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09화 (210/527)

제36장. 참으세요, 스승님(5)

칼리안은 고집이 세다.

체이스를 닮아서 세다.

뒤집어 말한다면 체이스와 칼리안의 고집은 엇비슷하다는 소리다.

- 내년 2월에 무슨 일이 있을지 이야기를 했었는데. 기억합니까.

그랬으니, 칼리안이 이기지 못한 플란츠의 고집을 체이스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특별히 고집 부릴 일도 없이 자랐을 것이 분명한 왕자가 대체 어디에서 그런 고집을 배웠는지는 몰라도 플란츠의 고집은 대단했다.

- 기억 못할 리가.

스스로의 똑똑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플란츠의 대답에, 잠깐 웃은 체이스가 말했다.

- 그래요. 그 때 나는 그 일에 내가 개입한 것이 없다 말을 했었는데.

칼리안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데블란이 칼리안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그것부터 알려주면 나도 말을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두어 번 했다. 과거의 데블란이 어떻게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에 대해 플란츠에게 사실대로 알리기에는 다소 적절하지 않은 내용이 섞여 있었던 탓에 되도록 칼리안의 의견을 듣고 플란츠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체이스는 플란츠에게 졌다.

정말 한 마디 말도 통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해도 도무지 듣질 않았다. 일단 너부터 말하면 그땐 나도 알려주겠다며 끝까지 같은 말만 했다.

이래서야 시간만 낭비될 뿐임을 힘들게 받아들인 체이스가, 포기의 의미가 담긴 한숨과 함께 과거의 자신이 데블란의 죽음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를 알렸다.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체이스의 과거도 순백이 아니었음에 대한 어떠한 감상도 전하지 않았다.

체이스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다만 이번에는 그 때와 사정이 달라진 것도 많고 그 때에는 없던 이가 있는 경우도 있어서, 텐실의 치유사에 대한 입국을 금지하는 것만으로 같은 미래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린 후작은 이제 텐실의 치유사 뿐 아니라 텐실 국적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입국까지 금지시키고 있었다. 그렇게나 강경하게 나오니 데블란이 다음 수를 생각해낸 것이었다.

- 혹시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히나에 대해 알고 있나.

칼리안의 말에 따르면 '참으로 똑똑하신' 플란츠는, 체이스가 말한 내용을 들은 뒤 데블란과 칼리안의 연결점을 곧바로 짚어냈다. 평소 칼리안이 히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정도만 보아왔을 뿐, 히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준 적 없었음에도.

- 알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워낙 의심이 많으신 분이니.

체이스는 히나를 언급하는 플란츠의 대답에 그리 놀라지 않고 곧바로 답을 전했다. 플란츠의 사고를 이미 여러 번 겪었으니 굳이 놀랄 것도 없던 탓이다.

- 란델 형님을 불렀으면 얼마든지 보내드렸을텐데. 아쉽군.

하지만 이 말에는 놀랐다.

란델이 치유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에 일단 놀랐고, 발칸에 대한 내용에 이어 마찬가지로 극비사항일 정보를 또 한 번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는 것에 놀랐고, 얼마든지 보내주겠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란델을 아낌없이 여기는 태도에도 놀랐다.

- 참 여러모로 비범하군요, 플란츠 왕자는.

- 어쩌다보니.

어쩌다보니 말 몇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능과 눈치를 가지게 됐고, 어쩌다보니 카이리스의 비밀을 그리 아까워하지 않게 됐고, 어쩌다보니 란델과의 사이가 엄청 멀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문득, 어쩌다 그 플란츠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처지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체이스가 실소했다.

- 히나가 엮여 있으면 내 아우님은 말 안해도 절대로 가지 않겠다 했을텐데. 굳이 왜 들쑤셔놨는지 모르겠군.

또 한 번의 질책이 이어졌다.

네가 말 안했어도 알아서 잘 처신했을텐데 왜 굳이 말을 해서 내 동생 얼굴 반쯤 죽었다 돌아오게 했느냐는 소리다.

거기에 대해서는 적절한 대답이 될 말을 플란츠에게 잘 배운 체이스가 답했다.

-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 당신 의지는 아니었다는 말인가.

입을 열 필요가 없어서인지 몰라도, 지금의 플란츠는 꽤 말이 많았다. 그리고 정확했다.

여기까지 대충 상황을 파악한 플란츠가 다 식은 딸기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칼리안이 마셨던, 앨런의 몫으로 내려놓았던 것과 극명히 다른 색을 보일 만큼 연하게 탄 딸기차에서 아주 은은한 딸기 향이 올라왔다.

플란츠는 그것을 굳이 삼키지 않은 채 데블란의 편지에 대한 설명을 했다. 체이스의 말을 모두 들었으니까.

- 그래서 내 아우님은 나한테 반지 건네 준 뒤에 마법사 잡으러 갔고. 나는 내 아우님의 옛 형님에게 상황 확인하는 중이고.

