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없거나 한 번(1)
플란츠는 간혹 그런 생각을 했다.
칼리안이 자신을 살려놓은 진짜 이유는 사실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칼리안이 앨런을 쫓기 위해 나갔던 그 즈음.
체이스와의 대화를 마친 플란츠는 빌헬름 관으로 가 아르센과 키리에를 만났다. 이유는 묻지 말고 당분간 둘이 번갈아가며 히나 곁을 지키라는 말을 전했다. 그 뒤에는 아르피아 궁에 다시 와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르메인을 만났다.
내 동생 또 도망가긴 했는데 이제는 좀 익숙해지실 때도 되지 않았는지, 매번 레이븐 뒤를 쫓아가야 하는 왕실의 말들이 얼마나 고생할지를 감안해서 외출 금지령을 적당히 풀어주시는 것은 어떨지를 말하고 나니 어김없이 그런 생각이 또 들었다.
공사다망하신 내 아우님은 나를 그냥 유용한 빗자루 정도로 삼으려고 살려놨나보다, 하고.
"이번에는 마나실 백작 찾으러 갔습니다."
벌여놓고 나간 일 죄다 쓸어모아서 알아서 뒷처리까지 해주고 있는 쓸모 많은 연두색 빗자루가 눈치 없이 근심만 깊은 듯한 짙푸른 눈을 보며 말했다.
칼리안은 에반을 들쑤셔놨고, 칼리안의 정혼자인 드미레아는 에반을 뒤집어놨다. 이 와중에 칼리안의 스승인 앨런은 그냥 도망갔단다.
회의장에서 드미레아가 벌여놓은 일 잘 수습한 깊은 바다 색 빗자루가 플란츠의 말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마나실 경이 어딜 그리 급히 갔다는 말이더냐."
"아마도 남쪽으로 갔을 텐데,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았으니 모르는 척 그냥 두십시오."
"내가 또······."
저도 모르게 이런 대꾸를 하던 르메인이 말을 맺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감잎을 우려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르메인 하는 꼬락서니 속터져서 못 보겠다며 매번 남쪽으로 가버리겠다 하던 앨런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또 뭘 잘못했는데 앨런이 진짜로 남쪽 땅에 갔는지에 대한 깊은 의문이 들었던 터였다.
다만 그런 이야기를 차마 둘째 아들의 앞에서 꺼낼 수는 없었던 르메인은 말을 멈추고 차 한 모금을 마실 시간 동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떠올려봤다. 그 후에는 생각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일단 반성부터 했다.
"······ 알겠다. 미리 알려주어 고맙구나."
"아닙니다."
간단히 대답한 플란츠가, 크게 거슬리는 것 없는 향의 차를 마신 뒤 내려놓았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르메인이 물었다.
"혹 오늘 저녁에 시간이 있겠느냐. 괜찮다면 네 형과 함께 식사나 하자꾸나."
란델은 칼리안의 생일 연회에도 오지 않았고 이번 회의에도 어김없이 불참했다. 칼리안이 때마침 자리를 비웠다 하니 유난히 서먹하다는 첫째와 둘째 사이를 좀 지켜볼 겸, 란델도 만나볼 겸, 상황 상 미리 전해주지 못했던 프레이야의 추숭에 대한 말도 둘에게 전해주기 위해 꺼낸 이야기였다.
함께 식사를 하고 싶으니 시간을 비워두라는 말 대신 괜찮은지를 묻는 말에,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대화를 원하신다면 따로 보시는 것이 낫습니다."
플란츠와 란델의 사이는 어차피 르메인이 끼어든다 해서 해결 될 일이 아니다. 눈치껏 분위기 맞춰 줄 칼리안도 없이 두 형제와 르메인이 둘러 앉으면 정말 말 한 마디 없는 고요한 식사 자리가 될 뿐이다. 그렇게 괜한 저녁 식사 시간 낭비하느니, 그냥 르메인이 란델만 데리고 따로 이야기 하는 것이 나을 터였다.
