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참으세요, 스승님(4)
때때로 순서가 바뀌는 것들이 있다.
"누구나 그래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그런 얼굴로 산뜻하게 이야기 한 얀이 앞에 놓인 체리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체리는, 딸기만큼 단 향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맛은 더 달았다. 딸기보다 훨씬 더 짙은 붉은색을 지닌 그 동그란 과일의 맛을 가득 담은 케이크가 입 속에서 부드럽게 녹았다.
"머리로 정해 둔 순서대로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체리가 맛있어서 체리를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니라 말간 봄의 어느 날 새하얀 설탕구름처럼 피어난 체리꽃이 예뻐서 체리를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비 개인 후에 떠오르는 동화같은 색의 무지개가 좋아서 소나기를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그러니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칼리안이 그리 좋아하는 민트 차로 입을 개운하게 만든 얀이 앞에 앉은 레릭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주 잘 익은 블루베리, 혹은 동글동글한 포도 색을 가진 레릭의 눈이 축 쳐졌다. 어떻게 눈이 저렇게 쳐질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눈꼬리를 축 내린 레릭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을 뵐 때마다 죄송스러운 마음이 너무 커서······."
"레릭. 처음부터 다른 마음 없이 왕궁에 들어오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저도 그랬고요."
이렇게 말한 얀은 레릭이 내민 돈 주머니를 잠깐 내려다 본 뒤 말했다.
"순수하게 왕족의 뒤치다꺼리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왕궁에 오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요."
누구보다 열심히, 누구보다 완벽하게 칼리안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얀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꽤나 노골적이고도 험한 말이었다. 때문에 레릭은 주변에 다른 듣는 사람은 없는지 재빨리 고개를 돌려가며 확인을 했다. 다행히 시종들의 휴식 공간에 둘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레릭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보다 나이는 많지만 경험은 적은 레릭의 근심 많은 표정을 한참 보던 얀이 다시 말했다.
"다들 다른 이유 하나씩 가지고 들어오는데, 그 이유가 돈이라는 게 뭐 어때서 그래요."
오로지 실리케의 품 속에서 나고 자란 2왕자가 그 품에 스스로 뛰어들며 비로소 벗어났을 때.
그것이 상처가 되어 몇 날 며칠을 두고 제대로 깨어나지도 못했을 때. 르메인이 실리케의 눈과 귀였던 시종과 시녀들을 모두 왕궁 밖으로 내보냈을 그 때.
아무도.
브리센이나 다른 귀족들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2왕자의 손발이 되겠노라 나서는 이가 정말 아무도 없었고, 2왕자의 시종으로 결정된 이들이 전부 일을 그만두겠노라 하며 왕궁을 벗어나 도망칠 때.
때문에 칼리안의 시종과 시녀들이 꽤 오랫동안 플란츠를 함께 돌보았던 그 때.
- 한 명만 나서면 돼. 그 후에는 구하기 쉬워질 거야. 그러니까 한 명만 찾아봐줘.
칼리안의 다른 시종과 시녀들이 두 배로 불어난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츠의 시종으로 올 사람이 계속 정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걱정해오는 얀의 말에 칼리안이 이런 대답을 했다.
그러더니, 정 어렵다면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 가장 쉬운 수단을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들은 얀이 주저하자 칼리안이 별 일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 순서는 중요한 게 아니야.
그 때는 칼리안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
체력 좋아서 가장 많이 무리한 메를린이 코피를 쏟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 말을 더 이해해볼 겨를도 없이 칼리안이 시키는대로 했을 뿐.
그렇게 해서 찾은 사람이 레릭이었다.
적당히 눈치있고, 착해 보이고, 입이 무거운 것 같고. 그리고 빚이 많았다.
"저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을 때 나서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진심으로요."
이렇게 말한 얀은, 칼리안의 금고에서 나와 남몰래 건네졌던 돈을 한 푼도 빼지 않고 담아 둔 주머니를 다시 레릭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플란츠의 상급 시종으로 나서준 것에 대한 대가, 그것을 그냥 받으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저는 더 나빴어요. 정말 나쁜 이유로 우리 왕자님 시종 하겠다고 나섰으니까요."
바싹 말라가는 영혼을 가지고 있었던 빨간 눈의 어린아이를 만나고 난 뒤에 그 아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됐다.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해서.
"어쩐지 우리 왕자님을 지켜보고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게 제가 아니라는 걸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 왕궁에 왔어요."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던 슬레이만이나 세리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제 풀에 지쳐 금방 돌아오리라 생각을 해서였을지, 아니면 그렇게라도 무언가에 신경을 쓰며 살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 생각을 해서였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순서가 바뀐거죠. 나 살겠다고 여기에 왔는데 이제는 완전히 바뀌었으니까요."