이렇게, 자칫하면 대마법사가 일국의 국왕을 시해하는 세기의 사건이 될 지도 모를 일을 태평하게 예고한 뒤에 머금고 있던 딸기차를 삼켜냈다.

- 마법사가 정말로 거기에 가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 뒤에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앨런이 앞 뒤 안 가리고 세크리티아에 바로 찾아가진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끝으로 말을 마쳤다.

앨런이 오지 않는 것을 매우 아쉽다 느껴야 할지 아니면 다행이라 느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잠시 미간을 찌푸린 체이스의 머릿속에 플란츠의 음성이 이어졌다.

- 굳이 같은 미래가 필요하다면 당신이 할 일을 해. 마법사나 내 아우님이 정말로 거기까지 가기 전에.

언젠가 루비아 관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칼리안에게 떠넘기지 말고 너도 움직이라면서. 그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며, 체이스가 답을 전했다.

- 다행히 이제는 정당한 명분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데블란이 칼리안에게 덫을 놓았다.

그것은, 체이스가 원하는 일을 직접 행한 뒤에도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이유였다.

실로 다행한 일이 아닌가.

이번에도 마음 놓고 증오할 명분이 생겼으니.

그리고 지금 당장 체이스가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였다. 그것을 플란츠에게 알려야 할지, 아니. 알려도 좋을지 잠시 고민하는데 플란츠가 또 한 번 말을 했다.

- 그것을 확인하면 될 것 같은데.

다른 누구도 아닌 체이스만이 할 수 있는 일.

직접 데블란을 찾아가 데블란의 속내를 떠보는 일.

- 그 자가 내 아우님의 지난 '이름'을 아는지.

그것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을 체이스가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부득부득 우겨가며 체이스에게 직접 대화를 걸었던 터였다.

체이스는 오늘 세 번째로 놀랐다.

팔찌가 빛났을 때, 플란츠가 란델에 대해 말했을 때.

그리고 지금.

- 알고 있었습니까.

- 어쩌다보니.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걱정한 칼리안이 유일하게 믿고 있는 것이 플란츠의 똑똑한 머리 아니던가. 누군가 강제로 지운 것에 대한 괴리를 깨달을 만큼 똑똑하니, 혹여 자신이 다시 지워진다 하더라도 플란츠만은 눈치를 챌 것이라고.

칼리안의 생각은 정확했다.

그 스스로가 무언가를 쉽게 잊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플란츠가 가장 잘 알았다. 그런데 언젠가 체이스가 말해주었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고, 심지어 그 말을 잊은 것에 대한 그 어떤 의구심조차 들지 않았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하지 않았다.

- 궁금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하니 답이 나와서.

그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일에 대해 고집스럽게 생각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늘어나다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시스파니안 이상으로 대단할 것이 분명한 누군가가 칼리안에게 얼마나 잔인한 일을 벌이고 있는지를.

-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데블란의 속내를 들춰보는 방법으로 그만한 것이 또 있을까. 해서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던 체이스가 대답했다.

결국 체이스가 절대 전하지 못할 말을 아리안느가 칼리안에게, 그리고 칼리안이 절대 부탁하지 못할 말을 플란츠가 체이스에게 건넨 셈이다.

지나치게 아이러니한 현실이 또 한 번 우스워질 수 있음에, 체이스가 피식 웃었다.

- 두고 온 것을 잘했다 생각할 일은 없지 않을까 했는데.

너른 바다 대신 너른 왕궁을 내려다보게 되고, 푸른 별의 축복을 받는 대신 붉은 꽃을 받고, 하루하루 실없는 내기를 하는 대신 매일 벼려지는 칼날 위를 걷고, 누구보다 저를 아껴주었던 형제의 품을 떠나서 사는 것이 그저 가엽기만 하였는데. 그것을 두고 온 것에 그저 애가 탔는데.

어쩌면······.

- 하지 마. 평생.

플란츠가 체이스의 말을 잘랐다.

두고 온 것을 잘했다 생각하는 일, 하지 말라고.

마음에 안 들어하고 계속 그렇게 걱정하라고. 여차하면 언제든지 찾아가겠노라 생각하며 살라고.

이번 생에서 체이스가 해야 할 형 노릇은 그것이니, 그것마저 포기하고 손에서 놓지 말라고.

그런 의미를 담은 짧은 말이었다.

* * *

가느다란 달도 저물고 새벽 어둠에 별이 잠겼다.

불어오는 바람조차 길을 잃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만큼 짙고 짙은 어둠 속에, 그 어둠의 한 면을 베어다 만든 듯한 검은 말이 쉼 없이 달렸다.

한 번 찾아간 길이라면 언제든 잊지 않고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레이븐은, 여기가 어딘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주인을 태운 채 거침없이 발을 놀리고 있었다.