"그래. 그렇게 하마."
자세한 설명 없이 짧게 이야기한 플란츠를 잠시 보던 르메인이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플란츠. 네가 자리하지 않아 듣지 못했겠지만. 이번 생일 연회에서······."
그 후에는 잠시 말을 멈췄다. 실리케의 아들인 플란츠에게 이 일을 어떻게 잘 설명해야 할지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던 탓이다.
"잘 하셨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레넌에 대한 일 외에는 열심히 소식을 물어다 주었던 레릭에게 이미 전해들었으니까. 르메인이 저렇게 주저하는 이유 역시 알고 있으니 굳이 어렵게 말을 꺼내도록 둘 필요가 없었다.
"칼리안도 많이 좋아했을 겁니다."
그 뒤 플란츠는 앞에 놓인 남은 차를 남김 없이 모두 마시고 내려놨다. 라벤더 차에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이 생각나서, 그냥 전부 다 마셨다.
"그래."
싹 비워진 찻잔을 본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몇 마디 말을 더 나누며 르메인과의 대화를 마친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린 뒤 나왔다.
체르밀 궁에 다녀오겠다던 레릭이 어느새 집무실 앞에 돌아와 있었다.
"왕자님, 빌헬름 관으로 가십니까?"
"체르밀."
하루 종일 길고 긴 이야기만 계속 한 탓에 점심 식사를 건너뛰고 난 이후로도 시간이 한참 흘러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 늦었으니 빌헬름 관의 일은 그냥 아르센이 알아서 하도록 두고 오늘은 좀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때문에 짧게 대답한 뒤 저벅 저벅 아르피아 궁에서 나오던 플란츠가 잠시 발을 멈췄다.
계단 앞, 긴 햇살이 한가득 내리쬐는 길 한가운데에 짝짝이 색 눈을 가진 은백색의 고양이 한 마리가 인형처럼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본 까닭이다.
그것이 꼭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괜히 그렇게 보였다. 레릭처럼.
"루시."
"애옹!"
정말 기다렸다는 듯, 플란츠의 부름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가 대답같은 소리를 냈다.
그 낯선 기분이 괜히 반가워서.
기지개 켤 때 잔뜩 힘이 들어가는 앞발도 반갑고 안아들 때 주우욱 늘어나는 허리도 반갑고 잔뜩 흙 묻은 분홍색 발바닥도 반가워서.
플란츠는 옅은 하늘 색 재킷에 고양이 발바닥 모양의 흙도장이 찍히는 것은 신경쓰지 않은 채 기지개 마친 루시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체르밀 궁을 향해 발을 옮겼다.
예민하고 성격 나쁜 2왕자가 고양이 안고 다니는 것에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사람들이 예를 올리며 지나갔다.
그런 플란츠의 뒤를 잰걸음으로 따르던 레릭이 조금 가까이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왕자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다른 이들이 보는 곳에서 흙발바닥 고양이 안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등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 말을 건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칼리안에게 돈을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얀은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플란츠를 볼 때마다 괜스레 속이 상해서, 언제까지고 안고 갈 불편한 비밀로 두느니 그냥 툭 터놓고 전부 다 이야기 한 뒤에 화를 내든 실망했다는 얼굴을 하든 무조건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으니까.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본 플란츠가 대답했다.
"해."
레릭이 아직 잘 모르는 것이 있었다.
플란츠의 성격이 꽤 급하다는 것, 그리고 때와 장소를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할 말이 있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들어야지 굳이 차를 내오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겠다 준비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
덕분에 아르피아 궁과 체르밀 궁 사이 어느 즈음의 애매한 곳에서 고양이 안고 있는 플란츠와 마주 선 애매한 상태로, 레릭은 고개를 푹 숙이고 돈 주머니를 꺼내 보여줬다.
"왕자님, 사실은 제가······."
그 주머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다시 발을 돌렸다. 여전한 짧은 말이 뒤이었다.