얀이 조금 먼 옛날을 떠올리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체리꽃이 예쁜만큼 체리가 맛있다는 것을 배우고, 무지개가 좋은만큼 소나기가 시원하다는 것을 배우고.
누구보다 잔인한 이유로 칼리안을 지켜보기 시작했음에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언젠가부터는 그 첫 이유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온전히 칼리안만 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얘기 들으셔도 우리 왕자님은 그냥 그랬구나 하고 말 거예요. 순서 상관 없이, 지금이랑 앞으로가 더 중요한 걸 아시니까요. 제 생각엔 플란츠 왕자님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플란츠지만, 아마 평생 플란츠를 기껍게 마주할 날은 없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릭이 플란츠를 진심으로 따르게 된 것까지 싫어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반갑고 좋은 일이다.
플란츠의 그 어마어마한 눈치에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레릭이 자신을 찾아온 진짜 이유를 마음에 담아두거나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받아요. 필요한 돈인 것은 맞잖아요. 받아도 되는 대가니까 어느 쪽에게든 미안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우리 왕자님 어차피 돈 많아서, 돌려줘봐야 서로 득될 것도 없어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끝난 얀의 얘기에 결국 또 울먹울먹해진 레릭이 돈 주머니를 다시 품에 넣었다. 그러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을 받는 것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도로 꺼내놓으려 했을 때였다.
- 벌컥!
하고, 시종들만이 들어오는 휴게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을 본 레릭이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이가 서 있었던 까닭이다.
짙은 청록색의 재킷, 검은 셔츠와 바지, 아주 단순한 디자인의 다이아몬드 브로치. 그리고 무거울 것이 분명해보이는 반짝이는 검.
'지그프리드 소공작!'
칼리안의 정혼자이니, 칼리안을 찾아온 것일까? 칼리안이 없어서 물어물어 얀이 있는 곳에 온 것일까?
스치는 생각을 뒤로 한 레릭이 인사를 하려던 찰나.
"오라버니."
청천벽력같은 호칭이 드미레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고보니 드미레아와 완전히 똑같은 색의 곱슬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사람과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이 잠깐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드미레아를 봤다.
"레아."
방금 전까지 돈 주머니를 밀어주고 체리가 좋고 순서는 상관 없다는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의, 아니 그런 말씀을 하셨던 분께서 대답했다. 아니, 대답하셨다. 그리고 물어보셨다.
"무슨 일 있어?"
"네. 마나실 백작이······."
천장이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아서 이어지는 드미레아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흐어어어, 하고.
레릭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 * *
여느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미리부터 예정되어 있던 수련을 하고, 늘 찾던 곳으로 나가 활을 쏘았다.
그렇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하루를 보내다 찌는 듯한 더위가 절정에 달했을 시간이 되었을 때.
절대 평범하지 않을 일이 일어났다.
미세한 정전기의 따끔한 느낌이 손목을 타고 전해지는 기분이 든 것이다.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마력만 먼저 전달되서 나타난 현상이었는데,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용자가 마나 감응을 눈치 챌 수 있도록 손을 써 둔 앨런의 두 번째 배려였다.
"아······."
"왜 그러십니까, 저하."
화살을 놓치며 놀란 듯, 혹은 반가운 듯 터져나온 한 마디 말에, 곁에 있던 테일란이 곧바로 다가왔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를 걱정한 탓이었다.
"무슨 일 있어?"
물론 항시 테일란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 일러두었던 아리안느도 함께 말을 건넸다. 주변에 서 있던 시종들과 시녀들을 물린 체이스가 테일란을 향해 팔찌를 보였다.
"이것 좀 봐줘."
상대방 측에서 먼저 대화를 건 것은 처음이었으나 부탁을 해오는 체이스의 얼굴은 담담했다. 물론 겉모습만.
칼리안이 대화를 걸어오기를 체이스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가장 잘 아는 아리안느가 함께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아무래도 주변에 보는 눈이 있으니 테일란보다는 자신이 체이스의 손목을 건드리는 것이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 칼리안 왕자?
그렇게 기대에 잔뜩 부푼 체이스가, 여전히 말을 건네오지 않는 칼리안을 불렀다.
- 아닌데.
뚝.
단 세 글자의 첫 자를 듣자마자 부푼 기대를 확 접어낸 체이스가 두 번째 글자를 듣기가 무섭게 통신을 끊었다.