이동 마법진은 지그프리드의 영지로부터 하루 거리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때문에 칼리안은, 이동 마법진의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숨이 답답해질 만큼 뜨거워진 공기를 제대로 느껴 볼 새도 없이 곧장 길을 나섰다. 중간에 한 번을 쉬고 난 뒤 다시 달렸다.

굳이 말에 오를 필요 없는 앨런이 벌써 어디까지 갔을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 다그닥, 다그닥!

참 오랜만에 이런 숲길을 마음껏 달려보는 레이븐은 힘이 든다기보다는 차라리 신이 난 것 같았다. 물론 레이븐이 그리 신나게 달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칼리안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달려도, 저녁이 가고 밤이 되고 새벽이 되도록 달려도 앨런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제온의 무리가 다시 덤벼들면 앨런이 발을 멈추고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쯤, 언제고 얼만큼이고 반갑기만 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 찾았다······."

그제야 밀려오는 안도감에 깊은 숨 같은 혼잣말을 꺼낸 칼리안이 앨런이 있는 곳까지 간 뒤 레이븐의 등에서 내렸다.

언젠가의 칼리안이, 언젠가의 플란츠가, 언젠가의 란델이, 그리고 르메인이 섰던 곳. 위대한 이의 영토를 지키는 고집 센 기사들의 땅이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 위에 앨런이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

- 타박.

가벼운 발소리에, 이미 오래 전부터 칼리안의 도착을 알고 있었을 앨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붉어지는 앨런의 긴 은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네, 스승님."

왜 더 가지 못하고 이 곳에 서 있었는지를 묻는 대신 칼리안은 고개만 끄덕였다.

"걱정했습니다. 스승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요."

앨런의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가 그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해서 앨런이 어떤 기분으로 리베른에서 지냈는지. 그 모든 것을 칼리안도 이제 알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후 칼리안을 만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을 했다.

데블란의 독니에 혹시라도 칼리안이 물릴까, 그 독에 또 한 번 아들을 잃을까, 앨런이 죽은 아들 로닐의 일을 떠올려가며 칼리안을 걱정할까봐.

그리고 후회도 했다.

진작 알았다면 실리케의 앞에서 독차를 마시지는 않았을텐데, 하고.

"갈 곳을 잃은 기분이라, 잠시 발을 멈추고 앞길을 고민하고 있었지요."

앨런의 조용한 목소리가 깊은 새벽에 맺히는 물안개처럼 흘러나왔다. 칼리안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 언덕에서 내려가 곧장 앞으로 가면 슬레이만이 있을 지그프리드령에 도착한다. 그리고 조금만 방향을 돌려 나아간다면 세크리티아가 나온다.

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고민을 했을까, 아니면 칼리안이 어떻게든 찾으러 오길 기다렸을까.

"평소 스승님 같았으면 이렇게 갑자기 움직이지는 않으셨을텐데요."

칼리안에게 단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정확한 상황은 확인하지도 않고, 르메인의 안전은 완전히 뒷전에 둔 채로 이렇게 충동적으로 올 만한 사람이었을까.

앨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멀리 서서히 동이 트는 하늘에 붉은 빛과 노란 빛, 그리고 푸른 빛이 들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아침이지만 매일이 다른 그 하늘을 조용히 보던 칼리안이 말했다.

"어릴 때, 만화경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유난히 마음에 들었어서 유난히 기억이 나요."

유리 조각과 보석 조각, 색색의 예쁜 것들이 들어있던 만화경을 기억 속에 떠올린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언젠가는 하루종일 그 안을 들여다보며 지내기도 했는데, 늘 같아보여도 늘 다른 것들이 보여서. 그게 참 신기하더라고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도. 같아보여도,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무조건 따르기만 할 생각 없어요. 무턱대고 덫을 밟을 생각도 없어요. 무조건 혼자 해결할 생각도 이제 안 할게요. 언제든지 도와달라고 얘기할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참으세요, 스승님."

데블란이라면 칼리안과 앨런이 어떻게 움직일지 속속들이 확인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슬레이만의 멱살을 붙드는 것도, 소리소문 없이 세크리티아에 쳐들어가 문제거리를 만드는 것도 참아달라는 소리였다.

지금껏 그것을 결정하지 못해 발을 멈추었던 앨런이 물었다.

"왕자님께서 그 가시밭길을 굳이 가도록, 제가 그냥 두어야 하겠습니까."

"가시밭길 아닙니다. 제 아버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압니다."

체이스를 내려놓은 것처럼. 데블란도.

그러니 정당성도 필요없다. 면죄부도 필요없다. 스스로를 납득시킬 명분 따위 없어도 된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같이 돌아가요, 아버지."

가느다란 달도 저물고 새벽 어둠에 별이 잠겼던 밤에, 어여쁜 제자가 어여쁘게 웃으며 앨런의 진짜 아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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