"됐어. 알아."
미안하다는 말 할 틈도 주지 않은 채로, 그렇게 저벅저벅 앞서나가는 플란츠를 다시 열심히 따라가면서 레릭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됐다고."
"그래도요. 죄송합니다. 안 그럴게요.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애옹! 애오옹!"
됐다는데 굳이 사과를 했다.
이 이상 어떻게 더 열심히 하겠다는 건지 플란츠로서도 알 수가 없었으나 그렇게 말했다.
품 속에서는 고양이가 애옹거리고 뒤에서는 레릭이 종알거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플란츠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가시면 쉬시는 동안 저녁 식사 준비 하도록 이르겠습니다, 왕자님. 드시고 싶은 것 있으세요?"
"없어."
르메인이 란델과 식사를 하기로 했으니 안 그래도 주방이 바빠질 터였다.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충 대답한 플란츠가, 한참이 지난 뒤 말을 덧붙였다.
"같이 먹어."
르메인은 란델과 식사를 하기로 했고, 칼리안은 앨런 붙잡아서 밥 먹을 테니까. 같이.
"······ 네, 네!"
미안한 마음도 들고 고마운 마음도 들고 해서 신이 난 레릭이 여전히 앞서 걸어가는 플란츠만 쳐다보면서 열심히 따라갔다.
"그럼 제가 2인분 준비하라고 얘기할게요, 왕자님."
"그래."
"피망 넣지 말고 양파 잘 익혀서요, 왕자님!"
물론 밥을 같이 먹자는 이야기였지, 예민하고 성격 나쁘고 고양이 안고 다니는 2왕자가 피망이랑 안 익은 양파 못 먹는다는 사실을 온 왕궁에 다 소문 낼 것처럼 굴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같이 가요, 왕자님!"
그래서 결국은 다시 짜증이 났다.
* * *
칼리안은 간혹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행운이라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의 불행이 될지도 모른다고.
"아니, 왜 그러는지는 말을 해줘야지! 다짜고짜 그러면 내가 놀라겠나, 안 놀라겠나?"
그 날 새벽.
때마침 지그프리드 외성 밖 북쪽 지역을 순찰하던 슬레이만의 눈에, 독특한 머리색 마법사와 그의 제자 겸 소드마스터 겸 예비 사위 겸 이 나라의 왕자인 소년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애초부터 둘이 몸을 숨길 생각 없이 서있었으니 밝아오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지나치게 눈에 띄이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이었다.
그래서.
때마침 보고를 받고 때마침 오늘 하루 일정이 없던 슬레이만이 곧장 말을 달려 언덕 위로 올라왔다. 그것이 앨런에게는 크나큰 행운이었고, 슬레이만에게는 딱 그만큼의 불행이었다.
붉디 붉은 태양이 떠오르며 하늘이 열릴 때, 어여쁜 아들내미 말에 간신히 닫아둔 앨런의 뚜껑도 활짝 열려버렸으니까.
- 타악!
푸른 빛이 넘실거리는 오러에 감싸여 사라져가던 새빨간 불덩이를 떠올린 슬레이만이, 조금 큰 소리로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의문 가득한 눈으로 앨런을 쳐다봤다.
"대련이 하고 싶으면 저택으로 오면 될 것을!"
되도록 슬레이만은 만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돌아가려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둘이 수도를 빠져나온 것은 이미 다 알려졌을 터였다. 이제는 앨런이 슬레이만 목을 꺾어놓을 일은 없을 테니, 둘이 여기까지 왔다 돌아가든 온 김에 슬레이만 만나 이야기 좀 나누고 돌아가든 데블란이 여기서 더 뭘 알아봐야 크게 문제 될 일은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결국은 지그프리드 공작령 안의 작은 술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 들어왔다. 아르센의 발칸이 지키는 왕궁 안에 있는 한 히나도 르메인도 당장 잘못될 일도 없을 테니까.
"대체 뭐가 문제인데 공격부터 했나?"