다른 뜻은 없었다. 실망해서 끊은 것은 아니다. 플란츠가 썩 달갑지 않은 것은 맞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끊긴 것이지 억하심정이 있던 것도 아니다. 아무튼 그렇다.
"뭐야? 왜 시작하자마자 끊어?"
"당신 마력이 부족했나봐. 나도 모르게 끊어지네."
마력이 중단된 것을 느낀 아리안느의 질문에 체이스가 넉살 좋게 거짓말을 했다. 그것을 본 아리안느가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대꾸했다.
"부족 같은 소리 하시네."
아, 또 들켰다. 하고 체이스가 싱긋 웃었다.
세크리티아도 아닌 카이리스에 있는 칼리안에게 무슨 일이 있기도 힘들지만, 무슨 일이 있다면 플란츠가 아니라 앨런이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굳이 마법 못 쓰는 플란츠가 번거롭게 끼어들었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통신을 끊은 터였다.
카이리스 어딘가에 있을 희멀건 왕자가 잔뜩 짜증내는 것이 눈에 훤하지만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데 어쩌겠나.
이런 생각을 한 체이스가 아리안느를 보며 한 번 더 팔을 내밀었다.
"다시 해줘, 아리안느."
귀찮다는 기색 가득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걸어온 아리안느가 한 번 더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테일란과 함께 조금 멀리 떨어져서는 과녁을 향해 활을 쏘기 시작했다.
그런 아리안느를 보며 입가에 호선을 그려낸 체이스가 그늘 아래로 걸어가며 말을 건넸다.
- 미안합니다, 플란츠 왕자. 내가 조금 놀란 마음에.
- ······ 여전하군.
칼리안이 아직까지도 먼저 말을 건 적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 기대감이 너무 컸다는 것을 알 리 없을 플란츠가 마뜩치 않은 감정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도 눈에 훤했다. 하지만 플란츠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든 체이스가 크게 신경을 쓸 일은 아니지 않겠나.
- 여전합니다. 별 일 없이 지내고 있고.
- 아닌 것 같은데.
이 말에, 아리안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체이스의 시선이 잠시 발치로 향했다. 체이스 측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던 탓이다.
때문에 데블란이 칼리안의 치유사를 불러낼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그 사이에 플란츠에게 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것인지를 물으려 했을 때, 플란츠로부터의 말이 앞섰다.
- 내 아우님의 옛 형님께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내 아우님 얼굴이 반쯤 죽었다 돌아왔어.
제멋대로인 호칭만은 여전했지만 체이스는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없었다. 곧바로 대답을 해줄 수도 없었다.
질책하는 말임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수면제로 날 재워놓은 내 정혼자가 멋대로 이야기를 한 것이라는 변명의 말은 하지 않았다.
한동안 체이스의 답을 기다리던 플란츠가 귀찮다는 듯 다시 말했다.
- 무슨 말을 했었는지 알아야겠는데.
굳이 그것을 체이스에게 직접 묻는다는 것은 칼리안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뜻일 터였다. 때문에 체이스는 우선 거절의 의사를 보이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플란츠의 말이 앞섰다.
- 제대로 말해. 둘러대지 말고.
체이스가 무슨 생각을 할 지는 뻔하지 않나. 분명 한 번에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여긴 탓이었다. 칼리안이나 체이스나 생각하는 게 똑같으니 말이다.
- 그것을 아는게 중요합니까.
- 중요해.
체이스가 얼굴을 굳혔다.
- 무슨 일입니까.
다짜고짜 칼리안의 반지를 빼앗아 너 내 동생한테 뭔 소리 했느냐 질책하기만 할 목적으로 말을 걸 플란츠가 아니라는 것은 체이스도 안다. 다른 무언가와 연관이 있다 여겼으니 저런 것을 묻는 것이리라.
- 세크리티아 국왕께서 내 아우님의 옛 형님 흉내를 내면서 편지를 보낸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을 뻗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데블란이 칼리안을 향해 덫을 놓았다는 소리임을 알아들은 체이스가 물었다.
- 무슨 편지를 보냈습니까.
- 말해. 먼저.
플란츠는 완강했다.
해결책은 서로 가린 것 없이 다 드러내고 난 뒤에 떠올릴 수 있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혹여 숨길 생각 하지 못하도록 일단 먼저 얘기하라는 의미였다.
- 당신, 내 동생한테 무슨 소리 했냐고.
