶어서, 체이스는 그냥 고개만 절레절레 가로젓고 말았다. 아무튼 체이스 역시 플란츠를 그 이상 칭찬해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플란츠에 대해 더 말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 그나저나, 이제 나도 마나 다루는 법을 한 번 배워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마나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 얘기 말고, 체이스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칼리안이 제일 걱정하고 있을 사람은 플란츠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 네. 아무래도 평생토록 아리안느나 카스트린 경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 말을 한 체이스도 웃었고 칼리안도 웃었다.
결국은 마주보지 못한 채 이렇게 목소리나 주고 받으며 평생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들어간 내용이라서 그냥 둘다 웃었다. 세렌티를 찾아가 소리 높여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니 웃기만 했다.
그렇게 웃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 나쁘지 않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카스트린 경에게 배우고 계시니 어느 날 오러를 만들게 되실지도 모르겠네요.
- 아무리 스스로가 이미 오른 길이라 해도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은데요, 칼리안 왕자.
- 제가 그랬습니까.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다시 한 번 체이스에게 전해졌다.
- 하지만 정말로, 미리 배워두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사들 역시 마나 다루는 법을 배운다.
언젠가 검의 길에 오르게 되면 오러를 쌓아야 하니 그것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마나 다루는 법을 배워놓는 것이다. 그러다 자신이 마나를 다루는 재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검까지 놓는 기사들이 간혹 있었다. 칼리안으로서는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본인들이 그리 회의감을 느끼고 포기하는 것에 간섭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지금 마나 다루는 법을 좀 알려줘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터라서. 신기하네요.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마나 다루는 법을 알려 줄 생각이라는 소리임을 체이스는 알아들었다. 굳이 말 가운데 '플란츠 형님'이라는 단어를 넣을 수도 없고, '플란츠 왕자, 2왕자' 라고 하기에도 어려워서 되도록 그 이름을 빼고 이야기하는 중임을 알고 있었다.
그 점은 체이스가 간섭해가며 정정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체이스는 그냥 조용히 대답했다.
- 플란츠 왕자에게 마나를 알려주려 했다는 말입니까.
- 네. 그렇게 하려고요.
아마 오늘 칼리안이 무슨 생각으로 숲에 오라 했는지 알았다면 플란츠가 그것을 지옥의 초대장이라 여기지는 않았을 터였다.
뭐, 물론 만난 김에 겸사겸사 대련을 할 생각도 당연히 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체이스와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있는데, 레이븐을 앞세운 백마 한 마리와 그 위에 앉아 있는 완두콩 하나가 보였다.
자신을 대신해 플란츠를 이곳까지 데려온 레이븐을 칭찬해준 칼리안이 체이스와의 대화를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셨습니까."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 말에서 내리는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제가 오늘은 재밌는 것을 알려드릴 겁니다. 매일같이 연습하셔야 하겠지만 재미는 있을 겁니다.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주십시오."
플란츠가 말 없이 칼리안을 쳐다보다 말했다.
"무슨 약속."
한동안 그런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왜 알려드리는지, 이번에는 넘겨짚는 것도 하시면 안 됩니다."
칼리안의 마나, 베른의 오러, 지금의 칼리안이 지닌 오러. 전부 비교해 가며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것을 왜 보여주려 하는지.
마나 다루는 법을 왜 알려주는지.
칼리안 없이 혼자 마나를 쌓아가며 연습하는 법을 왜 벌써 알려주려 하는지에 대해 절대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