슬레이만의 의문이야 당연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가 떠오르는 태양보다 눈부신 불덩이를 인사처럼 날려보냈으니, 사람인 이상 궁금할 수 밖에.
"대장 코끼리 네 놈이 여기 살아있는 게 문제라네."
"나는 원래부터 여기 살았었는데, 왜!"
"그런 말이 아니지 않나, 멍청한 코끼리야."
그 후에는 이런 식으로 말싸움이 붙었다.
사일런트도 두르지 않은 채여서, 혹시나 싶었던 칼리안이 소리를 없애야 했다.
그렇다 해서 싸우는 얼굴까지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술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 들어와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꽤 많은 소문이 돌 뻔 했다는 생각이 든 칼리안이 말했다.
"그만하세요."
조금 전 '한 번만 더 불러봐주면 안되겠냐' 하던 앨런의 말에, 생전 처음으로 다른 의미 없이 단어 뜻 그대로 불러본 아버지라는 그 말을 어색하지만 힘들게 다시 한 번 꺼내놓으려 했을 때 슬레이만이 왔다.
'그러고 보면 행운인 것만은 아니었나.'
어쩐지 그 일 때문에 앨런이 지금 더 화를 내는 것 같아서 작게 웃은 칼리안이 둘을 말렸다.
"저 배고파요, 스승님."
바로 전날, 생애 두 번 없을 인내심을 발휘하며 진짜 어른이 된 칼리안의 두 배 이상을 살아 온 둘이 아닌가. 이제 다 커도 오래 전에 다 컸을 두 어른들의 말싸움이 한참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던 탓에 와인 말고는 아직 제대로 된 음식 주문도 하지 못하고 둘을 지켜보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한 소리였다.
칼리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을 한 앨런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곧 끝내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내 인생을 끝내겠다는 말인가' 하는 식의 의문이 가득 든 눈이 되었던 슬레이만이, 앨런을 쳐다보며 너는 왜 애를 굶기고 다니냐는 말을 해서 앨런을 또 한 번 화나게 했다.
그러게 네 놈이 얌전히 집에나 갔으면 우리 왕자님 배 고프시기 전에 내가 뭐라도 먹였을텐데 이게 다 코끼리 네 놈 때문 아니냐, 내 사윗감 이제 나한테 보내주러 왔나 해서 와봤는데 네가 뭔 상관이냐, 내새끼를 내가 너한테 왜 보내냐 내가 미쳤냐, 쟤가 왜 네 새끼냐 소 새끼지, 소 새끼 아니거든 그런데 너 지금 어여쁜 내새끼한테 소 새끼랬냐 진짜 죽어볼래, 뭐 이런 식으로 오고가며 말싸움이 이어졌다.
"그만하라고 했는데. 내가."
결국 참지 못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제일 약하고 신분도 별 볼 일 없고 나이도 어려서 둘 다 내 말을 안 들으시나."
이렇게 이어진 서늘한 말을 들은 뒤에야 둘의 입이 닫혔다.
간신히 둘을 진정시킨 칼리안이 직접 나서서 이런저런 음식을 주문했다. 고기 위주로, 누구 생각나게 하는 초록색 나는 것 싹 뺀 채로 야무지게 골라서.
그 후에는 '나는 여전히 너희들이 왜 찾아왔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어 있는 슬레이만을 잠깐 쳐다보다 다시 눈을 내리뜬 채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또 잠시의 시간이 지나 모락모락 김이 나는 소고기 스튜와 레몬 소스를 얹은 생굴 요리를 포함한 이런저런 음식이 모두 나온 뒤.
"지그프리드 공."
"네, 왕자님."
칼리안이 슬레이만을 불렀다. 그리고는,
"혹시 뱀 사냥 해보신 적 있습니까."
카이리스 왕실을 위해서는 검을 들지 않겠지만 그 상대가 뱀이라면 어떻겠느냐고, 한 번 더 생긋 웃으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