무슨 말로 칼리안을 흔들었는지 그것부터 이야기하라는 그런 말에, 눈을 내리 뜬 채로 잠시 말을 잊고 있던 체이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다그치는 것은 플란츠고 그 말을 들은 것은 체이스였는데 웃음이 났다.
이유 없이 안심이 되어서.
* * *
- 다각, 다각.
앨런을 찾기 위해 아르피아 궁에서 나온 칼리안을 찾은 것은 놀랍게도 레이븐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앨런을 따라가기 위해서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레이븐이었다. 똑똑하기도 했고, 왕궁의 기사들을 따돌리고 달리는 것은 레이븐을 따를 말이 없었으니 말이다.
레이븐의 고삐를 잡은 채 아르피아 궁으로 찾아온 얀이 웃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마나실 경이 세뉴관을 찾아왔었다고 하던데요. 급한 일이라면서 레아를 잠시 만났대요."
이제 막 중앙 귀족 회의를 시작하려던 순간에 쪽지 하나가 르메인에게 전달됐다. 칼리안과 관련된 급한 일이니 잠시만 드미레아를 밖으로 내보내달라는 앨런의 요청이었다. 한 번도 그런 요구를 한 적 없던 앨런이었으므로, 르메인은 곧바로 드미레아를 회의실 밖으로 보냈다.
"왕자님께서 저희 집에 가셨을 때 대련하시던 모습을 기사들이 함께 보았는지 물었대요. 아버지와 대련한 것은 아무도 못봤지만 레아나 다른 기사들과 대련했던 것은 기사들도 보고 사용인들도 보고 했었잖아요."
"그랬지."
앨런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늠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얀의 말이 이어졌다.
"레아도 그 말을 했대요. 그랬더니 그 사람들 어딨는지 물어봤고, 전부 공작령에 있다 대답했더니, 저나 왕자님께는 이야기하지 말라 한 뒤에 레아 앞에서 사라졌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레아가 저에게 왔어요. 왕자님 어디계시냐고요."
앨런이 칼리안에게 비밀로 하라 일러두었다는 것까지 칼리안에게 전한 얀이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이야기가 오가는 과정에서 얀의 정체를 알게 된 레릭이 반쯤 기절했다 깼다는 사소한 이야기는 더하지 않았다.
이건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빠르고 정확히 퍼질 수 있는지를 잘 배운 칼리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 앞뒤 없이 세크리티아로 간 것은 아니구나 싶어서였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앨런을 쫓아갈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드미레아가 직접 공작령으로 가지 않고 칼리안을 찾은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래, 알았어."
지금 앨런은 꿍꿍이 많은 데블란 말고, 모든 인간은 다 선하기 짝이 없다 믿어 의심치 않는 순수한 근육덩어리 슬레이만을 잡아 족치러 간 거다.
데블란이 기억을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는 체이스가 확인을 할 수 있을 테고, 앨런은 칼리안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갔는지 아닌지를 확인해봐야 한다고 여겼을 테니까.
만약 데블란이 기억을 찾지 못한 채로 칼리안을 슬쩍 떠보고 있는 것이라면, 칼리안이 세크리티아와 연관이 있다는 정보가 새어나갔을 가장 유력한 곳은 지그프리드 공작령이라는 생각을 한 듯 했다. 칼리안이 아직 세크리티아의 검을 쓰던 버릇을 가지고 있을 때, 누군가의 눈 앞에서 제대로 된 검술을 보인 것은 그 곳이 유일했으니 말이다.
결국 비밀 못 지키는 제자 뒷감당을 하러 간 것이나 마찬가지기는 한데, 그런 앨런에게 미안해 해야 할지, 슬레이만을 애도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된 칼리안이 말에 오르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얀. "
앨런 행방도 알려주고, 눈치 빠르게 레이븐까지 준비해와 준 것에 대한 인사였다.
"너 없었으면 여기서 어떻게 지냈을지 상상도 안돼."
말이 나온 김에 진심어린 고마움을 함께 전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앨런이 이미 진작에 도착했을, 지그프리드령으로 향하는 이동 마법진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레이븐이 발을 박차고 거칠 것 없다는 듯 왕궁 밖을 향해 달려나갔다.
아무튼 앨런이 제 손으로 오랜 친구 목을 비틀어 놓는 일은 막아야 했으니 말이다. 친구 목 비틀어 놓은 앨런이 겸사겸사 근처에 있는 세크리티아에 들러야겠다 생각하기 전에 제대로 상황도 좀 확인을 해야 했고.
"우와······. 오늘 내 생일인가봐."
선물처럼 전해진 갑작스러운 극찬에 깜짝 놀란 얀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은 듣지 못한 채였다.